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국사기에서 본 옛 나무(산림. 97.6)
우리의 옛 선조 들은 한반도에 정착하면서부터 숲에 묻혀서 나무를 재료로 삶을 영위하였다. 무슨 나무를 어떻게 사용하였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의 차원이 아니라 이 땅에 과연 어떤 나무가 자랐으며 이 나무와 더불어 살아온 선조의 발자취를 가름해 볼 수 있는 지표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옛 나무를 추정해보는 방법은 출토목질유물을 현미경으로 관찰하거나 화분분석 등의 자연과학적인 수단과 선조 들이 기록해둔 고전을 들춰보는 방법이 있겠으나 나무의 쓰임새에 관한 광범위한 정보를 얻는데는 고전을 찾아보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정치사 중심으로 정사를 기록한 최초의 사서이므로 설화중심의 삼국유사에 비하여 비교적 믿을 수 있는 내용으로서 포함된 나무의 종류와 쓰임새를 알아보고 싶은 욕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자연과학 전공자가 방대한 삼국사기의 내용을 읽어 관련부분을 발췌 정리하는 데는 어려움이 너무 많았다. 다행히 근래 삼국사기와 조선왕조실록 등 고전의 CD-ROM 제작이 활발하여 일반인들이 쉽게 고전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 글은 <한글과 컴퓨터>사에서 제작한 김부식의 <삼국사기 CD 96>을 검색하여 수록되어 있는 나무종류와 그에 관련된 기술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소나무와 잣나무(松柏)
소나무에 관한 기록은 9건이 검색되었고 잣나무는 소나무와 동시 검색된 2건이 있었다. 소나무와 잣나무를 함께한 기록으로는 열전 눌최 조에는 <이 때 백제가 더욱 급공하여 속함, 기잠, 용책 등 세 성이 함락되거나 항복하였다. 눌최는 나머지 세 성을 고수하고 있었는데, 오군(五軍)이 구원하지 않고 돌아갔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비분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군사들에게 말했다. 봄철의 온화한 기운에는 초목이 모두 번성하지만, 겨울이 되면 유독 소나무와 잣나무만이 남는다. 이제 우리의 외로운 성이 구원하는 군사는 없고 날로 위급하여지니, 이제는 실로 지조 있는 사나이와 의리 있는 사나이가 절개를 다하고 이름을 날릴 때이다. 너희들은 장차 어떻게 하려는가?. 사졸 들은 모두 눈물을 뿌리면서 말했다. ?감히 죽는 것을 애석하게 여기지 않고, 오직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라 하였고 같은 열전 비녕자조에 <진덕왕 원년 백제가 대군을 거느리고 무산, 감물, 동잠 등의 성을 공격하므로 유신이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이끌고 대항하였다. 그러나 백제군은 정예군이었기 때문에 유신이 고전하고 승리하지 못하여 사기는 꺾이고 힘이 빠졌다. 유신은 비녕자가 힘껏 싸워 적진 깊이 들어갈 뜻이 있음을 알고 그를 불러 말했다. ?추운 겨울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는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법이다. 오늘의 사태가 위급하게 되었으니 그대가 아니면 누가 용감히 싸우며 기묘한 계책을 내어 여러 사람의 마음을 격려하겠는가?. 유신이 이어서 그와 함께 술을 마시면서 은근한 마음을 표시하니 비녕자가 재배하고 말했다. 지금 많은 사람 가운데 유독 저에게 일을 부탁하시니 가히 지기라 할 만합니다. 진실로 죽음으로써 보답하여야 마땅하겠습니다.>라 하여 모두 출전하는 장수를 격려하면서 송백의 늘 푸르름이 장수의 충성심과 기개를 지키는 표상으로 비유되었다. 열전 궁예조의 <상제가 아들을 진 마에 내려보냈다는 것은 진한과 마한을 말한 것이다. 두 마리 용이 나타났는데 한 마리는 푸른 나무에 몸을 감추고, 한 마리는 검은 쇠에 몸을 나타낸다는 것은, 푸른 나무는 소나무를 말함이니, 송악군 사람으로서 용으로 이름을 지은 사람의 자손을 뜻하나니, 이는 지금의 파진찬 시중을 이른 것이다...>라는 내용도 용이 몸을 숨기는 신성하고 웅장한 나무로 기록하고 있다.
