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장경판의 재질로 본 판각지에 대한 고찰
경북대학교 임산공학과 박상진
머릿말
고려대장경판은 국가가 위기에 처하였을 때 전국민이 일치단결 하여 불심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치겠다는 일념으로 고려 고종 24년(1237)에서 38년(1251)까지 장장 16년이란 세월에 걸쳐 완성하여 오늘날 해인사의 수다라장, 법보전, 동사간장 및 서사간장에 보관되어 있다. 판수는 1496종 6568권 81,258장이라는 방대한 규모에 이르고 있으며 단일 목질유물로는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을 수 없다. 이는 단순히 불교라는 어느 종교의 경전으로서의 값어치뿐만 아니라 선조들의 집념과 끈질긴 투혼을 엿볼 수 있는 증거로서 우리 모두 옷깃을 여미게 한다.
그러나 고려대장경에 대한 서지학적인 연구는 다양하게 수행되었으나 대장경판을 만든 나무의 재질에 관한 연구는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다행히 필자는 1990년부터 고려대장경판의 재질조사를 수행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면서 경판을 제작한 나무의 수종을 구명하고 경판재의 실제재적과 벌채과정을 비롯한 경판제작과정을 추정하는 작업을 계속하여 오고 있다. 이 과정에서 밝혀진 고려대장경판 및 장경각의 재질로 보아서 지금까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태조 7년(1398)의 강화출육설을 위시한 경판의 강화판각설에 대하여 몇 가지 의문점을 갖게 되었다. 본고는 고려대장경판의 재질분석의 결과를 바탕으로 판각지와 이운문제에 관하여 필자의 추정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1. 고려대장경 경판의 재질
1.1 지금까지 알려진 경판의 재질
수다라장의 관람창 오른편에는 실물 대장경판 한 장이 높직하게 붙어 있고 그 밑에는 대장경판을 만든 자작나무라는 간단한 설명과 함께 껍질이 벗겨진 작은 통나무하나가 있다. 이것은 70년대 말부터 계속 전시되어 왔으므로 해인사를 다녀간 우리 국민들의 대부분은 {고려대장경판은 자작나무로 만들었구나}하고 의심 없이 받아들여 왔다. 그러면 왜 고려대장경판이 자작나무로 만들어 졌다고 알려졌는지 그 과정을 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경판을 만든 나무의 재질이 무엇인지에 관한 기록은 알려져 있지 않다. 따라서 경판이 자작나무로 만들어 졌다고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근세에 들면서 서지학자를 중심으로 대장경판을 연구한 분들의 논문에서 찾을 수 있다.
우선 몇 발표논문의 관련부분을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해인삼미씨는 {내 본산 자랑-해인사의 장경각과 경판}라는 글에서
---경판의 전면에 칠을 하고 용재는 백화(白樺,자장나무)인데 제주도, 완도, 거제도 등에 산출한 것이라 한다.
② 무능거사씨는 {이조불교사(8)}에서
---용재는 장목(樟木, 조선에서는 후박이라 칭함, 제주도, 완도, 거제도, 울릉도에서 생산함)인데---
③ 만해 한용운씨는 {해인사순례기}라는 수필에서---체재로 말하면 백화(白樺, 자작나무 혹은 거재나무)의 질인데---
④ 이 기영씨는 {고려대장경, 그 역사와 의의}라는 논문에서
---목재는 제주도, 완도 및 거제도산인 자작나무를 섰는 데---
⑤ 조 명기씨는 {국보고려대장경의 가치}라는 논문에서
---용재는 제주도, 완도, 거제도, 울릉도 등지에서 산출하는 후박(厚朴, 樺, 자작나무 혹은 거재나무라고도 함)이다.
⑥ 서수생씨는 {가야산 해인사 고려대장경 연구}라는 논문에서 ---용재는 백화(白樺)인데 자작나무라고 한다. 일명 거제도나무라고도 한다. 이 나무는 제주도, 완도, 거제도, 울릉도 등지에서 많이 생산된다.--
는 등이다.
이상의 예에서 본 것처럼 대장경판을 만든 나무는 자작나무와 후박나무 및 거재나무(거제수나무의 경상도지방 사투리)등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대부분의 문헌에서는 자작나무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 대장경판이 왜 자작나무로 만든 것으로 알려졌는지는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는 화(樺)자의 해석에 있다. 자작나무는 한자로 화(樺)로 기록하고 있으며 옥편을 보면 자작나무 화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선조 들은 자작나무와 벚나무를 명확히 구분하여 사용하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 세종10년(1428) 6월9일조를 보면 함길도 경차관 정분이 수재 상황을 아뢰는 내용 중에"경성 관아의 문 앞에 버드나무가 있었는데, 하루는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공기는 찌는 듯이 뜨겁더니, 베필(布匹) 같은 한 물건이 공중에서 길게 쭉 뻗치어 내려왔습니다. 바로 불타는 화피(樺皮)이었습니다. 버드나무가 그 열기에 부딪혀 죽었다고 합니다. 함흥에서부터 갑산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산 위의 초목이 다 타 버렸습니다. 사람들이 하늘 불(天火)이라고 하였습니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의 화피는 자작나무껍질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 보면 세종 오례 / 군례 서례 / 병기 / 활·화살에 관한 내용에는 "활의 길이가 6척 6촌이 되는 것은 상제(上制)라 이르고, 6척 3촌이 되는 것은 중제(中制)라 이르고, 6척이 되는 것은 하제(下制)라 이른다. 궁간(弓幹)·궁각(弓角)을 취하여 교칠(膠漆)한 힘줄[筋絲]로써 이를 만든다. 붉은 칠을 한 것은 ‘동궁’이라 하고, 검은 칠을 한 것은 ‘노궁’이라 한다. 혹은 화피(樺皮)로써 바른다.”하여 여기서의 화피는 산벚나무임을 알 수 있다. 또 임경빈씨가 인용한 자료를 보면, 『임원십육지에서 화에 대한 인용은 자작나무에 대한 것과 벚나무에 대한 것을 함께 수록하고 있다. 이 시진의 본초강목 인용을 보면 화는 산도(山桃)와 비슷하여 색은 황색이고 분홍의 작은 반점이 있다. 수피는 두껍고 부드러우며 신발의 뒤창에 붙이고 때로는 칼집에 이것을 쓴다. 또 말안장이나 활을 싸기도 하고 껍질은 밀랍을 감아서 초를 만들어 불을 붙이기도 한다. }이 기술에서는 화가 벚나무인지 아니면 자작나무인지 구별이 불명하다.
서호수의 해동신서 종예항목에는 {화는 깊은 산중에 나는데 이것을 뜰에 옮겨 심을 수 있고 수고가 높게 된다. 3월에 엷은 분홍색의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데 열매는 처음에는 푸르나 뒤에는 분홍색으로 된다. 앵두와 거의 같은 시기에 익는데 일본사람들은 이 꽃을 무척 소중하게 여긴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때는 화를 벚나무로 본 경우이다. 즉 자작나무와 벚나무를 동일한 한자인 화(樺)로 표기하고 뒤섞어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화'자를 산벚나무류로 알고 있는 경우는 드물고 대부분 자작나무로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추정하건 데 필자가 과문하여 찾지 못한 대장경판의 재질을 기술한 옛 문헌의 어디엔가 벚나무 종류로 만들었다는 뜻으로 {화목(樺木)}이란 표기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화목을 해석한 사람은 의미가 산벚나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자작나무 화(樺)로 번역하여 전해짐으로서 오늘날 의심 없이 대장경판의 재질은 자작나무로 알려지지 않았나 생각해 볼 수 있다.
