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바다에서 발굴되는 침몰선
산림 2003. 12~2004년 01
최근 군산시 옥도면 '십이동파도' 근해에서 고려청자를 가득 싣고 가라앉은 고려시대 배 한척이 발견되었다. 3면이 바다인 우리나라는 예부터 활발한 해상활동으로 수많은 배가 왕래하였으므로 때때로 침몰 선박이 발견되고 있다. 옛 배가 발굴될 때 마다 우리들의 선입견은 우선 많은 보물을 싣고 있을 것이라는 상상이다. 그러나 청자가 실린 배는 값어치로 따지면 분명 보물선임에는 틀림없으나 그림의 떡일 따름이다. 배에 실린 모든 재화는 국가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바다에서 옛 배가 처음 발견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는다. 1975년 전라남도 신안 앞바다에서 750여 년 전 중국에서 일본으로 수출품을 싣고 가다 침몰해 버린 배한 척이 알려지면서다. ‘신안 보물선’이란 이름으로 신기루만 알았던 보물선의 실체를 만나게 된다. 비록 우리 배는 아니지만 이후 9년에 걸치는 발굴기간 내내 국민들의 관심은 온통 이 보물선에 쏠렸다. 정치적으로 유신과 군사 쿠데타로 이어진 암흑기였으니 절망을 딛고 보물선에 꿈과 희망을 기댈 수 있는 대리 만족의 수단이기도 하였다. 한편 이때 터득한 해양유물의 인양기술과 국민들의 높은 관심은 곧이어 발견된 완도선을 비롯한 다른 옛 배를 인양하는 원동력이 된다. 우선 중국 국적의 신안배와 벽파 통나무배부터 알아본다.
중국배로 시작한 옛 배 찾기
보물선 신안배
전남 무안에서 서쪽으로 끝도 없이 펼쳐지는 황토 밭 사이를 달려서 마지막 닿은 곳이 지도읍이다. 바로 앞 사옥도를 넘어 증도라는 섬이 있다. 이 섬의 끝자락 방축리에서 4km쯤 떨어진 앞바다에서는 우리나라 해양발굴역사를 뒤바꾼 유명한 발굴이 이루어졌다. 1975년 5월 고기잡이를 하던 한 어부의 그물에 청자화병 6점이 걸려 나오면서 보물선의 역사는 시작된다. 1976년 10월부터 1984년 8월까지 9년에 걸친 대장정이 이루어진다. 사실 오래전부터 이 일대는 도자기가 가끔 그물에 걸려 올라왔다. 조개가 다닥다닥 붙은 도자기의 진가를 알 리가 없는 어부들은 재수 없다고 깨트려 바다에 다시 던져버렸다. 조금 품새가 쓸 만하면 주모에게 건네고 막걸리 한 사발과 바꿔먹었다. 당시에도 괜찮은 것은 억대를 불렀으니 던져버린 어부들로서야 통탄해 마지않을 일이다. 못 알아보기는 막걸리 집 주모도 마찬가지, 마당 지킴이 멍멍개의 ‘청자 밥그릇’으로 쓰는 일이 흔하여 한때 신안군 일대를 다니면서 억대 개 밥그릇 수집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도 있었다한다.
신고를 받은 문화재청(당시 문화재관리국)은 다음해 10월 해군의 지원을 받아 발굴조사단을 구성하고 바다 밑을 뒤지기 시작한다. 밑바닥에 깔린 개흙이 일어나 앞을 전혀 볼 수 없고 조류가 빨라 가만히 서 있을 수도 없는 최악의 조건을 극복하고 발굴은 진행되었다. 해군 특수 부대 대원들의 고생하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유물과 함께 배 조각이 올라오면서 이배의 정체가 밝혀졌다. 14C초의 중국 원나라 국적의 무역선으로서 양자강 하구 영파(寧波)항을 출발하여 일본 교토 동복사(東福寺)로 가는 수출품을 싣고 가던 배였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사고를 당하여 이곳에 침몰한 것이다. 자그마치 22,000여점의 송.원나라 때의 도자기를 비롯하여 28톤의 동전과 자단(紫檀) 원목 등 막대한 양의 유물을 찾아냄으로서 ‘신안 보물선’이라는 영예에 부끄러움이 없었다.