선비의 기품을 상징한 나무로는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었는데 열전 최치원조에 보면 <치원은 서쪽에서 대당을 섬길 때부터 동으로 고국에 돌아올 때까지, 항상 난세를 만나 처신하기가 어려웠고 곧잘 비난을 받기도 했기 때문에, 스스로 불우함을 한탄하고 다시는 벼슬길에 오르지 않기로 하였다. 그는 산림과 강과 바다를 소요하며 누대와 정자를 지어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어놓고 책 속에 묻혀서 풍월을 읊었다. 경주의 남산과 강주의 빙산과 협주의 청양사와 지리산의 쌍계사와 합포현의 별장이 모두 그가 놀았던 곳이다.>하여 이때에도 선비의 주변에는 송죽이 항상 함께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황룡사에 소나무 벽화를 그린 솔거에 관한 기록을 보면 열전8 솔거조에 <솔거는 신라인인데 출신이 미천하여 가문의 내력을 기록해 놓지 않았다. 그는 선천적으로 그림을 잘 그렸다. 그가 일찍이 황룡사 벽에 노송을 그린 적이 있었는데, 줄기가 비늘 같았으며, 가지와 잎이 구불구불하여 까마귀, 솔개, 제비, 참새 등이 가끔 멀리서 바라보고 날아들다가 벽화에 이르러서는 벽에 부딪혀 떨어지곤 하였다. 세월이 오래 되어 색깔이 변하자 절의 승려들이 단청으로 덧칠을 하였다. 그 후로 까마귀와 참새가 다시는 오지 않았다. 또한 경주 분황사의 관음보살과 진주 단속사의 유마 화상이 모두 그가 그린 것인데 세상 사람들이 대대로 신화라고 말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아마 반송을 그린 것이리라 본다.
또 소나무는 흉년이 들면 송피를 벗겨 식량으로 대용한 것은 당시에도 일반화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신라 눌지마립간 16연(432)조에 <봄, 곡식이 귀하여 사람들이 소나무 껍질을 먹었다.>하였다.
소나무와 관련하여 기후상황을 추찰할 수 있는 기록으로는 신라 애장왕 2연(801)조에<...여름 5월 초하루 임술일에 꼭 있어야 할 일식이 일어나지 않았다. 가을 9월, 화성이 달에 들어가고, 별이 비오듯 떨어졌다. 무진주에서 붉은 까마귀를 진상하고, 우두주에서는 흰 꿩을 진상하였다. 겨울 10월, 날씨가 아주 추워서 소나무와 대나무가 모두 죽었다.> 하여 유난히도 이 해에는 괴이한 일이 많았으며 천재지변이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러나 소나무가 얼어죽었다는 기록은 그대로 믿기가 어렵고 소나무의 생태로 볼 때 추위만이 아니고 병충해나 옮겨 심은 나무가 활착이 덜된 쇠약한 탓이 아닐까?
