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호 장편소설 <제4의 제국, 2권 211~238쪽> 목관의 비밀
제3장 목관의 비밀
1990년 8월 12일 밤 9시.
경북대학교의 임산공학과 교수인 박상진(朴相珍)은 늦은 저녁을 끝내고 실험실로 돌아왔다.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는 연구원들과 함께였다.
마침 방학중이어서 캠퍼스는 텅 비어 있었고, 살인적인 더위는 한밤중이 되어도 열대야현상을 일으켜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배가 고팠으나 박상진은 식사를 드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로서는 일종의 흥분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몸살감기가 찾아왔을 때와 같은 이상야릇한 열기가 몸 안에서 끓어오르고 있었다.
나무의 세포 형태를 연구하는 목재조직학이 전공이었던 박상진은 마침내 숙원이었던 작업을 오늘밤에 해치울 수 있다는 흥분으로 편도선이 부어 있는 것도 잊고 있었다.
박상진은 오래 전부터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관목의 파편을 채취해 그것을 분석하고 싶다는 강한 열망을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고분에는 그 당시의 문화가 모두 집결되어 있으며, 그 시절 가장 호화로운 장신구와 가장 귀중한 보물들과 가장 세련된 문화의 유물들이 총망라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발굴된 대형 무덤들이 왕족들이나 귀족층의 무덤인 만큼 예술적인 모든 역량이 총동원될 수 있었으며, 특히 한 번도 도굴된 적이 없는 처녀분인 무령왕릉의 관목이야 새삼 일러 무엇 하겠는가.
문화는 항상 유동적인 것. 고립된 지역이 아니라면 이웃한 나라와의 끊임없는 교류로 변화하고, 발전하게 마련이다. 이러한 문화적 변동은 고분에 들어 있는 유물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즉 고분은 해당 시대의 총체적인 문화를 읽을 수 있는 압축파일과 같기 때문이다.
물론 박상진은 목재조직학이 전공이었으므로 고분에서 나온 보물이나 유물, 장신구 등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오직 고분 속에 들어 있는 목재가 그 주 대상이었다. 특히 고분 속에 들어 있는 관목은 그 무렵 최고의 권력자였던 왕의 시신을 감싸고 있는 신성한 물건이었으므로 그 무렵 시대 상황과 문화를 읽을 수 있는 대표적인 파일이었던 것이다.
무령대왕의 처녀분이 발굴된 것은 1971년 7월 5일이었으니, 정확히 20년 전의 일이었다.
만약 무령왕릉의 시신을 감싸고 있는 관목의 재질을 조사할 수 있다면 이는 1500년 전 무령대왕의 잃어버린 얼굴을 복원하는 일과 마찬가지였다.
총 108종의 2906점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유물이 출토된 무령왕릉. 그 수많은 유물들 중에는 왕과 왕의 시신을 감쌌던 11조각의 널빤지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그 관목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없어 이에 대해 분석하고 연구했던 사람은 전무했다.
그런데 바로 박상진만은 그 관목에 비상한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미 10여 년 전 신안 앞바다에서 침몰된 중국과 일본을 왕래하던 무역선의 나무 재질을 분석해 그 결과를 발표한 전력이 있었다.
중국 송나라와 원나라 때 만들어졌고, 도자기가 2만 점이나 실려 있어 ‘신안보물선’이라고 불리던 이 배는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의 대상이었지만, 그 선체의 나무 재질에는 그 누구도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상진은 나무를 문화재로 인식하고 이를 최초로 과학적으로 분석했던 ‘나무 역사학자’였던 것이다.
신안보물 선체의 재질을 분석한 이후 박상진의 연구대상은 문화재로 확대됐다.
경주 천마총에서 발굴된 ‘천마도(天馬圖)’의 바탕 재질을 분석하는 것을 시작으로 줄곧 무령대왕의 관목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화재 연구에는 무엇보다도 표본을 구하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 재질 분석을 하겠다고 청원서를 넣으면 마치 톱으로 문화재를 잘라버리는 파괴적인 일로 생각하고 일언지하에 거절당하는 것이 태반이었다. 사방 1밀리미터의 작은 파편이나 그보다 더 작은 표본만을 가지고도 전자현미경을 통해 나무의 종류 정도는 쉬이 분석할 수 있었음에도, 책임자에게 그런 사실을 설명해도 재질 분석이 성사되는 일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경우 재질 분석이 끝나도 별도의 허락이 있을 때까지 발표를 해서는 안 된다는 단서조항까지 붙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박상진은 벌써 10여 년 전부터 무령왕 관목의 표본을 구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여태껏 그 일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무령왕릉 발굴 당시의 발굴조사서를 구해 ‘목관(木棺)’에 대한 설명 부분을 우선 읽어볼 수밖에 없었다.