두 번째의 추정은 거제도에서 생산된 나무란 의미가 거제수나무로 변형된 과정에서 추정해 볼 수 있다. 시대적으로 고려대장경판의 각판 시기와는 맞지 않아 전설처럼 알려지고 있는 개간인유의 이거인 관련 기록을 보면 {羅王招致工匠亦運瀫板於巨濟島成列不止時入指云杞梓皆稱巨濟木至今仍名馬入我』라 하여 거제도에서 생산된 목재를 사용한 내용을 볼 수 있어 옛 부터 거제도에는 많은 나무가 분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장경판을 각판 할 때도 몽골군에 유린된 육지보다는 수집과 운반이 손쉬운 거제도, 남해도, 완도, 진도, 멀리는 제주도까지 주로 섬 지방에서 용재를 조달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각판당시 거제도를 중심으로 섬 지방에서 많은 나무가 조달되었을 것이므로 대장경판 각판에 쓰이는 나무는 모두 거제목(巨濟木)이라 하였을 것이다. 다시 거제수(巨濟樹)로 변형되고, 공교롭게도 지리산, 가야산등 남부지방의 고산지대에는 거제수나무라 불리는 나무가 본래부터 자라고 있었으므로 거제도에 나는 나무 전부에 대한 일반명으로서의 거제수를 남부지방의 고산에 분포하는 고유수종인 거제수나무로 잘못 알려지게 된 것으로 본다. 그런데 거제수나무는 고산지대에 분포하므로 일반인들이 잘 모르고 또 흰 수피가 종이처럼 잘 벗겨지는 모양이 흔히 알려져 있는 자작나무와 거의 비슷하여 구분이 어렵다. 한자로도 거제수나무와 자작나무는 같은 '화'자 표기를 하므로 대장경판이 자작나무로 알려지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1.2 경판의 실제 재질
대장경판을 판각하기 위하여 사용할 수 있는 나무의 특징은 우선은 재질이 균일하고 미세하여 글자 한 획 한 획이 깨끗하게 파져야 하며 너무 단단하여 글자를 새기기가 여려워서도 안된다. 그렇다고 너무 연한 나무는 인쇄를 할 때 빗침부분이 떨어져 나가버리므로 적당치 않다. 이런 조건에 맞는 나무는 그렇게 많지 않으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소나무, 잣나무, 젓나무 등의 침엽수는 세포크기가 크고 (머리카락의 1/2정도) 춘추재의 세포차이가 너무 뚜렷하여 부적합하다. 또 밤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물푸레나무 등은 물관의 직경이 무려 0.3mm나 되므로 쓸 수 없다. 그렇다면 적당히 단단하고 세포의 크기가 고르며 조각하기가 쉬운 나무는 대단히 한정되며 그나마 경판을 만들 수 있을 만큼 직경이 크게 자랄 수 있는 나무라야 하는데 이런 나무는 10여종에 불과하다. 경판의 수종분석방법은 나무의 세포형태나 배열형식을 광학현미경 및 전자현미경을 이용하여 목재조직학적인 기법으로 분류하고, 그 특징을 이미 조사한 세포형태특징과 비교검토하여 해당수종을 확정하였다.
대장경판을 대상으로 약 250여점의 표본을 선정하여 분석하였다.
표에서처럼 대장경판 제조에 사용된 원목의 수종은 대부분 산벚나무류로서 전체 시편 수 대비 62%에 해당하고 경판부위에서만 보더라도 64%에 달하며 마구리의 구성수종에서도 56%에 해당한다. 또한 돌배나무류는 전체 조사시편수 대비 약 13%이고 채취부위별로는 경판부에서도 14%나 점유하고 있다. 기타 자작나무류 8%, 층층나무류 6%, 단풍나무류와 후박나무류가 각각 3%, 사시나무가 1점 검출되었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경판에는 사용하지 않았고 마구리 혹은 부위불명 재료에서 각각 1-2점이 검출되고 있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경판의 수종은 산벚나무류와 돌배나무류가 전체 검출된 조사수종의 75%로서 대부분을 차지하며 지금까지 자작나무류로 알려진 수종은 8%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한가지 간과해서 안될 사실은 8만여 장의 대장경판 중에 불과 250여장을 조사한 결과를 가지고 대장경경판 전체수종을 논의 할 수 있느냐는 문제이다. 물론 필자도 표본크기가 모자라는 점은 인정하나 조사대상이 국보라는 특수성과 한정된 조사기간이라 어쩔 수 없었고 조사경판의 선정에 있어서는 가능한 대표성을 나타낼 수 있게 충분히 배려하였다. 조사표본수를 늘리면 앞 표에서 제시한 각 수종의 비율은 다소 변할 수 있겠으나 대체적인 경향을 알기에는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주요 경판수종인 산벚나무류, 돌배나무류, 자작나무류, 후박나무류의 특징을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1.2.1 산벚나무류 - Prunus sp.
산벚나무는 장미과라는 대단히 많은 나무종류가 포함된 집단에 속하는 나무이다. 좀더 좁혀 본다면 벚나무, 왕벚나무, 산벚나무, 올벚나무, 개벚나무. 섬벚나무, 꽃벚나무 등 식물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사람들은 좀처럼 구별할 수 없는 비슷비슷한 벚나무류 중의 한 종류이다.
이른 봄 다른 나무들은 아직 새잎의 푸르름이 시작도 하기 전에 화사한 분홍빛 꽃을 지천으로 달고있는 나무이다. 이 꽃이 필 무렵이면 멀리서도 쉽게 산벚나무를 구별할 수 있어서 몽고군에 유린당한 육지에서 몰래 몰래 한 나무씩 베어오기에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산벚나무는 꽃의 아름다움 만큼 우량한 재질을 가진 나무이다. 전국의 어디에서나 자랄 수 있으나 특히 남부지방에 흔히 볼 수 있고 섬지방에도 잘 자라고 있다. 높이 20m, 직경이 거의 1m까지도 자라는 나무이나 대체로 높이 10여m, 직경 5-60cm에 달하는 큰 나무이다.
심변재의 구분이 확실하고 심재는 짙은 적갈색이며 조직이 치밀하고 곱다. 기건비중 0.62정도이고 잘 썩지 않으며 가공이 쉽다. 용도는 조각재, 칠기심재 등이며 목판인쇄의 재료로서는 최우량재이다.
1.2.2 돌배나무류 - Pyrus sp.
우리 조상들이 즐겨 먹든 과일나무의 한 종류로서 돌배나무는 잘 알려져 있다. 배의 식용역사는 굉장히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데 약 4천년전의 일산신도시 선사시대유적에서 발견되기 도하며 약 2천년전의 의창다호리 가야고분에서 밤, 천선과와 함께 돌배가 출토된바 있어서 무척 오래 전부터 애용해온 것으로 생각된다. 분포지역은 산벚나무류 보다는 약간 추운 지방이며 경판에 쓰인 나무는 주로 남부 내륙의 산간지방에서 벌채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직경 60cm, 높이 10m 까지 잘랄 수 있으며 옅은 붉은 빛이 도는 목재이고 조직이 매우 치밀하고 균일하다. 기건비중 0.73으로 약간 무거우면서 강도가 강하고 단단한 반면 가공은 비교적 용이하다. 가구재, 기구재, 조각재 등으로 사용되었으며 1915년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하여 인쇄를 하면서 누락된 경판18매를 발견하고 다시 새겨넣을 때 서울근교의 배나무를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2.3 자작나무류 - Betula sp.
