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일상이 지겨울 때 우리는 만사 접어두고 훌쩍 어딘가 떠나고 싶어 한다. ‘구름에 달 가듯 가는 나그네‘는 낭만시대의 여행길일 뿐이고 핸들잡고 싱싱 달리면서는 목적지가 없을 수 없다. 끝내 다다르는 곳은 유명한 사찰이 아니면 반질반질 닳은 관광지가 대부분이다. 피하고 싶어서 떠나온 도시의 인파에 또 다시 시달리고 꼭 같은 부처님만 여러 번 뵙고 나면 돌아가는 길은 언제나 허망하다.
어디를 찾아가 세상의 찌꺼기를 털어낼 것인가? 나는 ‘천연기념물 나무 찾아가기’를 권하고 싶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늙은 고목에는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수많은 사연이 서려 있다. 봄가을 딱 두 번 옷을 갈아입고 나면 언제나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키다 보니 원치 않아도 수많은 인생살이 사연을 듣게 된다. 그 앞에 서면 세월의 길이는 축지법으로 줄인 거리만큼이나 짧아진다. 수백 년 시공을 건너 띄어 넘어 나무와 사람과 얽힌 사연들을 하나씩 곱씹어 본다. 아들을 낳게 해달라는 소박한 염원이 있는가하면 나라의 권력이 통째로 뒤집어지는 엄청난 이야기가 서린 역사나무도 있다.
마음이 편편치 않을 때는 거대한 나무 앞에 앉으면 편안함을 느낄 수 있어서 좋고, 동반자와 함께라면 맺어준 인연의 세월을 나무의 나이테로 짚어나갈 수도 있다. 사랑스런 어린 새싹들과 손잡고 왔다면, 나무에 얽힌 역사를 이야기로 엮어 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무 천연기념물에 대한 일반들의 관심은 안타까울 정도로 낮다. 진돗개와 황새, 수달..., 그래도 움직이는 동물은 알고 있으나 나무는 매스컴 잘 타는 속리산 정2품송이나 용문사 은행나무 정도를 얼핏 머릿속에서 떠 올릴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직업으로서 나무와 함께 살아온 긴 세월을 바탕으로, 나무 천연기념물 알리기를 계획하였다. 거의 10여년 가까이 전국 2백여 곳이 넘는 천연기념물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나무와 만나고 얽힌 이야기들을 모았다. 나무학자의 눈으로 해설하고 정리한 내용은 개인 홈페이지(bh.kyungpook.ac.kr/~sjpark/)에 올려 왔으며 2003년에는 일부를 경향신문에 연재하기도 하였다.
여기 내가 만나온 2백여 곳의 천연기념물 중 역사와 문화가 서려있는 48곳을 골라내어 천연기념물 소개의 실마리를 열고자 했다. 나무와 함께할 길안내와 나의 감상이 들어있고 나무와 맺어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내고자 하였다. 이 자그마한 책자가 나무 천연기념물을 알아보는 길라잡이가 되어, 보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나무가 자리 잡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2004년 3월
박상진
차 례
임금님과의 인연으로 얻은 영광
모두가 열광하는 새콤달콤한 초록 과일 / 창덩궁 다래나무
설렁탕 한 그릇으로 허기와 슬픔을 달래다 / 용두동 선농당 향나무
"똘배"들의 부적절한 관계에서 태어난 맛 좋은 청실배 / 진안 은수사 청실배나무
자연이 준 선물 하나, 최고의 지붕 재료 / 울진 굴참나무
나무 나라 최고의 벼슬을 2세에게 물려주고파 / 속리산 정이품송
애틋한 사랑 나무
흔들리는 사랑 붙들어주는 '사랑의 묘약' / 오류리 등나무
남북분단은 은행나무 부부마저 갈라놓았다 / 강화 서도면 은행나무
못다 한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굳게 믿으며 / 영광 불갑면 참식나무 자생 북한지대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좋아 / 지리산 천년송
우리나라 최고의 나무
마의태자가 남긴 恨의 징표 / 용문사 은행나무