아울러서 7백 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침몰한 배의 뱃몸(船體)가 발견된 것이다. 대체로 침몰한 목선은 바다 생물들이 금세 먹어 치워버리기 때문에 뱃몸이 남아있는 경우는 드물다. 개흙이 바로 배를 덮어버려야 가능하다. 이곳은 바닥이 고운 개흙이고 조류가 빨라 이런 조건을 잘 갖추고 있다. 남아있는 모습은 뱃머리가 북동쪽으로 기울어 갑판은 거의 없어지고 오른편 뱃전의 전부와 왼 뱃전1/3정도만 남은 채 비스듬히 누워 20m아래 개흙 속에 묻혀 있었다.
우리배와는 달리 용골(龍骨)을 갖추고 아래가 뾰족한 첨저형(尖底型)이 특징이다. 칸막이가 있는 격벽 구조로서 크기는 길이 28.4m, 최대나비 6.6m, 높이 4m로 거의 2백 톤에 이르는 당시로서는 최첨단 시설을 갖춘 큰 배이었다. 발굴은 먼저 배에 실려 있던 화물들을 들어 올리고 뱃몸을 물속에서 해체하여 720편의 조각으로 만들어 인양되었다. 신안선의 발견은 문헌상으로만 짐작해 오던 옛 동양 배를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 중국배에 쓰인 나무는 여러 종류이다. 배의 외판 과 밑판 및 용골은 모두 중국남부 지방에 자라는 소나무의 한 종류인 마미송(馬尾松, Pinus mansonia)이었다. 뱃사람들의 식수 저장탱크의 일부로 보이는 부분과 뱃전에 덧댄 나무(防舷材)는 역시 중국남부에 자라는 넓은잎삼나무(廣葉杉, Cuninghamia lanceolata)로 만들어졌다. 또 배안의 칸막이를 고정한 나무와 파도를 막기 위하여 설치한 뱃전의 높임나무 현장(舷墻)의 일부는 녹나무이다. 그 외에도 뱃몸에 쓰인 나무로는 조록나무, 가시나무 등이 있고 쓰임은 알 수 없으나 잣밤나무 말뚝도 수십 개 있었다.
이 배를 만든 나무, 실려 있는 나무의 공통점은 모두 중국 양자강 남부에 널리 자란다는 점이다. 이는 배가 어디서 만들어 졌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실증적 자료이다.
또 이 배에는 인도가 원산인 자단 원목 1,000여개가 실려 있었다. 지름 10-30cm, 길이 2m정도인 이 자단은 일본인들이 불상을 비롯하여 고급조각재로 쓰는 재료이다. 자기들이 직접 인도까지 가서 가져올 수 있는 항해술이 없어서 중국을 통하여 수입해다 썼다. 자단이 실려 있다는 사실은 이 배의 교역범위가 멀리 인도까지 이르는 무역선임을 증명해 주는 증거이다.
벽파 통나무배
진도 대교를 건너 바로 우회전하여 들어가면 금세 벽파진이란 곳과 마주한다. 제주도를 포함한 남해안을 들어가는 길목의 교통 요지, 한때 번성한 항구였으나 지금은 쇠락한 옛터일 따름이다. 이곳에서 1991년 개흙에 묻힌 통나무배가 한척이 발굴되었다. 13-4C의 중국배로서 위 부분이 썩기는 하였어도 대체적인 모양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남아있는 상태로서의 크기는 길이14.4m, 나비2.3m, 깊이 0.7m이었으며 나중에 복원해 보니 실제 길이는 19m에 이르렀다.
