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재 나무 답사기 / 저자 박상진 / 출판사 왕의 서재
한국사 천 년 역사의 현장을 지켜본 문화재 나무에 얽힌 우리 문화와 역사, 한국사의 숨은 비밀들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저자 유홍준 前 문화재청장 적극 추천
단종 1년(1452) 10월 10일 밤, 김종서의 집이 있던 재동에는 수양대군을 중심으로 쿠데타가 일어난다. 이른 바‘계유정난’이다. 피바다가 돼버린 마을에 피비린내를 없애기 위해 사람들은 재를 가져다 뿌렸다. 이후 이곳은‘잿골’이 됐다가 지금의 재동이 됐다. 참극이 벌어졌던 현장 한 편에서 핏빛에 어울리지 않는 깨끗한 백송 한 그루가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세조 3년(1457) 청령포에 유배와 있던 단종은 읍내 관풍헌으로 다시 옮겨갔다. 이때 어린 임금은 근처에 있던 은행나무에서 은행 몇 알을 따다가 자신의 운명을 점쳤다고 한다. 분명 나쁜 점괘를 보았을 그는 얼마 되지 않아 최후를 맞았다. 시신마저 아무렇게나 팽개쳐질 때 근처에 살던 엄흥도가 이를 수습하는 용기를 낸다. 그의 선조가 심어놓은 은행나무가 말없이 이를 지켜보았다. ‘점필재’ 김종직. 그는 성종 원년(1470) 노모를 모시겠다며 임금께 청해 함양군수가 된다. 그리고 재임기간 동안 백성을 돌보는 일에 정성을 쏟는다. 그러나 임기가 거의 끝나갈 즈음, 마흔이 넘어 얻은 5살짜리 아들을 홍역으로 잃고 만다. 아들의 이름은 목아(木兒)였다. 너무 일찍 하늘나라로 보내버린 아들을 위해 그는 수백 년에서 천년은 거뜬히 살 수 있는 느티나무 한 그루를 학사루 앞에 정성 들여 심고, 부모 가슴에 못을 박고 훌쩍 가버린 ‘나무 아이’의 짧은 삶에 대한 아쉬움을 달랬다.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 그는 왕위에 오른 지 불과 2년 8개월 만에 이성계 일파에 의해 쫓겨나듯 밀려나고 만다. 처음 원주로 유배됐다가 강원도 간성으로 쫓겨 가고, 다시 삼척으로 옮겨져서 추방된 지 2년이 채 안 돼 왕비와 두 아들과 함께 목이 졸려 죽는다. 474년 34대를 이어오던 고려왕조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때 그의 곁에는 귀신을 쫓는다는 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나무에는 이처럼 놀라운 역사의 비밀이 담겨있다. 그래서 흔히 나무를 가리켜 ‘역사의 비밀을 간직한 하드디스크’라고 한다. 그렇다면 아직까지 수많은 비밀과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한국사의 비밀 역시 나무를 통해 풀 수 있지 않을까.
14년에 걸친 답사와 조사……역사.문화적 가치가 높은 73곳의 문화재 나무에 얽힌 전설과 사연! 귀중한 사진자료와 함께 ‘읽을거리’는 물론 ‘볼거리’제공
『우리 문화재 나무 답사기』는 나무 고고학 분야 국내 최고의 권위자인 박상진 교수가 14년에 걸친 답사와 조사를 통해 풀어놓은 문화재 나무에 얽힌 전설과 사연을 담은 책이다. 이를 통해 한국사의 비밀과 전설을 흥미롭게 소개하고 있다. 특히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은 73곳을 귀중한 사진과 함께 담고 있어 읽을거리와 볼거리를 함께 제공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모두가 천연기념물 나무이다. 천연기념물 문화재 나무답게, 나무가 담고 있는 사연들 역시 하나같이 예사롭지 않다. 계유정난 당시 김종서의 살해현장을 지켜본 재동 백송, 어린 임금 단종의 슬픈 눈물이 베여 있는 영월 하송리 은행나무, 나라 잃은 임금의 슬픔을 간직한 삼척 공양왕 음나무, 날카로운 가시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강화 갑곶리 탱자나무 등등……. 인간의 삶에 희로애락이 있듯이, 나무 역시 희로애락의 영광과 상처를 동시에 간직하고 있다. 이를 빗대 우리는 역사라고 부른다. 때문에 인간과 나무가 가진 희로애락은 우리 역사의 희로애락이기도 하다. 『우리 문화재 나무 답사기』는 이런 우리 역사와 나무, 사람 사이에 얽힌 희로애락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때로는 분노와 탄식을, 또 때로는 선조들에 대한 자부심과 가벼운 기쁨에 들뜨게 한다. 한편,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의 저자이자, 문화재청장을 엮임한 유홍준 교수는 이 책을 가리켜 “문화재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연륜을 같이하며 살아온 나무가 있어 그 가치를 더욱 빛내주고 있다”며 “이 책은 나무의 이야기이자 역사와 예술과 인간의 이야기”라며 적극 추천했다. 추천사 :유홍준(前 문화재청장,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저자) 박상진 교수의 나무에 대한 해설은 이제까지 우리가 접해온 식물도감의 설명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하나의 나무가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가에 대하여 접근하는 방식이 거의 인문학의 수준이다. 예를 들어 물푸레나무를 설명한 것을 보면 우리네 삶 속에서 이 나무의 의미를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 “물을 푸르게 한다고 해서 물푸레나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실제로 어린 가지를 꺾어 맑은 물에 담그면 파랗게 우러나옵니다. 쓰임새로는 옛날에 죄인 볼기짝을 치는 곤장나무로 쓰였고, 농부들은 도리깨와 굉이자루로, 현대 사회에서는 야구방망이, 정구라켓에 쓰이고 있습니다.”나는 항상 말하기를 학생들 이름을 알고 가르치는 것과 모르고 가르치는 것과는 교육 내용과 교육효과에 엄청난 차이가 있듯이, 산이나 공원에 가서 나무의 이름을 알고 거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는 말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고 강조한다. 더욱이 문화재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연륜을 같이하며 살아온 나무가 있어 그 가치를 더욱 빛내주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인간과 예술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들어 있으니 이 책은 나무의 이야기이자 역사와 예술과 인간의 이야기인 셈이다.
