(13) 75년 신안해저 유물 발굴<하>
2004년 04월 14일(수) 00:00
겨울 바람 스산한 81년 2월 말. 전남대 캠퍼스 한쪽에 자리잡은 농대 임학과 박상진(당시 41세·현 경북대 임산공학과 교수) 교수의 연구실. 일단의 검정 신사복 차림의 사내들이 들이닥쳤다. 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직원들이었다.5·18학살의 공포가 광주를 짓누르고 있을 당시 안기부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영문을 몰랐던 박 교수는 두려움에 휩싸였다.발단은 박 교수가 한국임학회에 발표한 한편의 논문 때문이었다. 박 교수는 2월 초 신안 해저유물선의 선박 재질에 일본에서만 자생하는 일본 삼나무가 포함됐다는 발표를 했었다. 박 교수의 논문을 눈여겨본 경향신문 기자가 이를 `신안유물선은 일본 선박이었다''고 1면에 대서특필했다. 국내외 언론, 특히 일본언론은 이를 일제히 인용, 보도했다.지방대학의 전임강사에 불과(?)했던 박 교수는 일약 유명인사가 됐다.
그러나 대가도 혹독했다. 안기부 직원들은 박 교수의 방을 뒤져 실험 표본 등 자료를 모두 압수해갔다. 박 교수의 성향, 출신 등에 대한 상세한 신상명세서도 작성됐다. 그들은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당분간 광주를 벗어나지 말라”고 엄포를 놨다.당시 전두환 정권은 취약한 정통성으로 인해 국제적 따돌림의 대상이었다. 광주학살과 김대중 사형선고에 따라 일본과의 외교관계도 최악이었다. 박 교수의 발표는 `신안유물선은 일본제작선''이라는 등식을 가능케한 것으로 정권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하루가 천년이라더니 당시의 불안과 공포를 잊을 수가 없다. 천신만고 끝에 겨우 얻은 전임자리를 뺏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었다. 10여일이 지나 일종의 `연금''이 해제됐다고 연락을 받고서야 한숨을 쉴수 있었다. 왜 무엇때문에 학자의 조그만 연구결과가 안기부의 조사대상이 됐는지 지금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압수해간 표본도 돌려주지 않았다.”그러나 이 사건은 무명의 지방대 소장 교수의 이름을 중앙무대에 알리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다. 박 교수의 전공인 목재조직학이 무엇인지, 임산공학과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문화재관련 학자들과 공무원들에게 이 새로운 학문의 효용성을 알려주었다. 특히 목전에 다가온 신안유물선의 인양과 분석에는 박 교수와 같은 전공자가 필수적이었다.박 교수는 81년 6월 신안해저유물선 발굴단에 포함됐다. 박 교수는 “40대 초반의 전임강사로는 파격적이었다. 모두 이름만 들어도 전국민이 아는 유명인사였는데 내가 포함될지는 몰랐다”고 술회했다. 박 교수는 이후 4년여동안 발굴위원으로 활동한다. 신안유물선에서 나온 선박 파편조각을 추출해 무슨 나무가 재료인가를 추적하는 것이 그의 임무. 그러나 분석결과는 당초 박 교수가 추정했던 것과 달랐다. 신안유물선은 일본 삼나무가 아닌 중국 남부 양자강 일대에서 자생하는 넓은 잎 삼나무(광엽삼)와 마미송이 주종인 것으로 밝혀졌다.
문화재관리국은 1981년 7월 목포시 용해동 바닷가에 보존처리장을 세우고 유물선을 인양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유물 발굴이 어느 정도 끝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인양 방식은 선체를 조각조각 해체해 인양하는 `해체인양식''으로 결정됐다. 선체 조각을 하나씩 맞춰나가는 `퍼즐게임''이 시작된 것이다.신안유물선 복원에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초대 목포해양보존처리소장을 맡았던 최광남. 그는 복원작업이 한창 진행되던 1990년 8월 44세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떴다.최씨는 1981년 임시기구로 만들어졌던 목포보존처리장의 소장으로 부임한 이후 9년동안 신안유물선 복원에 매달렸다. 1974년부터 80년까지 일본 동경예술대학원에서 보존과학 석사학위를 마친 그는 국내에서 거의 유일한 그 분야 전공학자였다. 최소장은 선박 인양·복원 경험이 있는 중국 등 국내외를 돌며 자문을 구했다.고향이 신안군 지도읍인 김원창(현재 46세·목포해양박물관 학예연구사)씨는 군대를 제대한 직후인 81년부터 유물선 인양과 복원에 참여했다.“2개의 선수 부분과 중앙부, 선미 등 4개 부분으로 나눠 구역별로 그리드를 설정했다. 선체 인양은 잠수부 2명이 1개조를 이뤄 이뤄졌다. 해군의 창원함과 구미함이 번갈아 가며 작업했으며, 해군 잠수부 30여명이 상주했었다. 선박 조각 마다 일련번호를 붙여 선편끼리의 간격, 높이 등을 기록했고, 그것을 근거로 원형에 최대한 가까운 모습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신안유물선의 한쪽이 거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 부분까지 추상해서 모형을 만들수 밖에 없었다.”최 소장 등 복원작업에 참가했던 복원팀에는 하나의 꿈이 있었다고 한다. 똑 같은 모형의 신안유물선을 만들어 옛 항로를 밟아가자는 꿈이었다.