「…왕의 유해를 담았던 관은 단지 뚜껑인 관개만 남아 있을 뿐 그 아랫부분은 원형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뚜껑은 세 개의 장대한 재목을 아래위로 이어 마치 가옥의 지붕과 비슷한 모양으로 만들었으나 구성 방법이 특이하다. 중앙의 일면은 길이 2.5m, 넓이 24cm인데, 그 단면형은 정부(頂部)를 평탄하게 하고 좌우가 경사된 육각형이다. 나무의 두께는 8cm에 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발굴보고서의 내용을 본 순간 박상진은 강한 의혹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 때문이었다.
“왕의 유해를 담았던 관의 재목은 밤나무이다.”
발굴보고서대로라면 무령대왕과 왕비의 시신을 감싼 재질은 밤나무. 그러나 박상진은 이 보고서가 오류일 것이라는 강한 불신을 갖고 있었다.
물론 1990년경 경산 임당동의 고분에서 나온 관재는 밤나무였다. 밤나무 목재는 나무의 특성상 단단하고 잘 썩지 않으며,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어 사당의 위패, 제상 등 조상을 숭배하는 각종 제구를 만드는 재목으로 널리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밤나무로 관목을 만드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우리나라의 고분에서는 느티나무와 참나무, 그리고 소나무 등이 주로 사용되고 있었다.
황갈색 빛깔에 약간 윤이 나는 느티나무는 나뭇결이 매우 고우며, 썩거나 벌레 먹는 일이 적고, 다루기도 쉬웠다. 건조시킬 때 다른 나무에 비해 변형이 적은 이 나무는 특히 마찰이나 충격에도 강해 나무가 갖추고 있어야 할 모든 장점을 다 지니고 있어 예로부터 임금의 시신을 감싸는 영예로운 나무로 여겨지고 있었다.
특히 임금의 관을 ‘재궁(梓宮)’이라 불렀던 조선시대에는 녹나무와 굴피나무와 같은 나무를 관재로 사용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주로 소나무를 사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박상진은 무령대왕의 관재는 당연히 소나무가 아니면 느티나무일 것이라 추측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무령대왕의 유해를 넣었던 관목이 밤나무라는 학술보고서는 오류가 분명하다.’
박상진은 발굴보고서를 본 순간 확신했다.
결국 박상진은 이 보고서로 인해 더욱더 무령대왕의 관목을 연구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히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오랜 꿈이 이루어진 것은 몇 개월 전.
문화재관리국장이었던 정재훈을 만났을 때 박상진은 그에게 자신의 생각을 토로했으며, 의외로 쉽게 귀중한 표본을 얻을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았던 것이다. 정재훈의 소개서를 들고 당시 중앙박물관 유물부장이었던 이건무를 찾아가자, 그는 흔쾌히 수락했으며 마침내 꿈에 그리던 관목의 표본을 구할 수 있었다.
비록 엄지손가락 마디만큼의 작은 파편에 불과했지만 그것을 구한 순간 박상진은 감격해 눈시울이 충혈되는 것을 느꼈다.
숨막히는 교섭으로 마침내 무령대왕의 관재 조각을 입수한 박상진은 누가 그것을 빼앗을세라 소중히 품에 간직한 채 황급히 대학교의 연구실로 직행했던 것이다.
다행히 관재의 표본은 오래되어 나무 부분이 조금 썩기도 했지만 옻칠이 되어 있어 나무 세포의 기본 모양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발굴 당시에는 무덤 속으로 나무뿌리가 뒤엉켜 목관의 널빤지가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었으나 시신을 감쌌던 널빤지는 1500년의 세월을 용케도 견디고 썩지 않아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무령대왕과 왕비의 시신을 감쌌던 관목은 썩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던 것일까.
대체로 땅 속에 묻힌 나무 널빤지는 20~30년 정도면 거의 썩어버리고 만다. 무덤이 주는 적당한 습기와 일정한 물 그리고 캄캄한 어둠은 나무를 썩게 만드는 미생물에게는 최적의 조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제인들은 처음부터 이 같은 것에 대비해 특별한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즉 나무를 베어 완전히 건조시킨 후 그 나무를 수십 번에 걸쳐 옻칠을 했던 것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방수 페인트로 널빤지 전체를 완전 밀봉한 것과 같은 이치다.
결국 화려하게 황금으로 수놓은 그들의 정성과 절대로 물이 스며들지 못하게 만든 그들의 지혜와 그들의 뛰어난 옻칠 기술은 바로 1500년의 세월을 굳건히 버틸 수 있게 했던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박상진은 어렵게 구한 관목의 표본을 현미경으로 관찰하기 위해 하루 종일 세심한 작업을 반복했다. 대학원생들의 도움으로 우선 표본을 100분의 1밀리미터의 두께로 얇게 절단했다. 이때 사용되는 기계는 ‘미크로톰’이란 첨단기계.
목재의 세포를 관찰하기 위해 이렇게 얇게 썰어야 하는 정밀작업은 필수적이었다.
조교가 간신히 얇은 두께로 썬 박편(薄片)을 슬라이드글라스위에 얹은 후, 세포를 염색할 수 있는 색소를 한 방울 떨어뜨렸다.