[인문사회]“수백년 고목 벗삼아 과거여행 즐기죠”
서울 덕수궁에서 소나무를 어루만지던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는 “건조가 잘된 나무로 지은 목조건물은 천년 세월도 너끈히 견뎌낸다”고 말했다. 김미옥 기자
◇우리 문화재 나무 답사기/박상진 글·사진/412쪽·2만3000원·왕의서재‘우리 문화재 나무…’ 펴낸 박상진 교수“수백년 고목 벗삼아 과거여행 즐기죠”《“고목(古木)에 눈을 감고 등을 기대 보세요. 그리고 나무에 얽힌 전설과 역사를 떠올려보세요. 나무가 과거의 현장으로 안내할 겁니다.” 이 책을 쓴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69)는 나무박사다. 전공은 목재조직학. 나무의 세포를 연구하는 분야다. 하지만 그는 ‘궁궐의 우리나무’, ‘역사가 새겨진 나무이야기’ 등 나무와 문화재를 연결한 책을 여러 권 냈다. 20일 은행잎이 떨어지는 서울 덕수궁에서 그를 만났다.》
역사의 흔적 느끼세요
박 교수는 “전국에 수백 년 된 고목이 2만 그루 정도가 있는데 그중 숲을 포함해 천연기념물은 250여 그루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책에서 문화재로 지정된 73그루에 얽힌 역사를 소개한다. “일반인은 나무가 문화재인 줄 잘 몰라요. 나무가 그저 무덤덤하게 서 있기 때문에 그곳에서 역사의 편린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죠. 나무는 현재와 과거를 잇는 매개물입니다.”그는 재밌는 사연을 담은 나무로 전남 강진군 병영면의 ‘하멜 은행나무’를 첫손가락에 꼽았다. 하멜은 13년 동안 한국에 억류돼 있으면서 1656∼1663년 7년간 이곳에서 생활했다. 수령이 600년 정도인 은행나무 밑에는 고인돌 다섯 개가 놓여 있다. 저자는 “은행나무 밑 고인돌에 걸터앉아 머나먼 이국땅에서의 서러움을 달랬던 하멜의 심정을 떠올려 봤다”고 말했다. 강원 삼척시 근덕면의 700년 된 음나무 아래는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의 집이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곳이다. 공양왕은 이성계에 의해 원주로 유배됐다가 1394년 3월 삼척으로 거처를 옮겼다. 저자는 “공양왕이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귀신을 물리친다는 음나무 아래에 집을 마련했을 것”이라며 “공양왕을 교살(絞殺)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이 나무가 그의 목을 매단 곳으로 유추할 수 있다”고 말했다.박 교수가 국내 최고의 숲 가운데 하나로 꼽은 곳은 신라 최치원이 조성했다고 전해오는 경남 함양군 상림(上林). 함양태수로 부임한 최치원은 읍을 가로지르는 하천 때문에 비만 오면 일대가 쑥대밭이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숲을 조성했다. 국내 최고(最古)의 인공림인 상림은 현재 면적 18만 2665m², 길이 1.6km, 최대 너비 200m가량이 남아있다. 저자는 “개서어나무, 국수나무 등 1000년 전 나무가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은 아니고 현재는 그 손자, 증손자들이 숲을 호령하고 있다”고 설명했다.나무 과학자인 그가 문화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75∼1977년 일본 교토(京都)대 유학시절이다. 그는 교토의 유적을 답사하며 많은 문화재가 나무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목조문화재에 빠져들었다.박 교수가 발표한 그동안의 연구 성과는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그는 1990년대 해인사 팔만대장경 목재의 재질 분석을 통해 제작지가 기존에 알려졌던 인천 강화도가 아니라 남해안이라고 주장했다. 목재에 남부지역에서만 자라는 후박나무 거제수나무 등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 충남 공주시 백제 무령왕릉의 목관이 일본에서만 자라는 금송(金松)으로 제작됐다는 사실도 밝혀냈다.그는 “문화재청과 함께 수종별 ‘얼짱’ 나무를 선정하는 일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미 조사는 마쳤고 천연기념물로 지정하기 위해 조사한 내용을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박 교수는 “나이가 들면서 현미경 보기가 힘들어져 이젠 나무 연구보다 나무 벗하기에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나무는 노란 꽃이 예쁜 모감주나무입니다. 사진기 둘러메고 그걸 열심히 찾아다니다 보면 나이 먹는 것도 잊어버려요.” 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
천연기념물 나무에 얽힌 우리 역사 [연합뉴스] 2009.11.17
강원 영월군 남면 광천리 남한강 상류에는 강의 지류인 서강에 둘러싸이고 가파른 절벽에 막힌 평지가 있다. 조선 제6대 임금 단종은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청령포라 불리는 이곳에 유배됐다. 청령포 솔숲 가장자리에는 관음송이란 소나무 한 그루가 우람하게 있는데 단종은 이 소나무에 걸터앉아 서울을 바라보면서 통곡했다고 한다.
