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조문화재 재질 연구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박상진
아득한 먼 옛날, 우리의 선조들은 주변에서 흔히 얻을 수 있는 돌과 흙, 나무를 사용하여 생활용구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동물과 구별되는 문명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들 재료 중 나무는 가벼우면서 강하고, 가공이 용이하며, 보온 재료로서 적합하고 모양이 아름다운 등의 장점을 살려서 우리의 선조들은 수많은 목조문화재木造文化財로서 유산을 남기고 있다. 반면에 나무는 균일한 재료가 아니며 방향에 따라 성질을 달리하고, 수분변화에 따라 수축팽윤하며, 불에 타고 썩고 벌레 먹는 등의 단점도 가지고 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로서는 물려받은 목질유물의 재료적인 단점을 어떻게 보완하여 자손만대에 고스란히 남겨줄 것인가가 주요한 과제이다. 아울러서 목조문화재의 보존, 보수, 복원을 할 때 제작할 당시의 재질을 그대로 이용하는 것은 조형미를 살린다는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종류가 다른 재질을 사용함으로서 생기는 여러 가지 결점을 보완하는 의미에서도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하 필자가 지금까지 조사한 주요 목조문화재에 관련된 재질 연구 결과를 중심으로 우리나라 목조문화재 재질 연구의 어제와 오늘을 간략하게 알아보고자 한다.
1. 목조문화재에서 수집 가능한 정보
일제강점기에서 해방 후 혼란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 까지 수많은 문화재가 발굴되고 아울러서 보존보수 처리도 병행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모두 인정하는 바와 같이 성급한 발굴에 너무 치중하여 보다 중요한 보존처리방법 및 보존기술에 소홀히 하여 왔으며 특히 목질유물에 대하여는 무지하다할 정도로 그 중요성이 무시되어 왔다. 그렇다면 목질유물의 재질을 분석함으로서 우리는 과연 어떤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며 그 값어치는 무엇인지 알아보자.
우선 사용된 목질유물의 수종을 분석함으로서 선인들의 선호수종, 국가 혹은 지방간의 교역상황 및 나아가서는 당시 임상林相의 추정이 가능하고 해당 문화재를 보수할 때는 동일한 재질의 나무를 사용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또 표면 상태를 현미경적인 방법으로 정밀 조사하여 부재部材를 가공할 때 사용한 공구, 옻칠의 종류, 표면처리방법, 기타 방부 재료의 사용 여부 등 당시의 목재과학기술상황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아울러서 나무를 자른 방향과 연륜구성을 조사함으로서 원목크기, 나이, 사용한 총 원목의 재적材積 등을 추정할 수 있다. 기타 나이테너비의 변동경향을 조사하여 연륜연대학(Dendrochronology)적인 기법으로 발굴되는 목질유물의 정확한 연대를 밝힐 수 있는 등 정보의 보고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하다.
2. 목조문화재의 재질구명 방법
목조문화재는 물속의 개흙에 묻히거나 저습지 혹은 아주 잘 건조된 상태가 아니면 목재부후균이나 해충에 의하여 금세 분해되므로 보존될 수 없다. 바다 속에 보존된 신안 송원대무역선, 완도 고려초무역선, 벽파통나무배와 안압지 목선 및 저습지인 의창다호리 가야 고분, 기타 무령왕릉, 낙랑고분, 천마총, 황남대총, 화순 대곡리 목관, 임당고분 등 필자는 수많은 목질유물이 발굴된 예를 보아왔다.
우선 목질유물은 실체현미경으로 선인들의 가공공정을 알기 위하여 표면상 태를 정확하게 조사기록 한다. 다음 판재의 경우는 나이테와 평행으로 만들어진 접선단면판재(板目)인지 아니면 나이테와 직각인 방사단면판재(柾木)인지를 판별한다. 아울러서 나이테의 너비와 부재部材가 이루는 방향을 조사하여 가공전의 원목직경, 나이 등을 추정한다.