대장경판은 지금까지 자작나무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필자의 조사결과로는 앞에서 본 것처럼 경판의 수종은 대부분이 산벚나무류와 돌배나무류이고 자작나무류는 8%에 불과하였다. 자작나무로 알려진 나무는 식물학적으로 자작나무속에 속하는 나무의 총칭인데 자작나무류로서 자작나무와 거제수나무 및 사스래나무와 박달나무류인 박달나무, 물박달나무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극히 작은 표본을 대상으로 세포특징의 현미경구분이라 자작나무속의 종구분은 거의 불가능한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여기에서 말하는 자작나무류는 박달나무, 자작나무, 거제수나무가 모두 포함되어있다. 대장경판의 재료가 박달나무인지 자작나무 혹은 거제수나무인지는 중요한 의미가 있으나 현재의 지식으로서는 명확하게 구분하는 방법이 알려져 있지 않다.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로는 대장경판의 수종의 자작나무류라 함은 박달나무류에 더 가까운 것으로 생각된다. 박달나무류는 거의 전국적으로 분포한다.
1.2.4 후박나무류 - Machilus sp.
남해안이나 다도해의 섬지방을 여행해 보면 잎이 두껍고 겨울에도 짙푸르며 윤기가 흘러 마치 흔히 보는 감나무의 작은 잎처럼 생긴 나무를 만날 수 있다. 이 나무가 후박(厚朴)나무로서 녹나무과에 속하는 큰 나무이다. 남해안 지방과 다도해 섬지방에 주로 분포하며 육지로는 얼마 올라오지 않은 따뜻한 지방에 주로 자란다.
다 자라면 지름이 20m, 지름은 거의 1m까지 달하기도 한다. 후박나무는 옛 부터 회갈색으로 미끈한 껍질을 벗겨내어 한약제로 널리 사용되었다. 그래서 천연기념물로 보호된 몇몇 보호수를 제외하면 큰 나무를 좀처럼 만날 수 없다.
목재는 옅은 갈색이고 나무 결이 약간 어긋나며 비중은 0.65정도로서 건조 및 가공하기도 쉽지 않다. 이 나무가 대장경판의 재료로서 꼭 적당 하였다기 보다는 막대한 나무의 수집과정에 남해안에 흔한 나무로서 사용한 것 같다. 식물학적으로 비슷한 수종에는 녹나무와 생달나무가 있는데 모두 대장경판에 사용 할 수 있는 수종이다.
기타 층층나무, 단풍나무, 사시나무 등이 포함되어 있다.
2. 고려대장 경판의 현황
2.1 경판의 치수와 무게
경판의 길이는 양쪽의 마구리를 포함하여 68cm, 70cm, 73cm, 75cm, 78cm등이나 68cm인 경판이 조사판수에 대하여 약 33%, 78cm가 54%정도이고 기타는 수%씩에 불과하다. 경판의 폭은 평균 24cm로서 극히 일부경판은 19cm인 경우도 있으나 다른 경판은 모두 23.4-24.8cm의 범위에 있다. 경판의 두께는 2cm를 약간 넘은 경판도 있으나 대부분은 2.5-3cm전후이며 평균 2.8cm정도이다.
경판중량은 경판에 따라 차이가 많고 최소 2312g에서 최고 4444g까지 거의 2배에 달하는 중량의 차이가 있다. 68cm 및 70cm경판의 경우는 약 2600-3300g, 78cm경판의 경우는 약 3200-3800g의 범위에 있다. 이는 길이와 두께의 차이도 영향이 있겠으나 사용재료의 수종에 따른 비중의 차이 때문으로 생각한다.
2.2 경판에 사용된 목재의 양
경판에 사용한 목재의 양은 크기별 전체 경판수에 대한 점유비율을 개략적으로 환산한 총재적과 마구리에 사용한 목재의 양을 합하면 구할 수 있다. 추정한 경판의 재적은 약 370m3, 양마구리 재적이 약 80m3로서 경판과 마구리에 사용한 목재의 총량은 약 450m3에 달한다. 이를 무게로 환산하면 비중을 0.6-0.7로 보아 약 300톤 정도인데 4톤 트럭에 싣는 다면 7-80여대에 해당하는 방대한 양이다.
그러면 450m3에 달하는 경판재와 마구리재를 얻기 위하여 어느 정도의 원목을 벌채하였으며 운반하는데는 얼마의 인원이 동원되었는지 추정해보자.
우선 450m3의 목재를 가공하는 데는 당시의 조악한 기술로 볼 때 원목에서 경판재를 만드는 조제수율(調製收率)은 적게는 원목의 10수%, 많게도 40-50%를 넘을 수는 없다. 따라서 원목은 적어도 1000m3이상이 필요하였다고 본다.
경판길이가 64cm, 74cm인 것이 대부분이므로 이를 기준으로 본다면 통나무의 길이는 적어도 90cm는 되었을 것이다. 또 통나무의 직경은 경판폭이 24cm이므로 적어도 40cm이상이라야 한다. 한편 산벚나무와 돌배나무의 지하고(枝下高)는 약 1-2m정도로 보아 직경 40cm의 경우 통나무 한 토막에서 조경판(粗經板)은 2장 채취 가능하고 한 나무 벌채에서 약 1.5개의 통나무 토막이 생산 가능하다. 물론 실제로는 40cm이상의 대경목도 다수 사용되었을 것이나 운반 및 취급의 편의성을 고려한다면 사용 통나무 개수는 10,000-15,000본 정도로 추정되고 통나무를 선정 벌채하여 각판 장소까지 운반하는 데만도 동원된 연인원은 10만명 전후가 아닌가 생각된다.
3. 장경각 기둥의 재질
장경각이 언제 건조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으므로 우선 고려대장경판이 해인사에 있게된 시기부터 추정해 보는 수밖에 없다. 강화도에서 옮겨왔다는 설을 수용한다면 고려말에서 조선조 초까지가 고려대장경판을 해인사로 옮겨온 시기이므로 장경각의 건조시기는 이때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장경각의 건조년대에 관한 명확한 기록은 없고 다만 중수기록만이 몇 건 알려져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왕조 세조 3년(1458)에 대장경 50벌을 인쇄하고 장경각을 40칸으로 늘렸다 하였는데 최초의 수리.증축 기록이다. 성종19년(1488) 지금의 수다라장과 법보전 건물을 대대적으로 개조하여 보안당(普眼堂)이라는 액자를 걸어두었다. 그 뒤 광해군 14년(1622)에 이르러 수다라장을 수리하였고 인조2년(1624)에는 법보전을 중수하고 7년 뒤인 1631년에 단청하였다 한다. 이후에도 몇번의 수리기록은 있으나 건조년대에 관한 내용은 찾을 수 없다..
그런데 필자는 수다라장과 법보전 각각 48개, 동서사간장 각각 6개씩인 장경각기둥 108개에 대한 재질을 분석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기둥의 굵기는 수다라장이 32-59cm의 범위이고 평균은 38cm, 법보전은 38-68cm의 범위이며 평균은 46cm로서 법보전이 훨씬 큰 나무를 사용하였다. 기둥의 높이는 360cm이고 전체 들어간 나무의 부피(재적)는 수다라장이 약 14m3 법보전이 26m3로서 수다라장에 비하여는 거의 2배 가량 나무가 더 들었다. 기둥하나의 무게도 적게는 300kg에서 굵은 것은 1.3톤이나 되었는데 어떻게 운반하여 왔는지 신비롭기만 하다.
기둥에 사용한 나무는 침엽수로서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 리기다소나무의 4수종과 활엽수로서는 상수리나무와 느티나무의 2 수종을 합쳐 6 수종이 검색되었다. 이를 다시 각 장경각별로 보면
수다라장의 기둥은 48개인데 2번 기둥과 34번 기둥은 보수를 위하여 기둥의 윗 부분을 잘라내고 갈아넣은 {중첩기둥}이었다. 중첩기둥은 상하의 수종이 다른 경우도 있으므로 편의상 별개의 기둥으로 보아 50개 기둥을 대상으로 하였다. 검출된 수종은 침엽수재로서 잣나무가 14개(28), 소나무가 7개(14%), 전나무가 5개 (10%), 활엽수재로는 느티나무가 22개(44%), 상수리나무 종류가 2개(4%)이었다.