관음송(觀音松)은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지켜봤다고 해서 '볼 관(觀)'자를, 단종의 슬픈 말소리를 들었다고해서 '소리 음(音)'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강원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에는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이 교살된 곳이라는 전설을 지닌 음나무가 있다. 공양왕은 2년8개월 동안 허수아비 왕 노릇을 하다가 결국 왕위에서 쫓겨났다. 공양군으로 강등돼 원주로 유배됐다가 간성으로 쫓겨갔고 다시 삼척으로 옮겼다. 궁촌리 음나무가 있는 자리는 공양왕이 죽기 직전까지 살던 집의 마당이 있던 곳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음나무는 옛날부터 귀신을 쫓고 불행을 몰아내는 의미가 있지만, 공양왕은 이곳에서 한 달 남짓 살다가 나무의 효험도 보지 못하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공양왕을 '교살(絞殺)했다'고 나오는데 교살은 큰 나무에 목매다는 것이 보통이었다. 상세한 기록은 없지만, 공양왕이 음나무에서 최후를 맞았을 가능성을 충분히 떠올릴 수 있다. 조선 전기의 문신인 김종직은 함양군수로 재임하던 시절 5살짜리 아들을 홍역으로 잃는다. 아이의 이름은 목아(木兒), 즉 나무 아이였다. 김종직은 자식을 잃은 다음해인 1475년 승진해 함양을 떠나면서 학사루라는 누각 앞에 천년을 거뜬히 살 수 있는 느티나무 한 그루를 정성 들여 심고 '나무 아이'의 짧은 삶에 대한 아쉬움을 달랬다. 해인사 팔만대장경판, 무령왕릉 관재 등 나무 문화재를 과학적으로 분석해온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가 '우리 문화재 나무 답사기'(왕의서재, 412쪽. 2만3천원)를 펴냈다. 저자가 14년 동안 전국 각지를 답사하며 천연기념물 나무에 얽힌 전설과 사연을 담은 책이다. 전국에 있는 250여 천연기념물 나무와 숲 가운데 역사ㆍ문화적 가치가 높은 73곳을 선별해 2~3차례씩 답사했고 책에 실린 사진도 직접 찍었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우리는 나무 '문화재'라는 말에 익숙하지 않지만 문화재로서의 값어치를 따지면 천연기념물 나무는 다른 어떤 유물에도 뒤지지 않는다"면서 "기나긴 세월 동안 마을 지킴이로 살아온 나무에는 세상살이의 이런저런 사연이 얽혀 있다. 이는 우리의 구전문화이며 때로는 역사의 편린을 꿰어맞출 수 있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저자는 답사 현장에서 마을의 노인들을 만나 나무에 얽힌 옛 이야기를 수집했다면서 세월이 흐를수록 나무가 담은 사연이 잊히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우리 문화재 나무 답사기’펴낸 박상진교수 “오래된 나무에는 얽힌 사연도 많아요” [국민일보] 2009.11.19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오래된 나무들은 각각 사연들을 갖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문화재인 나무들과 대화를 나누며 역사와 세월을 되짚어 보는 것도 의미있지 않을까요?”나무 고고학 분야의 권위자인 박상진(69) 경북대 명예교수는 17일 ‘우리 문화재 나무 답사기’(왕의서재)를 펴낸 이유를 이런 반문으로 대신했다.박 명예교수는 “수 백 년, 많게는 천 년이 넘는 고목나무들을 보면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느끼게 된다”며 “우리 나무 중에도 문화재가 있다는 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그가 펴낸 책에는 전국에 흩어져 있는 73개의 천연기념물 고목나무와 숲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가 천연기념물 고목나무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95년 경남 남해 창선도 넓은 들판에서 홀로 자라는 웅장한 왕후박나무를 만나면서부터. 그는 그 때 크고 오래된 전국의 이름난 고목나무들과 숲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고 이들이 문화재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이후 문화재청이 지정·관리하고 있는 천연기념물 나무와 숲 250여곳을 각각 2∼3차례씩 답사했다.“마을 이장이나 노인정을 찾아가 고목나무에 얽힌 전설과 사연들을 수집했어요. 답사한 나무들 중에서 특히 역사, 문화적으로 가치가 높은 것들을 골라 이번 책에 담았습니다.”박 명예교수는 “기나긴 세월 동안 마을 지킴이로 살아온 나무에는 이런저런 사연들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서울 재동 헌법재판소 안에 자리잡고 있는 천연기념물 제8호 백송(白松)은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기 위해 일으킨 계유정난의 참극을 지켜봤다. 강원도 평창군 방림면 운교리에 있는 운교역 밤나무(천연기념물 제498호)는 관동대로 길목에 있던 운교역의 마방에서 벌어졌던 조선 관리들의 희로애락을 지켜 봤다. 강원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 음나무(천연기념물 제363호)에는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이 이성계에 의해 쫓겨나 살다가 이 나무에서 목이 졸려 죽임을 당했다는 전설을 갖고 있다고 한다.박 명예교수는 “자연을 압도하듯 사방으로 펼쳐진 거대한 나무들은 그 자체로도 위엄이 있다”며 “하찮은 세상사에 매달리다 번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을 넉넉하게 감싸준다”고 말했다.박 명예교수는 나무 문화재 전문가다. 서울대 임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교토대학 대학원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산림과학원, 전남대 및 경북대 교수로 지내며 해인사 팔만대장경판 재질 분석작업에 참여하는 등 나무 문화재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그는 지금도 나무 답사를 계속하고 있다. 시도 기념물 나무와 산림청 지정 보호수들이 주요한 답사대상이다. “천연기념물은 이제 다 둘러봤어요. 앞으로는 시도 기념물 나무 등을 찾아다니며 그들 나무에 얽힌 사연들을 수집해 일반인들에 알릴 생각입니다.”
'관음송'엔 홀로 유배된 단종의 눈물이… [한국경제] 2009.11.19
우리 문화재 나무 답사기 박상진 지음/ 왕의서재/ 412쪽/ 2만3000원
단종은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강원 영월의 청령포에 유배됐다. 남한강 상류의 서강에 둘러싸인 이곳 솔숲에는 관음송이란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단종은 이 소나무에 걸터앉아 서울을 바라보면서 통곡했다고 한다. 그 비참한 모습과 슬픈 목소리를 지켜보고 들은 소나무 이름은 '볼 관(觀)'자와 '소리 음(音)'자를 딴 관음송(觀音松)이다. 해인사 팔만대장경판과 무령왕릉 관재 등 나무 문화재 연구로 유명한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의 《우리 문화재 나무 답사기》에는 이 같은 사연들이 촘촘하게 적혀 있다. 그가 14년 동안 발품을 팔며 전국의 천연기념물 나무에 얽힌 전설과 사연을 담아낸 것.250여 천연기념물 나무와 숲 가운데 역사 · 문화적 가치가 높은 73곳을 선별해 싣고 사진도 곁들였다. 조선 전기의 문신 김종직이 함양군수 시절 다섯 살배기 아들을 홍역으로 잃었는데 아이의 이름이 목아(木兒 · 나무 아이)였다는 얘기와 그가 이듬해 함양을 떠나면서 학사루 앞에 1000년을 살 수 있는 느티나무 한 그루를 심고 '나무 아이'에 대한 아쉬움을 달랬다는 사연도 들어있다. 그는 '우리는 나무 문화재라는 말에 익숙하지 않지만 문화재로서의 값어치를 따지면 천연기념물 나무는 다른 어떤 유물에도 뒤지지 않는다'면서 '기나긴 세월 마을 지킴이로 살아온 나무에는 세상살이의 이런저런 사연이 얽혀있고,이는 우리의 구전문화이자 역사의 편린을 꿰어맞출 수 있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고 썼다.
