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재에서 만나는 옛 나무
경북대학교 임산공학과 박상진
5천년 역사를 이어오면서 우리 곁에는 항상 나무가 있었다. 삶이 힘들 때 쉼터로서만이 아니다. 집짓고 음식 해 먹고 살림살이를 만드는 인간생활 모두에 나무는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품이다. 그래서 선조들과 삶을 같이 하였던 옛 나무의 사연들은, 바로 우리 역사의 편린을 알아내는 단서가 된다. 필자는 30년 가까이 나무들과 나무 문화재들과 함께 살아왔다. 멀리는 석장리 구석기시대 사람들과 함께 있던 나무에서 청동기시대 살림터에서 나온 나무, 임금님들의 관재, 옛 배를 만드는 데 쓰인 나무, 각종 건축재, 글자가 새겨진 목판 등이 연구실을 찾아준 나무손님들이다. 우선 나무 쓰임의 역사적 변천을 단군신화에서부터 간단히 알아보고 무령왕릉의 관재, 해인사 팔만대장경판, 거북선과 나무에 얽힌 이야기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1. 선조들의 삶과 죽음을 함께한 나무들
1) 선사시대의 나무들
사람이 처음 집단생활을 시작할 때는 자연 동굴을 주거공간으로 이용했으나 차츰 그 형태가 인위적인 움막으로 발전했다. 선사시대에 만들어진 구조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움막의 재료가 무엇인지 잘 알 수 없으나, 겨울의 추위가 심한 한반도의 특성상 반지하의 구조가 필요했을 것이다. 바로 수혈식(竪穴式)주거지다. 가장 원시적인 형태는 둥글게 움을 파고 둘레에 서까래를 세워 가운데로 모이도록 만든 원추형 움집이다. 서울 암사동의 4호 집터처럼 바닥의 네 귀퉁이에 한 개씩의 큰 기둥구멍이 있다. 움집들로 벽을 보강하고 서까래를 견고하게 떠받치기 위해 벽체기둥을 세우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쓰인 나무들은 구석기 문화유적지로 유명한 석장리의 경우 참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 소나무 등이었다. 수양개 유적의 경우에는 참나무, 오리나무, 소나무가 출토되었다. 울산 옥현의 청동기 시대 유적에서는 수집 표본의 54%가 참나무였으며 25%가 굴피나무, 느릅나무가 5%, 소나무가 4%의 순이었다. 이런 나무들이 모두 건축재로 쓰였다고 볼 수는 없으나 나무의 성질로 보아서 참나무는 기둥처럼 힘을 많이 받는 구조재로 사용했을 것이다. 그 외의 나무들은 서까래 등의 보조재로 쓰였으리라 짐작된다.
2) 삼국시대의 나무들
삼국시대가 시작되면서 주거의 위치는 차츰 지상으로 올라오기 시작했고 건축재는 통나무를 그대로 사용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가공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절대 권력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왕궁의 건축에는 나무껍질을 벗기고 멋스럽게 다듬는 기술이 필요하다. 이때부터 보급되기 시작한 철기문화와 함께 목재의 가공기술은 급격히 발전했다. 도끼와 톱을 이용한 판자 만들기도 훨씬 손쉽게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의 나무건축은 현존하는 것은 없고 관재 등 출토 목재에서 쓰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고구려 낙랑의 나무
우선 문헌에서 보면 《삼국사기》에 이런 기록이 있다. 고구려 시조 주몽은 부여를 떠나면서 일곱 모가 난 돌 위의 소나무 기둥 아래(七稜石上松下)에 부러진 칼 한 쪽을 묻어둔다. 훗날 태어난 아들 유리는 자기 집 소나무 기둥 밑에서 부러진 칼 한 쪽을 찾아내어, 아버지가 있는 졸본으로 달려가 주몽을 이어 임금이 된다. 소나무가 건축물의 기둥으로 쓰였다는 최초의 기록이며 그만큼 소나무가 널리 자랐다는 증거이다. 삼국이 정립되던 2천여 년 전, 만주벌판의 고구려 땅에는 이전부터 소나무가 비교적 널리 퍼졌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렇게 만주 벌판에 소나무가 먼저 자리 잡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소나무는 햇볕을 좋아하는 나무다. 자라는 데 햇빛이 들어올 넉넉한 공간이 필요하므로 우거진 숲에서는 크게 번성하지 못한다. 오랜 세월동안 다른 나무들의 등살에 억눌려 살아오던 소나무는 기원전 10세기 전후 북방민족이 남하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숲에 불을 질러 농경지를 넓히고 집짓기와 난방에 필요한 나무를 베어내니, 소나무가 좋아하는 삶의 터전이 확보된 것이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의 땅, 한반도 깊숙한 곳엔 산악지대가 많고 사람의 수가 적어서 숲이 울창한 편이다. 즉 소나무가 잘 자랄 수 있는 넓고 양지바른 곳을 찾기 힘들다. 따라서 넓은잎나무가 주로 산을 점령했으며 이런 증거는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출토된 목재는 일제강점기에 발굴된 낙랑고분의 목곽이나 목관이 대표적이다. 사용된 나무의 종류에 대해서는 1936년과 1993년에 각각 미중문언(尾中文彦)과 필자가 조사한 내용이 있다.