박상진은 개인적으로 ‘사프라닌(safranine)’이란 색소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 색소는 박편을 선홍색으로 채색함으로써 보다 선명하게 세포막과 세포벽을 드러내는 특수염료였던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조교는 커버글라스를 덮었다.
“프레파라트가 준비됐습니다, 교수님.”
접안렌즈로 들여다보기 직전 일련의 과정을 모두 마친 표본을 현미경표본, 즉 프레파라트(preparat)라 부르고 있다.
현미경의 재물대에 얇게 절단한 박편을 고정시킨 조교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알겠네.”
박상진 역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접안렌즈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고 눈을 접착시켜 세포 모양을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박상진은 한 박자 쉬어가는 것이 옳은 판단이라 생각했다.
박상진의 전공과목은 목재조직학(wood anatomy).
나무를 이루고 있는 세포 모양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가장 큰 세포라야 기껏 머리카락 세 올 굵기. 그러므로 박상진의 연구는 늘 현미경과의 씨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점점 고고목재학(archeological woods)에 강한 흥미를 느끼며 현미경과 벗삼아 그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던 그도 막상 그토록 꿈꿔왔던 무령대왕의 관목세포를 직접 현미경을 통해 밝혀낼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자 긴장이 극에 이르고 있었던 것이다.
나무.
박상진은 나무를 사랑하고 있었다. 나무는 그가 연구하는 연구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애인이자, 벗이며, 종교였다. 초빙 장학생으로 일본 교토대학의 임산공학과에서 석사과정을 연구할 무렵부터 박상진은 연구실 앞 벽에 나무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나타내듯 다음과 같은 문장을 걸어두고 있었다.
“나무는 신성한 것이다.
나무와 이야기를 하고 나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자는 진리를 아는 사람이다. 나무는 스스로에게 집착하지 않고 늘 삶의 근본 법칙을 말해 주고 있다.”
헤르만 헤세가 쓴 ‘방랑(放浪)’이란 소설 속에 나오는 구절이었던가, 자신이 크게 감명받았던 이 구절은 박상진이 언제 어디서든 갖고 다니던 좌우명이었다.
‘그렇다.’
박상진은 완성된 프레파라트를 바라보며 심호흡을 했다.
‘나무는 헤르만 헤세의 말처럼 신성한 것이며, 삶의 근본 법칙을 말해 준다. 따라서 저 현미경에 놓여 있는 나무의 박편은 1500년 전에 죽은 무령대왕의 삶을 신성한 진리로서 밝혀줄 것이다.’
어느덧 날은 어두워져 실험실 창밖 밤하늘에는 무성한 별들이 떠 있었다.
“일단 먼저 식사들 하지.”
박상진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학생들을 쳐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2
박상진이 실험실로 돌아왔을 때는 가장 나이 어린 학생 하나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는 실험실을 교대로 지키도록 규정한 실험실의 수칙으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박상진의 철저한 연구 철학을 보여준다.
파수를 본 학생이 식사를 하기 위해 실험실을 나서자 박상진은 벽에 붙은 스위치를 모두 올렸다. 그러고 나서 세면대로 가 손을 깨끗이 씻었다.
현미경을 들여다보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은 그의 오래된 버릇이었다. 손을 씻으며 박상진은 심장의 고동 소리를 들었다.
‘마침내’
그는 수건으로 손의 물기를 닦으며 중얼거렸다.
‘무령대왕 관목의 비밀이 밝혀지는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손을 씻고 나서 그는 실험용 가운을 걸쳐 입고 프레파라트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리고 천천히 현미경의 접안렌즈에 눈을 밀착시켰다. 얼핏 사프라닌으로 인해 붉게 물든 세포가 현미경의 렌즈 속에 포착됐다.
박상진은 대물렌즈의 회전판을 돌려 세포의 크기를 50배에서 100배로, 100배에서 300배로 확대해 보았다. 마침내 500배의 크기로 확대하자 관목의 세포가 확연히 드러났다.
그 순간.
박상진은 심장이 멎는 충격을 느꼈다.
현미경으로 본 세포는 마치 질 좋은 섬유의 조직처럼 일년 동안 자란 나이테가 촘촘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세포 속에 있어야 할 송진 구멍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송진(松津, pine resin).
소나무에서 나온 담황색 수지로, 반드시 소나무과의 식물에서는 세포 속에 송진이 나오는 구멍이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송진 구멍이 없다면 그 나무는 소나무가 아닌 것이다. 송진을 분비하는 작은 샘이 없는 소나무는 전 세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단 하나의 예외라면 일본의 남부지방에서만 자라고 있는 금송(金松)에서만 가능하다.
박상진은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접안렌즈를 들여다보았다. 분명히 무령대왕 관목의 세포에서는 송진을 분비하는 작은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이럴 수가.’
박상진은 둔탁한 둔기로 머리를 강타당한 느낌이었다.