천연기념물 나무의 ‘풍만한 역사’ 뽑아내다 [한겨레] 2009.11.20
〈우리 문화재 나무 답사기〉박상진 글·사진/왕의서재·2만3000원사람이 있는 곳에 나무가 있었다. 나무는 사람들의 희로애락과 흥망성쇠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자신이 보고 들은 것에 대해 나무는 굳게 입을 다물 뿐이었지만, 사람들은 나무의 뿌리와 줄기, 꽃과 잎에 새겨진 인간의 역사와 문화를 다시 발굴해 냈다.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구내에 자라고 있는 17m 높이의 백송. 서울 시내의 천연기념물 나무 10그루 가운데 하나로, 줄기 껍질이 희고 곱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다. 백송이 있는 자리는 조선 영조 때의 재상이자 뒷날 풍양조씨 세도정치의 주춧돌을 놓은 조상경의 집이었다. 고종의 등극을 결정적으로 도운 조대비와 대원군이 안동김씨 세도를 종식시키고 왕정복고를 시도할 때 백송은 그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다. 그 뒤 이 자리에는 경기여고와 창덕여고가 차례로 들어왔다가 나갔고 지금은 심심찮게 뉴스의 근원지가 되는 헌법재판소가 들어서 있다.단종의 유배지였던 영월 청령포에는 어린 왕이 걸터앉아 서울 쪽을 보며 통곡했다는 30m 높이의 관음송이 있다. 폐왕의 비참한 모습을 보았다고 해서 ‘볼 관’(觀)자를, 그의 슬픈 울음소리를 들었다고 해서 ‘소리 음’(音)자를 붙인 이름이다. 그러나 단종 시절로부터 무려 55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관음송은 “미끈하고 늘씬해 흡사 군살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잘생긴 수영선수의 몸매 같”은 모습으로 객을 맞는다.함양 상림은 신라의 문장가 고운 최치원의 백성 사랑과 관리로서의 역량을 알려준다. 골품제도의 벽에 막히자 외직을 자청한 그가 함양 태수를 맡게 되어 처음 착수한 것이 하천을 다스리는 토목공사였다. 함양은 아늑한 분지에 비옥한 토질을 자랑하는 땅이었지만 읍을 가로질러 흐르는 위천이 큰물만 지면 범람하는 통에 물길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었다. 최치원은 백성을 동원하고 몸소 진두지휘해 둑을 쌓았고, 더 나아가 둑을 보완하는 호안림(護岸林)을 조성하였으니 그것이 지금의 상림이 되었다. 하동 섬진강변의 소나무숲 역시 조선 영조 때 하동도호부사로 부임한 전천상이 모래와 홍수를 막을 용도로 조성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나무 고고학 분야의 권위자인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가 낸 <우리 문화재 나무 답사기>는 이처럼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나무들을 답사 대상으로 삼아 그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와 숲은 모두 250여 개에 이르는데, 그중 73개가 책에 수록되었다. 보은 정이품송,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고창 선운사 동백나무숲 등 유명한 것들도 있지만, 서울 난곡 강감찬 장군 굴참나무, 망국의 설움을 간직한 삼척 공양왕 음나무, 외적의 침입에 맞서 날카로운 가시를 곤두세운 강화 갑곶돈대 탱자나무 등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나무들도 포함되었다.나무는 ‘역사의 비밀을 간직한 하드디스크’라 일컬어진다. 그러나 정작 나무 자신의 나이를 헤아리는 셈법은 컴퓨터 시대에 걸맞지 않게 원시적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무에 얽힌 전설이나 역사적 기록에 의지해 수령을 헤아리는 바람에 들쭉날쭉하기 일쑤다. 나무의 굵기와 나이테의 지름을 측정하고 수식을 세워 과학적으로 고목의 나이를 알아내는 방법이 있으나 까다롭고 비용도 들기 때문에 실제로 적용하는 경우는 드물단다. 지은이가 14년 동안 발품을 팔아 직접 찍은 컬러 사진들이 눈맛을 즐겁게 한다.
역사를 품은 巨木 73그루 [매일경제] 2009.11.20
단종 1년(1452년) 10월 10일 밤. 좌의정 김종서의 집은 피바다가 됐다.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된 것. 김종서는 두 아들과 함께 집에서 격살(擊殺)됐고 대역모반죄라는 누명까지 쓰고 효시(梟示ㆍ사람의 목을 베어 매달아 군중 앞에 공시)됐다. 그의 동네에 밴 피비린내를 없애기 위해 사람들이 재를 가져다 뿌려 '잿골'이라고 불렸는데 훗날 '재동'이 됐다. 참극이 벌어졌던 동네 한편에는 깨끗한 백송 한 그루(사진)가 자라고 있었다. 한양에 조선왕조가 터를 잡을 즈음 누군가 중국에서 가져와 심은 나무다. 세월이 흘러 이 백송은 영조 때 재상 조상경의 집에 서 있게 됐다. 거센 개화 물결을 타고 이 일대에 경기여고가 들어선다. 백송은 기숙사 바로 앞에 있었다. 이어 창덕여고가 들어왔다가 방이동으로 이사갔다. 지금은 대한민국 최고 권위 기관인 헌법재판소 지킴이 나무로 자리잡았고 천연기념물 제8호로 지정됐다.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의 저서 '우리 문화재 나무 답사기'는 말 없이 천년의 역사를 지켜본 거목의 사연을 들려준다. 14년에 걸친 답사와 조사를 거쳐 역사 문화적 가치가 높은 73곳의 문화재 나무를 소개한다. 단종의 죽음을 지켜본 영월 하송리 은행나무, 김종직이 죽은 아들을 위해 심은 느티나무, 나라 잃은 임금의 슬픔을 간직한 삼척 공양왕 음나무, 날카로운 가시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강화 갑곶리 탱자나무, 기우제를 지내고 활쏘기 터로도 쓰였던 제주 천지연 난대림 등 나무를 통해 한국사의 비밀과 전설을 들여다볼 수 있다. 단종은 영월 하송리 유배 시절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76호)에서 몇 알을 따다 자신의 운명을 점쳤다고 한다. 분명 나쁜 점괘를 보았을 그는 얼마 되지 않아 최후를 맞았다. 시신마저 아무렇게나 팽개쳐질 때 이 나무를 심은 엄임의 12대손 엄흥도가 이를 수습했다. 이 나무는 1910년 한일병합, 1945년 광복, 1950년 6ㆍ25전쟁 때도 굵은 가지 하나씩을 부러뜨려 나라의 큰일을 예고했다는 전설이 있다. 조선 성리학자 김종직은 마흔 넘어 얻은 다섯 살짜리 아들을 홍역으로 잃은 후 느티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너무 일찍 하늘나라로 간 아들을 위해 천년은 거뜬히 살 수 있는 나무를 심어 안타까움을 달랬다. 경남 함양군 운림리에 있는 이 나무는 천연기념물 제407호다. 고려 마지막 임금 공양왕은 왕위에 오른 지 불과 2년8개월 만에 이성계에게 쫓겨났다. 원주로 유배됐다가 강원도 간성으로 쫓겨가고 다시 삼척으로 추방됐다 살해된다. 왕비와 두 아들과 함께 목이 졸려 죽은 것. 474년 34대를 이어오던 고려왕조가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의 곁에는 귀신을 쫓는다는 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강화 갑곶리 탱자나무는 조선시대 왜군의 침략을 막는 데 공을 세웠다. 성곽과 방어 요지에 탱자나무를 촘촘히 심어 가시 울타리를 만들었다. 손가락 길이만 한 험상궂은 가시가 사방으로 빈틈없이 내밀고 있어 특별한 장비를 갖추지 않으면 탱자나무 가시를 뚫고 성벽을 오르는 게 녹록지 않았다. 왕의서재 펴냄.