이 통나무배는 녹나무로 만들었다. 녹나무는 아열대 지방을 대표하는 나무로서 중국남부와 일본의 남부지방, 제주도 등에도 자란다. 크게 자라는 나무로 유명하고 물에 견디는 힘이 강하여 예부터 배를 만드는 재료로 애용되어 왔다. 필자가 계산한 나무의 나이는 750여년, 높이 30m, 지름 약 3m, 무게만도 38톤에 이른다. 이런 어마어마한 나무를 잘라서 속을 파내어 통나무배로 만드는 일도 엄청난 품이 들었을 것 같다. 흔히 말하는 일엽편주(一葉片舟)보다야 큰 배이지만 거센 황해바다의 파도를 넘어 벽파진까지 들락거린 옛사람들의 삶은 모험과 도전으로 이어져 온 것 같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를 터전으로 살아온 우리나라는 먼 옛날부터 배를 만들고 항해하는 기술이 발달하였다. 강과 연안을 따라서 생필품의 이동에도 배는 필수품이었고 어민은 생계의 수단으로서 어선을 만들어야 했다. 중국과 무역을 위하여 커다란 상선이 필요하였으며 왜구를 격퇴하는 데는 싸움배가 있어야 했다. 이렇게 우리민족이 이 땅에 들어오면서부터 배는 만드는 기술은 바로 민족의 운명을 좌우하였다.
그러나 선조들의 솜씨를 짐작할 수 있는 자료가 미비하여 실물 옛 선박의 발굴을 고대하여 왔는데, 다행히 근래 옛 우리 배 3척이 인양되었다.
우리 배 발굴의 역사
안압지 나무배
경주지역 문화관광개발사업의 일환으로 1975년3월25일에서 다음해 3월25일까지 만 1년에 걸쳐 안압지 발굴이 있었다. 작업이 시작되고 한 달도 채 안된 4월 16일 진흙 속에 뒤집어져 밑창을 들어낸 작은 배하나가 확인되었다.
배의 크기는 전체길이 5.9m, 뒤 부분 너비 1.5m, 뱃머리너비 0.6m, 높이 0.35m, 밑판두께 13.5-18.5cm이다. 이배는 그림과 같이 3쪽으로 구성되는데 우선 통나무배를 반으로 가르고 사이에다 밑판을 하나 더 넣은 형태이다. 밑 부분은 편평하게 깎아내었으며 우리배의 기준모양이 된 평저선의 시조였다. 비록 아무런 장식도 없는 간단한 구조의 배이지만 가장 오래된 실물 배로서 우리 배 구조의 기원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사용한 나무는 3쪽 모두 소나무이었으며 함께 출토된 노(櫓)도 같은 소나무였다. 지름 약 60cm의 그리 크지 않은 원목을 베어다 쓴 것으로 보이며 소나무를 쓴 이유는 비교적 가벼우면서 물속에서 오래 버티기 때문일 것이다.
안압지는 전체 면적이 70,264㎡ 남짓한 좁은 인조호수인데, 이 배의 쓰임새가 무엇 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안압지라는 이름은 나타나지 않고, 임해전에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경순왕이 후백제 견훤의 침입을 여러 번 받아 위기를 느끼자, 왕5년(931)에는 태조 왕건을 초청하여 위급한 상황을 호소하며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런 정황으로 보아 ‘놀이 배’로 짐작하기도 한다. 그러나 장식이 없고 단순하며 뱃몸이 너무 두꺼워 움직임이 둔한 배이니 여러 가지 다른 쓰임새를 생각할 수 있다.
화물 운반 완도배
전남 강진반도의 끝자락 마량항에서 배로 30분 정도의 거리에 조약도라는 제법 큰 섬이 있다. 1983년 12월 한해가 저물어 가 즈음, 섬의 북쪽 어두리 앞 바다에서 키조개를 캐던 잠수부들은 바다 속에서 청자 4점을 건진다. 곧 바로 당국에 신고하면서 완도배는 처음 세상에 알려진다. 문화재청(당시문화재관리국)은 발굴단을 구성하고 1984년 3월에서 5월에 걸쳐 유물과 배를 건져 올렸다. 약 3만여 점의 청자와 청동제 유물, 9점의 목제품 등 귀중한 유물을 찾을 수 있었다. 청자는 고급품이 아니라서 예술적 가치는 적었으나 학술적인 중요성이 있는 유물이었다.