소나무를 건축재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예를 보면, 고구려 유리왕 원년(BC 19)조의 기록에는 주몽이 부여에 있지 못하고 남쪽으로 도망쳐 나올 때 그의 처 예씨에게 <"당신이 만약 아들을 낳으면, 나의 유물이 칠각형의 돌 위에 있는 소나무 밑에 숨겨져 있다고 말하시오. 만일 이것을 발견하면 곧 나의 아들일 것이오"라고 말했다. 유리가 이 말을 듣고 바로 산골로 들어가 그것을 찾았으나 실패하고 지친 상태로 돌아왔다. 하루는 유리가 마루에 앉아 있었는데, 기둥과 주춧돌 사이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듯하여 가보니, 주춧돌이 칠각형이었다. 그는 곧 기둥 밑을 뒤져서 부러진 칼 조각을 찾아냈다. 그는 마침내 이것을 가지고 졸본으로 가서, 부왕을 만나 부러진 칼을 바치고 왕위를 잇게되었다.>하였는데 집을 짓는 기둥재로 이때 벌써 소나무가 널리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기타 묘지의 둘레나무로 우리는 지금도 소나무를 사용하고 있는데 고구려 동천왕 8연(234)조에는 재미있는 기록이 있다. <가을 9월, 태후 우씨가 죽었다. 태후가 죽을 때 다음과 같이 유언하였다. "내가 행실이 좋지 않았으니,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국양왕(고국천왕)을 보겠는가? 만약 여러 신하들이 계곡이나 구덩이에 나의 시신을 차마 버리지 못하겠거든, 나를 산상왕릉 옆에 묻어 달라." 태후의 유언대로 장사하였다. 무당이 말했다. "국양왕이 나에게 내려와서 '어제 우씨가 산상왕에게 가는 것을 보고는, 분함을 참을 수 없어서 마침내 우씨와 다투었다. 내가 돌아와 생각하니 낯이 아무리 두껍다 하여도 차마 백성들을 대할 수 없구나. 네가 조정에 이를 알려서, 나의 무덤을 가리는 시설을 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국양왕의 능 앞에 일곱 겹으로 소나무를 심었다.>한다. 국양왕의 왕비 우씨는 죽은 후에도 시동생이자 정부이었든 산상왕릉 옆에 묻어 달라고 하고 그것도 모자라 혼백이 된 후에도 계속만나고 있었으니 어지간히 화가 날만도 하다. 그런데 국양왕의 선택은 저승에서도 산상왕을 잊지 못한 우씨에게 아예 무덤 속에서 나오지도 못하도록 꽁꽁 묶어 놓기라도 하련만 국양왕은 오히려 자신의 무덤을 소나무 7겹으로 둘러 싸서 아예 우씨의 행동을 볼 수 없도록 부탁하였다. 어느 쪽이 현명한 선택일지는 생각에 따라 다르겠으나 오늘날 소나무를 묘지의 둘레나무로 심은 것은 한번 눈감아 버린 풍진세상 무슨 일이 있더라도 두 번 다시 보시지 말라는 후손들의 주문이 아닐는지?
대나무(竹)
대나무가 선비의 대표로서 기록된 것은 앞의 열전 최치원조에서만 볼 수 있고 다른 기록들은 쓰임새와의 관련이다.
신라 문무왕12연(672)조에는 당나라 황제에 알리지 않고 백제를 토벌한 후 청죄(請罪)의 표를 올린 내용 중에 <...남산의 대나무도 저의 죄를 적기에 부족할 것이요, 포야산의 나무도 저의 착고(차꼬, 옛 형구의 일종)를 만드는데 부족할 것이니, 종묘와 사직을 연못으로 만들고, 저를 죽여 몸을 찢어 버리더라도, 이 사정을 듣고 나서 친히 판단하여 주신다면 기꺼이 형벌을 받겠습니다....>하여 변방 소국인 신라임금의 비애를 엿보게 한다. 대나무에 죄를 적는다는 내용에서 신라중기까지도 종이가 그렇게 흔치 않아 죽간(竹簡)을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나 추정해 본다. 한편 악기재료로 사용한 예는 지의 낙(樂)조에 <...향삼죽(鄕三竹)은 역시 신라에서 시작되었는데 누가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고기에는 "신문왕 때 동해 가운데에 갑자기 작은 산이 생겼는데, 모양이 거북의 머리와 같고 그 위에 한 포기의 대나무가 있어, 낮에는 갈라져 두 개가 되고, 밤에는 합쳐져 하나가 되었다. 왕이 사람을 시켜 그 대나무를 쪼개어 적(笛)을 만들게 하고, 이름을 만파식(萬波息)이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 말이 괴이하여 믿을 수는 없다...>는 기록이 있다. 또 신문왕 12연(692)조에 <봄, 대나무가 말랐다...>는 기록과 애장왕2연조(801)의 <겨울 10월, 날씨가 아주 추워서 소나무와 대나무가 모두 죽었다.>는 기록은 모두 가뭄과 추위를 추정할 수 있다.