우리나라 최고령 나무, 그 비결은? / 정선 두위봉 주목
나무 나라 최고 미인답게 그 자태가 아름답구나 / 무주 설천면 반송
특별함으로 살아남은 사연
황금비 내리는 축복받은 땅 그곳으로 / 안면도 모감주나무군락
800년을 대이어 버텨온 묘지기 나무 / 부산진 배롱나무
세상의 썩은 정신들이여! 소태맛 좀 보련가 / 송사동 소태나무
뿌옇게 안개 낀 날에는 소나무와 데이트를 / 상주 화서면 반송
나라 지킴이 나무
이 추운 날 갑곶에는 왜 가십니까? / 강화 갑곶리 탱자나무
벚나무는 '꽃놀이'를 위한 나무가 아니었다 / 화엄사 올벚나무
남해안의 왜구를 눈속임하던 고마운 나무 / 광양 유당공원 이팝나무
치료약에서 바둑판까지, 팔방미인이라네 / 병영면 비자나무
이순신 장군과 함께 승리의 기쁨을 나누다 / 남해 창선면 왕후박나무
절집의 지킴이 나무
막걸리 먹고 사는 운문사의 애주가/ 운문사 처진소나무
800년간 긴긴 세월을 쌍지팡이에 묻어두다 / 송광사 곱향나무 쌍향수
선운사 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 / 고창 삼안리 동백나무 숲
당당하게 세금 내는 나무
자기 땅에서 떵떵거리며 사는 나무 / 예천 감천면 석송령
비극의 현장을 지켜본 나무
희고 고운 껍질로 좋은 일을 예감하다 / 서울 재동 백송
하늘이여! 억울하고 원통하다 / 영월 관음송
저승에서라도 이밥을 배불리 먹거라 / 진안 평지리 이팝나무
마지막 남은 희망을 이 나무에 걸었으나... / 삼척 근덕면 음나무
두 손 모아 자식의 합격을 기원하다 / 삼척 도계읍 긴잎느티나무
선비들이 나무를 심는 까닭은
물 설고 낯선 땅에서 고향 생각하며 / 예산 백송
내 사랑 뿌리치고 어찌 그리도 빨리 가느냐 / 함양 학사루 느티나무
세상에 널리 쓰이던 만병통치약 / 독락당 중국주엽나무
모든 근심 훌훌 털고 하늘을 날아오르다 / 백사 도립리 반룡송
낙도를 지켜온 섬 살이 나무
생사의 갈림길에서 다시 살아나 / 완도 예송리 감탕나무
내가 너를 그리워할 때, 너는 바다를 그리워하는구나 / 진도 관매리 후박나무
훼방꾼이 너무 많은 작은 섬마을에서 / 추도 후박나무
멋쟁이 선비를 닮은 나무의 숲
동백의 황홀함이 무아지경으로 이끈다 / 백련사 동백나무 숲
사시사철 바람결에 끊이지 않는 저 향기로움 / 달성 측백수림
서당 나무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 서울 문묘 은행나무
恨 많은 여인 인목대비의 혼이 깃들다 / 합천 묘산면 소나무
힘든 농사일의 쉼터가 된 나무
나체가 더 아름다운 겨울 멋쟁이 / 대구면 푸조나무
오늘은 날씨 맑음! 똑똑한 기상 캐스터 / 인천 신현동 회화나무
김제평야의 수호천사 왕버들과 만나다 / 김제 봉남면 왕버들
500년 세월을 무색케 하는 젊은 나무 / 부산 구포동 팽나무
목민관의 백성 사랑 나무
이곳에 뱀은 얼씬도 하지 마라 / 함양 상림
한라산 신령님을 불러 내리던 영험한 곳 / 제주시 곰솔
커다란 꽃 뭉치를 정성껏 심고 가꾸었더니 / 미량리 동백나무 숲
천연기념물에 대하여
천연기념물 리스트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함보현 기자 = 올해로 59회를 맞는 식목일을 앞두고 나무와 풀을 소재로 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박상진 경북대(임산공학과) 교수의 「나무 살아서 천년을 말하다」는 전국에 흩어져 있는 천연기념물 나무를 소개하고 그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 쓴 책이다.
세조와의 인연으로 '정이품(正二品)'의 벼슬을 얻은 속리산 법주사 정이품송은이후 각별한 보살핌을 받았다. 수령 약 640살의 정이품송은 그러나 지나친 관심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다. 1970년대 나무 주변을 정리하면서 뿌리목 부근에 흙을 두껍게 덮은 것이 화근. 노송의뿌리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더욱 허약해 졌고, 썩은 살을 도려내는 수술도 받았다. 사람들은 병충해와 천재지변으로 언제 이승을 '하직'할 지 모르는 정이품송의대를 잇기로 결정했다.