미중 씨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낙랑고분 정박리(貞拍里) 4호 관재는 넓은잎삼나무, 석암리(石巖里) 257호 관재는 주목, 목곽(木槨)재는 둘 다 졸참나무 종류라고 되어 있다. 넓은잎삼나무는 우리나라에 없고 중국 양자강 남부에서 대만에 걸쳐 자라는 나무다. 바늘잎늘푸른나무로서 키는 30~40m 가량, 지름은 두세 아름이 넘는다. 바깥 모양과 재질이 삼나무와 비슷하나 잎이 더 넓어서 광엽삼(廣葉杉)이란 이름이 붙었다. 이 나무는 잘 썩지 않고 비교적 재질이 단단하여 관재를 비롯해서 돛배의 돛대나무로 쓰이기도 했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보아 정박리 4호분의 관재는 넓은잎삼나무가 자라는 양자강 남부에서 수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주목은 재질이 붉은색을 띄어 벽사의 의미가 있고, 잘 썩지 않는 특징 때문에 관재로도 널리 쓰이는 나무다. 필자가 조사한 결과로도 목관도 주목이었으며 목곽은 역시 졸참나무 종류였다. ≪성경통지(盛京通志)≫란 중국의 옛 책에는 ‘주목은 향기가 있고 목관으로서 가치가 높아 아주 귀하게 쓰인다’라고 적혀 있다. 이처럼 예부터 중국에서도 관재로서 쓰인 나무였다. 주목은 우리나라에 널리 자라는 주목(Taxus cuspidata)과 중국 중남부에 자라는 중국주목(Taxus chinensis)이 있다. 관재로 사용된 주목이 우리 주목인지 중국주목인지를 밝혀내는 연구는 아직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다만 낙랑고분의 관재가 중국주목인 것으로 미루어보아, 넓은잎삼나무를 수입할 때 함께 수입했을 가능성이 높은 편이다. 그러나 이곳 이외에도 만주 길림성 집안현 환문총(環紋塚)및 경주 금관총의 관재가 주목인 것으로 볼 때, 주목을 꼭 중국에서 가져와야 할 이유는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주목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관을 둘러싸는 목곽재는 평양 주변에도 흔히 자라는 참나무 종류를 이용했다. 어쨌든 낙랑고분은 사용된 관재의 일부를 멀리 중국남부에서 직접 가져와 만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역시 고대 동아시아 국가들의 세력과 교역범위를 알려주는 확실한 물증이기 때문이다.
신라의 나무
《삼국사기》 옥사(屋舍)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주택 한 변의 길이는 진골 24척, 6두품 21척, 5두품 18척, 4두품 이하는 15척을 넘지 못한다’며 집 크기를 못 박았다. 덧붙여서 집짓는 나무로 5두품 4두품 이하는 ‘느릅나무(山楡木)을 써서는 안 된다’고 아예 나무 종류까지 규제하고 있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귀족들이 집을 지을 때 느릅나무를 널리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운명적 만남이 나온다. 남천에 걸려 있는 느릅나무다리(楡橋)에 원효대사가 일부러 떨어짐으로써 인연이 시작되었다. 시대를 앞서간 신여성 평강공주가 청혼하러 온달 집을 찾아갔을 때, 그는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려 앞산에 올라가 있었다. 이 같은 기록으로 짐작해보건대 한반도에는 느릅나무가 흔했고 고급 기둥나무 등 건축재로 널리 사용되었다. 영명이 elm인 느릅나무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건축재이다. 그 외 참나무와 천마총 관재인 느티나무 등도 널리 쓰인 것으로 보인다.
유적지에서 출토된 신라시대의 나무를 보면 경주박물관 본관 신축부지에서는 소나무, 참나무, 오리나무 등 25종의 나무가 나왔다. 대구 칠곡 아파트 단지에서 발굴된 수중보(洑)는 5~6세기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조사해본 결과 32종류의 나무가 발견되었다. 이 중 참나무가 30%, 오리나무가 18%. 버드나무가 12%의 순이었으며 느릅나무와 소나무도 3%씩 차지했다. 신라시대 대구 근교의 산에는 대부분 넓은잎나무가 번성해서 바늘잎나무인 소나무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낮았음을 알 수 있다.
1921년 9월, 우리나라 최초의 금관이 나온 금관총이 발굴된다. 이곳에서는 길이 8자3치, 너비 3자3치 크기의 옻칠된 목관이 있었으며 목곽이 그 주위를 둘러쌌다. 목관은 강기정충(江崎政忠)씨에 의하여 주목으로 밝혀졌고 목곽은 미중문언씨가 녹나무로 분석하였다.
그런데 최근 필자가 98호 고분(1975년 발굴)의 관재를 조사해본 결과 녹나무가 검출되었다. 여기서 목곽과 목관을 만든 녹나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부터 향장(香樟), 예장(豫樟)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이 나무는 주로 배를 만드는 데 쓰였으나 일부에서는 관재로도 이용되었다. 우리나라에 경우 녹나무를 사용한 것은 98호분과 금관총이 처음이다.
녹나무가 주로 자라는 지역은 제주도, 일본남부, 중국의 양자강 남부를 비롯한 아열대지방이다. 자라는 곳을 최대한 북쪽으로 잡더라도 남해안의 다도해 섬지방을 벗어나지 못한다. 더욱이 기후 한계선에 분포하는 나무들은 자람이 좋지 못해서 관재와 같은 고급 재료로 쓰일 수 없다. 녹나무는 난대나 아열대에 주로 자라는 나무이다. 경주의 왕릉에 쓰인 녹나무는 중국 남부, 제주도, 일본 남부의 세 지역 중 어느 곳에서 가져온 수입 나무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백제의 나무
백제의 건축재를 짐작할 만한 자료는 매우 부족하지만 익산 미륵사지와 궁남지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미륵사지에서는 바늘잎나무로써 소나무와 금송이 보였고 넓은잎나무로써는 밤나무, 가래나무, 버드나무, 뽕나무, 오리나무 등이 발견되었다. 궁남지에서는 느티나무, 참나무, 밤나무, 소나무 등이 출토되었다. 한편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의자왕 19년(659) ‘대궐 뜰에 있는 느티나무(槐木)가 사람이 곡하는 소리처럼 울었다’고 되어 있는데 궁궐에 느티나무가 많았음을 설명해주는 부분이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나무는 미륵사지에서 나온 금송이다. 작은 토막형태로 남아 있어서 추정이 어려우나 출토된 위치로 보아서 관재가 아님은 분명하다. 금송의 원산지인 일본의 경우, 조각재나 기구재로 쓰이는 예는 드물고 주로 건축재나 관재로 이용했다. 따라서 미륵사지 출토 금송은 건축재, 그 중에도 기둥나무일 가능성이 높다. 부여 능산리에서 나온 비자나무 역시 관재뿐만 아니라 건축재로 쓰였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수입재 금송과 남해안에서 자라는 비자나무는 아무래도 왕족이나 고급귀족들의 나무였을 테고 느티나무와 밤나무, 참나무 등은 일반 백성들이 사용했으리라 짐작된다.
