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에 새겨진 팔만대장경의 비밀》
지은이 : 박상진
발행일 : 2007년 5월 21일
256쪽 / 값 14,000원 / 김영사
차 례
머리말 |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팔만대장경판의 숨겨진 이야기들
목판 인쇄의 새벽이 열리다
목판 인쇄, 해인사에서 시작되다|팔만대장경으로 승화시키다|일본이 달라고 조른 팔만대장경 인쇄본
나무, 석가모니와 만나다
석가모니의 탄생과 죽음을 지켜본 나무들|경판으로 나무와 다시 만나다|목판 대장경 새기기
자작나무 제작설의 진실 혹은 거짓
경판, 마법의 시작|경판 새김 나무의 조건|경판 나무 세포의 비밀을 찾아서|죽어서 경판으로 남은 나무들|팔만대장경판과 자작나무
다시 새기는 팔만대장경
경판 새김의 전말|팔만대장경의 이름과 내용|사용된 나무 양과 참가 인원|베어낸 나무 가져오기와 경판 만들기|대장경판 인쇄의 역사와 그 과정
경판의 탄생지를 둘러싼 미스터리
강화도 새김의 근거|강화도 새김의 의문|해인사로 언제, 어떻게 옮겼을까?|옮기는 과정의 미스터리|경판 자체에서 옮김의 흔적 찾기|강화도 이외의 새김 가능성|경판 새김 장소의 진실
처음 모습 그대로, 750년 경판 보존의 비밀
나무란 재료는 원래 잘 버틴다|판전을 지은 장인의 뛰어난 건축기술
옛 사람들의 완벽한 경판 관리 노하우?
경판꽂이|경판의 함수율|먼지|먹딱지|경판 보관 과정에서 생기는 문제|경판의 썩음|경판의 벌레 먹음|옛 사람들의 경판 보존|경판 보존의 취약점
8만 1,258장의 생존 기록
아예 일본에 주어버릴 생각도 했다|일본의 대장경판 약탈 모의|임진왜란과 대장경|일제 강점기의 반출 모의|한국전쟁 속의 팔만대장경|퇴암 스님의 실화 기록
연합뉴스 2007-05-28
<목재조직학으로 본 팔만대장경판>
해인사 경내 팔만대장경
박상진 교수 "산벚나무가 주류"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팔만대장경은 고려왕조에서 두 번째로 찍어낸 불교 일체경(一體經)이라는 의미에서 고려 당시에 이미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이라 불렀다. 그럼에도 속칭인 팔만대장경이 더욱 익숙하게 된 까닭은 이렇게 찍은 경판이 8만장이라는 데서 비롯된다.
정확한 수량은 8만1천258장. 총무게는 280t으로, 4t 트럭 70대분에 육박한다. 글자 총수를 합치면 조선왕조실록 분량 전체를 모은 5천200여만 자에 이른다.
이 경판을 어디에서 제작했는지를 두고 지금까지 학계에서 논란을 벌어진다. 고려가 대몽항쟁을 벌이던 시기 임시수도인 강화도에서 만들었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남해안에서 제작했다는 반론 또한 만만치 않다.
그건 그렇고, 경판은 도대체 어떤 나무를 이용했을까?
목재조직학자 박상진(朴相珍. 67) 경북대 명예교수를 실상 본업보다는 역사와 문화재 분야로 이끈 주인공이 바로 팔만대경 경판이었다. 2년 전 경북대 교수직을 정년퇴임한 그는 90년대 초반에는 공주 무령왕릉 출토 관재(棺材)가 이 지구상에서는 오직 일본열도에서만 자생하는 금송(金松)임을 밝혀냄으로써 역사학계에 일대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박 교수에게 무령왕릉 관재 분석은 부업이었고, 정작 그가 필생의 역작으로 매달린 것이 팔만대장경판을 목재조직학적인 측면에서 구명하는 일이었다. 그런 성과물을 박 교수는 이미 1999년 운송출판사라는 곳에서 '다시보는 팔만대장경판 이야기'라는 소책자로 정리해 낸 적이 있다.