2001년 산림청장 주례 하에 삼척의 팔등신 미인송과 혼례를올려 태어난 것이 바로 정이품송의 '자식 나무'. 강원도 정선 두위봉에 있는 주목 세 그루는 수령이 1천400-1천100년으로 우리나라의 최고령 나무이다. 주목이 지구상에 나타난 것은 약 3억 만 년 전이며 한반도에뿌리를 내린 지는 200만 년이 넘는다. 붉은 속살과 잘 썩지 않는 몸체로 빙하기의 추위를 이겨낸 주목은 낙랑고분의목관부터 활의 재료, 임금을 알현할 때 손에 드는 홀(笏)까지 다양한 용도로 쓰였다. 책은 이어 마의태자의 한을 품은 용문사 은행나무, 자기 땅에서 당당히 세금 내며 사는 예천 석송령, 희고 고운 껍질로 좋은 일을 예견하는 서울 재동의 백송 등천연기념물 나무들의 희로애락을 담았다. 박 교수는 최근 나무와 관련된 역사를 정리한 책 「역사가 새겨진 나무이야기」(김영사 刊)를 펴내기도 했다. 랜덤하우스중앙 刊. 240쪽. 9천원.
세계일보
[책]나무와 풀의 희·노·애·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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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살아서 천년을 말하다/박상진 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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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처럼 해마다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서둘러 자라지 않는 생명체도 많지 않다. 다른 나무의 그늘 밑에서 인고의 세월을 버틸 수 있는 지혜를 물려받은 나무는 결코 성장을 서두르지 않는다. 다른 나무들이 늙어서 힘을 쓰지 못하는 날, 인고의 세월을 견뎌낸 나무들은 사람들에게 회자된다.
전남 순천시의 천연기념물 88호 ‘쌍향수’는 수 백년 넘는 오랜 세월을 버텨온 나무들 중 하나다. 한국 3대 사찰인 송광사의 천자암 입구에 세워진 쌍향수는 고려 중기 보조국사 지눌이 사용하던 곱향나무 지팡이가 자란 것이다. 보조국사가 중국 금나라에 갔다가 왕비의 불치병을 고쳐준 인연으로 왕자 담당을 제자로 삼아 귀국하는 길에 천자암에 올랐다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나란히 꽂아놓은 것이다. 두 그루의 나무는 8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거의 붙어 자랐으며, 거대한 덩치로 지친 이들의 육신을 보듬어주고 있다.
박상진 경북대 임상공학과 교수의 ‘나무 살아서 천년을 말하다’는 나무에 얽힌 각종 이야기를 담았다. ‘천연기념물 나무와의 속 깊은 대화’라는 부제를 달고 역사와 문화가 서려 있는 48곳의 천연기념물을 골라내 이에 관한 세월의 깊이와 무게를 풀어냈다. 천연기념물을 독특한 시각을 바탕으로 희노애락의 4개 범주로 나눴다. ‘희’는 다시 임금님과의 인연으로 얻은 영광, 애틋한 사랑나무, 우리나라 최고의 나무, 특별함으로 살아남은 사연으로 ‘노’는 나라 지킴이 나무, 절집의 지킴이 나무, 당당하게 세금내는 나무로 애는 비극의 현장을 지켜본 나무, 선비들이 나무를 심은 까닭은, 낙도를 지켜온 섬 살이 나무로 ‘락’은 멋쟁이 선비를 닮은 나무와 숲, 힘든 농사일의 쉼터가 된 나무, 목민관의 백성사랑 나무로 나눠 설명했다.
‘희’를 상징하는 나무는 단연 충북 보은군 법주사의 ‘정이품송’이다. 조선 세조가 가마를 타고 지날 때 가지를 들어 그 통행을 도왔다는 정이품송은 높은 품계를 받아 기쁨을 누렸다. 이에 비하면 서울시 종로구 재동의 ‘백송’은 김종서의 살해 장면을 지켜보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소개된 나무들은 이처럼 역사의 현장을 지켜낸 진지함과 진득함을 간직해 독자의 관심을 사고 있다.