느티나무(槐, 槐樹)
고전에 표기된 나무이름이 지금 우리가 쓰는 한자이름과 동일한 것인지 아니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아는 것은 고전해석에 기본이 되고 있으나 이 분야를 전문적으로 밝힌 연구결과는 찾아보기 어렵다. 예를 들어 벚나무와 자작나무를 모두 화(樺)로 표기한다거나 삼(杉)이 일본삼나무인지 젓나무인지가 불명한 점등 끝이 없다. 여기서 말하려는 괴(槐) 혹은 괴수(槐樹)로 표기된 나무는 7건이 검색되었는데 대표적인 불명 수종 명이다.
백제 다루왕 21년(48)조에 <봄 2월, 왕궁 뜰에 있는 큰 괴수가 저절로 말라죽었다.>, 백제 의자왕 19년(659)조에는 <9월, 대궐 뜰에 있는 괴수가 사람이 곡하는 소리처럼 울었으며 밤에는 대궐 남쪽 행길에서 귀신의 곡소리가 들렸다.>, 열전의 해론 조에는 해론 이란 장수가 성을 지키지 못하게 되자 우리 왕이 나에게 이 성을 맡겼는데, 온전하게 지키지 못하고 적에게 패하니, 원컨대 죽어서도 커다란 악귀가 되어 백제인 들을 모조리 잡아먹고 이 성을 회복하리라.? 그는 마침내 팔을 걷고 눈을 부릅뜨고 달려나가 괴수에 부딪쳐 죽었다. 이에 성은 함락되고 군사들은 모두 항복하였다.>, 지의 거기 조에는 <6두품은, 안장에 자단, 침향, 황양, 괴 등을 사용하거나, 금, 은을 사용하거나 구슬 다는 것을 금한다...>하였고 이 금지규정은 5두품, 4두품 본인은 물론 4두품의 처와 백성들까지 광범위하게 규제하고 있다.
옛날에는 느티나무와 회화나무를 동일한 괴(槐)자로 표기하였으므로 명확히 어느 나무인지 구분하기는 어렵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괴(槐)를 회화나무로 해석하고 있는데 반하여 필자는 느티나무로 보고 있다. 원삼국시대에서 삼국시대에 걸치는 여러 출토목질유물의 수종조사에 의하면 임당고분 관재, 천마총 관재 등 당시에 느티나무는 너무나 흔히 사용된 흔적이 곳곳에 있었다. 또 나무의 재질로 볼 때 회화나무 보다는 느티나무가 훨씬 우수하여 자단, 침향 등의 우량재와 같은 용도로 쓰일 수 있는 점등을 보아 삼국사기의 괴(槐)를 느티나무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버드나무(柳, 楊柳)
유(柳) 혹은 양유(楊柳)로 기록되어 있어서 사시나무종류와 버드나무종류를 따로 구분하지 않고 기록한 것 같고 5건이 검색되었다. 버드나무 종류가 주로 사용되었으며 백제 무왕 35년(634)조에는 <3월, 대궐 남쪽에 못을 파서 20여 리 밖에서 물을 끌어들이고, 사면 언덕에 버들을 심고(四岸植以楊柳), 물 가운데 방장선산을 흉내낸 섬을 쌓았다.>하여 왕버들이나 능수버들을 심은 것으로 보인다.