이어서 수종을 조사하고 필요에 따라 성분분석을 할 수 있는 시편을 채취한다. 이 때 시편의 크기는 부재의 횡단면 전부가 포함되고 두께 약 1cm정도이상이 좋으나 수종조사만을 위한 경우는 직경 약 1mm정도의 작은 시편이라도 주사전자현미경 등 특수 현미경을 동원하면 분석이 가능하다. 보통은 대표 부위에서 약 1x1x1cm 크기의 시편을 채취한다. 수침목재의 경우 시편은 썩은 상태가 대부분이므로 PEG처리 혹은 탈수하여 파라핀으로 시편에 강고성을 부여한다. 다음 박편절삭기(microtome)로 두께 0.015~ 0.020mm의 목재의 3 단면별 절편切片을 만든 후 염색하여 프레파라트를 제작한다. 광학 혹은 전자현미경으로 보다 정밀한 나이테너비, 연륜구조 및 세포형태를 관찰 기록한다. 기 발표된 수종별 세포특성과 비교하여 해당 수종을 검색한다.
3. 일제강점기의 재질 연구
우리가 나라를 빼앗긴 1910년대 나카이(中井猛之進, 1882~1952)라는 일본 도쿄대학 교수는 조선총독부의 의뢰를 받아 한반도 전역에 걸친 식물을 조사하고 현대식물학의 분류기준에 의한 명명과 학명을 붙인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1938년 임업시험장 기사였던 야마바야시(山林)는 ‘조선 산 목재의 식별’이란 보고서를 내고 303종의 주요 목본식물에 대한 최초의 현미경에 의한 목재세포 형태조사를 벌린다. 아울러서 뮐레 반응 등 화학적 식별법과 자외선 조사법등 물리적인 식별법도 적용하여 우리나라 수종의 목재조직학(wood anatomy)적인 기초 자료를 집대성한다. 이 자료를 근거로 당시 한반도에서 벌리던 광범위한 발굴 사업에서 출토되는 목질유물의 재질분석도 이루어졌을 법하나, 일제강점기의 재질 분석은 주로 일본 본토에 있는 학자들에게 넘겨졌다. 일제 강점기 한반도 출토 목질유물을 분석한 대표적인 학자는 일본 교오토대학 교수였던 오나카(尾中文彦)이다. 그는 능산리 고분에서 금송을 처음 분석한 것을 필두로 여러 학자들은 금관총 목곽의 녹나무, 익산 쌍릉의 금송, 평양 오야리 낙랑고분의 넓은잎삼나무 등 한반도에 분포하지 않은 수종을 임금님의 목관으로 사용된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4. 우리 손으로 시작한 문화재 재질 연구
광복 후의 혼란기를 거쳐 문화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시기는 70년대에 들어오면서다. 1971년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 백제 25대 임금인 무령왕의 부부 합장릉의 발굴을 비롯하여 1973년 경주 황남대총 발굴 및 1975년 안압지 발굴이 이어졌다. 필연적으로 수많은 목질유물도 출토되었으나 아직 이를 과학적으로 분석해야 한다는 의식은 없었다. 심지어 무령왕릉 관재는 발굴보고서에 참여한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관재는 밤나무다’라고 한 줄로 적어 둔 것이 전부였다. 황남대총 발굴 목질유물의 일부는 당시 임업시험장에서 수종분석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로서는 목재조직학 전공자들도 목조문화재의 재질 관련 연구에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다만 필자가 1978년부터 처음 목조문화재의 재질연구를 시작하면서 중요성이 조금씩 인식되기 시작했다. 처음 향교나 사찰건물의 기둥목재를 시작으로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을 비롯하여 출토 목재인 공주 무령왕릉관재, 전남 신안군에서 인양된 송원대 중국선박인 신안선 등이 필자의 손을 거쳐 갔다. 그 외에도 완도 앞바다에서 인양된 고려시대 선박, 진도 벽파리에서 발굴된 통나무배, 안압지 배, 경남 창녕의 가야시대 고분 관재, 대구 칠곡지구 신라시대 유구 등 수많은 목질유물의 재질 분석에 관여하게 됐다.