도서출판 김영사에서 최근 펴낸 그의 연속작 '나무에 새겨진 팔만대장경의 비밀'은 언뜻 보아 1999년작의 복간인 듯하지만, 그동안 새롭게 축적된 연구성과를 대폭 보충한 확대 개정판이다. 박 교수가 주력한 대목은 크게 두 가지. 첫째, 경판은 어떤 나무를 썼는가? 둘째, 그렇다면 경판은 어디에서 제작되었을까? 둘은 밀접한 상관관계를 지닌다.
이를 위해 전자현미경 조사를 벌였다. 조사표본은 경판 209장과 마구리 27개, 나무못과 부위 불명 표본 8점을 포함하여 244점이었다.
팔만대장경
그 결과 경판은 산벚나무가 압도적으로 많이 나타나 전체 64%인 135장에 달했다. 돌배나무 32장(15%), 거제수나무 18장(9%), 층층나무 12장(6%), 고로쇠나무 6장(3%), 후박나무 5장(2%), 사시나무 1장(1%)이 뒤를 이었다.
이를 통해 팔만대장경판은 자작나무를 이용했다는 종래의 신념이 여지없이 무너졌다. 박 교수는 나아가 팔만대장경 당시에는 한반도의 북부 산악지대에서 자라는 자작나무를 이용할 환경이 될 수 없었다는 역사적 상황에도 주목했다. 당시 이들 지역은 몽고 치하에 있었다.
그럼에도 '팔만대장경판=자작나무'라는 신화가 구축된 것은 이에 대한 각종 기록에 등장하는 '화(樺)'라는 글자를 자작나무로 판독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樺'는 껍질이 하얀 나무는 어느 것이건 표현하는 말임에도, 그것을 쉽사리 자작나무로 이해한 데서 잘못된 상식이 자리잡게 되었다고 박 교수는 지적한다.
나아가 박 교수는 이런 분석결과와 당시 역사적 정황을 근거로 팔만대장경판은 해안사 일대에서 제작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강화도에서 만들어 해인사로 옮겼다는 통설 또한 거부한 것이다. 그에 의하면 강화도에서는 경판 제작을 위한 나무를 조달해오는 것은 물론 그렇게 제작한 경판을 해인사로 옮기기가 매우 곤란했다는 것이다.
문화유산을 보는 방법도 여러 가지다. 그 여러가지 중에 목재조직학이 있다는 사실을 박 교수의 이번 책은 새삼 일깨워준다. 256쪽. 1만4천원. taeshik@yna.co.kr
오마이뉴스 2008.04.05
우리가 팔만대장경에 대하여 알고 싶은 모든 것
<서평> 박상진 교수가 쓴 ‘나무에 새겨진 팔만대장경의 비밀’
법보 사찰 해인사를 늦게야 찾아간 이유
지난 3월 초, 해인사에 다녀온 적이 있다. 틈틈이 문화유적을 둘러보기 좋아하는 나로선 매우 뒤늦은 행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것은 어쩌면 내가 오래전부터 팔만대장경이라는 말에 압도당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대장경이란 무엇인가. 불교 교리를 경장, 율장, 논장의 삼장으로 나누어 종합 편찬한 경전이 바로 대장경이다. 그러니 얼마나 어마어마한 내용을 가진 책인가. 대장경이라는 말에 압도 당한 내게 결정타를 먹인 건 '해인'이라는 절 이름이다. 바다가 삼라만상을 비추듯 불법을 관조하는 상태인 해인이란 나 같은 초로인생이 감히 넘볼 경지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내게 해인사 행을 부추긴 것은 작년 가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씽동이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전각인 대비로전 낙성식이었다. 나의 해인사 행에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은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가 쓴 <나무에 새겨진 팔만대장경의 비밀>라는 책이었다. 그 책은 내가 팔만대장경에 대해 품고 있는 궁금증을 낱낱이 파헤쳐주었다.