기타 신라 나해니사금(198) 3년조에는 <여름 4월, 시조묘 앞에 쓰러졌던 버드나무가 저절로 일어섰다(臥柳自起)...>, 신라 첨해니사금 7년(253)조에는 여름 4월, 대궐 동쪽 연못에서 용이 나타나고, 금성 남쪽에서는 쓰러졌던 버드나무가 저절로 일어섰다. 5월부터 7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으므로, 조묘와 명산에 제사지내고 기원하였다. 곧 비가 내렸다. 흉년이 들어 도둑이 많이 생겼다...> 하여 인가 부근을 비롯하여 임금의 왕릉 둘레나무 및 하안(河岸)에 널리 심었든 나무라고 생각된다.
사용방법을 나타낸 내용으로는 지 거기 조에 <4두품으로부터 백성들에 이르기까지는,...안장 요는 가죽을 사용하며, 말 다래는 버들(楊)과 대나무를 사용한다...>와 열전 김유신조에 <장군 소정방·김 인문 등은 해안을 따라 의벌포에 이르렀으나 해안이 갯벌이어서 걸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버들을 자리로 만들어 깔아놓고(乃布柳席), 군사들을 하선케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복사나무와 자두나무(桃李)
복사나무와 자두나무는 도리(桃李)라 하여 모두 한꺼번에 표기되었으며 신라 파사니사금 23년(102), 나해니사금 8년(203), 진흥왕 원년(540), 경문왕 3년(863)과 고구려 고국양왕 3년(386), 문자왕 3년(493), 안원왕 10년(540) 및 백제 온조왕 3년(BC 16)조에는 모두 <겨울 10월, 복사나무와 자두나무 꽃이 피었다.>로 기록되고 신라 경덕왕 22연(763)조에는 <8월, 복사나무와 자두나무 꽃이 두 번째 피었다.>와 흥덕왕 8연(833)조에는 <겨울 10월, 복사나무와 자두나무에 두 번째 꽃이 피었고,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이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옛 과일의 대표는 복숭아, 오얏(자두), 돌배, 매실이며 특히 복숭아와 자두는 봄꽃의 감상과 아울러 식용열매를 딸 수 있으므로 궁궐이나 일반가정의 뜰에 반드시 한두 그루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0건이 검색된 것 중에 8건이 겨울 10월에 꽃이 피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전부 이상기후라고 보기는 어렵다. 피는 시기의 기록이 우리의 상식과는 맞지 않다.
매화(梅花)
고구려 대무신왕 24년(41)조에 <봄 3월, 서울에 우박이 내렸다. 가을 7월, 서리가 내려 곡식이 죽었다. 8월, 매화가 피었다(梅花發)>하여 복사나무와 자두나무와 마찬가지로 과일과 꽃의 감상을 위한 정원수로 널리 심은 것 같다. 마찬가지로 피는 시기의 기록은 믿을 수 없다.
모란(牧丹)
선덕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덕만이며, 진평왕의 맏딸이다. 덕만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고 명민하였다. 진평왕이 별세하였으나 아들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덕만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성조황고라는 칭호를 올렸다. 전 임금 때 당 나라에서 온 모란꽃 그림과 꽃씨를 얻어 덕만에게 보인 적이 있었다. 덕만은 "이 꽃이 비록 곱기는 하지만 틀림없이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왕은 웃으면서 "네가 어떻게 그것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꽃을 그렸으나 나비가 없기에 이를 알았습니다. 무릇 여자로서 국색을 갖추고 있으면 남자가 따르는 법이고, 꽃에 향기가 있으면 벌과 나비가 따르는 법입니다. 이 꽃이 무척 고운데도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으니 이는 틀림없이 향기가 없는 꽃일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씨앗을 심었는데 과연 그녀가 말한 것과 같았다. 그녀의 앞을 내다보는 식견이 이와 같았다.