필자는 1975년 4월 10일, ‘일본문부성 초빙장학생’이란 신분으로 일본 교토대학 농학부 임산공학과 석사과정 입학하면서 목재조직학(wood anatomy), 나무을 이루고 있는 세포모양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가장 크기가 큰 세포라야 기껏 머리카락 3개 굵기, 당연히 연구라는 것이 하루 종일 현미경과의 씨름이다. 유학생활 1년쯤 지난 어느 따사로운 봄날 일요일 오후, 기숙사 식당에서 유난히 흰 얼굴의 한 동양인이 나에게 한국 사람이냐며 다가왔다. 필자와 나이가 비슷한 이 사람은 나중에 경주박물관장을 거쳐 이화여대 석좌교수로 퇴직한 미술사학자 강우방 교수였다. 그 후 그는 같은 기숙사에서 지내면서, 명쾌하고 알기 쉽게 한일 문화재를 비교해설 해 주곤 했는데, 이것은 나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점차 나는 문화재를 보는 눈높이를 키워 나갈 수 있었다.
일본 유학생활 동안 필자는 순수 학문보다 나무로 만들어진 문화재 속에 숨겨진 비밀들을 찾아내는 일에 나도 모르게 조금씩 빠져들어 갔다. 그리고 옛 나무의 재질과 보존방법을 공부하는 고고목재학(Archeological woods)이라는 학문이 바로 내가 전공하는 나무 세포 연구가 바탕이 된다는 사실도 이때 알게 되었다. 어느덧 정해진 유학생활은 끝나고 귀국하여 근무지로 되돌아 왔다. 돌아오자마자 여러 정책연구에 매달리느라 나무 문화재 연구는 잠시 뒤로 미뤄두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여전히 머리와 가슴 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던 나무문화재에 대한 호기심은 나를 나무문화재 앞으로 데려다 놓았다. 그렇게 틈틈이 없는 시간을 조금씩 내어 나온 첫 작품이 바로 제주도 ‘조선조 향교 건물 기둥나무’ 분석. 나는 그 기쁨을 바탕으로 논문발표도 하고 남들이 별로 관심도 갖지 않은 분야이나 보람된 일이라는 생각에 더 열심히 할 다짐을 하고 있었다. 또 그 사이 임업연구원에서 전남대로 직장을 옮기게 되어 더욱 관심분야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81년 2월, 순조롭게 잘 나가던 나무 문화재와의 인연에 내려진 호된 시련을 당한다. 문제의 발단은 논문 한 편 때문이었다. 당시 전라남도 신안 앞바다에서 중국과 일본을 왕래하던 침몰 무역선이 발굴되었는데, 중국 송나라・원나라 때 만들어진 도자기가 2만 점이나 실려 있었다. 일명 ‘신안보물선’이라 부르는 이 배의 발굴에 많은 수많은 이들의 눈이 쏠렸고, 그 작업이 한창이었다.
필자는 이 배를 만든 선체船體나무의 재질을 분석하여 1981년 한국임학회 봄 총회 때 그 결과를 발표했다. 일본에만 자라는 삼나무가 일부 섞여 있다는 내용이 포함된 논문이었다. 이를 취재한 경향신문 기자는 일본 삼나무가 섞여 있으니 일본배일 것이라는 추정과 함께 경향신문의 특종기사가 되어 1면에 실리는 영광(?)을 안게 된다. 그리고 다음날, 이 보도는 일본 아사히신문, 하와이 교포신문, 조선일보로 재인용 확대되었다. 갑작스런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부터 문화재관리국(지금의 문화재청)으로부터의 확인 전화까지, 나는 2~3일간 정신이 없었고 이로 인해 부담도 상당히 느껴야 했다.