법보전 48개의 기둥 중 잘라내고 보수한 중첩기둥은 없었으며 41번 기둥하나만 잣나무이었고 나머지 47개는 모두 느티나무이었다.
동사간장은 6개 기둥 중 2번과 3번 기둥이 중첩기둥이었으므로 8개의 기둥을 대상으로 하였다. 소나무는 4개, 리기다소나무가 1개, 느티나무가 3개이었다.
서사간장은 동사간장과 마찬가지로 6개의 기둥 중 4번과 5번이 중첩기둥으로서 8개의 기둥을 대상으로 하였다. 소나무 5개, 잣나무가 2개, 느티나무가 1개이었다.
4채의 경판장 전체 기둥을 종합하여 보면 중첩기둥 6개를 포함하여 114개의 기둥 중 느티나무가 73개(63%), 잣나무가 17개(15%), 소나무가 이보다 1개 적은 16개(14%), 전나무가 5개(5%), 상수리나무류가 2개 (2%), 리기다소나무가 1개(1%)의 차례이다.
기둥의 수종은 느티나무가 가장 많고 특히 법보전은 기둥 1개를 제외하면 48개의 기둥 중 47개가 느티나무이다. 느티나무는 옛부터 널리 사용되었든 나무로서 원삼국시대의 고분인 임당고분, 천마총 관재를 비롯하여우리 나라의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무량수전의 기둥에도 느티나무가 쓰이고 있다. 또 기록에서도 삼국사기의 거기(車騎)조에 보면 목재사용을 규제한 내용 중에 수입 귀중 목재인 자단, 침향과 같은 서열에 있을 만큼 흔하면서 귀중한 우량재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몽고침입 등 전쟁과 사회적 혼란을 겪으면서 고려말 및 이조초기에 이르러서는 왜구를 막기 위한 선박 건조사업 및 새 왕조 지배계층에 의한 각종 건축사업은 필연적으로 산림파괴를 가져왔다고 생각되며 이는 숲 속에서 흔히 분포하든 느티나무가 급격히 줄어들고 소나무, 참나무 등이 상대적으로 많아지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 예로서 고려초 건물이 무량수전등은 기둥의 전부가 느티나무로 이루어진 반면 조선조 초기 건물인 화암사, 범어사, 무량사 등의 기둥재는 느티나무 외에 소나무와 전나무, 참나무류가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다. 나무의 수종만으로 건조년대를 추정하는데는 어려움이 있으나 대체로 보아 구성수종 전부가 느티나무인 법보전은 적어도 고려중.초기에 건조된 것으로 보이며 수다라장은 기둥에 상당한 양의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 등의 침엽수재가 많이 사용된 것은 산림파괴가 되어 느티나무를 구하기가 어려워진 고려 중 후기 이후에 건조되었거나 아니면 법보전과 동시대에 느티나무로 건조되었으나 조선조의 중수시에 침엽수로 교채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장경각 건물은 강화도에서 이운되기 전부터 있었다고 보아야하며 소나무가 많이 사용된 동.서 양 사간장은 보다 후대에 건축된 것으로 보이며 서사간장에서 리기다소나무가 검출된 것은 이 나무가 1900년대 초 미국에서 도입된 것을 감안한다면 최근 보수할 때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4. 고려대장경판재의 벌채와 운반
4.1 경판재의 벌체지역 추정
고려대장경을 각판하는 데 쓰인 그 많은 나무를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가져왔는가? 우리는 이 물음에 명확하게 대답하여 줄 아무런 문헌자료를 갖고 있지 않다. 다만 경판을 만든 나무의 종류가 밝혀졌으니 분포지역과 관련하여 추정해보는 수밖에 없다.
어떤 나무가 자라는데 가장 영향을 크게 미치는 조건은 기후조건이다. 예를 들어 제주도에 가 보면 육지와는 전혀 다르게 한 겨울에도 잎이 싱싱한 상록수를 흔히 만나게 되어 여름의 경치를 보고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이것은 제주도의 기후가 육지보다 따뜻하여 그기에 맞게 살아남은 나무가 육지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기후가 세월을 지나오면서 몇 번의 소빙하기를 거치는 등 변화를 가져오기는 하였으나 지금부터 750여년 전의 대장경 각판당시의 기후와 현재의 기후는 크게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당시에 자라든 나무의 종류나 분포지역이 지금과 거의 같다고 보아 대장경판에 사용한 나무종류별 당시의 분포지역을 추정해보자.
대장경판을 만든 나무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산벚나무 종류는 중부 이남지방의 따뜻한 지역에 주로 자란다. 높은 산의 험난한 지역보다는 비옥하고 습기가 많은 야트막한 야산의 양지바른 산록부분을 좋아하며 강을 끼고 있는 곳이면 더욱 안성맞춤이다. 또 거제도 남해도등 남쪽의 섬지방에는 산벚나무 종류가 지금도 흔히 볼 수 있으니 당시에는 더욱 많이 자라고 있었을 것이다.
경판의 수종 중 산벚나무 다음으로 많은 돌배나무 종류는 해안에 바로 인접한 지역보다는 약간 내륙지방에 분포하였을 것이다. 돌배나무는 섬진강이나 낙동강을 타고 내륙지방으로 상당히 들어온 지역에서 벌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음은 자작나무 종류이다. 앞에서도 몇 번 강조하여 온 것처럼 여기서 말하는 자작나무종류는 자작나무 한 종류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자작나무, 거제수나무, 박달나무까지 포함한 자작나무속에 속하는 나무들의 집합적인 명칭이다. 자작나무는 남한에는 분포하지 않은 한대 수종이고 거제수나무는 지리산을 비롯한 남부의 고산지방에 자라는 수종이다. 반면에 박달나무는 비교적 분포지역이 넓은 나무로서 거의 전국에 걸쳐 자라고 있다. 아직 대장경판에 사용된 자작나무속의 정확한 수종이 무엇인지 결론을 내기에는 연구가 더 진행되어야 하겠다. 그러나 잠정적인 결론은 박달나무쪽에 가깝다.
이상의 세 종류이외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수종이 후박나무 종류이다. 이 나무는 상록 활엽수 교목으로 남해안과 섬지방의 따뜻한 지방에서 밖에 자라지 않은 나무이다. 기타 중부이남에 주로 자라는 단풍나무와 층층나무 종류가 있었고 후박나무가 1점 있었다.
이상의 대장경판을 만든 수종이 자라는 지역을 가지고 추정해 보면 경판에 사용한 나무는 남해안 및 섬 지방을 비롯하여 섬진강, 낙동강 등의 하안(河岸)을 위시한 남부내륙 지방에서 벌채하여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4.2 원목의 벌체와 운반
산벚나무와 돌배나무는 나무의 특성상 집단으로 자라지 않고 한 두 나무씩 다른 나무에 섞여 자란다. 따라서 우선은 울창한 산림 속에 자라고 있는 산벚나무나 돌배나무 중 곧 바르고 경판재의 폭이 나올 수 있을 만큼의 굵기를 가진 나무를 고르는 일이다. 살고 있는 동네에서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깊은 산에 자라는 나무가 아니고 야트막한 앞산이나 뒷산에서 흔히 만나는 친근한 나무들이면서 산벚나무는 이른봄에 분홍빛 꽃을 지천으로 피우고 수피는 매끄럽고 가로로 갈라지니 찾기가 쉽다. 어느 나무가 속썩음이 없고 옹이가 적어 베어내면 경판을 만들기에 적합한 좋은 나무가 될 것이라는 것은 훤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좋고 적당한 나무라도 베어서 가져 나오기가 어려워서는 쓸모가 없는 나무일 따름이다. 따라서 이웃동네로 넘어가는 길옆이나 밭의 가장자리 등 접근하기 쉬운 곳에 자라는 나무를 선택하였을 것이다.