장미(薔薇)
제 46권 열전6 설총 조에는 <설총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신이 들으니 예전에 화왕(花王, 모란)이 처음 들어 왔을 때, 향기로운 꽃동산에 심고 푸른 장막으로 보호하였는데, 봄이 되어 곱게 피어나 온갖 꽃들을 능가하여 홀로 뛰어났습니다. 이에 가까운 곳으로부터 먼 곳에 이르기까지 곱고 어여쁜 꽃들이 빠짐없이 달려와서 혹시 시간이 늦지나 않을까 그것만 걱정하며 배알하려고 하였습니다. 홀연히 한 가인이 붉은 얼굴, 옥 같은 이에 곱게 화장하고, 멋진 옷을 차려 입고 간들간들 걸어 와서 얌전하게 앞으로 나와서 말했습니다. '첩은 눈 같이 흰 모래밭을 밟고, 거울 같이 맑은 바다를 마주 보며, 봄비로 목욕하여 때를 씻고, 맑은 바람을 상쾌하게 쐬면서 유유자적하는데, 이름은 장미라고 합니다. 왕의 훌륭하신 덕망을 듣고 향기로운 휘장 속에서 잠자리를 모시고자 하는데 왕께서는 저를 받아주시겠습니까?'...>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장미는 아름다운 여인의 이름이면서 장미꽃으로 대표된다고 볼 수 있다.
느릅나무(楡木)
신라 文武王 11年(671)조에는 대당 총관 설인귀가 임륜 법사를 시켜 신라왕에게 편지를 보내온 내용중에 <...두 분은 찬란한 대궐과 번화한 수도에서 주연을 벌였으며, 궁정의 연회에서 대화를 나누고, 군사에 대한 일을 의논하였습니다. 그들은 기일을 달리하여 서로 응원하기로 하고, 일시에 대규모의 군사를 동원하여 바다와 육지에서 전투를 벌렸습니다. 그 때는 변방의 잡초에 꽃잎이 매달리고, 느릅나무에는 열매가 매달리기 시작할 때였습니다(塞草分花, 楡星上莢)...>라고 하여 느릅나무의 꽃피는 시기를 계절을 알리는 지표로 삼은 것으로 보아 널리 이용되는 나무의 한 종류이었다고 생각된다.
나무 껍질을 벗겨 구황식으로 이용한 예는 열전의 온달 조에 잘 나타나있다. 평강공주가 온달의 집을 찾아가서 그의 어머니와 만나는 과정을 기록한 내용에 <...지금 그대의 냄새를 맡으니 향기가 보통이 아니고, 그대의 손을 만지니 부드럽기가 솜과 같으니, 필시 천하의 귀인인 듯합니다. 누구의 속임수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소? 내 자식은 굶주림을 참다 못하여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려고 산 속으로 간 지 오래인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소. 공주가 그 집을 나와 산밑에 이르렀을 때, 온달이 느릅나무 껍질을 지고 오는 것을 보았다. 공주가 그에게 자기의 생각을 이야기하니 온달이 불끈 화를 내며 말했다. 이는 어린 여자가 취할 행동이 아니니 필시 사람이 아니라 여우나 귀신일 것이다. 나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 온달은 그만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다...>하여 소나무와 함께 백성의 굶주림을 면하게 해준 고마운 나무이었다.
또 느릅나무는 목재도 흔히 이용한 것으로 보이며 쓰임새를 귀중하게 여겨 지(志)의 옥사 조에 보면 <5두품은 방의 길이와 폭이 18자를 넘지 못하며, 느릅나무(山楡木)나 당기와를 사용하지 못한다...>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산유목이라 하였으므로 느릅나무가 아닌 다른 나무일 수도 있어서 명확하지 않다.