기사가 나가고 일주일쯤 지난 어느 날 안기부(지금의 국가정보원) 광주 분실에서 수사관이 학교로 찾아왔다. 당시의 표현을 그대로 전하자면 “기사 내용을 ‘고위층’이 아는 척하였다”고 한다. 광주민주화 운동의 직후, 권력탈취에 혈안이 되어 있을 당시에 설마 어마어마한 고위층께서 가라앉은 배 한 척의 국적에 관심을 가질 만한 여유가 있을 리는 없을 터인데, 어찌하다 신문에 눈길이라도 한번 갔던 것인지…. 죄인 심문하듯 연구 동기부터 따지더니 꼬치꼬치 신상명세서를 작성하고 사용한 표본은 압수해 가 버렸다.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광주를 떠나면 안된다는 명령도 잊지 않고 곁들이면서.
새가 아니라 점보 비행기라도 떨어뜨릴 공포의 대상, 안기부한테 조사를 당하였으니 나이 마흔에 겨우 얻는 대학 전임강사 자리는 풍전등화인 셈이었다. 이런 상황과 위압적인 분위기 탓에 나는 매일 밤 불안에 떨게 만들었고, 낮에는 학생들이 연구실 노크만 해도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그러고 10여 일쯤 지난 어느 날 감금 아닌 감금이 해제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겨우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가 천년이라더니 그때의 긴 하루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왜, 무엇 때문에 학자의 하나의 연구결과까지도 조사의 대상이 되어야 했는지 아무런 설명도 없었고 지금도 그 이유를 모른다. 어렵게 구한 표본을 돌려달라는 말조차 감히 입에 올릴 수도 없었다. 오히려 잡혀가서 혼나지 않은 것만으로 감사해야 했을 뿐….
그런데 이 사건은 예기치 않은 수확을 안겨주었다. 필자의 전공인 목재조직학이 무얼 하는 학문인지를 알려주는 계기가 된 것이다. 문화재 관련 학자들과 공무원들에게 이런 분야도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셈이다. 당장 '신안해저유물 발굴위원'이란 감투가 씌워졌다. 나를 제외하면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름 석 자만으로도 일반인들이 쉽게 아는 유명학자들이었다. 어쨌든 감투 덕에 약 4년에 걸쳐 보물선 발굴현장에 직접 참가하여 표본도 수집하고 배의 재질도 분석하는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또 그러다보니 관련 분야 사람들도 나를 만나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아! 그 신안 보물선 재질을 분석한 박 아무개냐" 하며 먼저 알아주기도 하였다. 그 이후 신안보물선과 아울러 곧 이어 발굴된 완도 약산도 어두리 앞 고려 초기 화물선, 완도 장좌리 청해진 유적지의 목책, 강진 무위사와 전북 화암사 건축재의 재질 분석을 비롯하여 몇 군데 출토 나무유물이 나의 손을 거쳐 갔다. 그 동안 개인적인 사정으로 경북대학으로 옮겨오면서 잠시 주춤거리기도 하였으나 나무문화재 재질연구는 그대로 이어오고 있었다.
그러던 1990년 여름, 나는 백제 무령왕릉에서 나온 나무관재를 비롯하여 낙랑고분과 창녕 다호리 가야고분의 나무관재 조각을 만나게 된 것이다. 사실 나무 문화재연구에서는 표본을 구하는 일이 가장 어렵다. 재질분석을 하겠다고 어렵사리 청을 넣으면 톱으로 문화재를 잘라내는 정도로 생각하고 대개 문전박대를 당한다. 그러나 작은 부스러기나 사방 1mm크기, 경우에 따라서는 이보다 더 작은 표본이라도 전자현미경을 들이대면 나무의 종류 정도는 찾아낸다. 그러나 책임자에게 이런 내용을 설명하고 재질분석을 하자고 설득하는 일은 언제나 간단치 않다.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허락이 있을 때까지 발표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단서까지 붙는다. 그러나 학자라는 사람들의 속성이 새로운 것을 하나 찾으면 어디다 대놓고 자랑하지 않고는 입이 간지러워 못 배기게 마련인데, 아차, 잊어버리고 그 내용이 새어 나가 발표되거나 말 한마디 잘못으로 오해라도 생기면 그 기관으로부터 표본 구하는 일은 그것으로 끝이다.