그는 처음 이건무로부터 표본을 받아본 순간 관목의 재질이 우리나라에서 자생하고 있는 소나무거나 느티나무로 막연히 추정하고 있었다. 실제로 현미경을 통해 확인한 결과 세포 조직은 소나무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반드시 송진을 분비하는 샘구멍이 있어야 함에도 그것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박상진은 두 번, 세 번 거듭 확인했으나 결코 송진 구멍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박상진은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생각하였다.
‘무령대왕의 관목은 일본에서만 생산되는 금송으로 만들어졌단 말인가.’
아니다. 박상진은 머리를 강하게 흔들었다.
무령대왕의 관목이 어떻게 일본에서 자라나는 금송으로 만들어질 수가 있겠는가.
그는 다시 한 번 세포를 확인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전자현미경으로 세포의 크기를 천 배로 확대해 보다 정밀하게 분석해 보기로 했다. 전자현미경으로 관찰하는 방법은 광학현미경과는 전혀 다르다. 광학현미경은 실사(實寫)를 통해 직접 눈으로 세포의 형태를 관찰하지만 전자현미경은 전자선을 쏘아 올려 표본에 빛을 반사시킴으로써 그 모습을 영사막을 통해 투영시켜 세포의 크기를 천 배 이상으로 확대해 볼 수 있는 최첨단 광학기계였던 것이다.
광학현미경을 통해 세포의 가로 단면을 확인했다면 전자현미경을 통해 세포의 길이 단면을 집중적으로 관찰함으로써 보다 세포를 확대해 정밀조사하기 위함이었다. 과연 전자현미경의 영사막에는 관재의 세포 모양이 천 배로 확대되어 투영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박상진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천 배로 확대된 세포에는 ‘창상벽공’이라 불리는 금송 특유의 모양이 또렷이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창상벽공(窓狀壁孔).
이는 전문적인 용어로 ‘window-like pit’이라고 한다. 문자 그대로 ‘창문과 같은 구멍’이라는 독특한 모습인 것이다. 마치 마천루의 빌딩에 내걸린 유리창과 같은 문양. 이 문양이 세포에서 보인다는 것은 이 나무가 첫 번째 광학현미경으로 확인한 것처럼 일본의 남부지방에서만 자생하고 있는 금송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는 뚜렷한 증거인 것이다.
이때의 심정을 박상진은 자신의 책 《역사가 새겨진 나무이야기》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확대된 세포 모양을 확인한 순간 나는 놀라움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일본인들이 자기네들 나라에만 있다고 자랑해마지 않던 금송의 세포 배열이 잃어버린 기나긴 세월을 일깨워주듯 내 눈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금송(sciadopitys verticillata).
박상진은 지켜보고 있던 학생들을 뒤로하고 일단 실험실을 빠져 나와 운동장에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금송은 겉씨식물 바늘잎나무 무리에 들어가는 늘 푸른 나무다. 혹 이름만 보고 ‘금빛 나는 소나무’쯤으로 생각하겠지만 소나무와는 정작 촌수 세기도 어려운 먼 친척일 뿐이다.
식물학적으로는 낙우송(落羽松) 과(科)에 속하는 침엽수이며, 자손이 귀한 금송(金松) 속(屬) 집안의 외동아들이다. 세계의 다른 어떤 곳에서도 나지 않고 오직 일본 열도의 남부지방에서만 자란다. 키가 수십 미터에 지름이 두세 아름을 훌쩍 넘어 자라는 큰 나무인 것이다.
판자로 만들어놓으면 연한 황갈색을 띠며, 고급스럽고 나이테가 살짝 드러나는 은은함이 돋보인다. 또한 잘 썩지 않으며 특히 습기가 많은 장소에 있더라도 오래 견딜 수 있어 고급 나무관으로는 최상품으로 꼽고 있다. 나무통이나 배를 만드는 데 알맞은 이 금송은 당연히 최고급 목재로서 일본 황궁의 기둥을 비롯해 귀족과 임금의 관재로 쓰였던 특산품인 것이다.
‘그런데’
박상진은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피우며 생각했다.
‘그렇다면 서력 523년 5월 7일 사망한 그 2년 뒤 그의 아들 성왕으로부터 장례를 치르고 등관(登冠)에 있는 대묘 안에 안장된 무령대왕이 어째서 자신의 시신을 안치할 관을 일본의 특산물인 금송으로 사용했던 것일까.’
물론 그 금송은 일본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소중하게 직접 운반되어 이 무덤으로까지 건너오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육체를 안치할 마지막 유택으로서의 관을 스스로 선택한 사람은 다름 아닌 무령대왕. 거기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역사적 비밀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역사학이나 고고학을 전공하지 않은 임산공학자로서의 박상진은 이 뜻밖의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지 몰라 몹시 당황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에게는 뼈아픈 상처가 있었다.
신안보물선의 선체를 분석해 1981년 한국임학회의 봄 총회 때 그 결과를 논문으로 발표했을 적의 충격이었다.