나무를 통해 역사를 읽는 흥미로운 방법을 알져주다
박상진 교수는 목재조직학을 다루는 학자이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그냥 나무의 조직이나 세포 형태를 연구하는 데서 머물지 않는다. 그는 나무 속에서 역사를 읽기도 하는 특이한 존재다.
그는 이 책 이전에 펴낸 <궁궐의 우리나무>, <역사가 새겨진 나무이야기>, <나무, 살아서 천 년을 말하다> 등을 통해 우리에게 나무를 통해 역사를 읽는 흥미로운 방법을 알려 주었던 것이다.
책 <나무에 새겨진 팔만대장경의 비밀>은 '나무, 석가모니와 만나다', '자작나무 제작설의 진실 혹은 거짓', '다시 새기는 팔만대장경', '경판의 탄생지를 둘러싼 미스터리', '처음 모습 그대로, 750년 경판 보존의 비밀', '옛 사람들의 완벽한 경판 관리 노하우?', '8만 1,258장의 생존 기록' 등 모두 8장으로 이뤄져 있다.
저자는 매우 친절하게도 대장경판의 탄생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리하여 우리가 가진 궁금증을 하나하나 해결해 나간다. 책에 실린 중요한 내용을 몇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팔만대장경에 대한 궁금증 몇 가지
①팔만대장경판은 이름 그대로 팔만 개일까?
팔만대장경이라는 이름 속엔 이미 양적인 의미가 암시되어 있다. 그러나 팔만대장경은 정확히 팔만 개가 아니라 8만1258개이다.
②옛 문헌에 나오는 기록대로 팔만대장경판은 정말 자작나무로 만들어졌을까?
'자작나무는 백두산 원시림을 비롯한 북한 내륙의 고산 지방, 중국의 북동부, 사할린에서 시베리아에 걸쳐 자란다. 추운 곳을 좋아하는 한대 수종이기 때문이다. 만약 자작나무를 베어다 경판을 만들었다고 가정한다면, 생각해볼 수 있는 지역은 북한 내륙의 고산 지방이다. 나무를 벌채하여 압록강이나 대동강에 뗏목을 띄워 황해로 내려와 강화도로 가져와야 한다. 대장경판을 새길 당시 수도 개성을 비롯한 육지는 몽고군에게 점령당한 상태였다. 따라서 이런 가정은 성립되지 않는다.'(79 쪽)
저자가 목재조직학 연구 방법에 따라 팔만대장경 약 250여 점을 표본으로 삼아 현미경으로 나무의 세포 모양과 배역을 살펴본 결과 경판의 재질이 산벚나무, 돌배나무, 자작나무와 비슷하게 생긴 거제수나무가 88퍼센트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통설에서 말하는 자작나무는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③760년 전에 만들어진 팔만대장경이 어떻게 아직까지 아무런 손상을 입지 않은 채 남아 있을까?
지금으로부터 760년 전에 만들어진 팔만대장경이 지금껏 남아있다는 것이 경이로울 정도로 한반도는 지속적으로 전쟁에 시달려 왔었고, 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도 수많은 화재에 시달려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손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있는 데는 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당시 해인사에 있던 빨치산을 공격하는데 폭탄을 쓰지 않고 기관총으로만 공격함으로써 대장경의 파괴를 막은 폭격기 편대장 김영환 대령이 대표적인 사람이다.
④대장경판 글자 수가 전부 5천2백여 만 자라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거기에 달라붙어서 수고해야 했을까?
요즈음 서각(書刻) 장인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한 사람이 하루에 새길 수 있는 글자 수는 적게는 30자 많게는 50자 정도라고 한다. 경판 당 글자 수는 644자다. 경판 한 장을 새기는 데 13일에서 21일이 필요한 셈이다.
또 전체 대장경판 글자 수 5천2백여 만 자를 하루에 새길 수 있는 글자 수를 평균 40자로 나누면 판각에 동원된 장인의 연인원이 나온다. 약 131만여 명이라는 계산이다.
⑤경판은 과연 강화도에서 만들어져 해인사로 옮겨졌을까?
