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산리 고분 출토 목관재 철정(鐵釘) 부착 목편의 재질분석
경북대학교 임산공학과 교수 박 상진
1. 서론
땅속에 매몰된 목재는 주위 환경조건에 따라 제각기 다른 부후(腐朽) 과정을 거친다. 고분에서 출토되는 목관은 대부분의 판재가 오랜 세월을 거치는 대부분 썩어버리고 거의 목재의 원형을 잃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판자와 판자 사이을 잇는 철정(쇠못) 부분은 철이 부식되면서 목재세포의 내강으로 확산·침지되어 단단하게 고화(固化)되므로 그 부위가 미생물로부터 침입을 받지 않아서 그대로 보존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러한 유물에 대한 수종분석에 많은 어려운 점이 있다. 그 이유는 이미 목재의 재질과 산화금속의 복합으로 절단이 어려운 점과 산화금속이 목재 내강을 완전히 채우고 있어 수종분석에 필요한 목재의 조직을 관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목재와 금속을 분리하여야 하나 목재의 세포벽을 이루는 셀룰로오스, 헤미셀룰로오스, 리그닌은 금속에 비해서 쉽게 분해되어 목재만을 따로 떼어내는 데는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이에 본 실험에서 도금의 원리를 적용한 전기화학적 산화철의 제거방법을 도입하게 되었다. 도금시 전해액으로 많이 이용하는 강산성용액이 아닌 약 알카리성이나 중성용액을 사용하면 목재조직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은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여 분석하였다.
2. 재료 및 방법
2.1 공시재료
그림1과 같이 부여 능산리 일대 백제 고분에서 출토된 관재의 쇠못 주위에 붙어 있는 소량의 목재 시편을 사용하였다. 이들은 발굴 후 보존처리가 된 것으로 처리제를 제거하기 위해서 장시간 아세톤에 침지하였다. 송곳을 이용하여 못 주위에서 목재시편(1∼2mm내외)을 채취하였으며 필요에 따라서는 사포로 장방형의 블록시편을 만들었다.
2.2. 산화철제거
본 시료는 오랜 기간 금속의 산화 침투로 인해 목재 내강에 금속산화물이 가득 차있어서 금속산화물과 목재의 복합적 특성을 나타내었다. 쇠못이 영구자석에 붙었기 때문에 금속산화물이 철(Fe2+)을 함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으며 전기화학적 방법으로 산화철을 제거하였다.
제거 장치는 그림3과 같이 4개의 시험관이 직렬로 이들 각각의 시험관은 상호 연결시켰다. 첫 번째 시험관에 전해액을 조금씩 떨어트렸으며 양쪽 시험관에는 전극을, 중앙에는 시편을 두었다. 전해액은 증류수에 NaCl 0.1%를 녹였으며 알루미늄전극에 13.5V 2A의 직류를 통하게 하였다. 동시에 scale의 제거와 용액의 원활한 순환을 위해서 교반을 하였다.
이때 처리의 진행여부는 시편의 변색여부로 판단하였으며 시편이 검은 색 혹은 짙은 고동색으로 변했을 때에는 해부현미경을 통해서 세포내강에서의 산화금속물의 제거된 여부를 결정하였다. 재질의 변화에 따른 비교는 칼로 표면을 얇게 잘라 재질의 목재 특성으로 변화유무를 판단하였다.
2.3. 수종분석
목질만 따로 분석된 시편은 hand section과 Epon처리법을 혼용(混用)하여 3단면 절편을 만들었다. 시편의 크기가 작아서 각각 단면구별이 어려웠기 때문에 해부현미경으로 단면을 관찰한 뒤 방사와 접선단면은 면도날로 잘라서 아라비아고무액으로 커버글라스를 덮어 관찰하였다. 횡단면과 자르기 어려운 시편은 크기가 작고 강도가 약하며 쉽게 부스러져 버리는 점을 감안하여 Epon처리법을 사용하였다.
시편은 각각의 부위를 선별·절단하여 물에 수세한 후 알콜계 탈수(ETOH 30%<50%<75%<95%<99.8% ; absolute <propylene oxide)를 각 단계별 1시간씩 하여 에폭시수지로 embedding을 하였다. 그후 60℃의 건조기에서 경화시켰으며, Rotary microtom(Jung multicut)으로 1∼3㎛초박의 절편을 만들어 염색하여 캐나다 발삼으로 봉입하고 영구프레파라트를 제작하였다.