선체의 재질을 분석한 결과 박상진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즉 선체의 일부에서 일본에서만 자라고 있는 삼(杉)나무가 섞여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으며, 이를 토대로 논문을 발표하자 ‘신안보물선의 선체에 일본 삼나무가 섞여 있으므로 이는 분명 일본 배일 것이다’라는 특종기사가 도하 각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던 것이다.
갑작스런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로부터 문화재관리국의 확인전화까지 2, 3일간 경황 없이 상당한 부담 속에서 지내야 했던 박상진에게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안기부의 광주분실로부터 수사관이 직접 찾아왔던 것이다.
광주민주화운동 직후 권력 탈취에 혈안이 되고 있던 신군부로서는 신안 앞바다의 보물선이 일본 배라는 연구 발표에 몹시 심사가 뒤틀렸는지, 죄인 심문하듯 연구 동기부터 따지기 시작해 꼬치꼬치 신상명세서까지 작성한 후 급기야는 사용한 표본까지 압수했고,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광주(그 무렵 박상진은 전남대학교에 재직하고 있었다)를 떠나서는 안 된다는 확인각서까지 써야 했던 것이다.
박상진은 기억하고 있었다.
감금 아닌 연금 상태에서 열흘 동안 불안에 떨고 있었던 어두운 시절을. 그 무렵 박상진은 위협적인 상황과 외압적인 분위기에서 밤마다 불안에 떨었으며, 낮에는 학생들의 연구실 노크 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왜, 무엇 때문에 학계의 연구 결과 하나까지도 정치적으로 악용되어 검열대상이 되어야 하며, 더욱이 어렵게 구한 표본까지 압수당해야만 하는지,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무더위를 달래기라도 하듯 어느덧 밤하늘에서는 성긴 빗방울이 후둑후둑 듣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박상진은 비를 피할 생각도 없이 그대로 서서 생각에 잠겼다.
‘내가 지금 확인한 대로 무령대왕 관목의 재질이 일본의 특산목인 금송이라는 것을 발표한다면 그 영향력은 신안보물선을 능가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지니게 될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무령대왕의 관목 분석에만 그치지 않는다. 또한 이것은 단순히 농학 분야의 쟁점에만 그치지 않는다. 이것은 역사와 고고학의 영역을 뛰어넘어 우리나라 역사 교과서 전체를 새로 써야 할 만큼의 핵폭탄과 같은 가공할 살상력을 지니게 된다.
이미 신안보물선의 예를 통해 드러나지 않았던가. ‘신안보물선이 일본 배일지도 모른다’는 발표에도 자존심이 상했던 우리 민족이 아니었던가. 박상진이 안기부 요원으로부터 주목받은 것도 전국적으로 미묘한 시기에 자랑스러운 우리나라의 보물선이 일본 배라는 사실로 드러나는 것에 대한 맹목적인 거부반응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무령대왕의 관목이 우리나라의 소나무가 아닌 일본의 특산목인 금송이라고 발표될 경우, 그렇지 않아도 반일감정에 젖어 있는 국민들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그렇다면’
한 방울 두 방울 듣기 시작하던 하늘에서 쑤와와―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박상진은 처마 밑으로 들어와 비를 피하며 다시 생각했다.
이 일을 영원한 비밀의 상자 속에 숨겨버려야 할 것인가.
‘아니다.’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것은 학자로서의 양심이 아니다. 학자는 그가 밝혀낸 진실을 발표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도 말하지 않았던가.
나무는 삶의 근본 법칙을 말해 준다고. 나는 신성한 나무를 섬기는 목신교(木神敎)의 신도. 그러므로 나무가 말하는 교의에 귀를 기울이고 진리의 소리를 대신 받아 전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박상진은 조용히 실험실 안으로 돌아왔다.
그로서는 더 이상 관목의 재질을 분석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이미 수차례의 정밀작업으로 관목이 금송으로 밝혀진 이상 또다시 현미경을 통해 확인해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 오늘 실험은 이것으로 끝내도록 하지.”
초초하게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박상진은 짐짓 가볍게 말했다.
“알아내셨습니까.”
조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박상진은 대답 대신 머리를 끄덕였다.
“나무의 재질이 무엇인가요.”
“아직 모르겠어.”
박상진은 짧게 대답했다.
자신의 실험을 도와주는 조교에게까지 분석 결과를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 미안한 감정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적절한 때가 오지 않으면 그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털어놓지 않으리라 순간 굳게 다짐했다.
그는 직접 표본을 수습해 캐비닛에 소중히 보관하고 나서 실험실의 문을 닫고 어두운 복도를 걸어 나오며 문득 갈릴레이를 떠올렸다.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
1609년 네덜란드에서 망원경이 발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손수 망원경을 개량해 배율을 높여 천체 관측에 처음으로 사용했던 이탈리아의 천재 과학자.
지동설을 주장해 교황청으로부터 정식으로 파문당해 활동을 중단해야만 했던 갈릴레이.