통설에 따르면 경판은 강화도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태조실록과 정조실록의 기록대로 태조 7년 5월12일에서 정조원년 정월 11일까지 9개월에 걸쳐 대장경판이 강화도 선원사에서 합천 해인사로 옮겨왔다는 건 사실일까? 현실적 여건을 감안하면 그 많은 양의 경판을 옮긴다는 게 과연 가능했을까? 저자는 여기서 상상의 힘을 발휘한다.
'지금까지 팔만대장경판은 강화도에서 만들어져 해인사로 옮겨온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말은 사실일까? 먼저 경판을 새길 나무를 어떻게 조달하느냐가 문제로 떠오른다. 좁디좁은 강화도로 고려의 수도가 옮겨갔으니 수많은 사람들이 밥 해먹고 불 지펴서 추위를 피할 에너지가 필요하다. 산의 나무는 대부분 잘려 나갔을 것이다. 재질이 좋아 새김에 쓸 나무가 모두 없어져버렸을 테니 강화도 자체 조달은 불가능하다. 강화도에서 경판을 새겼다면 그 엄청난 양의 나무를 배에 실어 가져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강화해협을 사이에 두고 고려군과 몽고군이 대치하는 전쟁 상태에서, 더욱이 간만의 차가 커서 썰물 때면 십 리도 넘게 갯벌이 노출되는 강화도의 해변에 배를 대고 무거운 통나무를 운반했을까?'(153쪽)
거기에 저자는 경판의 재료인 나무들이 자라는 장소와 함께 그 많은 양의 경판을 옮기는 일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덧붙인다. 결국 경판의 제작지는 고려 무인정권의 실력자 최우의 식읍지였던 진주를 비롯하여, 해인사와 가까이에 있는 지역이 아닐까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와 관련지어 몇 년 전, 경남 남해에 놀러 갔을 때의 일화 한 가지가 있다. 남해 역사박물관장 등과 함께 팔만대장경 제작지일 가능성이 있는 고현면 발굴 현장에 동행한 적이 있다. 결국 그 발굴은 안타깝게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박상진 교수의 견해가 아주 개연성이 높다는 반증일 것이다.
팔만대장경의 위대성을 기억하기 위하여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인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위원회는 해인사 장경판고를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올렸다. 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건물이 세계문화유산이 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대장경판일진대, 건물만 등재하다니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그러나 다행히 원문에는 '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판고'라고 돼 있다니 경판도 거기 포함돼 있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팔만대장경이 위대한 것은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장경 인쇄본을 달라고 끊임없이 요구했다는 사실로도 증명된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는 것만 효종 때까지 80여 회라고 한다.
'대장경 인쇄본을 달라는 방법도 갖가지였다. 사신을 통해 일본 국왕 이름으로, 때로는 지방 호족들까지 대장경 인쇄본을 요구하여 조선은 항상 그 처리에 고심했다. 더 이상 불교를 숭상하지 않으므로 대장경을 인쇄하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일본의 요구를 거절하기도 했지만, 혹시라도 행패를 부릴까 두려워 때에 따라 대장경 인쇄본을 주기도 하면서 그들을 달랬다. 시달림의 정도가 얼마나 심했던지 태종·세종 때는 인쇄본이 아니라 아예 대장경판을 주자는 논의까지 있었다. 또한 대장경 인쇄본을 얻으려는 수차례의 요구가 좌절되자, 일본은 사신이 단식투쟁을 하거나 군사를 동원하여 대장경을 탈취할 계획까지 세우기도 했다.'(20쪽)
이렇게 온 세계가 인정해 주는 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의 위대성을 정작 그 주인인 우리만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 책을 읽고 나서 해인사에 찾아간다면 팔만대장경의 비밀이 그대로 환히 눈에 들어올 것이다. 마침 오늘은 식목일이다. 나무로 만들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을 가슴에 심는 일도 나무 심기에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 아닐까.
겨우 살창 틈으로나 장경각을 들여다볼 수 있을 뿐인데 가면 뭐하냐고요? 그런 분은 해인사 입구 성보박물관에 들리시면 된다. 아주 가까이에서 대장경 경판을 볼 수 있다. 물론 노터치다. 만진다고 해서 경판이 성희롱이라고 고발하지야 않겠지만, 그게 문화재를 대하는 예의니까.