아울러서 갑판 부분이 없어진 뱃몸의 상당 부분이 비교적 좋은 상태의 고선박이 남아있었다. 배는 길이 9m, 나비3.5m, 깊이1.7m 크기에 약 10톤 규모의 외돛배이다. 대체로 고려초기인 11세기 중·후반경 해남에서 주로 일반 백성들이 사용하던 그릇들을 싣고 항해하다가 침몰한 장삿배(商船)로 알려졌다. 이 배는 안압지 배가 비록 시대는 앞서지만 바다배로서는 최초로 발굴된 가장 오랜 순수 우리의 배이었다. 무엇보다도 자료의 부족으로 연구가 부진했던 '우리배(韓船)'의 역사와 그 발달과정을 연구하는데 너무나 중요한 발굴이었다.
배를 만드는 데는 여러 종류의 나무가 쓰였다. 바깥을 두른 외판과 밑바닥 판은 대부분 소나무이었으나 외판은 상수리나무, 밑판은 비자나무가 섞여있다. 좌우 외판을 긴 가로통나무로 연결하여 벌어지는 것을 막는 가룡목(加龍木)과 밑판을 옆으로 서로 이어주는 장삭(長槊)은 상수리나무, 외판을 아래위로 연결하는 데 쓰인 나무못(皮槊)은 느티나무였다. 또 밑판을 보호하도록 덧댄 나무에는 졸참나무와 굴피나무가 쓰였다. 기타 목제품의 일부에서는 동백나무가 있었다.
이런 나무들은 옛 배가 무슨 나무를 사용하여 만들어지는지를 알아 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특히 밑판에 쓰인 비자나무는 배가 어디서 만들어졌는지를 알아내는 알림방 구실을 한다. 왜냐하면 이 나무는 따뜻한 기후를 좋아하여 남해안만 자라는 난대수종이니 적어도 배는 비자나무가 자라는 곳에서 만들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어서다. 아울러서 배를 사용하다가 수리하는 과정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굴피나무와 목제품 재료인 동백나무 역시 남해안에 많은 나무다. 배 만들 때 쓰인 나무 특성으로 보아 이 배를 만든 지역은 우리나라 남해안 지방의 어느 하구(河口)로 짐작할 수 있다. 한편 배의 밑판은 바깥쪽으로 두께 1mm정도의 거의 균일한 새까만 층이 있다. 이 층은 주사전자현미경으로 관찰한 결과 바다 벌레가 침해 할 수 없도록 외판의 표면을 얇게 태운 탄화층이었다. 이는 9백여 년 전 우리 선조들은 나무배를 오래 쓸 수 있는 대단히 과학적인 기술을 익히 알고 있었든 것으로 짐작된다.
목포 달리도 배
달리도는 목포시 서쪽 6.5km, 영산강 하구에서 잠깐 내려선 곳에 있는 작은 섬이다. 영산강 하구언 공사가 완공되면서 이 섬에도 해안이 깎여 나가는 등 약간의 지형변화가 있었다. 1989년 섬의 북쪽 ‘지픈골’이란 마을 앞 갯벌에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옛 배 잔해가 들어났다. 실제 발굴은 1995년 초여름에 이루어졌다.
달리도 개펄에서 발굴된 나무배는 방사성 탄소연대측정법으로 조사한 결과 13∼14세기경 고려 사람들이 사용한 전통 우리 배이었다. 크기는 길이10.5m, 나비2.7m, 깊이0.8m정도이며 약 10톤짜리 배다. 배의 앞 뒤 부분이 모두 썩어버렸으나 바닥이 남아 있어서 옛 모습을 짐작할 수 있었으며, 시대가 조금 앞서는 완도선과 함께 우리의 옛 배의 구조와 재질을 알아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배의 몸체는 소나무를 사용하였으며 가룡목은 상수리나무와 졸참나무로서 완도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배의 뱃몸은 거의 소나무임을 다시 한 번 확인 할 수 있다. 그 외 나무못 일부는 뽕나무를 사용하였는데, 지금도 옛 배를 만드는 장인들은 뽕나무를 쓰고 있다. 꼭 뽕나무를 써야만 한다기보다 내려오는 습관으로 같은 나무를 이용한 것이다. 완도선의 나무못은 느티나무이었다.