너무 귀한 표본을 손에 넣은 터라 벅찬 설렘을 안고 현미경 앞에 앉았다. ‘잃어버린 왕국’ 백제 25대 무령왕(462~523)의 왕릉 발굴은 1971년에 이루어졌지만, 너무나 유명하여 필자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광복 후 가장 가치 있는 발굴이라는 명성과 달리 지나치게 서두른 탓에 수많은 귀중한 자료가 없어져 버렸고 충분한 연구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채 수 십 년의 세월이 흘러가고 있는 상태였다. 시꺼먼 옻칠에 으스스한 느낌마저 주는 관재棺材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우선 관재의 나무 종류는 뜻밖에도 무령왕과 왕비의 시신을 감싸고 있던 관 나무는 일본 남부지방에서 가져온 금송(金松, Sciodopitys verticillata)임을 밝힐 수 있었다. 이는 무령왕이 어릴 때 일본에서 자랐다는 역사적 기록을 증명하고 백제와 일본의 관계를 규명하는 귀중한 근거를 제시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몇몇 매스컴에 연구 내용이 크게 소개되자 나는 다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안기부 조사를 또 당하는 것은 아니겠지? 지난날의 쓴 기억이 떠올라 매스컴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처지라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려야 했다. 개인적으로 무령왕릉관재를 분석함으로써 귀중한 고고학적인 근거를 찾았다는 것은 일생의 크나큰 영광이다. 하지만 이렇게 중요한 기초조사를 1990년까지 거의 20년 동안 재질분석을 해볼 생각도 않았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지금도 여전히 대부분의 발굴현장마다 수많은 나무 자료들이 재질조사조차 거치지 않고 없어져 버리는 현실은 안타까울 뿐이다.
이런 저런 인연으로 이외에도 일산 신도시, 익산 미륵사지, 울산 옥현 청동기 유적, 부여 궁남지 등 여러 매장문화재까지 우리나라 나무문화재의 상당 부분이 필자의 손을 거쳐 재질 분석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언제나 나의 관심의 중심부에 있던, 단일 나무문화재로서는 세계 최대라고 할 수 있는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은 접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드디어 기회가 왔다. 1993년 경 부산 MBC 창사 30주년 다큐멘터리 제작에 관여하면서 팔만대장경판과 만나게 된 것이다. 이어서 문화공보부 주관 ‘팔만대장경판의 과학적인 보존을 위한 기초조사’ 팀에 참가하면서 본격적이 대장경판 연구에 들어갔다.
팔만대장경판은 알려진 바와 같이 고려 고종 23년(1236)에 시작하여 38년까지 16년간에 걸쳐 제작된 81,258여 장의 나무판(경판)으로 전체 무게는 280톤에 이른다. 한 장의 크기는 길이 68 혹은 78㎝, 나비 24㎝, 두께 3㎝, 무게 3㎏정도이다. 한 장에는 앞뒤 322자, 양면을 합치면 644자가 새겨져 있고 팔만대장경판 전체로 볼 때는 약 5천2백만 자나 된다. 이렇게 엄청난 일을 해두고도 어인 일인지 선조들은 기록에 너무 인색하였다. 믿을 만한 기록이라고는 《고려사》에 한 줄, 《조선왕조실록》에 두 줄이 전부다.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 오늘날 해인사에 보관하고 있는지, 수많은 사연들이 모두 신비의 베일에 가려진 문화재다. 기록이 없고 현물은 남아 있는 문화재의 비밀 문…, 나는 이 문을 열기 위해 자연과학이라는 열쇠를 사용하였다.