덧붙이는 글 | 나무에 새겨진 팔만대장경의 비밀/ 박상진/ 김영사/ 14,000원/ 2007.5
세계일보 2007.06.01
[책]팔만대장경…?
박상진교수, 대장경 경판 나뭇조각 분석해 비밀 풀어내
유네스코가 인정한 인류 문화유산 ‘팔만대장경’. 고려 고종 때 국난 극복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사실 외에는 어떤 사료도 남아 있지 않다.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새겼으며 해인사에 있게 된 사연 등 궁금한 점은 많으나 그동안 어느 누구도 속 시원히 대답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박상진 지음/김영사/1만4000원
그런데 ‘궁궐의 우리 나무’ ‘역사가 새겨진 나무이야기‘ ‘나무, 살아서 천년을 말하다’를 집필하는 등 과학으로 역사를 읽는 나무 전문가이자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인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가 750년간 잠들어 있는 팔만대장경을 흔들어 깨우고 나섰다.
나무의 세포 형태를 연구하는 목재조직학 전문가인 박 교수는 ‘750년 된 경판이 썩지 않은 비결은? 경판 제작에 쓰인 실제 나무는? 경판은 해인사에서 만들어졌다?’ 등 팔만대장경을 둘러싼 궁금점을 풀기 위해 섬세한 현미경의 눈으로 대장경 경판에서 떨어져 나온 나뭇조각을 분석, 베일에 가려진 비밀을 풀어냈다. 경판에 쓰일 나무의 선별부터 새김과 보존까지, 나아가 목공의 한 줄 땀방울에서 고려인들의 원대한 희망까지….
박 교수는 ‘팔만대장경판은 팔만 개가 아니다? 한 장의 경판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동원되었을까? 팔만대장경판을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은 누구일까’는 등 기록이 알려주지 못했던 숨겨진 이야기를 설득력 있으면서도 흥미롭게 들려준다. 또한 ‘팔만대장경판은 자작나무로 만들어졌다, 팔만대장경판은 강화도에서 만들어져 해인사로 옮겨왔다’는 등 확인되지 않은 속설도 통쾌하게 뒤집어 독자들을 지적 즐거움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장경 인쇄본을 달라고 처음 요구한 것은 고려 말인 1388년 포로 250명을 돌려보내면서였다. 이후 조선 효종 때까지 80여 회에 걸쳐 끊임없이 요구했다. 대장경 인쇄본을 얻으려는 수차례 요구가 좌절되자, 일본은 사신이 단식투쟁을 하거나 군사를 동원하여 대장경을 탈취할 계획까지 세우기도 했다.”(20쪽)
“‘팔만대장경판은 자작나무로 만들었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심지어 해인사 수다라장의 관람 통로 안에 있는 경판 제작 표본 나무도 자작나무라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팔만대장경판은 정말 자작나무로 만들어졌을까? 자작나무는 백두산 원시림을 비롯한 북한 내륙의 고산 지방, 중국의 동북부, 사할린에서 시베리아에 걸쳐 자란다. 자작나무를 베어다 경판을 만들었다고 가정한다면, 생각해볼 수 있는 지역은 북한 내륙의 고산 지방이다. 나무를 벌채하여 압록강이나 대동강에 뗏목을 띄워 황해로 내려와 강화도로 가져와야 한다. 대장경판을 새길 당시 수도 개성을 비롯한 육지는 몽고군에게 점령당한 상태였다. 따라서 이런 가정은 성립되지 않는다.”(79쪽)
팔만대장경을 보존하는 기술은 또 어떤가. 목판 보관에는 통풍이 가장 중요하다. 너무 건조하면 나무가 뒤틀리거나 갈라지기 쉽고, 너무 습하면 곰팡이가 핀다. 이런 점에서 박 교수는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는 수다라장 판전은 최고의 기술을 자랑하는 목판 보관 건물이라고 단정한다.