천연기념물 나무에 얽힌 전설 [경북일보] 2009.11.20
전국 각지 답사…옛 이야기 수집
해인사 팔만대장경판, 무령왕릉 관재 등 나무 문화재를 과학적으로 분석해온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가 '우리 문화재 나무 답사기'(왕의서재)를 펴냈다.
이 책은 저자가 14년 동안 전국 각지를 답사하며 천연기념물 나무에 얽힌 전설과 사연을 담은 책 '우리 문화재 나무 답사기'다.
전국에 있는 250여 천연기념물 나무와 숲 가운데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은 73곳을 선별해 2~3차례씩 답사했고 책에 실린 사진도 직접 찍었다. 때문에 저자는 답사 현장에서 마을의 노인들을 만나 나무에 얽힌 옛 이야기를 수집했다면서 세월이 흐를수록 나무가 담은 사연이 잊히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강원 영월군 남면 광천리 남한강 상류에는 강의 지류인 서강에 둘러싸이고 가파른 절벽에 막힌 평지가 있다.
조선 제6대 임금 단종은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청령포라 불리는 이곳에 유배됐다.
청령포 솔숲 가장자리에는 관음송이란 소나무 한 그루가 우람하게 있는데 단종은 이 소나무에 걸터앉아 서울을 바라보면서 통곡했다고 한다.
관음송(觀音松)은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지켜봤다고 해서 '볼 관(觀)'자를, 단종의 슬픈 말소리를 들었다고해서 '소리 음(音)'자를 따서 붙인 이름.
강원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에는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이 교살된 곳이라는 전설을 지닌 음나무가 있다. 공양왕은 2년8개월 동안 허수아비 왕 노릇을 하다가 결국 왕위에서 쫓겨났다. 공양군으로 강등돼 원주로 유배됐다가 간성으로 쫓겨갔고 다시 삼척으로 옮겼다. 궁촌리 음나무가 있는 자리는 공양왕이 죽기 직전까지 살던 집의 마당이 있던 곳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음나무는 옛날부터 귀신을 쫓고 불행을 몰아내는 의미가 있지만, 공양왕은 이곳에서 한 달 남짓 살다가 나무의 효험도 보지 못하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공양왕을 '교살(絞殺)했다'고 나오는데 교살은 큰 나무에 목매다는 것이 보통이었다. 상세한 기록은 없지만, 공양왕이 음나무에서 최후를 맞았을 가능성을 충분히 떠올릴 수 있다.
조선 전기의 문신인 김종직은 함양군수로 재임하던 시절 5살짜리 아들을 홍역으로 잃는다. 아이의 이름은 목아(木兒), 즉 나무 아이였다.
김종직은 자식을 잃은 다음해인 1475년 승진해 함양rk 을 떠나면서 학사루라는 누각 앞에 천년을 거뜬히 살 수 있는 느티나무 한 그루를 정성 들여 심고 '나무 아이'의 짧은 삶에 대한 아쉬움을 달랬다.저자는 머리말에서 "우리는 나무 '문화재'라는 말에 익숙하지 않지만 문화재로서의 값어치를 따지면 천연기념물 나무는 다른 어떤 유물에도 뒤지지 않는다"면서 "기나긴 세월 동안 마을 지킴이로 살아온 나무에는 세상살이의 이런저런 사연이 얽혀 있다. 이는 우리의 구전문화이며 때로는 역사의 편린을 꿰어맞출 수 있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412쪽. 2만3천원.
역사의 흔적 간직한 나무 이야기 [디지털타임스] 2009.11.20
우리 문화재 나무 답사기/박상진 지음/왕의서재 펴냄/412쪽/2만3000원모든 사건의 가장 확실한 목격자는 주변을 둘러싼 사물이다. 사람은 말을 바꿀 수도 있고 삶의 유한함으로 인해 사건을 증언하지 못한다. 건물 역시 시대의 흐름과 함께 짓고 부수는 과정을 반복한다. 하지만 땅에 깊이 뿌리를 박은 나무는 세월을 이겨내고 살아남는다. 마을의 큰 어른처럼 지난 세월의 흔적을 모두 간직하고서 말이다.책은 나무를 두고 `역사의 비밀을 간직한 하드디스크`라고 설명한다. 나무가 스스로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수는 없지만 세월을 버텨낸 나무들에게는 역사적인 기록과 전설, 민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무는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의 역사이자 문화이다.단종 1년(1452년)에 왕을 보필했던 김종서는 두 아들과 함께 수양대군에 의해 격살된다. 이른바 `계유정난`의 첫 번째 희생자였다. 당시 그가 살았던 재동 마을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했고 이를 없애기 위해 사람들은 재를 뿌렸다. 때문에 이 마을은 잿골이 되었다가 현재는 서울시 종로구 재동으로 원래 이름을 되찾았다.오늘날 재동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는 헌법재판소이지만 그 뒤뜰에 자리한 백송 한 그루는 조선 전기 김종서의 죽음에서부터 후기 흥선대원군의 집권에 이르기까지 지난 600년 동안 우리 역사를 지켜본 정직한 목격자였다. 이 백송의 일대기를 짚으면 지난 역사의 토막토막이 풀어 헤쳐진다. 백송 근처에 살았던 위인들을 엮어내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역사가 펼쳐지는 셈이다.나무 고고학 분야의 전문가인 지은이는 14년간 문화재와 관련된 나무를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문화재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세월을 함께하며 살아온 나무가 있다"며 "이 책은 나무 이야기이자 역사와 예술, 인간의 이야기"라고 평가한다. 그의 말처럼 책에는 나무의 특성을 설명하기 위해 역사적 사료와 인문학적 지식이 다양하게 등장한다. 식물도감의 맛을 곁들인 훌륭한 역사서로 손색이 없다.
