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 판전의 비밀
고려의 장인들은 경판을 쌓아둘 창고, 즉 판전板殿을 어떻게 지을 것인지에 많이 고심한 것 같다.
우선 판전 구조를 살펴보자. 약간 서남향으로 나란히 一자로 지어진 수다라장과 법보전 사이의 동서 양쪽 끝에는 자그마한 건물이 각각 한 채씩 더 있다.
바람이 잘 통하는 위치를 잡았다.
경판을 오랫동안 흠 없이 잘 보존하기위한 첫 번째 조치는 통풍이 잘되게 해주는 것이다. 경판나무는 공기 중의 수분과 끊임없는 소통을 한다. 공기가 습하면 수분을 빨아드리고 반대로 건조하면 수분을 내놓는다. 이런 과정은 공기습도와 온도에 따라 달라지며, 매년 반복하다 보면 계절별로 경판이 갖은 함수율은 대체로 일정해 지며 우리는 이를 평형함수율이라 부른다. 해인사 일대의 연간 평형함수율은 15~16%이며 경판은 이 함수율에 거의 안정되어 있다.
이와 같은 함수율을 유지 할 수 있는 곳으로 해인사의 가장 위쪽, 서남향의 양지 바른 곳에 판전이 자리 잡도록 설계했다.
판전 건물의 특성
수다라장이나 법보전 둘 다 대장경판 보관을 목적으로 지었으므로 장식이 거의 없는 소박한 건물이다. 판전은 약 60cm 높이 정도의 기단基壇을 만들고 대체로 네모지거나 불규칙한 모양의 자연석 위에 기둥을 얹었다. 바깥 기둥은 둥글게 깎은 두리기둥으로 약간 배흘림이 되어 있고, 건물 안의 중앙 기둥은 네모기둥이다. 바깥 기둥의 위에는 단익공單翼工을 짜 넣어 대들보를 받치고 이 대들보는 높은 중앙 기둥의 옆구리에 고정시켰는데, 이는 반대쪽에도 동일하여 대칭을 이룬다. 높은 중앙 기둥의 위와 좌우로 걸쳐진 대들보의 가운데에는 다시 작은 기둥을 세워 대들보를 연결하고, 건물 안 중앙 기둥의 위에는 다시 기둥을 지붕머리와 연결하도록 하여 건물이 더욱 견고하게 보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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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라장 뒤쪽 살창 |
법보전 뒤쪽 살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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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라장 앞쪽 살창 |
법보전 앞쪽 살창 |
이렇게 구조는 단순할지라도 공기 흐름을 원활히 하는 데 가장 많은 신경을 쓴 것 같다. 내부 바닥은 흙바닥이며 경판꽂이를 판전의 길이 방향과 같이 설치하고 적당한 공간을 두어 상하좌우의 공기 흐름이 원활하도록 고안했다. 건물 바깥벽에 설치한 붙박이 살창 역시 판전 안의 공기 흐름을 배려한 설계이다. 벽면의 아래와 위 및 건물의 앞면과 뒷면의 살창 크기를 달리하여 대류 현상을 이용하는 절묘한 기술을 발휘했다. 건물의 앞면에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 중방中枋을 걸치고 붙박이 살창을 아래위로 설치했다. 수다라장과 법보전의 살창 모양은 비슷하나 크기가 약간씩 다르다. 수다라장의 경우 앞 벽면의 창 크기는 아래 창이 위 창보다 약 4배 정도, 뒤 벽면은 위 창이 아래 창보다 1.5배 정도 더 크다. 법보전은 앞 벽면은 아래 창이 위 창보다 약 4.6배 정도, 뒤 벽면은 위 창이 아래 창보다 1.5배 크다. 판전의 앞과 뒤 그리고 아래와 위의 창 크기를 왜 달리했는가? 여기에는 자연 대류를 생각한 선조들의 과학이 숨어 있다. 수다라장과 법보전은 모두 30칸 195평, 동․서사간전은 모두 3칸 17평의 장방형 목조 건물이다. 건물은 가야산 정상인 두리봉을 뒤로하고 깃대봉, 단지봉, 오봉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앞에는 비봉산을 마주보고 있다. 판전 건물 자리는 표고 645m이고 기본 방향은 서남향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다.
판전은 남향 건물로서 앞쪽보다 뒤쪽의 온도가 낮고 공중 습도가 높다. 공기의 이동은 판전 건물 뒷면의 살창으로 들어와 판전 속에 머물다가 빠져 나갈 때는 앞으로 나가기 마련이다. 판전으로 공기가 들어갈 때 습한 공기는 아래에 처져 있으므로 위 창보다 아래 창을 약간 작게 하여 습한 공기가 적게 들어가게 설계했다. 그러나 바깥 공기는 건물 높이 4m 정도에서는 아래 위 습도 차이가 그렇게 크지 않으므로 살창은 1.5배 정도로 큰 차이는 두지 않았다. 판전 속에 들어간 공기는 경판이 가지고 있는 수분을 빼앗아 들어올 때보다 무거워지고 아래로 처진다. 이런 습한 공기는 앞면 살창을 통해 빨리 빠져나가 버릴 수 있도록 앞면 아래 창은 위 창보다 4배 이상 크게 만들었다. 반면에 건조하여 위로 올라간 공기는 오랫동안 판전 안에 머무를 수 있게 판전 앞면 위 창은 아주 작게 했다.
판전 바닥의 숯
판전 건물의 밑바닥에 사람들은 관심이 많다. 건물은 육안으로 확인하여 경판 보존에 매우 합리적임을 금세 알아낼 수 있지만 땅속은 무엇인가 신비로운 사실이 들어 있을 것만 같아서이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불교의 최고 경전인 대장경판을 보관하는 건물이니 당연히 좋은 나무로 튼튼한 마룻바닥을 설치해야 맞다. 그러나 판전의 바닥은 마루를 깔지 않은 흙바닥 그대로이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흙바닥 속에 특별한 비밀이라도 있는 것처럼 여러 가지 상상을 했다.
맨 흙바닥에 부처님의 경전을 새긴 경판을 보관했다는 사실이 얼른 이해가 안 가는 것은 당연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흙바닥에 무엇인가 비밀이 묻혔을 것이다. 비밀의 열쇠는 숯이 갖고 있다고 믿었다. 숯을 켜켜로 흙속에 깔아 판전 내부가 일정한 수분을 유지하도록 조절해주고 벌레가 살지 못하게 했을 것으로 생각한 듯하다. 이런 미확인 숯 매몰설을 사실처럼 누가 처음 알리기 시작했는지 지금 와서 찾아낼 수는 없다. 하지만 필자를 포함하여 대장경에 관심을 가져온 많은 사람들은 밑바닥 속에 많은 숯이 들어 있는 줄로만 알았다. 그렇게 믿어왔고 전혀 의심을 갖지도 않았다.
그러나 바닥은 그냥 흙바닥이다. 다만 일제강점기 이후 판전의 보수 때마다 수시로 시행된 강회剛灰 다짐을 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