백제 25대 임금 무령왕의 관재는 금송이었으며 사적 14호로 지정된 능산리 왕릉에서 나온 관재 역시 일본 교토대학 교수 미중문언(尾中文彦)이 분석한 결과 금송이었다. 이곳 이외에도 그가 몇몇 장소에서 분석한 백제 후기 목관 10여 건도 금송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고려시대의 나무들
고려시대로 접어들면서 삼국시대 때 쓰이던 나무와는 종류가 달라진다. 평안도에서 전라도를 잇는 한반도 서부 지역은 정치무대의 중심이 되었고 인구밀도가 높아지면서 급격히 산림이 파괴되었다. 가까운 산에 소나무가 많아지니 당연히 그 사용 빈도가 점점 높아졌다. 그러나 소나무 외에는 모두 잡목으로 취급하던 조선시대 이전이라서 소나무에만 의존하지는 않았다. 고려 초 화물선 완도배의 밑바닥에 비자나무와 참나무까지 쓰고 있는 예가 이를 증명한다.
몽고란을 거쳐 고려 후기로 오면서 주위에는 점점 소나무가 많아 졌다. 삼국시대 때 건축재로 쓰던 느릅나무, 느티나무, 참나무 등이 차츰 소나무로 바뀌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부근에는 소나무 외에 건축재로 쓸만한 나무가 없었다. 그러나 깊은 산 속에 있는 사찰 건물만은 소나무보다 훨씬 오래 쓸 수 있고 주변에 풍부하게 자라는 느티나무나 참나무를 주로 이용했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은 고려 말인 1376년에 지은 건물로서 기둥의 나무는 모두 느티나무였다. 느티나무 목재는 나무 결이 곱고 황갈색 빛깔에 약간 윤이 나며 썩거나 벌레가 먹는 일이 적은데다 다듬기도 좋다. 그러면서도 물관의 크고 작음이 확실히 구분되는 ‘환공재(環孔材)’로서 배열이 독특하여 아름다운 무늬를 갖는다. 나무가 클수록 비늘모양, 구슬모양, 모란꽃 모양의 무늬와 함께 기름기가 약간 밴 듯한 광택이 특징이다. 건조를 할 때 갈라지거나 비틀리는 경우가 적고 마찰이나 충격에 강하며 단단하다. 동구 밖 아름드리 당산목 느티나무의 고고함을 구태여 강조할 필요는 없으리라. 나무의 여러 가지 속성만 따져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나무들에 전혀 뒤지지 않는 좋은 나무이다. 한마디로 나무가 갖추어야 할 모든 장점을 다 가지고 있는 '나무의 황제'다.
나무 다루는 기술이 남달랐던 우리의 선조들이 느티나무를 그대로 썩혀 둘 리가 없다.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 해인사 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법보전 건물의 기둥은 모두 느티나무를 건축재로 썼다. 그 외 조선시대 사찰 건물인 강진 무위사, 부여의 무량사, 구례 화엄사의 기둥 등 전부 혹은 일부가 이 나무다. 사방탁자, 뒤주, 장롱, 궤짝 등의 조선시대 가구까지 느티나무의 사용범위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임금님의 관재와 배 만드는 데 쓰인 예는 앞에서 말한 대로이다.
느티나무를 정자나무로만 생각하여 키가 그리 크지 않고 둥그스름하게 퍼지는 나무로만 알면 큰 잘못이다. 숲 속에서 다른 나무와 경쟁하여 자라는 느티나무는 곧바르고 우람하게 자란다. 그것도 적당히 자라다가 멈추는 것이 아니라 키가 20~30m, 지름 너덧 아름이 될 때까지 자라는 게 보통이므로 사찰의 기둥으로도 손색이 없다.
무량수전을 비롯한 옛 건물의 기둥에 느티나무가 쓰인 것은 잘 썩지 않는 성질 때문이다. 밖에 나무를 내놓고 일정기간 후 얼마나 썩었는지를 조사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느티나무가 소나무보다 세 배나 더 오래 버티었다고 한다. 비바람이 들이쳐 장마철 내내 아랫부분이 젖을 수밖에 없는 기둥의 특성으로 볼 때, 느티나무가 소나무보다 훨씬 유용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보는 기둥은 대부분 소나무다. 대체로 느티나무 자원이 거의 없어진 조선조에 들어와서 어쩔 수 없이 소나무가 쓰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봉정사 극락전의 나무를 분석해보았더니 건물의 뒤쪽 좌우 기둥은 미국 나무였다. 하나는 리기다소나무, 또 하나는 알라스카 가문비나무였다. 1972년 보수를 할 때 구하기 쉽고 값싼 수입나무로 눈속임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교과서에 수록된 국보15호가 수입나무로 된 기둥으로 지탱하고 있었다니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다행이 2002년부터 새로 보수공사를 한 덕분에 지금은 소나무로 바뀌어져 있다.