벌채와 운반은 두 가지 방법으로 이루어 졌다고 생각된다. 하나는 통나무 그대로 베어내어 뗏목을 만들어 분사대장도감으로 직접 보내는 방법이다. 분사대장도감에 보낼 나무는 바닷가나 강가에 바로 붙어 있어서 짧은 거리만 목도를 하여도 되는 편리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 거제도와 남해도로 이어지는 크고 작은 섬과 바다에 맞 붙어있는 여수, 하동, 고성, 진해 등 남해안 해안선이 대상지역이 될 것이다. 가슴높이에서 지름이 적어도 40cm이상 되어야 경판재로 쓸 수 있으므로 대체로 큰 나무가 선택 벌체 되었을 것이다. 경판의 길이에 알맞게 90cm전후로 절단을 한다. 지름이 40cm짜리라도 무게는 100kg이 넘는다. 쌀한가마 무게가 넘으니 아무리 장정이라도 지게에 지고 내려오기는 무리가 아니었을까? 두 사람이나 4사람이 한 조가 되어 어깨에 매고 목도를 해야 했을 것이다. 바다나 강에 바로 면하여 자란 나무는 굴러내려도 금새 물 속에 떨어지게 할 수 가 있다. 일단 물 속에 떨어진 나무는 땟목을 만들거나 배로 끌고 가서 일정한 장소에 모았을 것이다. 이런 통나무벌채는 수운(水運)까지의 이동거리가 짧은 남해안의 섬지방 등에서 주로 이루어져 분사대장도감으로 모아진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또 하나는 벌채한 다음 그 자리에 1-2년 동안 그대로 방치하여 판자를 켜서 지게에 지고 내려가는 방법이다. 생나무를 바로 켜면 살아 있을 때 나무에 걸려 있든 생장응력이 그대로 남아 잘 갈라지고 비틀어진다. 그래서 얼마동안 통나무 상태로 눕혀 두면 자라고 있을 때의 응력은 차츰 줄어든다. 나무 속의 심재와 변재 사이의 심한 수분차이도 상당히 없어지며 때로는 나무진도 빠져버린다. 목수들이 말하는 진을 빼고 삭히는 작업이 바로 이 과정이다.
나무를 베어둔 후 느긋하게 1-2년 기다렸다가 이제는 충분히 진이 빠졌다고 생각되면 두 사람 한 조가 되어 탕개 톱하나를 들고 베어둔 자리에 다시 올라간다. 굵은 가지를 잘라 X자의 판자켜는 틀을 만들고 정해진 두께를 표시한 다음 아래위로 서로 마주 보면서 톱질을 하면 판자가 만들어진다. 처음 켜는 두께는 얼마정도 이었을까? 현재 경판의 두께가 평균2.8cm이고 경판을 만들고 나머지에서 마구리를 만들었다고 생각되는데 판자의 두께도 마구리 두께와 거의 같은 4cm정도일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판자는 옹이가 많거나 썩은 부분이 포함되어 있어서 쓸 수가 없는 것은 그대로 버리고 오면 되므로 대단히 효율적이고 편리하다. 산벚나무와 돌배나무에는 특별히 옹이가 많기 때문에 더더욱 현장에서 판자를 만들어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산에서 바로 만들어진 경판을 1-2장씩, 힘센 장정이라면 4-5장씩 지고 내려와 각판하는 절에 가져가서 {경판시주}의 형태로 모아지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5. 고려대장 경판의 전래(傳來)
오늘날 해인사에 고려대장경판이 전하여 내려오고 있는 것에 관하여는 여러 가지 이설(異說)이 많으며 박영수씨의 고려대장경판의 연구와 조선왕조실록 를 중심으로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5.1 재래설(在來說)
팔만재장경판은 강화도에서 새겨서 해인사로 옮겨온 것이 아니라 해인사에서 각판하였거나 아니면 가까운 남해안 지역에서 각판하여 가져왔으므로 처음부처 해인사에 있었다는 생각이다. 직접 관련을 지어 볼 수 있는 문헌은 해인사 유진 고려대장경 개간 인유(留鎭 八萬大藏經 開刊 因由)와 해인사 사적비(事跡碑)가 있다.
5.2 강화출육설(江華出陸說)
강화도에서 대장경판을 각판하고 보관하다가 해인사로 옮겨졌다는 것은 시기에 대한 논란은 있으나 가장 널리 인정되는 학설이다. 관련된 몇 가지 주장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고려말설(高麗末說)
이는 다카하시(高橋亨)라는 일본인 학자 등에 의하여 주장된 것으로서 고려말 60여년 사이에 강화도에서 해인사로 옮겨왔다는 설이다. 근거로서 고려 초에서 조선조 초까지 국왕이나 개인이 대장경을 인출한 문헌의 기록을 토대로 설명하고 있다.
신라 때부터 이조 숙종조에 걸쳐 시문을 모아 엮은 동문선(東文選) 68권의 박전지(朴佺之(1250∼1325)가 지은 영봉산 용암사 중창기를 보면 충숙왕 5년(1318) 임금은 구 대장경이 부식되어있음을 보고 이 절의 주지 천태종의 무애국통(無楝國統)에게 명하여 새로이 봉안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내용중에 {就江華板堂印出闕函闕卷闕張而來}라하여 강화판당에서 빠진 함.권.장을 인출하여 가져왔다는 구절이 있어 이때까지도 대장경판은 강화도에 있었음이 추정된다.
한편 같은 동문선 76권에 보면 이숭인이 지은 신륵사대장각기(神勒寺大藏閣記)가 있는데이는 이색이 우왕 7년(1381)에 죽은 부친의 뜻을 따라 대장경을 인출하고 신륵사에 대장각을 세워 안치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이색은 대장경 인출사업을 혼자 힘으로는 어려워 공민왕의 왕사인 보제국사(普濟國師) 나옹(懶翁) 제자들의 힘을 빌려 준공하였다. 그러나 어디에서 인출하였는지 기록에 없었다. 그런데 비슷한 시대 사람인 이숭인이 지은 도은시집(陶隱詩集)에 보면 {睡庵長老印藏經于海印寺獻呈 一絶 睡庵認破本來空 不是尋常數墨人 安用區區印經卷 止啼黃葉未爲珍}이라 하여 수암장로가 해인사에서 대장경을 인경하여 바쳤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수암장로는 보제국사의 제자로 추정되므로 이색의 대장경 인출사업은 해인사에 이루어 졌다고 보는 것이다.
이상의 동문선 자료를 근거로 대장경판을 해인사로 옮겨온 것은 고려 충숙왕 5년(1318)에서 우왕7년(1381)에 걸치는 63년간이라는 주장이다.
(2) 정축년출육설(丁丑年出陸說)
태조 6년인 1397년에서 태종6년인 1406년 사이의 9년간에 옮겼다는 설이다.
1926년 김포광씨는 해인사 동.서사간장에 보관중인 사간판(寺刊板)을 조사하다가 균여대사 저서인 석화엄교분기원통초(釋華嚴敎分記圓通痹) 제 10권 9.10장이 새겨진 경판을 발견하였다. 이 경판의 10장 글자가 새겨진 윤곽의 왼쪽 바같 쪽에 <丁丑年出陸時 此旟失與 知識道元同願 開板入上 乙酉十月日 首座盓玄>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즉 {정축년에 강화도로부터 내올 때 이 경판을 잊어버렸으므로 지식 도원과 함께 불사를 일으키고 을유년 10월에 판을 새겨 넣은 사실을 수좌충현이 기록한다}는 내용이다.