나무에 새겨진 팔만대장경의 비밀 / 박상진 지음/ 김영사 / 1만 4000원
조정진 기자 jjj@segye.com
문화일보 2007-05-29
나무의 과학으로 본 팔만대장경
목재조직학 박상진 교수 ‘팔만대장경의 비밀’출간
김영번기자 zerokim@munhwa.com
파란만장한 우리 역사 속에서 꿋꿋이 살아남은 팔만대장경(국보 32호). 유네스코에 의해 인류 문화유산의 금자탑으로 자리매김한 팔만대장경은 그 중요성에 비해 제작 경위나 보존에 얽힌 역사가 세세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어떤 목재로 어떻게 만들었으며, 당초 제작된 장소는 어디인지 등이 명확하지 않은 것이다. 이에 대해 ‘나무 학자’로 유명한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가 목재조직학이라는 다소 생소한 학문분야를 통해 팔만대장경의 진실을 밝혀 눈길을 끌고 있다. 최근 출간된 ‘나무에 새겨진 팔만대장경의 비밀’(김영사)에서 ‘나무의 과학’으로 역사의 진실을 파헤친 것.
◆팔만대장경은 어떤 경판 = 1236년(고려 고종23) 몽골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시작된 팔만대장경 제작은 16년의 세월이 걸려 1251년(고종38) 완성됐다. 경판의 수가 무려 8만1258장, 무게가 280t, 글자 수가 5200여만자로 470여년 간 기록된 ‘조선왕조실록’의 글자 수와 맞먹는다. 팔만대장경은 13세기에 만들어진 세계 최대 규모의 인쇄용 원판이면서 빠진 부분이 없는 완벽한 전질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자작나무로 만들었나 = 팔만대장경은 자작나무로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인사 관람통로 안에 있는 경판 제작 표본나무도 자작나무라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자작나무는 백두산 원시림을 비롯한 북한 내륙의 고산 지방, 중국의 북동부, 사할린에서 시베리아에 걸쳐 자란다. 만약 자작나무를 베어다 경판을 만들었다면 북한 내륙의 고산 지방에서 나무를 벌채, 압록강이나 대동강에 뗏목을 띄워 황해로 내려와 강화도로 가져와야 한다. 대장경판을 새길 당시 개성을 비롯한 육지는 몽골군에게 점령 당한 상태였다. 따라서 이런 가정은 성립하지 않는다.
박 교수는 1993∼1994년 팔만대장경판에서 표본을 수집, 경판을 만든 나무의 종류를 분석했다. 표본 수집에 제약이 따랐지만 경판 209장, 마구리 27개, 나무못과 부위 불명 표본 8개 등 모두 244장을 대상으로 조사했다. 이 결과, 경판은 산벚나무 135장(64%), 돌배나무 32장(15%), 거제수나무 18장(9%), 층층나무 12장(6%), 고로쇠나무 6장(3%), 후박나무 5장(2%), 사시나무 1장(1%) 등의 비율을 보였다. 경판을 만든 나무는 대부분 산벚나무와 돌배나무로, 표본조사한 전체 나무의 79%를 차지한 것. 한마디로, ‘팔만대장경판 자작나무 제작설’을 뒤엎은 결과였다.
그렇다면 왜 자작나무 제작설이 나왔을까. 박 교수는 한자 표기에서 혼란이 발생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자작나무를 뜻하는 ‘樺(화)’를 옛 사람들은 자작나무와 벗나무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고 사용했다. 근세에 들어 대장경판 연구자들이 ‘자작나무 화’로 의심없이 번역함으로써 이같은 오류가 발생했을 것이라고 박 교수는 추정했다.