그 시작은 우선 무슨 나무로 만들었는지를 밝히는 일이었다. 나는 먼저 자작나무로 제작하였다는 전설부터 확인했다. 결과는 전설과 달리 우리나라 산에서 흔히 보는 산벚나무와 돌배나무가 대부분이었다. 다음은 강화도에서 새겨서 조선 태조 때 해인사로 옮겨왔다는 학설에 정면 도전을 해보았다. 경판 자체 무게만도 4톤 트럭으로 70대 분량, 천리 길을 지게로 지고 머리에 이고 달구지에 실어 날랐다면 지금의 경판 표면에서 부딪힌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어야 했다. 표면에 생긴 여러 가지 흔적들을 조사하고 경판이동에 필요한 인원을 계산해 본 결과, 해인사 근처에서 만들었을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또 팔만대장경판을 해인사로 옮기는 일이 있었다면 임금님의 방귀소리까지 적어 둘 정도로, 세세한 기록으로 유명한 《조선왕조실록》에 이런 내용이 비치지도 않았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추정했다. 이런 내용들을 정리하여 1999년 ‘다시 보는 팔만대장경판 이야기’라는 책을 한 권 내고 이어서 2007년에 ‘나무에 새겨진 팔만대장경의 비밀’을 김영사에서 내는 것으로 마무리를 하고 후속 연구는 후학들에게 넘겨 둔 상태이다.
5. 목조문화재에 사용한 주요수종
(1). 건축재
인간이 처음 집단생활을 시작할 때 주거의 공간으로서는 자연 동굴을 이용하였으나 차츰 주거의 형태는 인위적으로 축조한 움막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신구석기시대에 축조된 구조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재료의 재질 추정에는 어려움이 있으나 움막은 반지하의 형태이므로 잘 썩지 않고 단단한 재질의 나무가 적당하며 참나무류 및 물푸레나무류는 이런 목적에 적합할 것이다. 또 신구석기시대의 목질유물은 다량의 오리나무가 출토되는 점으로 보아 건축재의 보조 재료로서 이 나무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주거의 형태가 차츰 지상으로 올라오기 시작하면서 건축재는 통나무를 그대로 사용하는 형태를 벗어나 박피하는 등의 가공이 필요하게 되었다. 따라서 가공하기 쉬우면서 비교적 단단하고 곧게 자라며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목재를 선호하게 되었고 우리나라에서 이와 같은 목적에 적합한 건축재의 수종은 소나무 종류이다. 따라서 왕궁을 비롯한 대부분의 건축재에 사용되었을 것이고 소나무류 이외는 북쪽지방에서 잣나무, 전국적으로는 느티나무, 전나무, 참나무류 등이 사용되었다. 특히 고려 말에서 조선에 들어오면서 소나무가 건축재 이외에 조선재로서의 용도가 급격히 증가하여 사찰이나 향교 등에는 소나무이외의 수종이 사용된 예가 흔하다. 한편 제주도 등 남부지방에서는 고유수종인 조록나무, 잣밤나무등의 상록수를 사용한 흔적도 보인다.
(2). 선박재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조선술이 발달하였고 사용재료도 다양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재료는 우선 물속에서 견딜힘이 강한 수종이었을 것이고 가볍고 단단하며 가공이 쉬운 수종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에 적합한 수종은 지금은 희귀목에 불과한 비자나무가 고대에는 상당히 많이 사용하였든 것으로 보인다. 완도 어두리 침몰선의 경우 예외적으로 선체에 소나무 이외에 비자나무, 상수리나무, 졸참나무, 느티나무, 굴피나무 등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선박재의 거의 대부분은 소나무이었으며 선조들은 소나무보호에 안간힘을 쓴 흔적이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고려 때에도 《동국이상국집》, 《고려사》등에 소나무보호에 대한 기록이 있어나 강력한 소나무 보호정책은 조선시대부터 시작된 것 같다. 개국과 함께 왜구를 막기 위한 해군력 강화가 요구되었고 군선재로서도 많은 소나무가 필요하게 되었다. 경국대전에는 송목금벌松木禁伐이라는 조항으로서 소나무의 벌채를 규제하였는데 이는 건축재의 확보보다는 군선제조에 쓸 나무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태조실록에는 군선을 늘려야할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고 세조실록에는 군선에 쓸 나무가 부족하므로 관가나 양반의 집도 우량 소나무의 사용을 자제하도록 함으로서 한때 군선의 수가 최대에 달하였다. 한편 중종실록을 보면 병선의 수명이 5~8년에 불과하다 하여 소나무의 공급은 수요를 따르지 못하게 된다. 조선조의 소나무 보호정책은 군선의 제조기법이 낙후되어 수명이 너무 짧고, 화전을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으며 송정의 비효율성 등으로 조선 말기에 오면서 우리나라의 우량 소나무는 차츰 고갈되었다.