4) 조선시대의 소나무
조선시대로 들어오면서 강력하게 소나무 보호가 시작되었다. 새 왕조의 개창과 더불어 수도 건설과 새로운 권력자들의 건축물, 지방관서 건물 신축 등 건축재의 수요가 급증한다. 아울러서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남해안을 휩쓸고 다니는 왜구를 격퇴하기 위해 많은 배가 만들어졌는데, 이에 쓰인 나무도 만만찮았다. 몽고란 이후 지속된 산림 파괴로 인해 벌채하여 쓸 수 있는 나무는 소나무 외엔 거의 없었다. 자연히 소나무마저 차츰 줄어들게 되었다. 실록을 보면, 세조 7년(1461) 병조에서 소나무의 벌목을 금할 것을 건의하는 내용이 있다.
‘송목금벌(松木禁伐) 법은 엄하지만 관리 소홀로 배를 만드는 재목조차도 다 없어졌습니다. 청컨대 지금부터는 나라에서 쓰는 것을 제외하고는 관가나 양반 집에서는 배를 만들 수 없는 소나무만을 쓰게 하고, 백성들은 잡목을 쓰게 하소서’
조선 초기의 소나무 보호정책과 현황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기록이다. 이후 《경국대전》에도 소나무 보호정책을 강력히 추진했으나 소나무는 점점 고갈되어 갔다.
조선 초기 건물로 알려져 있는 해인사 고려대장경판 수다라장 장경전은 기둥 48개 중 느티나무가 22개, 참나무가 2개이고 나머지는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이다. 법보전은 47개가 느티나무, 1개가 잣나무이다. 강진 무위사 대웅전 기둥도 소나무와 단풍나무가 섞여있다. 조선 중후기로 내려와서도 사찰 기둥에는 소나무, 느티나무, 참나무, 전나무 등이 두루 쓰였다. 반면에 궁궐이나 관아의 건축물에 대부분 소나무가 쓰이면서 소나무는 최고의 나무로, 나머지 나무는 잡목으로 인식되었다.
왕실 건축과 배 만드는 데 들어가는 소나무를 특별히 보호하기 위해 전국 2백여 곳에 봉산(封山)이라는 소나무 특별보호구역을 만들고 벌목을 엄격히 규제했다. 그래도 수요에 비해 소나무 공급이 늘 부족했고, 조선조 말에 이르면 깊은 산골 외에 쓸 만한 소나무가 남지 않게 되었다. 그나마 한강 수계(水系)로 운반이 불가능했던 울진 ․ 봉화 지역의 소나무들은 오늘날까지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 소나무는 학술적으로 금강소나무(강송)이지만, 흔히 춘양목이라 불린다.
오늘날 우리의 산을 둘러보면 온통 소나무이고 국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도 역시 소나무다. 주거문화라는 영역뿐만 아니라 삶의 전체를 대표하는 문화에 나무를 넣어본다면 우리 나무문화는 주저 없이 소나무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우리와 소나무의 길고도 질긴 인연을 고려해볼 때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삼국시대에서 고려로 이어진 우리 역사의 중반기에는 참나무와 느릅나무, 느티나무가 소나무 못지않게 선조들의 삶 깊숙이 들어와 있었음을 알게 된다.
2. 백제의 무령왕과 금송
역사는 언제나 싸움에 이긴 사람들의 눈으로 쓰여다. 우리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백제라는 고대국가는 나당 연합군에 의해 정복당하면서 수많은 기록과 유물이 철저히 파괴되어버렸다. 진실을 밝혀낼 수 있는 자료가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이런 실정에 비추어보면 1971년 7월 5일, 충남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 이루어진 백제 유적 조사는 가뭄 속의 단비였다. 광복 후 최대의 고분 발굴로 일컫는 백제 무령왕릉의 발굴은 1천 5백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잃어버린 왕국’의 얼굴을 찾는 일과 마찬가지였다. 도굴꾼의 피해를 전혀 받지 않은 ‘처녀분’이어서 모두 108종 2,906점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수많은 유물 중에는 왕과 왕비의 시신을 감쌌던 11조각의 널빤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발굴 당시부터 시꺼먼 옻칠이 되어 있었고 어쩐지 으스스한 기운을 자아내어 이 나무판자에 관심을 갖는 이가 적었다. 그러나 여기에 백제와 일본의 교류를 밝혀줄 귀중한 증거가 숨어 있었음이 발굴된 지 20여 년 후에야 비로소 밝혀지게 된다.
1) 믿기지 않은 사실
나무는 저마다 좋아하는 환경이 서로 달라 어느 한정된 지역에만 자라는 특성을 갖는다. 때문에 무슨 나무로 만든 것인지를 알아내는 일은 당시 사람들의 지역간 혹은 국가간의 교역범위를 짐작케 하는 바로미터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가까운 곳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나아가서는 톱, 대패, 자귀 등의 사용 자국을 분석해보면 당시 사용한 쇠의 강도와 함께 쇠를 다룬 기술력도 짐작해볼 수 있다.