◆어디에서 만들어졌나 = 지금까지 팔만대장경은 강화도에서 만들어져 경남 합천 해인사로 옮겨진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박 교수는 몽골의 침략을 피해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고려의 수많은 사람들이 밥 해먹고 불 지피는 데만도 강화도의 나무 대부분이 잘려나갔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엄청난 나무를 다른 지역에서 옮겨 왔다면 배에 실어 가져왔다는 것인데, 이 역시 논리적으로 성립하기 어렵다. 강화해협을 사이에 두고 고려군과 몽골군이 대치하는 전쟁 상태에서, 더욱이 간만의 차가 커서 썰물 때면 십리도 넘게 갯벌이 노출되는 강화도의 해변에 배를 대고 통나무를 운반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특히 8만장이 넘는 경판을 강화에서 해인사로 옮겼다면 아무리 포장을 철저히 했다고 하더라도 경판이 서로 부닥쳐 마모된 흔적이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경판은 단 한 곳에서도 이런 흔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깨끗하다. 따라서 경판을 새긴 장소는 해인사 인근이라고 봐야 한다. 이는 경판을 만든 나무의 대부분이 산벚나무와 돌배나무라는 사실로도 뒷받침된다.
또한 경판 나무에 거제수나무가 들어 있는 점도 이를 증명한다. 해발 600~1000m 사이의 고산 지대에서 자라는 거제수나무를 먼 곳에서 일부러 가져다 경판 나무로 이용했다고 보기 어렵다. 해인사 부근에 흔히 자라는 거제수나무가 일부 사용됐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김영번기자 zerokim@munhwa.com
서울신문
나무에 새겨진 팔만대장경의 비밀/박상진 지음
팔만대장경은 초조대장경과 속장경이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버린 뒤 고려 왕조가 백성들의 마음을 한데 모으고자 고종 23년(1236년)에 새기기 시작하여 16년만에 완성했다. 경판(經板)의 숫자는 8만1258장이고, 무게는 280t으로 4t 트럭 70대분에 육박한다.‘조선왕조실록’에 맞먹는 5200만자로, 한문에 통달한 사람이라도 하루 8시간씩 꼬박 30년을 읽어야 하는 분량이다. 팔만대장경은 지금까지 강화도성 서문 밖의 판당(板堂)에서 만들어진 뒤 강화 선원사에서 보관됐고, 조선 초기에 한양의 지천사를 거쳐 해인사로 옮겨진 것으로 알려졌다. 강화도가 아닌 남해안에서 만들어졌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았다. 사용된 목재 또한 자작나무라는 설이 정설처럼 되어 있었다. 박상진(朴相珍·67) 경북대 명예교수는 자신의 전공인 목재조직학으로 팔만대장경과 관련된 의문을 푸는 데 매달렸다. 그는 공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관이 일본열도에서만 자생하는 금송(金松)이라는 사실을 밝혀내 역사학계에 충격을 준 주인공이기도 하다.
경판에 대한 연구 결과는 ‘나무에 새겨진 팔만대장경의 비밀’(김영사 펴냄)에 담겼다. 목재조직학도 문화유산을 해석하는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에 충분하다.
박 교수는 전자현미경으로 209장의 경판과 손잡이에 해당하는 마구리 27개, 나무못과 부위가 불명확한 표본 8점 등 244개를 시료로 하여 조사했다. 그 결과 경판에 사용된 목재는 산벚나무가 압도적으로 많아 전체의 64%인 135장에 이르렀다. 돌배나무가 15%인 32장, 거제수나무가 9%인 18장 등으로 뒤를 이었다.
옛 사람들은 자작나무와 벚나무를 같은 화(樺)자로 표기했는데, 근래에 연구자들이 벚나무가 될 수도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자작나무로 의심 없이 번역한 결과가 아니겠느냐고 해석한다.
나아가 박 교수는 분석 결과와 역사적 정황을 근거로 팔만대장경판은 강화도나 남해안이 아닌 해인사 일대에서 제작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당시 몽고군에 포위되어 있는 강화도에서는 경판 제작을 위한 나무를 조달하는 것은 물론 제작한 경판을 밖으로 옮기기도 매우 곤란했다는 것이다.1만 4000원.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뉴시스 2007-05-31
‘나무에 새겨진 팔만대장경의 비밀’
섬세한 현미경의 눈으로 팔만대장경판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나뭇조각을 분석, 베일에 가려져 있던 팔만대장경판의 거대한 실체를 파헤친 책이다.