비록 종교재판에서는 자신의 소신을 굽혀 천동설이라고 거짓 자백을 했지만, 그는 법정을 나오면서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
무리한 망원경 관측이 원인이 되어 말년에는 시력까지 잃었으며, 죽은 후에까지도 교황청으로부터 그 어떠한 공식적인장례를 치르는 것도, 또 묘비를 세우는 것도 금지당해야만 했던 갈릴레이. 그러나 결국 역사를 통해 그는 ‘불멸의 지성’
으로 다시 부활했던 것이다.
당분간 묵비권을 행사하기로 결심하며 어두운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박상진은 갈릴레이처럼 반복해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래도 그래도 무령대왕의 관목은 금송(金松)이다.’
3
1991년 10월 18일.
충청남도 공주 문예회관에서는 무령대왕발굴 20주년을 기념해 학술대회가 열렸다. 박상진은 역사학자가 아닌 농학자로서 이곳에 초대된 유일한 연사였다. 박상진이 발표한 논문의 제목은 ‘백제무령왕릉출토관재의 수종’.
물론 박상진의 논문은 무령대왕과 왕비의 목관이 일본에서만 자생하고 있는 금송이라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박상진의 발표 내용은 전 사학계를 뒤흔들어 놓는 핵폭발과 같은 엄청난 충격을 일으켰다.
실험실에서 전자현미경을 통해 무령대왕의 관목이 일본열도의 남부지방에서만 자라나고 있는 금송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지 정확히 1년 뒤의 일이었다.
지난 1년 동안 박상진은 이 사실을 발표해야 하는가, 아니면 당분간 판도라의 비밀상자 속에 놓아두고 적절한 시기가 올 때까지 침묵을 지킬 것인가를 끊임없이 망설이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박상진은 관목의 표본을 얻으면서 문화재 담당자로부터 별도의 허락이 있을 때까지는 발표를 해서는 안 된다는 단서조항을 들었으며, 반드시 이를 지킨다는 서명까지 날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의 심정을 박상진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학자라는 사람들의 속성이 새로운 것을 하나 찾으면 어디다 발표하고 자랑하지 않고는 입이 간지러워 못 견디게 마련이다. 따라서 순간 잊어버리고 그 내용이 새어나가거나 말 한 마디 잘못으로 오해라도 생길 경우 다시는 관계 기관으로부터 표본을 구하는 일은 그것으로 불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박상진이 끝까지 망설였던 주된 이유는 관계 기관과의 약속을 어기고 논문을 발표할 경우 다시는 표본을 구할 수 없게 된다는 두려움보다는 무령대왕의 관목이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부터 직수입돼 왔다는 역사적 사실이 던질 수 있는 가공할 파괴력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상진은 학자는 학자로서 지켜야할 양심이 있다고 생각했다. 학자가 지켜야할 양심을 저버린다면 그는 더 이상 학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교황청으로부터 파문당해, 마침내 종교재판에 회부되어도 ‘그래도 지구는 돈다’며 중얼거렸던 갈릴레이의 독백이야말로 학자들이 마땅히 지켜야 할 진리에의 증언이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무령대왕의 관목은 일본에서만 자라고 있는 금송이 틀림없으며, 그러한 사실은 무령대왕의 출신이 일본과 뗄 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증명하는 역사적 진실이었던 것이다.
바로 그 무렵 박상진의 마음에 용기를 불러일으킨 새로운 사실이 밝혀진다.
우연히 1936년 발간된 일본 교토대학의 오나카(尾中文彦)의 논문집을 구해 읽은 직후 박상진은 큰 충격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오나카는 박상진과 마찬가지로 원래 농학을 전공한 학자였으나 ‘고고목재학’에 관심을 갖고 일찍부터 그 방면에 많은 연구를 했던 대학자였다.
박상진이 교토 대학에서 유학하는 동안 순수목재조직학에 관한 연구보다 오히려 나무로 만들어진 문화재속에 숨겨진 비밀들을 찾아내는 일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어 옛 나무의 재질과 보존방법을 공부하는 ‘고고목재학’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대선배이자 고고목재학의 권위자인 오나카의 영향 때문이었던 것이다.
1915년.
일제강점기였던 이 무렵, 부여에서 논산 쪽으로 약 3km 떨어져 있으며, 사비성의 나성(羅城) 동편에 해당하는 야산에 줄지어 늘어서 있던 고분들이 일본학자들에 의해 집중적으로 발굴조사 되기 시작했다. 이 발굴 작업을 총지휘한 사람은 유명한 역사학자인 우메하라(梅原末治). 1915년부터 1937년에 이르기까지 일본학자들에 의해 앞뒤 2줄로 3기씩, 모두 6기의 고분들이 확인됐으며, 그중 4개의 무덤이 발굴 조사되었던 것이다. 이 야산의 고분군은 ‘능산리고분군(陵山里古墳群)’으로 불리는데, 이 고분이 주목받은 것은 이 무덤들이 백제의 왕릉으로 추정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능산리 왕릉’으로도 불리는 이 고분군은 사적 제14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후 1971년 보수공사 때 다시 1기의 고분이 발굴됨으로서 현재 모두 7기의 고분이 확인되고 있다.
