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릉 관재서 일본특산 삼나무 검출(조선일보 97.06.30)
지난 71년 발굴된 백제 제25대 무녕왕(武寧王)릉의 관재(棺材)가지금까지 밝혀진 일본특산의 金松 외에 역시 일본에서만 발견되는 삼(衫)나무가 추가로 검출돼 무녕왕릉 관재가 일본에서 도입됐다는 사실이 30일 재확인됐다. 이에따라 무녕왕이 재위하던 6세기께 당시 동북아 강국으로 군림하던 백제와 일본 야마토(大和) 정권과의 밀접한 외교관계를 규명하는데 귀중한 증거가 될 것으로보인다.
이같은 사실은 경북대 朴相珍교수(임산공학)팀이 공주박물관에 보관중인 무녕왕릉 출토 목재의 재질을 조사한 결과를 최근 발간된 백제논총 제5호에 기고해 밝혀졌다. 朴교수는 지난 89년 1차조사에서 무녕왕릉의 관재가 일본에서만 발견되는 침엽수종인 金松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바 있다.
이번 2차조사에서는 1차조사 때보다 훨씬 많은 11개의 표본을 이용,수종 분석은 물론 관재를 만드는데 소요된 목재의 양과 이 목재의 수령까지도 분석해냈다. 2차조사에서도 대부분의 관재가 1차조사 때와 마찬가지로 金松으로 나타났으나 나무파편 1개는 역시 일본에서만 발견되는 삼나무로 검출돼 무녕왕릉에서 발견된 관재는 모두 일본에서 가져왔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됐다고 이 논문에서 朴교수는말했다.
논문에 따르면 상록침엽교목(常綠針葉喬木)인 金松은 세계적으로 단 1종류만 있으며 일본 혼슈(本州)의 저위도 지방과 시코쿠,큐슈 등 주로 일본 남방지방에만 분포하며 대체로 해발 6백-1천2백m의 고지대의 강수량이 풍부하고 습도가 높은 곳에자생하고 있다.
또 낙우송과(落雨松科)에 속하는 삼나무는 편백과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수종으로 일본에서는 건축재와 목선을 만드는데 널리 사용됐으며 우리나라에는 일제때 남부지방의 조림을 위해 도입됐기 때문에 삼국시대 당시 한반도에는 삼나무가 없었다고 朴교수는 밝혔다. 수종과 함께 나이테(年輪) 조사를 통해 무녕왕과 왕비의 관을 만드는 데는 수령3백50년 내지 6백년,직경 1백30㎝ 이상되는 거대한 金松들이 수십본 가량 사용된 사실도 아울러 밝혀졌다.
盧泰敦 서울대교수(국사학과)는 『아직도 백제와 야마토 정권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학설이 분분하다』면서 『무녕왕릉 관재의 수종분석으로 당시 백제와 일본과의 관계가 밀접했음을 입증하는 또 다른 귀중한 증거가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무령왕릉 棺材서 일본특산 삼나무 검출 (중앙일보 97.06.30)
지난 71년 발굴된 백제 제25대 무녕왕(武寧王)릉의 관재(棺材)가 지금까지 밝혀진 일본특산의 金松 외에 역시 일본에서만 발견되는 삼(杉 )나무가 추가로 검출돼 무녕왕릉 관재가 일본에서 도입됐다는 사실이 30일 재확인됐다. 이에따라 무녕왕이 재위하던 6세기께 당시 동북아 강국으로 군림하던 백제와 일본 야마토(大和) 정권과의 밀접한 외교관계를 규명하는데 귀중한 증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사실은 경북대 朴相珍교수(임산공학)팀이 공주박물관에 보관중인 무녕왕릉 출토 목재의 재질을 조사한 결과를 최근 발간된 백제논총 제5호에 기고해 밝혀졌다. 朴교수는 지난 89년 1차조사에서 무녕왕릉의 관재가 일본에서만 발견되는 침엽수종인 金松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바 있다.
이번 2차조사에서는 1차조사 때보다 훨씬 많은 11개의 표본을 이용, 수종 분석은 물론 관재를 만드는데 소요된 목재의 양과 이 목재의 수령까지도 분석해냈다. 2차조사에서도 대부분의 관재가 1차조사 때와 마찬가지로 金松으로 나타났으나 나무파편 1개는 역시 일본에서만 발견되는 삼나무로 검출돼 무녕왕릉에서 발견된 관재는 모두 일본에서 가져왔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됐다고 이 논문에서 朴교수는 말했다.