3. 결과 및 고찰
3.1. 산화금속제거
그림4는 처리 시 (-)전극으로 사용되었던 알루미늄막대이며 하단부에 금속산화물로 보이는 금색의 물질로 코팅되었다. 그리고 (-)극 주위의 유리표면에 흰색의 침전물이 발생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1주일의 시간이 소요된 후 재색은 붉은 색에서 고동색으로 변해 있었으며 해부현미경 관찰결과 처리이전에 내강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금속산화물이 제거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림2는 처리이전에 횡단면을 SEM으로 관찰한 사진이다. 왼쪽은 못과 인접한 부위였기 때문에 금속산화물이 더 심하게 침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세포 내강에 금속산화물이 존재하고 부분적으로는 내강을 완전히 막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때 재질은 거의 목재이기보다는 산화금속 덩어리이었다. 횡 방향 절단 시 분말이 되었고 섬유방향 절단 시 각각의 섬유로 해리되었다.
처리 후 시편은 산화금속의 제거되었고 가운데에서는 아직도 산화금속이 많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비교적 만재부가 산화금속의 제거가 늦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아직 남아 있는 금속산화물은 세포내강벽 S3층에 결합하여 존재하였으며 부분적으로는 내강을 완전히 채운 것도 있었다. 그러나, 처리이후에는 시편의 절단이 잘되었으며 특히 섬유가 축방향으로 잘 찢어지는 특성을 나타내었다.
3.2. 수종분석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관재 28점의 수종은 비자나무 24점과 소나무 4점이었으며 각각의 유물 번호는 다음과 같다.
①비자나무 : 유물번호 15, 16.1, 17.1, 17.2, 26, 29.1, 29.2, 30, 33, 36.1, 36.2, 36.3, 43.1, 43.2, 44.2, 44.3, 46, 48, 49.2, 52, 56, 58.1, 58.2, 58.3,
②소나무 : 유물번호 22, 53.1, 53.2, 60
3.2.1 비자나무(Torreya nucifera, カヤ)
그림 4-8은 배율을 달리하여 관찰한 횡단면사진이다.
횡단면에서 연륜경계가 명확하며 가도관과 방사조직만이 관찰되는 단순한 구조로써 침엽수임을 알 수 있었다. 방사조직은 비교적 파괴가 많이 이루어져 방사상의 긴 할렬이 관찰되었다. 가도관은 비교적 원형과 타원형이였으며 세포간극이 많이 존재하였다. 부분적으로 마치 축방향 유세포 인 것 같았으나 확대 관찰 시 결정으로 나타난 점으로 볼 때 제거가 덜된 금속산화물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림 9-12는 방사단면에서 관찰한 사진이다.
방사단면에서 조재가도관과 방사유세포가 만나는 직교분야에 형성되어있는 분야 벽공은 편백형이었으며 부분적으로 파괴가 많이 되어 타원형을 나타내는 것도 존재하였다. 가도관의 2차벽 내면에 나선비후가 현저히 관찰되었으며 2본 대칭의 독특한 형태를 가졌다. 가도관벽의 유연벽공은 파괴가 많이 이루어져 중심으로 향하여 찢어졌거나 혹은 벽공연이 완전히 파괴되어 큰 원형을 나타내는 것도 있었다.
그림 13-15는 접선단면에서 관찰한 사진이다.
접선단면에서는 2∼5세포고의 단열동성형 방사조직이 관찰되었다.
각 시편마다 열화는 많이 이루어졌으나 나선비후 2본대칭의 독특한 구조를 가지는 수종은 비자나무속의 비자나무밖에 없다.
이상의 특징으로써 이 시편의 수종은 비자나무속의 비자나무임을 알 수 있었다.
비자나무는 우리 나라의 전북내장산, 산양의 남부지방과 제주도 완도등지에서 분포하는 난대성(해발150∼700m)의 상록 침엽교목으로 높이 25m, 지름 2m에 달한다. 재질은 강도가 보통이지만 강성이 풍부하며 내균 및 보존성과 내수습성이 크고 뒤틀림 등의 결함이 적은 목재로 알려져 있다.
3.2.2 소나무(Pinus densiflora, アカマツ)
그림 20-21은 횡단면상에서 관찰한 사진이다.
횡단면에서 가도관과 방사조직이 관찰되었고 조재부에는 수직수지구가 파괴된 구멍이 보인다. 수지구 주위에는 파괴된 박벽의 에피델리얼세포를 관찰할 수 있었으며 비교적 조·만재 이행이 급한 편 이였다.