이미 철저히 도굴되어 특이할 만한 유물들은 출토되지 않았으나 1호 무덤의 현실(玄室) 네 벽에는 사신도의 벽화가 남아 있었으며, 천정에는 고구려 고분 벽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연꽃무늬(蓮花紋)와 구름무늬(飛雲紋)의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이 같은 문양은 부여지방에서는 유일한 것으로 학계의 이목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놀라웠던 것은 동하총(東下塚)이라 불리는 1호 무덤에서 두개골의 파편과 옻칠된 목관의 조각 그리고 부속금구(金具)가 출토되었으며, 다른 5기의 무덤에서도 옻칠된 목관의 조각들이 나왔다는 사실이다.
오나카는 특히 이 목관 조각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결국 그는 1946년 발굴 책임자였던 우메하라에게 사정해 마침내 5기의 무덤에서 출토된 표본을 얻어 현미경검사를 한 결과 놀랍게도 이 5기의 목관이 모두 일본에서만 자라고 있는 금송임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능산리 왕릉은 무령대왕의 아들이었던 성왕(聖王)이 서력538년 공주에서 부여로 수도를 옮긴 후부터 서력660년 멸망할 때까지 122년 사이에 만들어진 왕들의 무덤이다. 이때의 기록이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이 나오고 있다.
“성왕.
16년 봄 사비(일명 소부리)에 수도를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하였다.”
따라서 백제의 역사는 성왕이 사비성, 즉 부여로 수도를 옮긴 뒤 위덕왕(威德王), 혜왕(惠王), 법왕(法王), 무왕(武王) 그리고 마지막 임금인 의자왕(義慈王)에 이르기까지 6대나 더 지속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능산리 고분의 총 7기의 왕릉에는 이들 6명의 왕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나머지 고분은 이에 준하는 왕족의 묘로 추정된다. 현재 7기의 왕릉이 누구누구의 무덤인지는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으나 어쨌든 5기의 무덤에서 출토된 모든 관목이 일본에서만 자라고 있는 금송을 사용했다는 것은 성왕의 아버지인 무령대왕 때부터 일본에서 자생하고 있는 금송을 관목으로 쓸 만큼 백제와 일본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드러내는 명백한 증거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뒤늦게나마 확인한 박상진은 큰 용기를 얻는다. 이미 1936년에 능산리 고분군에서 발굴된 5기의 왕들의 목관이 금송이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고증된 것이 사실이라면 자신이 밝혀낸 무령대왕의 관목 또한 금송이라는 비밀을 만천하에 공개한다고 해도 이것은 전혀 미증유(未曾有)의 대사건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만약 무령대왕의 처녀분이 일제강점기에 발굴되었다면 이미 관목이 금송이라는 사실은 오래전에 벌써 밝혀졌을 것이 아니겠는가.
능산리 고분군에서 나온 5기의 목관이 모두 금송으로 밝혀졌다는 오나카의 논문을 읽는 순간 마침내 학술대회를 통해 그러한 사실을 발표할 수 있는 큰 용기를 얻었던 것이다.
결과적이지만 박상진의 발표는 센세이션 그 자체였다.
이 내용은 즉시 학계의 정설로 인정되었으며, 박상진은 그로부터 3년 뒤인 1994년 마침내 꿈에 그리던 대로 공주박물관 지하 수장고에 보관되어있던 무령왕릉에서 나온 11개의 나무 관재를 하나하나 정밀 조사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자 더욱 더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다.
무령대왕과 왕비의 시신을 감쌌던 11조각의 널빤지 모두 일본의 특산목인 금송으로 제작되었음이 재확인되었던 것이다.
그뿐인가.
유물의 용도는 불명확하지만 2차 조사 때 이들과 함께 보관된 작은 나뭇조각에서 삼(杉)나무가 추출되었던 것이다.
무령대왕의 무덤에서는 목관 뿐 아니라 두침(頭枕), 목재 봉황두(鳳凰頭), 족좌(足座) 등 여러 가지 목재품들이 출토되었는데, 그 어디에서 떨어져 나온 목재 파편인지는 불분명하지만 분명히 삼나무가 검출되었던 것이다.
삼나무 역시 금송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만 자라는 특산목. 일본말로 ‘스기’라고 불리는 이 나무는 건축자재는 물론 목선의 재료 등으로 널리 쓰였으며, ‘만약 스기가 없었더라면 일본의 고대 건축물은 결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할 만큼 편백나무와 더불어 일본을 대표하는 나무였던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일본서기의 소잔오존(素盞嗚尊)의 신화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소잔오존’은 한반도와 관계가 깊은 일본 건국신화에 나오는 용감하고 잔인한 무사로, 그는 신대기에서 그의 털을 뽑아 삼나무와 편백나무 그리고 금송을 만들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서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소잔오존이 말했다.