대장경판을 강화도에서 옮겨 온 후 정리를 할 때에 원통초 10권 9.10장판이 없어진 것으로 알고 정축년에서 9년 후인 을유년에 판을 새로 새겨 넣었는데 뒷날 인경작업등을 하다가 원본을 찾아내었으므로 새로 새긴 충현의 판은 사간판으로 돌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기록의 정축년을 고려 충숙왕 6년인 1337년과 조선 태조 6년인 1397년중 후자로 추정하면 대장경판은 1397-1406사이의 9년간에 강화도에서 해인사로 옮겨온 것으로 추정할 수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정축년은 조선왕조실록의 태조 7년(병진년, 1398)조의 경판이 강화도에서 나왔다는 기록과는 1년의 차이가 있고, 원통초는 정장이 아닌 사간판에 있는 점을 들어 후세의 가짜 판각일수도 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3) 태조7년설(太祖七年說)
태조7년인 1398년 5월 10일과 정조원년인 1399년 1월 9일 사이의 약 9개월 동안에 강화도에서 해인사로 옮겨왔다는 설이다.
이에 관하여는 이조실록 태조 7년 5월10, 11, 12일 조에 3일에 걸쳐 연속된 기록이 있는데 {丙辰 幸龍山江 大藏經板 輸自江華 禪源寺 丁巳雨戊午雨 令隊長隊副二千人 輸經板于支天寺 命檢參贊門下府使兪光祐 行香 五敎兩宗僧徒 誦經 儀仗鼓吹前導}라는 구절이다. 그 내용을 보면 "이태조가 1398년 5월 10일 용산강 즉 정확히는 지금의 한강 원효대교 북쪽으로 행차하여 대장경판을 강화도 선원사로부터 가져오는 것을 참관하였다. 비는 10일부터 12일 까지 계속되었고 2천명의 병사를 동원하여 지천사로 옮겼다. 검참찬문하 부사 유광우에게 명하여 향을 피우게 하고 오교양종의 승려가 경을 외우며 의장을 갖추어 나팔을 불며 인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지천사의 위치는 서울 서대문 밖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일부에서는 지금의 프라자호텔 자리라는 설도 있다.
이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이라는 믿을 만한 사서에 실려있으며 연대가 명확한 유일무이한 기록이므로 가장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대장경판}이 우리가 알고있는 고려대장경판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경판인지도 명확히 알 수 없고 그날 옮겨온 대장경판이 해인사에 있는 81,258장 전부 혹은 일부인지 등 중요한 단서를 알 수 있는 아무런 암시도 찾을 수 없다. 어쨌든 강화도에 있든 대장경판은 지천사라는 서울근교의 육지로 옮겨진 것은 확실한데 그 이후에 대장경판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어디에서도 단 한 줄의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태조7년 설과 관련을 지워 볼 수 있는 기록이 같은 조선왕조실록 정종조에 나와있다. 정종 원년(1399) 1월 9일 경상감사에 내린 행정명령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太上王欲以 私財印成大藏經 納東北面 厥畜菽栗五百四十石 于端吉兩州倉 換海印寺傍近 諸州米豆} 즉 "대장경 인쇄에 참가할 승려들을 공양하기 위하여 태상왕 이성계는 머물고 있든 함경도 동북면에 비축해둔 콩과 밤 540석의 사재를 내어놓았는데 거리가 멀어 직접 가져 갈 수 없으니 단주와 길주 두 고을 창고에 납입하게 하고 해인사 근방의 여러 고을에서 쌀과 콩을 대신 내주도록 하라."는 내용이 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기록을 비교해보면 태조 7년에 정조에게 양위하였으므로 정조원년인 1399은 대장경판이 강화도에서 나온 바로 다음해 정월에 벌써 해인사에 와 있어야만 권력투쟁과정에 무참히 죽은 사위와 충신들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태조가 원하였든 경판을 인쇄할 수 있다.
이 설이 가장 널리 통용되고 있으며 태조 7년(1398)을 고려대장경판이 해인사 보관된 원년으로 보고 있다.
(4) 세조초기 이운설
조선왕조실록 성종 9년(1478) 11월21일조에는 임금이 경상도 관찰사 박건(朴楗)에게
{도내(道內) 합천군 해인사에 소장된 대장경과 판자(板子)는 모두 선왕조(先王朝) 때에 마련한 것이고, 또 객인(客人)이 구하는 바이며, 국용(國用)에도 없을 수 없으니, 만약 신중하게 지키지 못하여 혹 비가 새어서 썩거나 손실이 된다면 매우 불가한 일이니, 경은 숫자와 물목을 자세히 살펴서 아뢰어라.}라는 구절이 있다.
이에 대하여 황수영. 문명대 교수는 {여기서 보면 선조(先朝)때 해인사로 옮긴 것이 분명한데 선조라 함은 예종으로 볼 수 있지만 겨우 1년 남짓 재위하였으므로 선조는 세조로 보는 것이 순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세조는 불교를 숭상하든 왕이었든 만큼 대장경의 보관에 각별한 신경을 썼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1478년에 이미 비가 새었다는 것을 보면 건물 퇴락의 경과로 보아 아마도 세초초기인 1456년경에 해인사로 옮겼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4.3 고려대장경판 2벌 설
대장경판 2벌 설은 대장경을 달라는 일본의 요구에 대하여 조선이 대응한 몇 문헌에서 나타나고 있다.
일본은 고려 공양왕(1389-1392)말년부터 조선왕조 효종(1649-1659)에 이르는 170여 년간 끝없이 대장경을 하사해 달라고 요구하였으며 그때마다 우리 조정에서는 처리에 골몰하였다. 세종 때는 아예 경판을 주어버릴 것을 고려한 적도 있으나 실제 준 것은 인쇄본이며 풍랑을 만나 표류한 어민들과 교환하는 조건으로 일부를 주기도 하였으며 정장이 아닌 밀교장경 등을 대신 보내기도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정종 원년(1399) 7월 21일조에 보면
{일본 사신의 부관인 스님 10여명이 입궐하여 예를 올리니 모시·삼베 및 인삼과 호랑이가죽·표범가죽 등의 물건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대장군과 의홍이란 사람이 우리 나라를 위하여 적을 멸한 뜻을 사례하고, 또 대장경판을 하사해 달라고 청한 것에 대하여 대답하였다.
"예전에 2벌이 있었는데, 1벌은 나라 사람들이 인쇄하는 것이고, 나머지 1벌은 해구(海寇)의 노략질로 불태워서 없어진 것이 많아 완전하지 못하다. 장차 유사를 시켜 완전히 보충하여 보낼 터이니, 배를 준비하여 와서 실어 가라(古有二本 一本國人所印 一本海寇火之 殘缺不完 將令攸司完補以遣 其具舟楫來輸焉)."
라는 기록이 있다.
이 내용대로라면 고려대장경판은 2벌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 벌이 해구에 의하여 불태워 없어졌다는 말은 고려 충정왕(1348-1351)때로부터 공양왕말년까지 강화도 교동 등 바다에 면한 지역에 왜구의 침략이 빈번하였는 바 경판의 일부가 타버린지도 모른다. 고려 이색의 목은집에 의하면 처조부를 기리기 위하여 시주한 대장경일부가 강화도 용장사에 있었는데 왜구에게 유린당하여 태반이 망실되었으므로 그 나머지를 보완하여 풍덕군 경천사에 옮겨둔 일이 있다. 용장사에 관한 기록은 동국여지승람 불우조(佛宇條)에 이르기를 {龍藏寺 在府西四里 大藏經板堂 亦在西門外}라 하였다.
즉 강화문 밖 대장경판당에 있던 2벌 중의 한 벌인 {강화도 고려대장경판경판}도 용장사의 대장경과 마찬가지로 왜구에 의하여 불태워 버린지도 모른다.