‘역사의 아픔’ 지켜본 천연기념물 나무들 [세계일보] 2009.11.20
우리 문화재 나무 답사기/박상진 지음/왕의서재/2만3000원
만일 나무나 돌이 표현력이 있다면 역사는 추정이나 가상이 없었을 것이다. 특히 천년 이상을 꿈적도 않고 한곳을 지키는 나무는 역사의 비밀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침묵하고 있다. '우리 문화재 나무 답사기'는 래인사 팔만대장경, 무령왕릉 관재 등 나무 문화재를 과학적으로 분석한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가 14년 동안 전국 각지를 답사하며 천연기념물 나무에 얽힌 전설과 사연을 담은 책이다. 박 교수는 전국에 있는 250여 천연기념물 나뮹와 숲 가운데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은 73곳을 선별해 2∼3차례씩 답사했고 책에 실린 사진도 직접 찍었다. 책에 게재된 천연기념물 나무는 각자의 사연이 남다르다. 계유정난 당시 김종서의 살해현장을 지켜본 재동 백송, 어린 임금 단종의 슬픈 눈물이 배어 있는 영월 하송리 은행나무, 나라 잃은 임금의 슬픔을 간직한 삼척 공양왕 음나무, 날카로운 가시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강화 갑곶리 탱자나무 등이다. 나무에 얽힌 사연은 우리의 구전문화이며 때로는 역사의 편린을 꿰어맞출 수 있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천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나무는 그렇게 묵묵히 서 있었다 [한국일보] 2009.11.20
우리 문화재 나무 답사기/박상진 지음/왕의서재 발행ㆍ412쪽ㆍ2만3,000원
단종의 흐느낌 들었던 관음송 · 공양왕 머문집 마당의 음나무… 전국의 73개 거목이 품은 사연 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은 이성계에 의해 폐위돼 공양군으로 강등된 뒤 원주로 유배된다. 다시 간성을 거쳐 삼척으로 도망갔다가 그곳에서 1394년에 숨졌는데 '조선왕조실록'에는 교살됐다고 적혀 있다. 더 자세한 기록이 없어서 공양왕이 어떻게 죽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의 죽음과 조금은 관련됐을 것 같은 나무 한 그루가 지금의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에 있다.
궁촌(宮村)이라는 예사롭지 않은 이름의 마을에 있는 키 20m의 음나무. 마을에는 이 나무 앞이 당시 공양왕이 머문 집 마당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흔히 음나무가 귀신과 불행을 막아준다고 하는데, 공양왕은 이곳에서 한 달 남짓 지내다 나무의 효험을 보지 못한 채 비극적인 죽음을 맞고 말았던 것이다. 세력을 키우며 새 왕조 건설에 나선 이성계는 조선을 세우기 전 전국의 이름난 산을 찾아 산신께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자신이 세우려는 왕조가 영원하기를 기원한 것이다. 그러나 광주 무등산의 산신만은 그의 기도에 응하지 않았다. 화가 난 이성계는 무등산 산신을 지리산으로 귀양 보내고, 산 이름도 무정한 산이라는 뜻에서 무정산(無情山)으로 바꿨다. 그렇지만 마음이 개운치 않았던지 그는 무등산을 떠나면서 인근 담양의 한재마을에, 당장이 아니라 훗날에라도 소원을 들어달라는 염원을 담아 느티나무 한 그루를 정성스럽게 심었다. 우리나라의 나무에는 많은 사연이 담겨 있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전설인지 경계가 모호하지만 우리가 이따금 만나는 고목에는 이처럼 선인의 삶과 역사가 함께 한다. <우리 문화재 나무 답사기 >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고목과, 거기에 깃든 여러 이야기를 모은 책이다. 어디나 그렇듯 비운의 인물일수록 이야기가 많은 법. 삼촌 수양대군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난 비극의 주인공 단종과 관련해서는 두 종류의 나무가 등장한다. 단종은 수양대군에 의해 1457년 영월 청령포로 유배된다. 그곳에는 다른 나무를 압도하는, 키 30m의 우람한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열여섯 살 어린 단종은 그 소나무에 걸터앉아 서울을 보며 통곡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무는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지켜보고 슬픈 소리를 들었다 해서 관음송(觀音松)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관음송에 기대 슬픔을 달래던 무렵, 청령포 일대에 홍수가 나자 단종은 읍내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긴다. 그때 부근 언덕의 은행나무에서 은행 몇 알을 따 자신의 운명을 점쳤다고 한다. 점괘가 어땠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거처를 옮긴지 얼마 안 돼 사약을 받고 한많은 짧은 생애를 마친다. 방치됐던 단종의 시신은 영월 호장 엄홍도가 수습했는데 그는 은행나무를 심은 엄임의의 12대 손이었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는 엄흥도와 함께 이 은행나무를 절개와 의리의 상징으로 여긴다. 책에는 이밖에 최치원이 함양 태수로 있을 때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조성했다는 상림, 김종직이 다섯 살 아들을 잃고 슬픔을 이기기 위해 심었다는 느티나무, 곽재우가 북을 걸어놓고 의병을 훈련시켰다는 현고수(懸鼓樹) 느티나무, 이언적이 자신의 건강을 보살피기 위해 심은 조각자나무, 김정희가 청에서 가져와 고조부 김흥경의 묘소 앞에 심은 백송 등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나온다. 나무를 매개로 역사 속 인물과 역사적 사건을 만날 수 있다. 저자인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는 목조 문화재 권위자로 이 책은 그의 14년 답사의 결과물이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전국 250여개의 나무 및 숲 가운데 역사ㆍ문화적 가치가 높은 73개를 골라 현장을 방문하고 사진을 찍어 책을 완성했다. 수백년 심지어 1,000년 이상을 살면서 이들 나무는 역사의 소용돌이와 함께했다. 때로는 웃음이 나오고 또 때로는 눈물이 나오는 여러 사건들을 그저 묵묵히 바라본 나무들은 이제 구전의 산실이 돼 역사의 빈틈을 채우는 이야기의 원천이 되고 있다.