방사단면에서 방사가도관의 수평벽에서 거치상비후가 존재하였으며 조재가도관과 방사유세포가 만나는 직교분야에 형성되어있는 분야 벽공은 창상형태로 나타났다. 그리고 가도관벽의 유연벽공사이에는 눈섭모양의 트레베큘레가 존재하였다. 접선단면에서는 방사조직이 단열형과 방추형을 나타내고 있었으며 파괴된 수평수지구가 존재하였다. 이상의 특징으로써 본시편의 수종이 소나무과의 경송류임을 알 수 있었다.
4. 고찰
능산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목관재의 철정에 붙어 있는 목재의 수종은 분석 가능한 28점의 시료중 24점이 비자나무이고 나머지 4점이 소나무이었다.
비자나무는 난대성 수종으로서 현재는 백양산과 내장산이 북쪽 한계선이고 제주도에 큰 군락으로 자란다. 나무높이 20m, 지름 2m까지 자라는 상록침엽수 교목이며 일본에도 널리 분포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사, 동국여지승람, 세종지리지, 조선왕조실록 등에는 비자나무의 분포지역과 조정에 바치는 세공(歲貢)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옛날에는 더 많은 비자나무가 널리 분포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비자나무는 목재 뿐만 아니라 열매는 촌충의 구제약제로서도 널리 사용되었다. 비자 열매는 동의보감에 의하면 하루에 7개씩 7일동안 먹이면 촌충은 녹아서 물이 된다고 하였다.
고려사에 보면 원종 12년(1271)에는 을묘일에 <몽골에서 궁실을 지을 재목을 내라고 요구하였다. 또 중서성의 지시로 금칠, 비자나무, 노태목(奴台木), 오매(烏梅) 등의 물품들을 요구하였다. 또 흑구가 말로 전하는 비자나무란 것은 지방 사람들이 백목(白木)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추에게 그 산지가 어디냐고 물으니 그는 승천부의 금요도라고 답하였고 비자열매, 오동열매, 잣나무 열매도 역시 이곳에서 산출된다고 한다. ...우선 비목(榧木) 약간 쪽을 바친다>고 하였다. 비자나무 산지에 관하여는 문종 7년(1053) 2월에 <탐라국 왕자 수운라가 자기 아들 배웅교위 고물 등을 보내 비자 등 물품을 바쳤다>는 내용이 있다. 반역 이추 조를 보면 원나라 승상 안동이 말하기를<귀 왕국 소산 약품으로서 궁중 의국(醫局)에 비치하여 두고 쓸 만한 것이 있다는 말을 듣고 이제 김유 등을 보내서 채취케 하니 품목은 향백자(香栢子) 60근, 남해도 심모송(失母松) 50근, 남쪽 비자 50근, 송고병(松膏餠) 30근이며 또 복약 후 목욕방으로는 관음송(觀音松)에 고인 물과 풍면송(風眠松) 솔잎 2백 근>이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비자나무의 목재와 열매는 귀하게 여겨 진상에 관한 여러 기록이 있다. 연대 순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세종3년(1420) 1월13일 예조에서 아뢰기를, <“진상하는 물목 속에 제주의 감자(柑子), 유자, 동정귤(洞庭橘), 유감(乳柑), 청귤, 표고, 비자 등 물건도 또한 그 시절을 따라서 진상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제주도에서 진상하는 것은 면제하도록 명하였다>, 세종7년(1424) 6월14일 호조에서 아뢰기를, <창고에 남아 있는 참기름·다시마·꿀·비자·개암·표고·전복 등은 거둬들인지 해가 오래므로 장차 소용없이 되겠사오니 백성들로 하여금 돈을 바치고 사가게 하소서>하였다. 예종1년(1468) 2월29일 행 통례원 인의 고택이 제주의 폐단을 아뢴 상소문에서 < 한라산의 소산물은 안식향, 이년목(二年木), 비자, 산유자 등과 같은 나무와 선재(船材)들인데, 이 모두가 국용에 절실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근년 다투어 먼저 나무를 베고 개간을 하여 밭을 만들어서, 거의 모두가 붉게 되었습니다. 신은 원컨대 이제부터 나무를 베고 새로 개간하는 자를 엄히 금하게 하소서>하였다.