논문에 따르면 상록침엽교목(常綠針葉喬木)인 金松은 세계적으로 단 1종류만 있으며 일본 혼슈(本州)의 저위도 지방과 시코쿠,큐슈 등 주로 일본 남방지방에만 분포하며 대체로 해발 6백-1천2백m의 고지대의 강수량이 풍부하고 습도가 높은 곳에 자생하고 있다. 또 낙우송과(落雨松科)에 속하는 삼나무는 편백과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수종으로 일본에서는 건축재와 목선을 만드는데 널리 사용됐으며 우리 나라에는 일제 때 남부지방의 조림을 위해 도입됐기 때문에 삼국시대 당시 한반도에는 삼나무가 없었다고 朴교수는 밝혔다.
수종과 함께 나이테(年輪) 조사를 통해 무녕왕과 왕비의 관을 만드는 데는 수령3백50년 내지 6백년,직경 1백30㎝ 이상되는 거대한 金松들이 수십 본 가량 사용된 사실도 아울러 밝혀졌다.
盧泰敦 서울대교수(국사학과)는 "아직도 백제와 야마토 정권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학설이 분분하다"면서 "무녕왕릉 관재의 수종분석으로 당시 백제와 일본과의 관계가 밀접했음을 입증하는 또 다른 귀중한 증거가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입력시간 1997년6월30일 07시47분
"무령왕릉관재 일본서 가져온 것"<동아일보 91.10.22.10면>
해방이후 가장 크다란 발굴수확중의 하나로 꼽히는 백제 武寧王陵의 관이 일본열도 남부지방에만 분포하는 금송으로 만들어 졌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경북대 박상진교수(목재조직학)는 18.19일 공주 문예회관에서 열린 무령왕릉 발굴 20주년 기념 학술회의에서 발표한 논문을 통해 이같이 주장했다. 박교수는 무령왕릉 나무 관의 조각을 전자현미경을 이용해 분석한 결과 나무세포의 형태적인 특성상 금송임을 밝혀냈다고 주
장했다. 검사결과 나이테 폭은 평균 1.4-2.2 mm로 나이테 폭의 변동이 크지 않아 목재의 재질이 비교적 균일한 침엽수임을 알 수 있다는 것. 또 횡단면과 방사단면을 관찰한 결과 목재조직의 특성으로 볼 때 나무종류가 일본 특산의 상록침엽 교목으로써 세계적으로 1과 1
속1종만으로 구성되는 금송임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금송은 일본남부지방 고산지대의 강수량이 풍부한 곳에서 자생하며 잘 썩지 않고 습기에 강하며 향기가 있어 관재로서는 최고급에 속한다고 박교수는 설명했다.
박교수는 {무령왕릉관재는 일본에서 가져온 것으로 가공하기 전 원목은 지름 1백30cm 길이 3m 무게 3.6t에 수령은 3백년이상 된 큰 나무로 당시의 무역규모로는 엄청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그 동안 연구를 통해 무령왕릉 전축분(塼築墳) 형식이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판명된 데 이어 관재를 일본에서 가져온 것이 밝혀짐으로써 백제가 중국 일본과 긴밀한 문화 교류를 했음이 더욱 명백해진 셈이다.
<공주 김차수 기자>
백제문화硏 "무령왕릉" 학술회의 <조선일보 91.10.22>
71년 7월 충남공주 웅진동 송산리 고분군서 발견된 무령왕릉은 한일역사학계에 엄청난 충격을 던졌다. 그후 20년. 무령왕릉의 발굴에 따른 연구성과는 어떤 것이면 그것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공주대 부설 백제문화연구소(소장 朴秉國)는 18,19일 이틀간 공주시 문
화회관 소강당에서 {무령왕릉의 연구현황과 제 문제}란 주제로 학술회의를 열고 그 동안의 연구성과를 점검하는 한편, 백제사 연구의 진로를 모색했다.
참가학자들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지석을 비롯, 모두 1백8종 2천9백6점에 이르는 유물의 학술적, 문화재적 가치에 대해 논의하고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고 있는 倭-梁나라와의 관계, 백제를 둘러싼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에 대해 진단했다.
이번 학술회의에서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관재의 나무 종류를 농학자가 분석, 백제와 왜의 관계를 규명하는 논문을 발표해 눈길을 끌었다.
박상진교수(경북대)는 {백제 무령왕릉 출토관재의 수종}이란 발표에서 {무령왕릉에서 사용하고 있는 관의 목재는 일본열도 남부지방에만 분포하는 금송임을 각종 검사를 통해 확인했다}며 따라서 이 관재는 당시 倭에서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박교수는 {이 원목은 가공 전
직경 1백30cm, 길이 3m, 무게 3.6t이며 수령은 3백년이상으로 추정되는 거목으로 당시 두 지역간의 엄청난 교역규모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관계연구에도 중요한 증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왕릉 발굴자의 한 사람인 안승주(安承周)공주대 총장도 박교수의 연구를 높이 평가하며 {무령왕릉 출토품의 학제간 종합연구로 기록이 부족한 한국고대사의 연구영역 확대를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