“수백년 고목 벗삼아 과거여행 즐기죠” [동아일보] 2009.11.21
◇우리 문화재 나무 답사기/박상진 글·사진/412쪽·2만3000원·왕의서재
‘우리 문화재 나무…’ 펴낸 박상진 교수 / "수백년 고목 벗삼아 과거여행 즐기죠”
《“고목(古木)에 눈을 감고 등을 기대 보세요. 그리고 나무에 얽힌 전설과 역사를 떠올려보세요. 나무가 과거의 현장으로 안내할 니다.” 이 책을 쓴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69)는 나무박사다. 전공은 목재조직학. 나무의 세포를 연구하는 분야다. 하지만 는 ‘궁궐의 우리나무’, ‘역사가 새겨진 나무이야기’ 등 나무와 문화재를 연결한 책을 여러 권 냈다. 20일 은행잎이 떨어지는 서울 덕수궁에서 그를 만났다.》
하멜 지켜본 은행나무 /최치원이 꾸민 ‘상림’ / 역사의 흔적 느끼세요박 교수는 “전국에 수백 년 된 고목이 2만 그루 정도가 있는데 그중 숲을 포함해 천연기념물은 250여 그루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책에서 문화재로 지정된 73그루에 얽힌 역사를 소개한다. “일반인은 나무가 문화재인 줄 잘 몰라요. 나무가 그저 무덤덤하게 서 있기 때문에 그곳에서 역사의 편린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죠. 나무는 현재와 과거를 잇는 매개물입니다.”그는 재밌는 사연을 담은 나무로 전남 강진군 병영면의 ‘하멜 은행나무’를 첫손가락에 꼽았다. 하멜은 13년 동안 한국에 억류돼 있으면서 1656∼1663년 7년간 이곳에서 생활했다. 수령이 600년 정도인 은행나무 밑에는 고인돌 다섯 개가 놓여 있다. 저자는 “은행나무 밑 고인돌에 걸터앉아 머나먼 이국땅에서의 서러움을 달랬던 하멜의 심정을 떠올려 봤다”고 말했다. 강원 삼척시 근덕면의 700년 된 음나무 아래는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의 집이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곳이다. 공양왕은 이성계에 의해 원주로 유배됐다가 1934년 3월 삼척으로 거처를 옮겼다. 저자는 “공양왕이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귀신을 물리친다는 음나무 아래에 집을 마련했을 것”이라며 “공양왕을 교살(絞殺)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이 나무가 그의 목을 매단 곳으로 유추할 수 있다”고 말했다.박 교수가 국내 최고의 숲 가운데 하나로 꼽은 곳은 신라 최치원이 조성했다고 전해오는 경남 함양군 상림(上林). 함양태수로 부임한 최치원은 읍을 가로지르는 하천 때문에 비만 오면 일대가 쑥대밭이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숲을 조성했다. 국내 최고(最古)의 인공림인 상림은 현재 면적 18만 2665m², 길이 1.6km, 최대 너비 200m가량이 남아있다. 저자는 “개서어나무, 국수나무 등 1000년 전 나무가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은 아니고 현재는 그 손자, 증손자들이 숲을 호령하고 있다”고 설명했다.나무 과학자인 그가 문화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75∼1977년 일본 교토(京都)대 유학시절이다. 그는 교토의 유적을 답사하며 많은 문화재가 나무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목조문화재에 빠져들었다.박 교수가 발표한 그동안의 연구 성과는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그는 1990년대 해인사 팔만대장경 목재의 재질 분석을 통해 제작지가 기존에 알려졌던 인천 강화도가 아니라 남해안이라고 주장했다. 목재에 남부지역에서만 자라는 후박나무 거제수나무 등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 충남 공주시 백제 무령왕릉의 목관이 일본에서만 자라는 금송(金松)으로 제작됐다는 사실도 밝혀냈다.그는 “문화재청과 함께 수종별 ‘얼짱’ 나무를 선정하는 일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미 조사는 마쳤고 천연기념물로 지정하기 위해 조사한 내용을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박 교수는 “나이가 들면서 현미경 보기가 힘들어져 이젠 나무 연구보다 나무 벗하기에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나무는 노란 꽃이 예쁜 모감주나무입니다. 사진기 둘러메고 그걸 열심히 찾아다니다 보면 나이 먹는 것도 잊어버려요.”
[잠깐! 이 저자]《우리 문화재 나무 답사기》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 [조선일보] 2009.11.21
"고목나무 전설은 문화이자 歷史 자료지요"조선 제6대 임금 단종은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강원 영월의 청령포에 유배됐다. 남한강 상류의 서강에 둘러싸인 이곳 솔숲에는 관음송(觀音松)이라는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단종은 이 소나무에 걸터앉아 서울을 바라보면서 통곡했다고 한다. 그 비참한 모습을 지켜봤다고 해서 '볼 관(觀)'자를, 슬픈 목소리를 들었다고 해서 '소리 음(音)'자를 붙인 나무다.'나무 박사' 박상진(69) 경북대 명예교수가 펴낸 《우리 문화재 나무 답사기》(왕의서재)에는 나무에 얽힌 이런 사연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그가 14년 동안 발품 팔아 확인한 전국의 문화재 나무에 얽힌 전설과 사연을 담은 책이다. 250여 천연기념물 고목나무와 숲 가운데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은 73개를 선별해 컬러사진과 함께 펼쳤다."녹음기를 들고 마을 이장이나 노인정을 찾아가 나무에 얽힌 전설과 사연들을 수집했습니다. 어르신들 얘기는 '~라더라' 한마디면 끝나버려요. 2~3차례 찾아가서 더 듣고, 인물과 마을 역사를 찾은 다음, 나무의 특징까지 넣어서 이야기를 엮은 거죠."