또 세종 5년 12월(임신)조에는 일본국왕의 사신 규주와 범령이 와서 국서를 올렸는데 그 내용중에 역시 경판은 1벌이 아니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귀국에는 장경판이 1벌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은 바 1벌의 하사를 요청한다.(別有所請 聞貴國藏經板非一 要請一藏板)}
이상의 기록으로 보면 대장경을 만들 때 2벌을 만들어 한 벌은 강화도에, 나머지 한 벌은 해인사에 보관해 두었다는 내용으로 해석할 수가 있다. 사실이라면 지금까지 우리가 대장경판을 새긴 지역이나 옮겨온 경로에 대한 여러 가지 의문점은 말끔하게 풀어버릴 수 있다. 즉 해인사 한 벌은 남해나 거제도의 경판을 새길 수 있는 나무가 많이 나오는 지역에서 만들어 수시로 해인사로 옮겨다 놓았거나 해인사 자체에서 새겼고 강화도 경판은 서해안 및 남해안에서 나무를 실어다가 강화도에 가져간 후 고려사 기록대로 강화판당에서 새긴 후 선원사에 보관하고 있었으나 한창 왜구가 들끓든 고려말에 불타 없어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6. 강화출육설을 중심으로 본 이운설의 검토
강화출육설에 근거하여 이운과정 및 경로를 추적해 보자. 해인사에 있는 대적광전의 벽화를 보면 대장경판을 소달구지에 싣고 남자는 지게에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이고 옮겨가는 모양을 그려 놓았다. 이 그림은 대적광전이 축조연대가 1865년이므로 반드시 강화도에서 옮겨오는 과정을 형상화하였다는 증거가 없는 이상 당시의 상황을 그려놓았다고 보기는 어렵고 오늘날 우리가 옮겨오는 과정을 상상하는 바를 그대로 그려 놓은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우리는 상상력을 동원하여 본다면 강화도의 대장경판을 옮겨오기 위하여는 우선 철저한 포장을 하여야 할 것이고 이운의 경로는 육상이나 해상의 어느 한 방법을 선택하였을 것이다.
6.1 경판이운의 준비
우선 안전하게 이동하기 위한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대장경판은 나무로 만들어 졌으므로 충격과 습기에 노출되면 파괴되거나 썩어버릴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포장작업을 정교하게 하지 않으면 옮기는 과정에 경판은 대부분 각판부분이 서로 맞닿아 마멸되어 쓸모 없게 되거나 비를 맞아 경판이 갈라지고 비틀어지는 등 막심한 피해가 생길 것이다. 각판당시에도 마구리의 손잡이를 글자를 새긴 경판보다 두껍게 하여 서로 맞닿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하였다.
준비로서 경판이 서로 맞닿지 않게 완충포장지를 넣어 고정하고 사람이나 우마차가 들거나 싣기에 적당한 크기로 튼튼한 포장을 해야한다. 경판과 경판사이에 쓰일수 있는 완충지는 한지, 베, 짚 등을 생각할 수 있고 몇 개씩 단위로 포장하는 데는 외부충격을 감안하여 비교적 두꺼운 나무판자로 만든 괘짝이 아니면 안된다.
이상과 같은 몇 가지 재료에 대한 가정을 해두고 재료의 양이 어느 정도 일지 계산해보자. 경판 한면의 넓이는 약 경판의 길이는 대부분을 차지하는 68cm경판과 78cm경판의 평균으로서 73cm를 잡고 폭을 24cm로 보아 약 1,752cm2가 된다. 이를 경판의 장수 81,258장으로 곱한 전체경판의 한쪽 넓이는 자그마치 1억4천2백3십6만cm2나 된다. 경판과 경판사이에 완충재료로 베나 한지를 사용하여 정성스럽게 포장하여야 하므로 한지를 사용하였다면 수천만장, 베를 사용하였다면 적어도 수백필에 달하는 막대한 양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다음은 포장단위를 생각해보자. 취급의 편의성과 한 사람이 옮길 수 있는 무게를 대체로 40-50kg정도로 잡아 본다. 경판 한 장의 무게가 3.4kg전후이므로 경판 10장이면 포장판자의 무게를 포함하여 한 개의 포장단위는 약 50kg이 될 것이다. 따라서 포장한 대장경판의 개수는 8천백여개가 된다. 또 들어가는 포장판자의 수량은 경판10장을 쌓으면 높이는 대략50cm, 포장판자의 두께를 한치(2.5cm)로 볼 때 한 묶음을 포장하는 데 0.03m3 약 100사이의 판자가 필요하다. 포장에 들어가는 총 판자의 양은 244m3이다. 오늘 날 처럼 기계로 제재하여 판자를 만들어도 이 양은 엄청난 양이며 나무를 벌체운반하는 인력까지 생각한다면 막대한 재정적 지원이 있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다.
6. 2 이운방법과 경로로 본 이운문제
대장경판이 강화도에서 해인사로 옮겨왔다면 이운의 경로는 육상과 해상의 어느 한 방법으로 이루어 졌다고 생각된다. 먼저 육상경로를 보면 조선왕조 실록 태조 7년의 기록을 근거로 1398년 5월 10일이후 지천사에 임시 보관되어 있든 경판은 지금의 원효대교 북편인 용산강 나룻터로 옮겨져 대체로 60여척의 강배에 실어서 한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한강 줄기를 따라 양평의 양수리까지 간 다음 선수를 남한강으로 돌려 장호원, 여주를 거쳐 조선초기의 대표적인 조창(漕倉)의 하나이었든 충주의 가흥창(可興倉)에 도착한다. 대체로 여기까지는 조선시대이 세곡운반을 위하여 배가 다닐수 있는 한계이므로 하선을 해야한다. 대장경판은 새재를 넘어가야 하는데 우마차가 다닐정도로 길이 넓어진 것은 조선 후기로 알려져 있으니 이고 지는 등 인력에 의존 할 수 밖에 없다. 다음은 인력으로 새재를 넘어 경판은 문경, 점촌을 거쳐 낙동강변에 도착한다. 수로로 낙동강을 타고 내려와서 고령의 장경나루에 도착, 다시 육로로 해인사로 운반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앞에서 본 것처럼 경판의 총무게는 전체 경판수에다 평균무게 3.4kg을 곱하여 약 280톤, 여기에 포장재의 무게를 포함하면 400-500톤으로 추정할 수 있다.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50kg의 포장경판을 운반하면 연 인원 약 1만에서 2만 여명이 필요하다. 정조원년 1월10일의 인경일자에 맞추기 위하여는 적어도 한해전인 태조 7년 8-9월까지는 해인사에 도착해 있어야 하는데 물리적으로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해상운반하였을 것이라는 가정에서 이운의 경로를 추정해 보면 용산강 나룻터에서 각지의 조창(漕倉)과 경창(京倉)을 왕래하는 조운선(漕運船)에 실어 운반하는 방법이다.
조운선은 강 배보다 규모가 훨씬 크고 조선초기의 배는 600석 정도까지 실을 수 있다니 약 20척 정도면 고려대장경판은 한꺼번에 옮길 수 있다. 그러나 낙동강을 거슬러 고령의 장경나루까지는 조곡선 처럼 너무 큰배는 역류가 어려우므로 척수는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았거나 아니면 낙동강 입구에서 다시 규모가 작은 강배로 옮겨실어야 한다. 조운선에 실려진 대장경판을 임진강과 만나는 지금의 김포군 하성면을 감싸고 한강하구의 유도(留島)를 돌아 강화해협으로 들어가게 된다. 지금의 강화대교를 뒤로하고 남쪽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바로 선원사이다. 서울의 지천사로 내갈 때 일부만 가져갔다면 여기서 나머지 대장경판을 실으면 된다. 다음은 서해안 조운선의 항로를 따라 완도, 고흥반도, 여수를 거쳐 남해도, 거제도를 통과하고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지금의 고령군 개진면 개포나루에 도착하는 길이다.