신안송원대무역선의 선체구성수종은 마미송, 넓은잎삼나무, 녹나무, 가시나무, 조록나무류 등이었다. 일본의 경우는 고대에는 녹나무로 만든 통나무배가 알려져 있으며 후대로 오면서 비자나무가 가끔 사용되었고 소나무, 삼나무가 흔하다.
(3. 목관재
불로장생에 대한 꿈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가장 간절한 소망일 것이다. 부족사회가 시작되면서 절대 권력자는 내세에 대한 믿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으며 묘제가 발달하여 목관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는 자기의 시신을 감싸는 관재에 대하여는 특별한 관심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관재를 만드는데 적합한 나무는 거리의 멀고 가까움에 관계없이 곳은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의 어디까지라도 운반하여 사용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실례로서 최근 필자에 의하여 밝혀진 무령왕릉의 금송관재는 당시의 교역상황을 추정할 수 있는 귀중한 실증적 자료로 생각된다. 주요고분의 목관재의 수종을 보면 다음과 같다.
낙랑고분 : 두꺼운 주목판재를 사용하였다. 주목은 현재 고산에만 주로 분포하며 직경이 큰 나무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주목의 분포범위를 추정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한편 일제강점기에 조사한 일본 측 자료에는 낙랑고분 출토관재가 중국남부에 만 분포하는 넓은잎삼나무(중국에서는 삼목, 일본 삼나무는 일본유삼이라함)라고 분석하고 이는 낙랑이 중국남부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무령왕릉 : 왕과 왕비의 관재 모두 일본 특산 금송으로 제작되었다. 무령왕릉의 금송관재는 가공하기 전의 원목은 직경 130cm, 길이 3m, 무게 3.6ton이었고 수령은 300년 이상이므로 당시의 백제와 일본 사이에는 엄청난 규모의 교역이 있었든 것으로 생각된다.
의창 다호리 가야 고분 : 관재는 직경 약 1m에 달하는 상수리나무를 벌채하여 반으로 자르고 구유형으로 파낸 다음 한쪽은 시신을 넣고 나머지 한쪽은 뚜껑으로 하여 나무못으로 고정하였다. 가공 방법에 있어서 통나무를 톱을 사용하여 두 쪽으로 자른 것인지 아니면 다른 나무를 도끼나 자귀 등을 사용하여 반쪽을 버리고 구유형으로 파낸 것인 지는 불명하다. 상수리나무는 비중이 크고 단단하여 지금도 가공이 어려운 대표적인 수종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정밀한 가공을 하여 관재로 사용한 것으로 볼 때 당시의 철기제작 기술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화순 대곡리 고분목관 : 분포지역이 한반도 남부에서 일본에 걸쳐 분포하는 굴피나무를 사용하였다. 이 나무는 현재의 형태로 보아서는 직경이 그다지 크지 않아 관재로 부적합하나 당시에는 충분히 큰 나무가 있지 않았나 추정된다. 이와 같이 수종분석은 당시의 산림을 복원해 볼 수 있는 자료로서도 값어치가 있다.
천마총 및 황남대총 : 느티나무를 판자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천마도는 자작나무 종류 중 자작나무나 거제수나무, 사스레나무의 어느 한 수종으로 추정된다. 이들 수종은 세포조직의 배열이 비슷하여 거의 구분이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북쪽 지방에만 있는 자작나무로 해석하여 당시의 고구려와의 외교관계를 논의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조선시대 민묘 : 고려 때의 화장풍습에서 매장풍습으로 바뀌면서 선호수종도 거의 소나무로 바뀐 것 같다. 소나무를 선호하게 된 것은 비교적 흔히 구할 수 있고 가공이 쉬웠기 때문이다.