싸리나무
고구려 미천왕 31년(330)조에는 <후조의 석륵에게 사신을 보내 싸리나무 화살을 주었다(致其?矢).>는 내용으로 보아 고구려에서는 화살의 재료로 싸리나무가 대단히 유용하였든 것으로 생각되며 곧고 단단하여 화살로서 적합할 것 같다. 한편 열전5 온달 조에는 평강공주가 온달의 집으로 바로 찾아갔다가 어머니로부터 퇴짜를 맞고 <...공주는 혼자 돌아와 사립문 밖에서 자고(宿柴門下) 이튿날 아침에 다시 들어가서 모자에게 자세한 사정을 이야기하였다...>하여 얼마 전까지도 우리네 시골 정취를 느끼게 하던 사립문이 이때 벌써 일반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향나무
신라 경순왕 9년(935)조에는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기로 결정하고 <...시랑 김봉휴로 하여금 태조에게 편지를 보내 항복을 청하였다. 왕자는 통곡하면서 왕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산길을 따라 개골산으로 들어갔다. 그는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삼베옷을 입고 풀잎을 먹으며 일생을 마쳤다. 11월, 태조가 왕의 편지를 받고, 대상 왕 철 등을 보내 왕을 영접하게 하였다.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여 태조에게 가는데, 향나무 수레와 구슬로 장식한 말이(香車寶馬) 30여리에 이어지니, 길이 막히고 구경꾼은 울타리를 두른 것 같았다. 태조가 교외에 나와서 왕을 영접하여 위로하였으며, 왕궁 동쪽의 가장 좋은 구역을 주고, 맏딸 낙랑 공주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라는 구절이 있다. 천년 사직을 지키지 못하고 항복하러 가는 행차가 너무 호화스러워 신라가 망하게 된 원인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의 향차(香車)가 향나무 수레인지 향기로운 냄새를 피운 수레였는지는 불명하나, 백제 무왕 35년(634)조에는 <봄 2월, 왕흥사가 준공되었다. 그 절은 강가에 있었으며 채색장식이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왕이 매번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가서 향을 피웠다>는 기록이 있어서 어쨌든 향기를 내게 하는 재료로 향나무를 사용한 것이 아닌가 추정해 본다.
자단(紫檀)과 침향(沈香)
두 수종 모두 고급장식용재로서 인도를 비롯한 동남아 아세아가 자생지이고 우리 나라에는 자라지 않으므로 종자나 묘목이 아닌 원목으로 수입한 것으로 보인다. 나무의 특징을 보면, 자단은 콩과의 Dalbergia속의 여러 수종이 포함되나 대부분 Dalbergia latifolia로 추정된다. 자단은 이름그대로 짙은 자갈색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나무에서는 장미향기가 독특하여 서양사람들은 아예 장미목(Rosewood)이라하고 예나 지금이나 고급 가구재를 비롯한 장식재로 유명하다. 침향은 팥꽃나무과에 속하고 Aquillaria agallocha란 학명을 가진 상록교목으로서 직경이 2m까지 자랄 수 있는 대경목이다. 재색은 황갈색으로 아름답고 나무에는 향기가 있으며 추출한 수지는 향료로도 사용하는 고급나무이다. 자생지로 볼 때 인도와의 교류가 비교적 활발하였든 것 같고 직접 거래인지 아니면 중국을 통한 거래인지는 우리의 대외 무역사를 구명하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자단에 관한 기록은 신라 헌덕왕 11년(919)조에는 <봄 정월, 이찬 진원의 나이가 70세가 되자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하였다. 이찬 헌정이 병이 나서 걷지 못하므로, 나이 70세가 안되었으나 금으로 장식한 자단 지팡이를 하사하였다...> 하여 임금이 하사하는 고급지팡이로서 자단을 사용한 것이다.