김원창씨는 “신안유물선의 출발지점으로 추정되는 영파항으로의 귀향은 아직도 이뤄지지 않았다. 그 항해는 실험고고학적 의미도 클 뿐 더러 민간외교적 측면에서도 큰 역할을 할 것입니다. 거기가서 수몰당한 신안선 선원들의 진혼제라도 지내면 얼마나 멋진 이벤트가 되겠는가”라고 이쉬움을 토로했다.인양작업이 진행되던 1983년 1월 25일 신안유물선과 유물을 둘러싼 중요한 미스테리 하나가 풀린다. 1982년 6월 신안 바다에서 건진 목간(木簡·소나무로 만든 꼬리표)을 세척하던 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실의 한 연구원이 목간에 새겨진 글씨를 찾아낸 것이다. 목간은 물건을 받을 사람의 이름과 보내는 사람의 수결(手決·일종의 사인)을 새겨 물건을 포장할 때 매달아 놓는 표식이다.`至治三年六月一日''(지치3년6월1일)이라는 글과 `東福寺''(동복사)라는 글이었다. 지치는 원나라 제 5대 영종(英宗)의 연호이므로 지치 3년이면 서기 1323년이다. 동복사란 일본 절 `도후쿠지''를 말하는 것으로 이 배에 실은 물건을 사기로 한 하주(荷主)로 추정된다. 신안유물선은 1323년 6월 수출품을 싣고 항해에 나섰다가 신안 앞바다에 침몰한 것이다.목포보존처리장은 1990년 1월 국립문화재연구소 목포해양유물보존처리소로 확대 개편된다. 유물과 유물선 발굴작업은 이미 84년 10월 공식적으로 마감됐다. 94년 12월에는 국립해양유물전시관으로 개관돼 일반인들의 이용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신안 유물의 상당수는 이미 서울로 옮겨져 지역민들이 직접 이를 감상하는 기회가 박탈됐다.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문광부는 유물발굴작업이 끝난 86년 10월 거의 한달동안 신안 앞바다 일대에 대한 유물확인작업을 재차 벌인다. 생업의 터전을 잃은 어민들의 어로제한을 해제하기 위해서다.“그해 10월 4일부터 소형 선박 6척을 빌려 일주일동안 신안 앞바다를 이잡듯 뒤졌다. 흑유 등 3~4점이 나왔으나 별로 가치있는 것은 없었다. 10월 20일께 해군의 거북선 탐사선까지 동원돼 5일동안 신안부터 영광 낙월도까지 수중을일일이촬영하는수색작업을폈지만 그릇 조각하나발견하지 못했다. 이후 사적지 지정이 해제되고 어민들의 어로작업이 자유롭게됐다” 발굴작업을 처음부터 지켜본 신안군청 남상율 계장(당시 공보실 근무)의 말이다./오주승기자jsoh@kwangju.co.kr
**유물선 복원 작업신안유물선은 우현 쪽으로 15도 정도 누워 있는 상태로 바다속 개펄에 파묻혀 있었다. 노출된 좌현쪽은 거의 원래의 모습을 잃은 상태였다. 660여년이란 긴 세월, 빠른 물살, 바다 해충으로 인해 손상도 심했다.심한 부식으로 인해 물속에서 선체를 하나씩 해체한 후에 건져 올리는 `해체인양법''이 동원됐다. 스웨덴의 바사호(340년전의 배)나 영국의 메리로즈호(400년전의 배)는 통째로 끌어올렸지만 660여년이나 된 배는 너무 썩은데다 상태가 나빠 그럴수 없었다.인양된 선편은 모두 720조각. 용골을 비롯한 497조각의 배 몸체와 223조각의 포판재가 건져졌다. 포판재는 외판 등을 바다 해충으로 부터 보호하기 위해 덧씌운 나무판이다. 그 크기는 12.7m의 용골에서 1m 내외의 소형재까지 다양했다. 좌현의 모습은 잃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우현은 14단 일부까지 남아 선체의 규모와 구조를 알려주었다.신안유물선은 V자형의 첨저형 선박으로 배밑에는 대단히 튼튼하고 큰 사각단면의 용골이 놓여졌었다. 또 7개의 칸막이 벽이 시설된 독특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어느 한 곳에 물이 스며들어도 다른 쪽은 보호할 수 있는 구조였다. 서양인들이 이런 기술을 쓴 것은 신안유물선보다 500년이 뒤진 19세기의 일이다. 널빤지를 이을 때 이음부분을 그냥 맞대지 않고 같이 이어 물이 새지 않도록 만들어졌다. 배의 재원은 최대길이는 34m, 최대너비 11m, 적재중량 약 200t에 쌍돛대를 단 그때로서는 아주 큰 배였다.1986년 8월 30일 5분의 1 축소 모형배가 만들어졌다. 신안선 복원팀은 탈염처리, 모형제작, 실측기록등을 마치면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다. 잔존구조를 확인하고 복원방법을 강구하기 위해 만든 축소 모형제작에만 4년이 걸린 셈이다. 복원팀은 축소모형배를 근거로 실제 신안유물선 복원에 나섰다. 복원된 신안유물선은 현재 목포해양박물관에 전시돼있다.신안유물선에는 저울추가 여러개 발견됐는데 절강성 영파인 `慶元路''(경원로)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이 배의 출항지를 밝히는 결정적 자료가 됐다. 경원항은 일본과의 교역으로 유명했었다. 신안유물선은 절강성 영파를 출항하여 중일간 최단 무역항로인 남로를 따라 일본 후쿠오카로 향하던중 신안 앞바다에서 침몰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