무령왕릉에서 나온 관재는 오래되어 옻칠이 된 밑나무가 조금 썩기도 했지만 나무 세포의 기본 모양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발굴이 이루어지고 꼭 20년째인 1991년, 무령왕의 관재 조각을 입수하는 행운을 얻은 필자는 급히 프레파라트를 만들어 현미경 접안렌즈를 들여다보았다. 확대된 세포 모양을 확인하던 찰라, 놀라움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일본인들이 자기네들 나라에만 있다고 자랑해 마지않는 금송(金松)의 세포배열이 잃어버린 기나 긴 세월을 일깨워주듯 필자와 눈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2) 바다를 건너온 금송
금송은 겉씨식물 바늘잎나무(침엽수) 무리에 들어가는 늘 푸른 나무다. 혹 이름만 보고 금빛 나는 소나무쯤으로 생각하겠지만, 소나무와는 촌수 세기도 어려운 먼 친척일 따름이다. 식물학적으로는 낙우송과(科)의 금송속(屬)으로서 자손이 귀한 집안의 외동아들이다. 세계의 다른 어떤 곳에도 없고 오직 일본열도의 남부지방에만 자란다. 키가 수십 미터에 지름이 두세 아름을 훌쩍 넘치게 자라는 큰 나무이다. 판자를 만들어 놓으면 연한 황갈색을 띠어 고급스럽고 나이테가 살짝 드러나는 은은함이 돋보인다. 잘 썩지도 않으며 특히 습기가 많은 장소에 쓰더라도 오래 견딜 수 있으므로 고급 나무관의 재료로는 최상품이다. 나무통이나 배 만드는 데도 알맞다. 당연히 최고급 목재로써 예부터 일본의 왕궁 기둥을 비롯하여 고급관리나 임금의 관재로 쓰였다.
무령왕의 관재는 일본에서 만들었든, 단지 재료만 제공했든지 간에 다른 나라 왕의 시신이 안장될 관재 제작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양국의 관계가 매우 밀접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우리나라와 일본 옛 문헌 어디에도 금송의 수출입에 관한 내용이 없다. 하지만 금송이란 나무의 특성을 과학적으로 들춰보면 짐작은 가능하다.
관재를 베어낼 당시 나무 지름은 1백50cm, 나이는 3백년 이상으로 추정되었다. 이 정도의 큰 나무가 자라는 곳은 ‘고우야마끼’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일본의 고야산 주변일 것이다. 여기서 베어진 나무는 판자로 켜진 다음 우리나라와 일본을 잇는 옛 뱃길을 따라 백제로 옮겨졌을 것이다. 즉 오사카-시고쿠-후쿠오카를 잇는 좁은 해협을 거쳐 우리나라의 남해안으로 들어온 후 해안선을 타고 금강 하구로 진입해 곰나루(지금의 공주)에 닿는다.
무령왕과 왕비의 나무관은 아름다운 관 덮개가 달린 고급 목관이다. 현재 남아 있는 무령왕과 왕비 관에 쓰인 널빤지는 길이가 2.5m, 너비가 20~60cm, 두께가 6cm다. 이 정도 규모라면 관 하나를 만드는 데 필요한 널빤지는 적어도 10장이 넘는다. 다듬다가 버리는 것과 말리는 과정에서 갈라져 못쓰는 것도 있을 테니 실제로 쓰인 널빤지는 훨씬 더 많다. 왕과 왕비의 관에 필요한 재목은 판자로 따져도 족히 30~40장이 넘는다. 작은 배라면 두 척은 돼야 하고 큰 배라도 한 배 가득 실어야 겨우 실어 나를 수 있는 엄청난 양이다.
현재 옛 국립공주박물관 앞뜰에는 일제강점기에 심은 세 그루의 금송이 단아한 모습으로 자라고 있다. 그들 선조 나무가 백제 중흥의 기수 무령왕의 시신을 감싸고 있었다는 영예로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금은 무엄하게 파헤쳐 전시되고 있는 대왕의 유물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3. 해인사 고려대장경판의 마법
1) 나무판과 ‘광주리’의 규모
대장경은 석가가 인도 곳곳을 다니면서 설교한 말씀을 모은 불교의 교과서이다. 내용은 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論藏)의 삼장(三藏)으로 구성된다. 삼장이란 인도의 고대언어인 산스크리트(梵語)의 Tripitaka를 한문으로 번역한 말로 세 개의 광주리라는 뜻이다. 경장은 석가를 따르는 제자와 중생을 상대로 설파한 내용을 기록한 <경>을 담아놓은 광주리란 뜻이며, 율장은 제자들이 지켜야 할 논리의 조항과 그밖에 스님들이 공동으로 생활하는 데 필요한 규범을 적어 놓은 <율>을 담은 광주리란 뜻이고, 논장은 위의 <경>과 <율>에 관하여 스님들이 읽기 쉽게 해설을 달아놓은 것으로서 <논>을 담은 광주리란 뜻이다.
80의 생애를 마치고 부처님이 입적한 후 그 말씀은 제자들에 의하여 처음 정리된다. 종이가 없던 시절이므로 다라수라는 나뭇잎에다 새기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패엽경(貝葉經)이다. 중국에 불교가 전해지면서 다른 나뭇잎이나 대나무, 또는 나무껍질을 이용하기도 하고 돌이나 금속에다 새기기도 했다. 그러나 취급과 보존, 인쇄하여 널리 알리는 데는 나무를 대신할 만한 재료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목판(木板)대장경이 만들어졌으며, 우리나라에도 고려 현종 2년(1011)부터 거의 80여 년에 걸쳐 처음 나무 대장경 새기기 작업이 시작되었다. 처음 만든 대장경이라 하여 초조대장경이라 부르는데 이후 150여 년 동안 부인사에 정성스럽게 보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고종 18년(1232) 몽골군 2차 침략 때 사리타이가 이끄는 몽골의 화마(火魔)로 초조대장경판은 하룻밤 사이 처참한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전국이 몽골군의 말발굽에 유린당하고 우리의 문화유적이 하나하나 사라져 갈 때, 조정의 대응이란 한 뼘도 안 되는 강화도로 쫓겨 가는 일이 고작이었다. 수십 년 대물림으로 이어지던 부패한 무신정권은 대응 한 번 제대로 못했다. 영문도 모르고 전쟁에 휩싸인 백성들은 조정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최우를 비롯한 당시 집권세력은 사람들의 마음을 한곳에 모을 수 있는 커다란 이벤트가 필요했다. 그래서 ‘불타버린 대장경을 다시 새기자! 그래서 부처님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치자!’는 깃발을 높이 들었다. 공교롭게도 초조대장경을 새기자 거란군이 물러간 과거의 예가 있었으므로, 이 슬로건은 국민적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드디어 고종 23년(1236), 나라의 곳곳에서 나무를 베어 넘기고 대패로 다듬어 나무판에 부처님의 말씀을 새기는 대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16년의 세월이 흐른 고종 38년(1251), 고려인이 몸과 마음을 바쳐 이룩한 팔만대장경판(정식 이름은 고려대장경판)은 드디어 완성되었다.