거북선을 인양하려는 꿈과 좌절
해군에서는 오래전부터 임진왜란 당시 남해안 어디엔가 가라앉아 있을 지도 모르는 실물 거북선을 인양해보려는 욕심을 갖고 있었다. 이런 뜻이 받아들여져서 1989년 8월1일 해군사관학교에 ‘충무공해전유물발굴단‘이 발족한다. 말 그대로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 수십 년 걸려도 임진왜란 때의 싸움배 판자조각 하나 찾기도 어려울 터이다. 그러나 군조직의 특성상 기다림에 익숙하지 않아 수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그래도 96년까지 발족 후 7년에 걸쳐 기초조사를 하고 자리를 잡아갈 즈음, 발굴단 자체의 불미스런 일로 잠시 해체되었다. 다시 98년부터 ’해저유물 탐사단‘이란 이름으로 다시 업무를 시작하였다.
임진왜란의 역사를 읽다보면 제대로 저항 한번 못하고 처참하게 지는 육군의 무기력함에 심한 분노와 좌절감을 느낀다. 그래도 우리의 자존심을 조금이라도 살려준 싸움은 이순신 장군이 이끈 해군의 승리일 것이다. 승전보의 한가운데는 장군의 뛰어난 전술이 있었지만 거북선을 비롯한 우리 싸움배의 튼튼함도 크게 한 몫을 하였다.
우리 배의 가장 큰 특징은 다른 나라 배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용골이라는 배의 등뼈를 기준으로 판자를 붙여, 배의 아래가 역 삼각형으로 좁아진다. 그러나 우리 배는 이런 용골이 아예 없고 밑이 편평한 사각 통 모양의 평저선(平底船)이다. 이것은 해안선이 길고 갯벌이 많은 서남해안에 배가 출입할 수 있는 매우 적합한 구조다. 썰물 때 배를 갯벌에 올려놓고 작업을 할 수 있으며 특별히 항구가 아니라도 어디에나 배를 정박 시킬 수 있다.
평저선을 기본 구조로 하여 우리의 배는 쓰임새에 따라 여러 모양으로 만들어 졌다. 화물운반선, 삼남지방에서 세금으로 받은 곡식을 운반하는 조운선 등 일상의 경제활동에 쓰이는 배를 비롯하여 싸움배가 발달한다. 조선 초기에 들어 특히 싸움배는 맹선(猛船)이라 하여 조운선과 싸움배의 기능을 같이하는 배가 있었으나 너무 무거워 쓸모가 없다는 논란이 성종 때 있었다. 맹선이 개량되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7년 전인 명종 10년(1555)에 판옥선(板屋船)이란 전용 싸움배가 만들어졌다. 판옥선은 이후 조선왕조 해군의 주력함으로서 임진왜란 때 큰 역할을 한다. 판옥선은 우선 다층 전함이라는 점이 가장 큰 특징 이다.
판옥선은 한마디로 2층으로 된 큰 배로서 중국배나 일본배에 비하여 몇 가지 이점이 있었다. 우선은 크기가 크고 두꺼운 판자를 사용하였으므로 배가 견고하여 웬만큼 풍랑이 있어도 항해가 가능하다. 또 다른 배는 갑판 위가 노출되어 있어서 적의 공격을 쉽게 받으나 판옥선은 전투병이 2층 갑판에서 내려다보고 공격할 수 있고 노를 젓은 노군은 1층에 숨어버릴 수 있다. 또한 판옥선의 넓은 갑판은 대포를 설치하기에도 좋으며 사정거리도 늘릴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판옥선은 결정적인 단점을 갖고 있었다. 배가 크다 보니 당연히 속도가 늦고 전쟁의 기본요소인 기동성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처음에는 가볍고 날렵한 배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일본배와의 싸움에 효과적이지 못하였다. 차라리 크고 단단하게 만들어 당파라는 박치기 전법으로 그들을 제압하려 하였다. 이어서 판옥선의 구조 개선도 이루어졌다. 판옥선의 2층위하다 다시 거북모양의 구조물을 얹어 천하무적 거북선을 만든 것이다. 이제 거북선을 만든 재료부터 찾아 들어가 보자.