책 뒤편에 실은 천연기념물 목록은 나무에 대한 상식을 높여준다. 천연기념물 유래는 독일의 자연과학자인 알렉산더 폰 훔볼트의 발언에서 비롯됐다. 그가 1800년 베네수엘라의 한 나무를 보고 ‘기념비적인 자연물’이라고 칭한 것이 계기가 됐다. 때마침 산업혁명으로 자연파괴가 심해지는 상황이라 자연보호의 상징으로 천연기념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도 1962년부터 발효된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각종 식물과 동물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청명과 한식, 식목일이 끼어있는 4월이 되면 출판가와 서점가에서는 나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 국립수목원 연구관으로 재직 중인 이유미 박사는 ‘광릉 숲에서 보내는 편지’에서 주변에 있는 풀과 나무의 이야기를 풀어준다. 책은 식물세계에 존재하는 생존전략을 통해 그 속에 숨어 있는 과학과 삶의 의미를 탐미했다. 나무 살아서 천년을 말하다=랜덤하우스중앙 9000원, 광릉 숲에서 보내는 편지=지오북 1만4000원
박종현기자/bali@segye.com |
매일경제
老木은 모든 것을 알고있다 2004년04월02일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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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기껏해야 `백년대계(百年大計)`를 논할 때 나무는 `천년대계(千年大 計)`를 꿈꾼다. 사람은 기껏해야 100년을 살지만 나무는 수백 년을 넘게 산다. 나무는 말 없이 산다. 100년도 못 사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베어내지만 않으면 말이다.
식목일을 맞아 출간된 경북대 임산공학과 박상진 교수의 책 `나무, 살아서 천 년을 말하다`는 흔히 노거수(老巨樹)라고 불리는 나무에 얽힌 사연과 생태를 담은 책이다.
책의 주인공은 노거수 중 특히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연산군은 유난히 다래 열매를 좋아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람들은 작은 다래나무가 살아봐야 얼마나 살겠느냐 하겠지만 연산군에게 열 매를 바치던 다래나무가 지금도 창덕궁에 남아 있다. 이 다래나무의 나이는 대 략 600년, 궁궐 후원에서 조선왕조의 모든 명암을 지켜본 나무다. 얼마나 많은 사건이 이 다래나무 앞에서 벌어졌을까. 그래도 다래나무는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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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매년 때가 되면 지금도 열매를 맺을 뿐….
나무에도 분단의 아픔은 남았다. 강화 서도면의 외딴섬 볼음도에 가면 천연기 념물 304호로 지정된 800년 된 은행나무가 있다. 원래 은행나무는 암나무와 수 나무가 가까운 곳에서 자란다. 강화 은행나무는 수나무다. 암나무는 볼음도에 서 8㎞쯤 떨어진 휴전선 너머 황해도 연안에 있다.고려 중엽 두 나무는 황해 도에 함께 서 있었다. 그러나 엄청난 홍수가 났고 수나무는 빗물에 쓸려 볼음 도까지 떠내려 왔고 그곳에 정착하게 된다. 결국 휴전선까지 그어지면서 부부 의 가슴 아픈 이별은 지속되고 있다.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는 1100살이 된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다. 신라의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가 세상을 등지고 금강산으로 가던 중 지팡이를 꽂아 놓고 간 것이 큰 나무로 자랐다는 전설을 간직한 이 나무는 일본이 용문사에 불을 질렀 을 때도 불이 붙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향나무는 전남 순천 송광사에 있다. 800년 된 이 나무 는 한 그루가 아니라 두 그루가 서로 포옹하듯 자란다. 누가 비튼 것처럼 나선 형의 골이 지면서 자라는 모습이 흡사 용이 승천하는 것 같다. 재미있는 건 이 나무가 천연기념물 88호라는 사실이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동글동글 꽈배기처 럼 구부러진 쌍동이 나무에 딱 맞는 숫자가 `88` 아닌가 싶다.
나무는 언제나 자기가 사는 곳을 닮는다. 천연기념물 160호인 제주시 아라동의 곰솔군락을 보면 알 수 있다. 바닷가에서 살기 때문에 해송(海松)이라고도 불 리는 이 곰솔나무는 500년 동안이나 소금기 섞인 짠바람을 이겨내며 제주를 지 켜왔다. 그래서인지 나무껍질은 자외선에 타버린 듯 새까맣고 잎은 억세고 뻣 뻣하다. 자연과 싸우며 삶을 이어온 제주 사람들의 근면함을 닮은 나무다.