‘한향(韓鄕)의 섬에는 금은이 있다. 내 아들이 다스리는 나라에 부보(浮寶:배)가 없으면 좋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소잔오존이 수염을 뽑아 흩어지게 하니 곧 삼나무가 되었다. 또 가슴의 털을 뽑아 날려 보내니 편백나무가 되었으며, 볼기짝의 털은 금송, 그리고 눈썹의 털은 녹나무가 되었다.”
그 뿐 아니라 소잔오존은 각기 그 나무의 쓰임새에 대해서도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삼나무와 녹나무, 두 나무는 배를 만드는데 쓰고 편백나무는 궁궐을 짓는데 쓰라. 그리고 금송은 백성이 산 속에서 장사를 지낼 때 시신을 감싸는 관재로 쓰라.”
이렇듯 삼나무와 금송들은 신대기 때부터 신들이 아끼는 나무 중의 하나였으며, 특히 금송은 시신을 감싸는 관재로 쓸 만큼 역사가 무척 오래된 나무였던 것이다.
서력 전 3세기경 도작문화가 시작된 미생시대의 고분에서도 금송이 관재로서 발견되고 있으며, 전방후원분이 시작되는 고분시대, 즉 4세기 후반에서 5 세기 초에 걸쳐 오늘날 오사카를 비롯한 긴키(近畿)지방에 조영된 무덤에서도 관재로서 대부분 신화에서 지정한대로 금송이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금송을 사용한 무덤의 주인공은 다른 나무를 쓴 피장자들보다 더 높은 신분이거나 지방을 다스리던 지배 계층에 해당되고 있었음을 일본 학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일본에서의 금송은 건국신화에서도 나오 듯, 서력 전부터 고급관재로 널리 사용됐던 신이 정해준 대표적인 일본의 나무였던 것이다.
마침내 박상진은 2차 조사에서 중대한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박상진은 무령왕릉에서 나온 관목의 널빤지 11개는 베어낼 당시 나무의 지름은 150cm, 나이는 3백년 이상이며, 현재 남아있는 무령대왕과 왕비의 관에 쓰인 널빤지의 길이와 넓이 그리고 두께와 같은 아름다운 관 덮개가 달린 고급 목관을 만들기 위해서는 적어도 관 하나를 만들 때 필요한 목재의 양은 열장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더욱이 다루다가 버리는 것과 건조 과정에서 갈라져 못 쓰게 된 것을 고려해보면, 실제로 쓰인 목재의 양은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박상진은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왕과 왕비의 관에 필요한 목재는 적어도 3, 40장이 넘었을 것이며, 이러한 양의 목재를 싣기 위해서는 작은 배라면 두 척이 있어야 하며, 설사 큰 배라도 한 배 가득 실어야 간신히 실을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양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3백년 이상이나 된 금송을 베어 판자로 켠 다음 오사카, 후쿠오카를 잇는 좁은 내해를 거쳐 한반도의 남해안으로 들어온 후 해안선을 타고 금강하구로 진입해 오늘날 공주인 곰나루에 닿게 한 무령대왕의 강력한 자력(磁力)은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일까. 자신의 시신을 감쌀 신성한 목관을 만들기 위해 그 방대한 양의 나무판자를 배에 싣고 오게 한 무령대왕의 강력한 카리스마는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무령대왕.
수장고에서의 제2차 조사를 끝낸 후 공주박물관 앞 뜨락으로 나온 박상진은 일제강점기에 세운 세 그루의 금송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서력 501년 41세의 나이로 즉위해 22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고 62세의 나이로 서력 523년에 생을 마감한 백제 제25대 임금 무령대왕,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 비교적 늦은 나이인 40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를 때까지 그는 일본에서 어떤 성장기를 보냈던 것일까.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낸 후 마침내 죽은 후에 자신의 시신을 감쌀 관재로 일본신화에 나온 금송을 선택한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던 것일까.
그 순간 박상진은 오래전부터 갖고 있던 또 하나의 수수께끼 하나를 마침내 밝혀낸 느낌이었다.
박상진은 줄곧 공주박물관 앞 뜨락에 자라고 있는 세 그루의 금송에 관해 강한 의문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어째서 일본 일본의 특산품인 금송 세 그루가 그곳에서 자라고 있는지, 분명히 일제강점기에 심어졌을 그 금송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항상 강한 의구심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야 마침내 밝혀지게 되었으니,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선조인 무령대왕 뿐 아니라 위덕왕, 혜왕, 법왕, 무왕, 그리고 의자왕들의 고토인 공주박물관 앞 뜨락에 조상들의 넋을 진혼하기 위하여 세 그루의 금송을 심었던 것이다.
세 그루의 금송은 불어오는 바람에 진저리치며 몸을 떨고 있었다. 자신들의 선조들이 무령왕의 시신을 감싸야만 했던 역사의 비밀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금은 무엄하게 파헤쳐져 전시되고 있는 대왕의 유물을 말없이 지켜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