거북선을 만든 나무
박치기에 이기는 데는 우선 들이받은 배의 강인한 구조와 함께 단단한 뱃몸(船體)이 필요하다. 우리 배가 강한 것은 무엇보다 배의 겉판이나 밑판을 만든 나무의 강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선시대의 싸움배에 관한 기록과 당시 숲의 구성을 추정해볼 때 거북선의 뱃몸은 대부분 소나무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소나무는 여름에 만들어진 단단한 세포가 나이테 속에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배의 겉판을 만드는 바늘잎나무 종류 중에는 다른 어떤 나무보다 단단하다.
또 우리 배는 등뼈랄 수 있는 용골이 없고, 밑이 편평한 평저선이니 강도를 보강하기 위하여 두꺼운 판자를 쓸 수밖에 없다. 배 자체만으로도 튼튼한데, 박치기에 알맞도록 주요 부위는 더 강한 나무로 보강을 하였다. 주로 참나무, 가시나무, 녹나무와 같은 나무를 썼다. 실제로 조선시대 싸움배의 앞부분은 진목(眞木), 즉 참나무로 만들었다 한다. 참나무는 1cm3에 5백kg의 압축강도에도 견딜 만큼 단단하고 질기다. 특히, 또 다른 참나무 종류인 가시나무는 더 단단한 나무이다. 정종18년(1794) 호남 위유사 서용보가 임금께 올린 글 중에, ‘가서목은 강하고 질긴 좋은 재목으로서 군용으로 수요가 크다’고 하였다. 가서목은 오늘날의 가시나무를 말함이며 나무의 특성상 배 만드는데 중요한 쓰임새였음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런 나무만 사용하여 배를 만들 수도 있지만 너무 무거워 민첩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고, 또 노 젓는 병사들도 힘이 기하급수적으로 더 들게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선체의 대부분은 소나무로 만들고 중요한 부위만 다른 나무로 보강한 것이다.
일본 배는 어떠한가? 일본의 산에는 우리처럼 소나무가 흔한 것이 아니라 삼나무나 편백나무라는 나무가 주로 자란다. 곧고 빨리 자라는 이점은 있으나 무르고 약하다. 이런 나무로 만든 배는 우리의 소나무 배와 부딪쳤을 때 당해낼 재간이 없다. 그래서 처음부터 싸움 전략이 우리와 다르다. 우리 배에 살짝 갖다 붙이고 건너와서 칼로 제압을 하자는 것이다. 속도가 빠르고 움직임을 쉽게 하도록 배를 만들어야 하니 뱃몸 판자의 두께도 얇고 배의 전체 크기도 작은 것이 유리하다. 큰 싸움이 벌어졌던 칠천량 전투(1597)를 묘사한 그들의 기록에 이런 말이 있다. ‘조선배는 우리 배보다 비교가 안될 만큼 크다. 그래서 조선배에 바짝 달라붙어도, 자루의 길이가 두 칸이나 되는 창으로 미치지 못하니 배에 뛰어드는 것은 어림도 없었다.’고 하였다.