팔만대장경이라 했으니 경을 새긴 경판(불경을 새겨 넣은 나무판자)이 8만여 장일 것이라는 점은 짐작이 간다. 정확한 숫자는 조사한 학자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다. 문화재청에서 밝히는 공식 숫자는 81,258장이다. 그렇다면 경판 한 장 한 장의 크기는 어느 정도일까? 우선 길이는 손잡이에 해당하는 마구리를 합쳐서 68cm 및 78cm인 경판이 대부분이며 70cm, 73cm, 75cm인 경판이 약간씩 포함되어 있다. 너비는 24㎝, 두께는 2.7~3.3㎝ 정도다. 대체로 15인치 LCD모니터 2대를 이은 크기이며 너비는 이보다 조금 좁다. 경판의 무게는 나무의 종류와 길이에 따라 가벼운 경판은 2.2kg 정도이고 무거운 경판은 4.8kg에 이르기도 한다. 평균 3.1kg으로 노트북 컴퓨터 무게와 비슷하다. 따라서 팔만대장경 무게를 모두 합치면 2백80t, 4t 트럭에 싣는다면 70대 분량이다. 오늘날에도 이렇게 많은 화물차가 한꺼번에 줄지어 달린다면 끝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말이나 소가 끄는 달구지가 전부인 당시를 상상한다면 그 엄청난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경판에 정성스럽게 새겨진 글자 수는 앞뒷면을 합쳐 한 장에 6백40여 자이다. 따라서 전체 팔만대장경판의 글자 수는 5천2백만 자나 된다. 이런 큰 숫자는 얼른 규모가 파악되지 않는다. 조선왕조 5백년 내내 만들어온 실록의 전체 글자 수와 맞먹으니,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2) 밝혀진 마법, 숨겨진 마법
경판을 만드는 과정부터 잠깐 알아보자. 먼저 나무를 선택하고 베는 작업부터 시작한다. 다행히 우리 산에서는 경판을 새기기에 적당한 나무를 손쉽게 구할 수 있다. 필자가 경판의 재질을 전자현미경으로 분석한 결과 대부분 산벚나무와 돌배나무가 선택받은 주인공들임이 밝혀졌다. 이외에도 박달나무나 거제수나무를 비롯하여 단풍나무, 남쪽에만 자라는 후박나무 등이 조금씩 섞여 있다. 특히 가장 많이 사용된 산벚나무는 잎도 피기 전 삭막한 산 속에서 화사한 꽃을 무리지어 피움으로써 멀리서도 금세 찾아낼 수 있다. 껍질에는 가로 숨구멍도 있어서 다른 나무와 구별이 쉽다. 몽골군에게 점령당해 빼앗긴 산에서 몰래 베어오기는 이런 나무가 안성맞춤이다.
베어 넘긴 나무는 1년 정도 방치해서 나무가 갖고 있던 스트레스를 없애준다. 흔히 말하는 숨죽이는 과정이다. 어차피 판자로 쓸 나무이니 통나무 그대로 가져올 필요는 없다. 산에서 바로 나무를 켜서 판자만 가지고 내려오면 되고 곧바로 소금물에 삶아 음지에서 천천히 말린다. 다음은 판자 표면을 깨끗이 대패질하고 미리 경전을 써둔 한지를 뒤집어 붙인다. 풀이 마른 후에는 글자가 잘 보이지 않으니 들깨기름을 살짝 발라 글자를 새긴다. 경판을 보호하고 인쇄할 때 취급이 편하도록 양 모서리에 손잡이를 붙이면 경판 작업은 끝이다. 작업 과정 하나하나가 오늘날 반도체 칩을 만드는 작업만큼이나 고도의 기술을 요한다. 공정에 조그만 차질이 생기면 나무를 베어내는 처음 과정부터 다시 해야 한다.
글자를 새기는 작업이 핵심기술인데 능숙한 기술자가 하루 종일 매달려도 40~50자 정도가 고작이다. 그러므로 한 달에 경판 2장을 만들기도 빠듯했다. 동원된 연인원을 따져보았더니 1백30만 명, 여기에 나무를 베어오고 판자를 켜는 도우미 인원까지 계산하면 실로 엄청난 인력과 물자가 동원된 작업임을 확인하게 된다. 한마디로 고려국의 운명을 걸고 온 나라 백성이 혼신의 힘을 기울여 만든 대작이다.
그런데 수많은 질곡과 외침을 겪어오면서도 오늘날까지 팔만대장경판이 고스란히 보존될 수 있었던 비밀은 무엇일까? 부처님의 뜻이다, 보관건물의 구조와 위치의 합리성 때문이다, 옻칠을 해둔 탓이다, 바닷물에 삶아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바닥에 숯을 묻은 탓이다, 등등 제각각 주장하는 이들마다 다르다. 그러나 비밀의 열쇠는 근본적으로 나무 재료의 우수성에 있다.