수백 년이라는 시공간을 뛰어넘어 나무와 나누는 대화는 재미있다. 이 책의 매 력이다. 우리가 식목일에 심은 나무가 수백 년 후 이 땅에서 우리를 증거할지 누가 알겠는가.
랜덤하우스중앙 펴냄. <허연 기자>
경향신문
[글밭&책밭]작은 꽃송이·울창한 숲… 그 세월이 귀하다.
◇나무, 살아서 천년을 말하다
박상진/랜덤하우스중앙
◇광릉 숲에서 보내는 편지
이유미/지오북
두 권의 책은 숲이라는 큰 담론이 아니라 그 안에 부분으로 살고 있는 작은 개체들의 얘기를 담고 있다. ‘나무…’는 백년, 천년의 세월을 버텨온 천연기념물 나무를, ‘광릉…’은 국내에 자생하는 일반 식물을 다뤘다. 식물이 항상 사람의 주변부라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저들 세계를 들여다보면 그곳 또한 중심이고 광활한 우주다. 인간과 맺은 무언의 역사가 존재하고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다.
#시간=천연기념물 나무가 ‘노약자’라서 대접받는 건 아니다. 나이테에 켜켜이 쌓인 세월의 무게 때문만도 아니다. 그가 귀한 것은 소멸하지 않고 살아 수백년전 이 땅에 일어난 사건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신라 마의태자가 남긴 한(恨)의 징표로 남아 있는 용문사의 은행나무, 남해안에 들끓던 왜구를 눈속임하던 전남 광양의 이팝나무, 통일신라시대 한 스님과 인도 공주의 사랑 이야기가 얽힌 전남 영광의 참식나무. 이들은 인간과 자연이 역사라는 수레에 함께 올라탄 운명공동체임을 확인해 준다.
식물도 인간처럼 생로병사의 순환을 거친다. 그러나 시간과 계절 앞에 정직할 뿐 ‘속도’에 굴복하지는 않는다. 복수초, 깽깽이풀, 노루귀 같은 봄꽃들은 서로 다투어 자라지 않는다. 경쟁이 덜한 것은 높이 자란 나무들이 아직 잎을 내지 않은 덕이다. 서로 키를 올려가며 볕을 나눌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인간사가 그러하듯 식물 세계에도 예외는 있다. 나무 줄기에 기생해 사는 겨우살이는 나무의 생장속도를 늦추고 수명도 갉아먹는다.
그러고보면 나무 나라에도 폭군은 있다. 가령 층층나무는 혼자 재빨리 키를 키워 가지를 잔뜩 펼친다. 이웃 나무들은 ‘햇볕이 고파’ 스러진다. 이런 나무는 사람의 톱날에 잘려나갈 위험이 높으니 인과응보인 셈이다.
#사랑=강화군 서도면에 있는 은행나무는 ‘망부목(忘婦木)’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이 수나무는 원래 북한 천연기념물 164호인 암 은행나무와 부부 사이였다. 수컷은 고려 중엽때 홍수로 인해 현재 자리까지 밀려왔다. 요즘 이 나무는 시름 시름 앓고 있다. 바닷물이 바로 옆까지 올라와서인데 마을 사람들은 북한의 암나무를 그리워해서라고 믿고 있다.
대부분의 꽃은 꽃잎이 한장씩 허물어지지만 동백은 꽃 전체가 한꺼번에 떨어져 나간다. 그래서 짓밟힌 여인의 순결을 상징한다지만 애절함과 간곡함이 절멸로 이끈 건 아닐는지. 스스로 사랑을 나누지 못하는 꽃과 나무들에게 동박새는 듬직한 중매쟁이다. 이 새는 꽃가루를 이리저리 옮겨 신방을 차려준다. 근친결혼을 막기 위해 암꽃은 위에, 수꽃은 아래에 달려 있는 소나무꽃의 사랑 방식도 경이롭다. 각각 9,000원. 1만3천원.
〈조장래기자 joy@kyunghyang.com〉 최종 편집: 2004년 04월 02일 17: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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