이처럼 크기도 클뿐더러 참나무를 비롯한 단단한 나무로 주요부위를 보강한 우리 배로, 일본 배를 향하여 돌진 앞으로!를 감행하면 다음 상황은 물어 볼 것도 없다. 또 꼭 정면 박치기가 아니라 옆면으로 부딪쳐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우리 배를 만들 때 배의 너비 방향을 고정하고 튼튼히 할 목적으로 가룡목(架龍木)이라는 가로 버팀목을 쓰는데, 이 역시 참나무나 가시나무이다. 자그마치 비중이 0.8이나 되고 압축강도는 1cm2에 800kg이나 버틸 수 있는 나무다. 근본적으로 조선재료의 우수성 때문에 임진왜란의 해전에는 일본 배가 맥을 쓰지 못했다.
거북선의 인양은 가능한가?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을 우리 국민 모두가 소망하는 대로 과연 그 웅장한 모습을 실물로 볼 수 있을까? 실망스럽게도 거북선 자체를 인양할 가능성은 그렇게 많지 않다.
우선 기록으로 보아서 임진왜란 때 만들어진 거북선은 3척에 불과하다. 전라좌수영에서 건조된 영귀선(營龜船), 방답진에서 만들어진 방답귀선, 순천부의 순천귀선이 전부이다.
김재근 전 서울대 교수의 추정에 따르면, 임란이 끝난 후 숙종 때까지는 5척 정도이었으며 정조 때에는 40여 척으로 늘어났다가 순조8년(1808)에는 30척으로 차츰 줄어들었다 한다. 가장 바람직하다면 임란 때의 3척 중에서 1척을 인양하는 것이고, 아쉬운 대로 임진왜란이 끝난 후 만들어진 수 십 척 중 1척이라도 건져 올려지는 것이 우리의 희망사항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배와 싸움을 벌인 주체는 3척밖에 없는 거북선만이 아니고, 사실은 판옥선(板屋船)이라 불리는 일반 싸움배가 바다싸움의 중심에 있었다. 거북선과 거의 같으나 거북등 모양으로 덮여진 지붕이 없고 병사들이 갑판에 바로 노출되어 있는 구조다. 기록으로 알려진 것만 수 백 척에 이르니 판옥선이라도 인양할 수 있다면 거북선의 복원은 가능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음은 가라앉은 거북선이 바다 속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남아 있을까하는 문제이다. 침몰한 나무배에 제일 먼저 목선천공충(shipworm)과 바다나무좀(limnoria)이라는 바다벌레들이 덤벼든다. 그래서 가라앉은 배가 오랫동안 남아있기 위한 조건은 이들의 침입을 막아줄 개흙(뻘)이나 모래가 얼마나 빨리 얼마나 두껍게 침몰선을 덮어 버리느냐에 달려있다. 바다벌레는 이렇게 덮인 두꺼운 이불을 뚫고 들어 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런 곳이 완전한 안전장소는 되지 못한다. 이번에는 나무의 뼈대가 되는 셀룰로오스 성분만 분해해버리는 연부후균(軟腐朽菌, soft rot)이 기다렸다는 듯이 덤비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해 속도가 너무 늦어 조금 두꺼운 나무를 먹어치우는 데는, 수 백 년이 걸리니 임진왜란 때의 배 정도는 아직 남아있을 수 있을 수 있다.
임진왜란 때의 거북선이나 판옥선을 비롯한 싸움배가 어디에 침몰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기록에 나와 있는 몇 개의 격전지 중 개흙이 두껍게 쌓이고 조수의 흐름이 빨라 쉽게 묻힐 수 있는 지역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신안선이나 완도선이 가라앉아 있던 장소는 모두 이런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남해안에는 기록으로나 지형으로 보아 임진왜란 때의 배가 아니더라도 옛 배가 묻혀 있음직한 장소가 여럿 있다. 그러나 이런 곳의 대부분이 현재는 양식장으로 활용되고 있어서 조사를 위한 탐사선이 함부로 활동할 수 없는 것이 가장 큰 제약이다. 비록 거북선이 찾아질 가능성은 아주 낮을 지라도 해저유물 탐사 작업은 계속되어야 한다. 5천년 역사를 이어오면서 조상의 삶의 편린들이 우리의 3면 바다 속 어디에 숨어 있다가 언제 모습을 들어 내줄지 모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