나무조직은 셀룰로오스라는 철근과 리그닌이라는 콘크리트로 벌집모양의 세포를 형성하는 독특한 건축술을 자랑한다. 이 방법으로 지어진 나무조직은 마치 ‘마법에 걸린 성’처럼 죽어서도 수천 년을 거뜬히 버틸 수 있다. 다만 아킬레스건처럼 치명적 약점을 가지는데, 바로 수분이다. 그러나 수분만 쫓아내면 7백50년 정도의 세월을 거뜬히 버틸 수 있을 만큼 보존성이 뛰어난 재료가 바로 나무이다.
우리 선조들은 이런 나무의 특성을 경험으로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래서 경판을 새기기 전부터 나무를 완전히 말리기 위한 일에 필요한 조치를 모두 취했으며, 만들어진 경판을 어떻게 보관해야 자손만대에 전해질 것인가도 잘 알고 있었다. 보관건물은 바람이 잘 통해 습기가 머물 시간을 주지 않도록 설계되었다. 커다란 바람 창을 여러 군데 설치해서 건조한 산바람이 경판의 습기를 뽑아내 계곡으로 빠져나가도록 했던 것이다. 아울러 경판을 옆으로 세워 건물 내의 아래위 공기 이동이 쉽게 이루어지도록 만드는 일도 잊지 않았다. 한마디로 ‘습기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보관기술이 훌륭해도 나무는 화재로 인해 순간에 타버릴 수 있다. 해인사는 신라 애장왕 3년(802)에 창건되어 1천2백년의 세월을 간직한 고찰이다. 수백 명의 스님이 기거하는 큰 절이니 화재가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경판이 만들어진 이후 7백50년 동안에도 수많은 화재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화재기록은 조선 후기 퇴암스님이 <해인사 실화적>이란 책에 기록한 것이 전부다. 이를 보면 1695년부터 1876년까지 2백여 년 동안 무려 7차례의 화재가 있었다. 기록에 없는 기간까지 포함한다면 적어도 수십 차례의 화재가 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수많은 화재에도 불구하고 대장경판은 단 한 번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대장경판을 보관하는 건물은 해인사 남쪽 산자락의 약간 높은 곳에 있는데, 산 아래에서 위쪽으로 기류가 흘러가니 불길이 쉽게 번질 만한 장소이다. 어떻게 그 많은 화재 속에서도 건재했는지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그래서 해인사 스님들의 믿음대로 부처님의 보살핌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이 외에 국토가 전쟁터로 휩싸인 순간에도 용케 무사했다. 임진왜란 때는 해인사 코앞인 성주가 점령당했다. 그들이 그토록 탐내던 팔만대장경판이 보관돼 있는 곳에 하루 이틀이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다. 그러나 홍의장군 곽재우를 비롯해 거창과 합천에서 일어난 의병들이 일본군의 해인사 진입을 막아냈고, 스님들도 승병을 만들어 해인사를 지켰다. 한국전쟁 때도 위기가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를 잃은 1천여 명의 북한군들이 해인사를 중심으로 게릴라 활동을 폈다. 소탕작전을 벌리던 국군은 미 공군에 공중지원을 요청했고, 1951년 12월18일 김영환 대령이 이끄는 전투기는 해인사 폭격명령을 받고 출격했다. 하지만 그는 여러 가지 이유를 붙여 미 작전당국의 명령에 불복하고 폭격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는 크게 혼이 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의 전투기는 5백 파운드짜리 폭탄 2개를 적재하는 F-51이어서 만약 명령대로 폭격했다면 팔만대장경은 순식간에 재로 변했을 것이다. 정말 알 수 없는 마법의 보호를 받는 것일까?
4. 박치기의 명수 거북선
임진왜란의 역사를 읽다보면 제대로 저항 한 번 못하고 처참하게 패한 육군의 무기력함에 심한 분노와 좌절을 느낀다. 그래도 우리의 자존심을 조금이라도 살려준 장본인은 이순신 장군과 그가 이끈 해군일 것이다. 승전보의 한가운데는 장군의 뛰어난 전술이 있었지만 거북선을 비롯한 우리 싸움배의 ‘박치기’ 실력도 크게 한몫을 하였다.
선조29년(1596) 11월7일, 왜적의 침입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는 내용 중에 “거북선은 사면을 판옥(板屋)으로 꾸미고 형상은 거북등 같으며 쇠못을 옆과 양머리에 꽂았는데, 왜선과 만나면 부딪치는 것은 다 부서진다.”고 되어 있다. 흔히 이르는 당파(撞破)를 말한다. 박치기 한 방으로 시원하게 상대를 매트 위에 눕히던 70년대의 프로레슬러 김일 선수를 떠올리면 된다. 조금은 무지막지한 수법 같지만 당시로서는 가장 효과적이고 속 시원한 공격이었다.
1) 거북선의 구조
우리나라 배의 가장 큰 특징은 용골이 없다는 점이다. 다른 나라 배들은 용골이라는 배의 등뼈를 기준으로 판자를 붙여, 배의 아래가 역삼각형으로 좁아진다. 그러나 우리 배는 이런 게 아예 없고 밑이 편평한 사각 통모양의 평저선(平底船)이다. 이것은 해안선이 길고 갯벌이 많은 서남해안에 출입하는 데 적합한 구조다. 썰물 때 배를 갯벌에 올려놓고 작업을 할 수 있으며 항구가 아니라도 어디에나 배를 정박시킬 수 있는 장점을 지녔다. 평저선을 기본 구조로 하여 우리의 배는 쓰임새에 따라 여러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일반 어선이나 화물운반선을 비롯해서 삼남지방에서 세금으로 받은 곡식을 운반하는 조운선 등 일상의 경제활동에 쓰이는 배가 만들어졌는데 싸움배도 점차 발달하게 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맹선(猛船)이라 하여 조운선과 싸움배의 기능을 같이하는 배가 있었으나, 성종 때 너무 무거워 쓸모가 없다는 논란이 일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7년 전인 명종 10년(1555)에 맹선이 개량되어 판옥선(板屋船)이란 전용 싸움배가 만들어졌다. 판옥선은 이후 조선왕조 해군의 주력함으로서 임진왜란 때 큰 역할을 한다.