성종3년(1461) 1월30일 제주 점마 별감의 사목에 이르기를, <안식향, 유자, 비자목은 국용에 가장 절요한 것으로, 모두 한라산에서 나옵니다. 근래에 전부(田夫)가 옛 것을 싫어하고 새로운 것에 힘써, 나무를 베어내고 경작을 하니, 실로 염려할 만합니다>하였다. 성종24년(1492) 8월5일 전 개성부 유수 고태필이 제주의 일에 관해 아뢰기를 <신이 조모를 따라 제주에서 자라나서 본주의 일을 갖추어 경험하여 압니다. 국용에 가장 긴요한 산유자목, 이년목(二年木), 비자목, 안식향나무가 많이 생산되므로 일찍이 경차관을 보내어 표(標)를 세워서 벌채를 금하고 경작을 금하게 하였습니다>하였다.
중종14년(1519) 9월25일 왕이 조강(朝講)에 나아갔을 때 특진관 민상안은 아뢰기를 <각 고을에서 장원서(掌苑署)에 수납하는과일 중에 비자 같은 것은 그 수량이 너무 많아, 매양 그 수량을 감하도록 아뢰고 싶었습니다>하였다. 명종5년(1549) 5월4일 홍인을 무고로 세 차례 문초하였더니 <...박세번이 제가 상으로 비자를 받은 것을 그릇된 일이라고 고발하여 위협하려 하였고...> 하는 기록이 있다. 영조39년(1762) 3월20일 임금은 <제주에서 바치는 비자나무 판을 정지케 하라고 명하였다.
제주에서 해마다 비자나무 판 10부(部)를 바쳤는데, 재해가 든 해라 하여 5년을 한정하고 바치는 것을 정지하게 한 것이다>하였다. 영조45년(1768) 7월10일 봉상 제조(奉常提調) 신회가 말하기를,<제향에 쓰이는 비자와 표고는 제주에서 봉진하던 것인데, 중지하라는 하교가 있었으니 마땅히 선혜청으로 하여금 값을 쳐주어 바치게 하소서>하였다.
또 1983년 완도 어두리에서 인양된 고려초기의 민수용 화물운반선 선체의 저판(底板)일부와 완도 장좌리 청해진 유적지의 목책을 비자나무로 사용한 것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당시 비자나무가 남해안 지방에 얼마나 풍부하였나를 추정해 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상의 역사기록과 출토목재의 재질분석에서 볼 때 비자나무가 당시에도 제주도와 남해안에 풍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능산리 고분군이 백제 후기인 사비시대(538-660)의 고토인 점을 고려하여 볼 때 좋은 관재를 쓰기 위하여 멀리 남해안에서 비자나무를 운반하여 가져온 것으로 생각되며, 무령왕릉의 관재로 쓰인 금송을 일본에서 가져온 것을 고려해 본다면 비자나무를 일본에서 가져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혀 배제 할 수 없다. 최근 알려진 바에 의하면 축조년대가 7-8C로 알려진 일본의 唐招提寺, 大安寺, 神護寺, 元興寺의 관음보살상등이 모두 비자나무이었다. 이는 당시 일본과 백제의 관계로 볼 때 고고학적인 검토가 더 필요하다고 본다.
소나무는 재질특성이나 지금의 광범위한 분포상태로 보아서는 고대에도 비교적 널리 쓰일 것으로 생각 할 수 있었으나 三國以前의 관재에서는 거의 출토되지 않았다. 이번에 처음 출토되었으며 이는 우선 두 가지 측면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무늬가 아름답고 잘 썩지 않아 고급관재로 쓸 수 있는 비자나무를 가져 올 수 없는 계층의 관재일 가능성이며, 두 번째는 고려후기, 조선시대에 들면서는 거의 소나무로 관재를 만들었으므로 후대의 민묘 관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솔거의 노송도를 비롯한 안압지 출토 목선, 최근의 황룡사지 발굴목재, 고려초기의 완도침몰선등이 모두 소나무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에도 소나무가 관재로 쓸 수 있을 정도는 있었다고 보아야 하므로 비자나무와 같이 사용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이에 관하여는 더 많은 자료가 얻어지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다.
5. 결론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관재의 철정에서 분석한 관재의 재질은 28점의 분석 가능한 시편중 24편이 비자나무, 4편이 소나무이었다. 비자나무의 분포지역이 남해안 도서지방, 제주도, 일본에도 널리 분포하므로 관재의 벌채지역을 우리 나라 뿐만 아니라 일본까지 고려하여 더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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