팔만대장경은 13세기에 만들어진 세계 최대 규모의 인쇄용 원판이다. 빠진 부분이 없는 완벽한 전질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몽골의 침입, 임진왜란, 일제강점기, 6·25 등 숱한 외침으로 전쟁의 소용돌이에 여러 번 휩싸였던 역사를 감안하면 불타지 않고 온전히 보존됐다는 것이 기적에 가깝다.
내용도 완벽하다. 초조대장경을 바탕으로 송·거란의 대장경과 비교, 잘못된 데를 바로잡고 누락된 곳을 찾아 넣는 등 어느 대장경보다 자료수집이 광범위하고 교정에 충실했다.
규모면에서도 비교할 대장경이 없다. 경판을 가로로 눕혀 쌓으면 거의 백두산 높이가 된다. 이으면 길이가 150리, 무게로는 4t 트럭 70대 분에 이른다. 그 안에 5200만 글자를 담고 있다는 사실로도 여실히 증명되는 방대함이다. 한자에 능숙한 사람이 하루 8시간씩 30년을 읽어야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분량이다.
게다가 팔만대장경은 추사(秋史) 김정희가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 마치 신선이 내려와서 쓴 것 같다”고 극찬한 아름다운 서체로 이뤄져 있다.
‘나무에 새겨진 팔만대장경의 비밀’은 팔만대장경판을 만든 나무는 어떤 종류인가부터 시작해 나무를 베어 경판을 만들고, 옮겨진 경판에 새김 작업을 거치는 과정 등 팔만대장경판 자체의 역사에 중점을 두고 있다. 동시에 나무의 과학으로 역사 속설을 뒤집는다.
팔만대장경판은 강화도에서 만들어 해인사로 옮겨왔다고 알려져 있다. 좁은 강화도로 고려의 수도가 옮겨갔으니 숱한 이들이 밥을 해먹고 불을 지펴서 추위를 피할 에너지가 필요했다. 산의 나무는 대부분 잘려 나갔을 것이다. 재질이 좋아 새김에 쓸 나무가 모두 없어져버렸을 테니 강화도내 조달은 불가능하다. 강화해협을 사이에 두고 고려군과 몽골군이 대치하는 전쟁 상태에서, 더욱이 간만의 차가 커서 썰물 때면 10리도 넘게 갯벌이 노출되는 강화도의 해변에 배를 대고 무거운 통나무를 운반했을까.
당시에는 경판을 옮기는 별다른 수단이 없었다. 수레를 이용하거나 직접 등에 지고 머리에 인 채 8만장이 넘는 경판을 옮겨야 했다. 아무리 포장을 철저히 한다 해도 덜컹거리는 수레에서 흔들리고, 걸을 때마다 흔들려 경판끼리 맞닿은 부분이 생기게 된다. 경판에 그때의 마모 흔적이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러나 경판 단 한 군데서도 이런 자취를 찾을 수 없다. 너무 깨끗하다. 옮겼다는 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다.
‘팔만대장경판은 자작나무로 만들었다’고 돼있다. 해인사 수다라장의 관람통로 안에 있는 경판제작 표본 나무도 자작나무라고 소개하고 있다. 자작나무는 백두산 원시림을 비롯한 북한 내륙의 고산 지방, 중국의 북동부, 사할린에서 시베리아에 걸쳐 자란다. 자작나무를 베어다 경판을 만들었다고 가정한다면, 생각해볼 수 있는 지역은 북한 내륙의 고산 지방이다. 벌채해 압록강이나 대동강에 뗏목을 띄워 황해로 내려와 강화도로 가져와야 한다. 대장경판을 새길 당시 수도 개성을 포함한 육지는 몽골군에게 점령당한 상태였다. 따라서 성립할 수 없는 가정이다.
<사진>은 서울 인사동 문화의 거리 팔만대장경 행렬이다. 조선의 문무백관과 호위무사로 분장한 합천 군민과 승려 등 300여명이 모조품을 이거나 지고 행진했다.
박상진(경북대 명예교수) 지음, 256쪽, 1만4000원, 김영사
신동립기자 reap@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