판옥선은 우선 층으로 이루어진 싸움배라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2층으로 된 구조는 전투의 효율성을 극대화했다. 다른 배는 갑판 위가 노출되어 있어서 적의 공격을 쉽게 받지만, 판옥선은 전투병이 2층 갑판에서 내려다보며 공격할 수 있고 노를 젓는 노군은 1층에서 임수를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배에 비해 규모가 컸던 판옥선은 두꺼운 판자를 사용했기 때문에 견고함을 자랑했다. 따라서 웬만한 풍랑에도 항해가 가능했고 넓은 갑판은 대포를 설치하기에도 용이했으니 사정거리도 늘릴 수 있었다.
그러나 판옥선에도 단점이 있었다. 배가 크다 보니 당연히 속도가 느려져 전쟁의 기본요소인 기동성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처음에는 가볍고 날렵한 배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일본 배와의 싸움에 효과적이지 못했다. 그래서 차라리 크고 단단하게 만들어 당파라는 박치기 전법으로 그들을 제압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리고 판옥선의 2층 위에 다시 거북모양의 구조물을 얹힌 결과, 천하무적의 거북선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박치기를 이기기 위해서는 들이받은 배의 강인한 구조와 함께 단단한 뱃몸(船體)이 필요하다. 우리 배가 강한 것은 무엇보다 배의 겉판이나 밑판을 만든 나무의 강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선시대의 싸움배에 관한 기록과 당시 숲의 구성을 추정해볼 때 거북선의 뱃몸은 대부분 소나무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소나무는 여름에 만들어진 단단한 세포가 나이테 속에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배의 겉판을 만드는 바늘잎나무 종류 중에는 다른 어떤 나무보다 단단하다. 또 우리 배는 척추에 해당하는 용골이 없고, 밑이 편평한 평저선이니 강도를 보강하기 위하여 두꺼운 판자를 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배 자체만으로도 튼튼하지만 박치기에 알맞도록 주요 부위는 더 강한 나무로 보강했다. 주로 참나무, 가시나무, 녹나무 등을 썼는데, 실제로 조선시대 싸움배의 앞부분은 진목(眞木), 즉 참나무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일본 배는 어떠한가? 일본의 산에는 소나무가 드문 반면 주로 삼나무나 편백나무가 자란다. 곧고 빨리 자라는 이점은 있으나 무르고 약하다. 이런 나무로 만든 배는 우리의 소나무 배와 부딪쳤을 때 당해낼 재간이 없다. 그래서 처음부터 수상전의 전략이 우리와 다르다. 우리 배에 살짝 붙이고 건너와서 칼로 제압하는 방식이었다. 속도가 빠르고 움직임을 쉽게 하도록 배를 만들어야 하니 뱃몸 판자의 두께도 얇고 배의 전체 크기도 작은 것이 유리했다. 큰 싸움이 벌어졌던 칠천량 전투(1597)를 묘사한 그들의 기록에 이런 말이 있다.
‘조선 배는 우리 배보다 비교가 안 될 만큼 크다. 그래서 조선 배에 바짝 달라붙어도, 자루의 길이가 두 칸이나 되는 창으로 미치지 못하니 배에 뛰어드는 것은 어림도 없었다.’
2) 거북선 파편이라도 기다리며
임진왜란 때 거북선의 활약은 대단했다. 수백 척의 일본 전함 속을 종횡무진 휘젓고 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부숴버리고 침몰시켰다. 도망가는 배는 천자총통이나 황자총통을 비롯한 대포로 망가트리고, 가까이 붙은 배는 용머리로 화염을 내뿜어 태워버렸다. 그러나 거북선의 진짜 모양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너무 부족하여 조상의 위대한 발명품을 명확히 재현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어떻게 만들었고 크기는 어느 정도이며 생김새는 어땠는지 무엇 하나 우리의 궁금증을 속 시원하게 풀어주지 못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만들어진 거북선은 3척에 불과했다. 전라좌수영에서 건조된 영귀선(營龜船), 방답진에서 만들어진 방답귀선, 순천부의 순천귀선이 전부이다. 김재근 전 서울대 교수의 추정에 따르면, 임란이 끝난 후 숙종 때까지는 5척 정도였으며 정조 때에는 40여 척으로 늘어났다가 순조8년(1808)에는 30척으로 차츰 줄어들었다 한다. 임란 때의 3척 중에서 하나를 인양하는 게 가장 바람직할 테지만, 아쉬운 대로 임란 후 만들어진 수십 척 중 1척이라도 발견되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하다못해 수백 척이 넘었던 판옥선이라도 인양할 수 있다면 거북선의 복원이 가능하다고 하니 앞날을 기대해도 좋지 않겠는가?
임진왜란 때의 거북선이나 판옥선을 비롯한 싸움배가 어디에 침몰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기록에 나와 있는 몇 개의 격전지 중 개흙이 두껍게 쌓이고 조수의 흐름이 빨라 쉽게 묻힐 수 있는 지역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기록으로나 지형으로 보아 남해안에는 묻혀 있음직한 장소가 여럿 있다. 그러나 이런 곳의 대부분이 현재는 양식장으로 활용되고 있어서 조사를 위한 탐사선이 함부로 활동할 수 없는 것이 가장 큰 제약이다. 판옥선 한 조각이라도 건져 올릴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기다려야 한다. 꼭 충무공의 유물이 아니더라도 5천년 역사를 이어온 조상의 생생한 편린들이 우리의 바다 속에 숨어 있다가 언제 모습을 드러낼지 모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