태조 7년 5월12일 지천사로 옮겼다 하였으니 얼마동안은 지천사에 보관하면서 이운 준비를 위한 포장과 정리를 하였다고 보아야한다. 이 기간이 적어도 몇 달은 소요되었으리라 보여지며 계절적으로 농사일이 한창 바쁜 시기이고 여름철의 무더위와 장마철과 태풍의 계절이다. 따라서 해인사 이운을 위한 출발은 빨라도 그해의 가을에 들어간 8-9월이 아닐까 생각된다. 우여곡절 끝에 지천사를 출발한 이운선은 다시 강화도 선원사에 들러 출육당시에 미쳐 가져가지 못한 나머지 경판을 싣고 낙동강의 장경나루로 향하였을 것인데 날씨가 고르고 별다른 해난사고가 없어야 약 2개월 정도의 시일이 걸린다. 장경나루 도착은 10-11월이 되고 다시 해인사까지 운반하기 위하여는 우마차와 인력을 동원하더라도 다시 1-2개월은 소요될 것이다.
정조 원년 1월 11일 대장경판을 인경하기 위하여는 포장을 풀어서 권.차순대로 정리하는데 적어도 수개월 전에 해인사에 경판이 도착해 있어야만 인쇄할 수 가 있다. 경판과 포장재를 합쳐서 약 400-500톤에 달하며 무질서하게 옮겨온 경판의 권.장를 순서대로 정리하고 경판가에 분류하여 넣는데 만도 아무리 낮추어 잡아도 4-5개월은 소요되며 더욱이 그 사이에 한 겨울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1915년 일본인들이 카드를 작성해 가면서 과학적으로 인경작업을 수행하는데도 인쇄가 끝난 대장경의 정리에만 4개월이 소요되었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정조실록의 기록대로 원년 정월 11일에 경판을 인쇄하기 위하여는 대장경판이 적어도 한해 전인 태조7년 8-9월까지 해인사에 도착하여야 할 것이다. 따라서 비교적 빠른 이운이 가능한 해상이운을 가정하더라도 9개월 동안에 대장경판이 해인사로 옮겨진 것으로 보기에는 많은 의문이 남는다.
6.3 기타 이운에 관련된 문제
현재의 고려대장경판을 강화도에서 해운사로 이운된 경판으로 보기에는 이운방법과 경로문제이외에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의문점을 지적할 수 있다.
첫 번째로는 육상운반이든 해상운반이든 장경나루를 거쳐 해인사의 장장 천리길을 옮겨왔다면 아무리 포장을 철저히 하였더라도 경판이 흔들리면서 맞닿아 마멸된 흔적이 남고 각자부가 떨어져 나간 부분이 상당수 있을 수밖에 없다. 나무의 표면을 현미경으로 보면 작은 골이 수없이 져 있는 요철(凹凸)이므로 조금만 부딪쳐도 흔적이 남는다. 또 글자의 크기는 사방1.5cm정도이며 글자 굵기 2mm, 글자 깊이 2mm정도이고 글자 끝의 빗침 부분은 가늘고 날카롭다. 인경할 때 글자부분은 크고 작은 충격을 받고 나무를 썩게하는 미생물도 가장 많이 활동하는 부분이므로 매우 약하다. 또 글자획의 주위는 보이지 않은 칼날 자국이 수없이 들어가 있어서 조그만 충격에도 쉽게 떨어져 나가 버릴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해인사 경판은 너무나 완벽하다. 인경을 다른 경보다 많이 하여 글자 자체가 마멸된 반야심경을 제외하고는 8만천여장의 대장경판은 대부분 바로 엊그제 글자를 새겨 넣어 둔 것처럼 글자의 획하나도 떨어져 나간 것이 없다.
두 번째는 장경각의 건조년대 추정에서 생각해보자. 기록으로 장경각의 명확한 건조년대는 알 수 없으므로 기둥의 재질 분석에서 검토해 보자. 나무의 수종만으로 건조년대를 추정하는데는 어려움이 있으나 대체로 보아 구성수종 전부가 느티나무인 법보전은 적어도 고려중.초기에 건조된 것으로 보이며 수다라장은 기둥에 상당한 양의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 등의 침엽수재가 많이 사용된 것은 산림파괴가 되어 느티나무를 구하기가 어려워진 고려후기 이후에 건조되었거나 아니면 법보전과 동시대에 느티나무로 건조되었으나 조선조의 중수시에 침엽수로 교채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장경각 건물은 강화도에서 이운하여 오기전 부터 있었다고 보아야하며 이는 현재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사간판 중에서 고려각판은 모두 54종 2,835매에 이르는데 이들 사간판을 보관하기 위한 건물로는 법보전과 수다라장의 건물이 너무 규모가 크다. 다시 말하여 고려대장경을 판각할 당시부터 수다라장과 법보전은 건조되어 있었든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세 번째는 경판에 사용된 나무의 재질에서 검토해보자. 경판에 쓰인 나무는 산벚나무를 비롯하여 후박나무 등 남해안과 섬지방에 주로 자라는 나무이다. 그렇다면 벌채한 나무를 천리길 강화도로 운반하여 각판하였다는 것인데 이것이 가능한 일이며 또 꼭히 운반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라도 있었는지 궁금하다.
네 번째는 앞에서 알아본 것처럼 당시로서는 그 엄청난 양의 대장경판을 옮기기 위하여는 막대한 경비가 소요되고 적어도 범국가적인 지원이 있지 않으면 이운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이운에 소요되는 막대한 경비를 지원할 수 있는 지는 의문이다. 또 조선왕조실록에는 180회의 대장경관련 세세한 기록이 남아있는데 반하여 대장경 이운에 관한 내용은 실록은 물론 어느 사서에도 남아있지 않다는 점은 대장경판 이운문제의 미스테리로 남는다.
결론
이상에서 본 것처럼 고려대장경판은 고종때 강화도에서 각판하여 얼마동안 보관하다가 조선조 초에 해인사로 옮겨왔다는 강화출육설은 경판의 재질을 중심으로 검토해 볼 때 많은 의문점이 남는다. 필자는 대장경판의 이운문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견해를 갖는다.
1. 경판재의 대부분이 남부지방 나무이며 이운시에 생길수 있는 경판표면의 손상이 거의 없고 장경각의 축조년대가 고려초중기로 추정되므로 각판장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검토와 아울러 재래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2. 경판에 사용된 목재를 벌채하여 치목(治木)한 위치와 각판(刻板)한 장소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으며 치목은 주로 분사대장도감에서, 각판은 해인사 및 그 주변의 사찰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이는 경판의 표면상태가 먼 거리를 옮겨왔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3. 경판목재는 벌채한 원목을 통나무 상태로 치목장소까지 운반하여 판자로 만든 후 각판장소로 옮겨간 경우와 벌채한 원목을 1-2년 방치하였다가 현장에서 판자로 만든 후 각판장소에 바로 옮겨간 경우의 두 가지형태로 확보 된 것으로 추정된다.
4. 경판의 사용된 수종의 분포특성으로 보아 일부 산벚나무류와 후박나무류 등은 남해안과 섬지방 등 바로 수운을 이용할 수 있는 장소에서 벌채된 후 섬지방에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분사대장도감에 모아져서 각판을 할 수 있는 조경판(粗經板) 상태로 가공되어 각판장소에 옮겨졌을 것이고 돌배나무와 일부 산벚나무류, 자작나무류, 단풍나무류, 층층나무류 등은 남부내륙의 여러 지방에서 벌채되어 현장에서 조경판으로 제작되어 바로 각판장에 모아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