박 명예교수는 "나무 한 그루는 그 자체가 역사이자 문화"라며 "오랜 세월 마을을 지켜온 나무에는 세상살이의 온갖 사연이 얽혀 있다"고 했다. "병을 낫게 해주고 한 해 농사가 풍년이 되게 해주는 나무부터, 역사의 소용돌이를 지켜본 나무까지…. 고목나무 전설은 우리의 구전문화이며 때로는 역사의 편린을 꿰어맞출 수 있는 자료가 되기도 합니다."강원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에는 고려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이 이성계에 의해 쫓겨나 살다가 이 나무에서 교살됐다는 전설을 가진 음나무(천연기념물 제363호)가 있다. 조선 전기의 문신 김종직이 함양군수 시절 5살짜리 아들을 홍역으로 잃었는데 아이의 이름이 목아(木兒·나무 아이)였다는 얘기, 그가 이듬해 함양을 떠나면서 학사루라는 누각 앞에 느티나무 한 그루를 심고 아이에 대한 아쉬움을 달랬다는 사연도 들려준다."흔히 문화재라면 탑이나 팔만대장경, 박물관 유리장 속의 금관만 생각할 뿐 '나무 문화재'라는 말엔 익숙지 않잖아요. 전국의 이름난 고목나무들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나무 고고학 분야의 최고 권위자인 그는 1963년 서울대 임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교토대학 대학원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산림과학원 연구원을 거쳐 전남대, 경북대 교수로 지내며 해인사 팔만대장경판 재질 분석작업에 참여하는 등 나무 문화재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일에 몰두해왔다.나무의 어떤 매력에 끌렸던 걸까. "고등학교 3학년 때 진로를 결정하는데, 담임선생님이 그러더군요. '자네 같은 젊은이가 아니면 누가 한국의 헐벗은 산을 푸르게 만들겠나'. 그 한 마디가 제 인생을 바꿨죠. 어떤 사명감 같은 게 평생 작용한 것 같습니다."그러면서도 그는 "자연을 압도하듯 사방으로 펼쳐진 나무들을 보면 세상사의 온갖 근심이 사라진다"며 "언제 찾아가도 늘 제자리에서, 덤덤히 맞아주는 나무의 큰 품을 잊지 못해 천 리 길도 마다않고 달려가게 된다"고 했다.주말마다 떠나는 답사 파트너는 아내. "집사람이 조수예요. 요즘엔 내비게이션이 흔하지만 예전엔 그런 게 어딨어요? 저는 운전을 하니까 옆에서 길을 찾는 역할을 했죠.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이제 아내가 나무 박사 다 됐어요."그는 "팔팔할 때는 전자 현미경 들여다보는게 일이었는데, 이제 나이 들어서 첨단 연구를 하기는 어렵고 일반인들에게 나무 이야기를 쉽고 재밌게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우리나라에 나무 종류별로 최고의 나무들이 있는데, 일명 '얼짱 나무'들만 모아서 한 번 써볼까 해요. 소나무 중 최고, 은행나무 중 최고… 이렇게 묶어서 소개하면 사람들이 나무를 더 친근하게 여기지 않을까요?"
나이테에 새긴 역사의 상처, 문화재가 된 나무들 [중앙일보] 2009.11.21
우리 문화재 나무 답사기/박상진 지음, 왕의 서재, 412쪽, 2만000원국내에서 나무 고고학 분야의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지은이가, 14년간 발품을 팔아 기록한 나무와 역사의 '퓨전 에세이'이다. '문화재 나무'라면 속리산의 정일품송 나무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을 텐데 문화재청이 지정, 관리하는 천연기념물 나무와 숲이 250여 곳에 달한단다. 지은이는 이중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높은 73곳을 골라 '역사 현장의 나무'에서 '선비와 장군의 나무'까지 4부로 나눠 소개한다.1452년 단종 1년 10월 10일 밤 수양대군 일파는 서울 재동에 있던 김종서의 집을 습격해 그를 살해한다. 이른바 조카의 왕위를 탐낸 '계유정난'의 시작이다. 어찌나 참혹했는지 마을 사람들이 피비린내를 없애기 위해 재를 가져다 뿌린 것이 계기가 되어 마을 이름이 '잿골'로 바뀐 것이 오늘날 재동의 유래가 됐다. 이 쿠데타의 현장을 지켜본 나무가 지금의 헌법재판소 뒤뜰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8호 백송이다. 수령(樹齡)이 700년을 넘었으니 지켜본 풍상이 어찌 이뿐일까.조선 말 어린 고종의 섭정을 맡은 대원군이 뜻을 같이 하는 이들과 함께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종식시키는 왕정복고를 논의한 곳도 이 백송이 바라보이는 사랑채였다고 한다. 대원군은 백송 껍질이 차츰 하얗게 되는 것을 보고 거사의 성공을 확신했다고 하니 영험하기도 한 셈이다. 키 17미터, 뿌리목 둘레 3.8미터의 늠름한 모습을 자랑하는 이 나무는 현재도 희고 고운 피부를 자랑하고 있다.지은이는 문화재나무마다 이같은 역사적 사실을 두루 짚어내면서 나무의 사진· 행정구역· 지정 시기· 지도상 위치 등 정보를 꼼꼼히 더했다. 그러기에 단순한 탐방기를 넘어서 읽는 재미와 정보를 두루 갖춘 책이다.
천연기념물 고목들의 사연 [부산일보] 2009.11.21우리 문화재 나무 답사기 / 박상진 / 왕의서재/2만3천원
200~300년은 젊은 축이다. 700~800년은 되어야 장년, 1천년은 넘어야 노인 소릴 듣는 천연기념물 나무. 전국 250여 곳 마을 어귀에 조용히 선 이 '문화재 나무'들은 얼마나 많은 역사적 순간들을 지켜봤을까. 그중 73곳의 고목들을 찾아간 '우리 문화재 나무 답사기'(박상진)는 그래서 나무 이야기이자 역사와 사람의 이야기다. 강원도 영월 하송리 은행나무는 한일합방, 해방, 한국전쟁 등 큰일이 있을 때마다 스스로 가지를 부러뜨렸다는, 수령 1천300년을 호가하는 나무다. 유배 중이던 열일곱 살 단종도 사약을 받기 전 이 나무의 은행 몇 알을 따다 운명을 점쳤다. 옆마을 청령포의 관음송도 이 어린 임금이 걸터앉아 통곡했다는 나무다.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은 이성계 일파에게 쫓겨 삼척 궁촌리 귀신을 쫓는다는 음나무 집으로 흘러드는데, 바로 그 나무에서 교살됐다는 전설이 있다. '왕의 여자들'이 누에를 치던 창덕궁 뽕나무, 경남 함양 군수를 지낸 김종직이 다섯 살 아들 '목아(木兒)'를 홍역으로 잃고 심은 느티나무 등도 소개했다. 풍부한 사진 자료는 눈을 씻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