(4). 가구재
가구재는 형태를 갖추기 위한 골재와 미닫이 등 앞면의 장식용 판재의 부분으로 크게 대별된다. 골재로 쓰이는 수종은 소나무, 참나무, 배나무, 단풍나무 등 재질이 비교적 단단하고 가공이 쉬운 나무를 사용하였으며 판재는 느티나무, 오동나무, 먹감나무, 참죽나무, 물푸레나무등 무늬가 아름다운 널판재를 사용하였다. 18~19세기에 제작된 이조가구를 중심으로 사용수종을 보면 다음과 같다.
책장 : 소나무나 배나무를 골재로 하여 오동나무나 느티나무판재로 장식하였다.
탁자 : 책이나 기물을 올려놓을 수 있는 가구로서 골재는 소나무, 단풍나무, 참나무 등이며 참죽나무, 오동나무, 먹감나무 등의 널판재로 치장하였다. 또 판자에 대나무를 붙이거나 골재를 굵은 통대로 사용한 죽장탁자도 가끔 볼 수 있다.
장농 : 골재는 배나무 및 가래나무 혹은 소나무를 사용하며 널판재는 느티나무, 오동나무 등을 이용한다. 앞 판의 장식을 위하여 검은 줄무늬가 들어간 감나무(일명 먹감나무)를 사용하였다.
찬탁 및 소반 : 다리와 상판 모두를 소나무 혹은 은행나무로 만들거나 느티나무 혹은 참죽나무를 상판으로 하고 다리는 소나무나 배나무를 쓴다.
뒤주 : 잘 썩지 않고 통기성이 비교적 좋은 느티나무가 대부분이다.
반닫이 : 소나무, 느티나무, 먹감나무, 오동나무가 주로 쓰인다.
(5). 목판과 나무 활자
목판은 글자가 새겨진 나무판을 말하며 인쇄문화의 발달을 알리는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 중의 하나다. 문자가 발명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한꺼번에 지식을 전달하는 수단의 첫 수단이 바로 목판에 의한 인쇄이다. 우리나라는 팔만대장경이라는 81,258장의 인류 최대의 목판을 가지고 있으며 안동 국학원에는 조선시대 양반가의 문집을 비롯한 6만여 장의 목판을 보관하고 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은 산벚나무가 64%나 되고 그 외 돌배나무, 거제수나무 등으로 제작되었으며, 국학원 목판은 고로쇠나무, 박달나무, 거제수나무를 비롯하여 감나무, 산벚나무, 서어나무, 돌배나무, 오리나무 등으로 만들었다.
나무 활자의 경우 예부터 회양목이 널리 사용되었으며 그 외 돌배나무, 감나무, 모과나무 등 생활주변의 다양한 수종이 이용되었다.
(6). 기타 생활용구 목재
일상생활에 흔히 필요한 생활용구 목재는 수종고유의 특성을 살려서 적합한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농기구재는 단단하고 질긴 나무, 조각재는 피나무와 같이 연하고 부드러운 나무 등을 선호하고 있다.
농기구재 : 대부분의 농기구재는 소나무와 참나무류가 쓰이며 도리깨 등 비교적 질기고 단단한 용도에는 물푸레나무나 들메나무가 이용되었다.
조각재 : 부드러워서 칼질하기가 쉽고 무늬가 아름다운 수종이 주로 사용되었다. 피나무, 느티나무, 소나무 등이 사용된다.
칠기재 : 칠기에 목심으로 넣은 나무는 의창 다호리 가야고분에서 오리나무, 신안 송원대 무역선에서는 조록나무가 분석되었다. 고고학적인 검증이 명확하지는 않으나 감은사지 출토 칠기 그릇은 너도밤나무가 분석된바 있다.
기타 서어나무 및 은행나무로 만들어진 화암사 불구佛具, 완도 어두리 침몰선에서 발굴된 목제품에 사용된 동백나무 등 다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