자단과 침향이 함께 기록된 예는 지의 거기(車騎) 조에는 진골에 대하여< 수레 재목으로 자단과 침향을 쓰지 않고 대모를 붙이지 못한다. 또한 감히 금, 은, 옥으로 장식하지도 못한다...> , <안장에 자단과 침향의 사용을 금한다...> 고 하여 진골은 수레와 말안장에 자단과 침향 등 수입목만 규제를 하고 국산수종인 회양목, 느티나무, 산뽕나무 등의 사용을 권장한 것 같다. 한편 6두품과 5두풉은 <안장에 자단, 침향, 회양목, 느티나무, 산뽕나무 등을 사용하거나, 금, 은을 사용하거나 구슬 다는 것을 금한다. 여인은, 안장에 자단과 침향을 사용하는 것과 도금을 하거나 구슬 다는 것을 금한다.>하였다. 6두품, 5두품의 벼슬을 한 본인은 수입목인 자단과 침향을 포함하여 국산재라도 귀중한 나무는 쓸 수 없도록 한데 반하여 그의 처는 수입목인 자단과 침향만 규제하고 국산재의 사용제약은 하지 않았다. 이는 여왕까지 배출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 역사상 가장 여권이 신장되어 있든 신라시대 사회상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4두품에서 백성들에 이르기까지는 <안장에 자단, 침향, 회양목, 느티나무, 산뽕나무의 사용을 금하고, 금, 은, 옥으로 장식하는 것도 금한다.>하여 사치스런 용도로 귀중재를 사용하는 것을 규제하였다.
한편 지의 옥사 조에는 <6두품은....상(床)을 대모(고급거북껍질)와 자단과 침향과 회양목으로 장식하지 못하며 또한 비단 깔개의 사용을 금한다. 겹문과 사방문을 설치하지 못하고, 마구간은 말 5필을 둘 정도로 만든다.>하여 집을 짓는 것은 물론 방안의 침대까지 허가된 재료밖에 쓸 수 없도록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고급관리의 부패가 국가의 존망을 좌우하므로 수입재인 자단과 침향은 엄격히 규제하여 수입량을 줄이고 일반 백성에게는 근검절약하는 기풍을 진작시키고자 한 것 같다.
회양목(黃楊)
회양목은 거의 관목에 가까운 소경목이지만 황백색의 재색이 깨끗하고 재질이 치밀하고 매우 골라서 자단, 침향, 느티나무, 산뽕나무와 함께 수레, 말안장 등의 기구재로 사용하였으며 진골을 비롯한 최고위 관료가 아니면 사용할 수 없는 귀중한 나무이었다. 검색된 예는 자단 및 침향과 동일하다.
산뽕나무
산뽕나무의 가장 널리 쓰인 용도는 마구 등의 기구재인 것 같다. 이 나무도 귀하게 여겨 일정한 품계이상의 관직을 가져야만 쓸 수 있었으며 이는 나무의 재질도 우량재이지만 양잠재료로서 함부로 사용을 금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의 거기 조에 보면 <6두품은, 안장에 자단, 침향, 회양목, 괴목, 산뽕나무 등을 사용하거나, 금, 은을 사용하거나 구슬 다는 것을 금한다. 안장 언치로는 가죽을 사용한다. 안장 방석은 명주와 거친 베와 가죽을 사용하며, 말 다래는 마유로 염색한다. 재갈과 등자는 금, 은, 황동 등을 쓰거나 도금, 도은과 구슬 다는 것을 금한다. 말의 가슴걸이로는 가죽과 삼을 사용한다>하였으며 5두품, 4두품도 산뽕나무의 사용을 금하고 있다. 누에를 키우기 위하여 뽕나무를 재배한 기록은 신라 원성왕 2년(786)조에는 <여름 4월, 동쪽 지방에 우박이 내려 뽕과 보리가 모두 상하였다...> 는 내용이 있다.
참나무(橡)와 밤나무(栗)
신라 성덕왕 원년(785)조에 <...겨울 10월, 삽량주에서 상수리가 변하여 밤이 되었다.>하였고 성덕왕 13년(714)조에도 <...여름에 가뭄이 들었고, 질병에 걸린 사람이 많았다. 가을에 삽량주 산의 상수리가 변하여 밤이 되었다...>고 한다. 상(橡)은 상수리나무로 알려져 있으나 여기서는 참나무류 전체를 지칭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며 참나무가 밤나무가 되었다는 의미가 궁금하다. 밤의 대용으로 참나무열매(도토리)를 식용하였다는 의미가 아닐는지?
또 헌강왕 6년(880)조에 보면< 9월 9일, 왕이 좌우의 신하들과 월상루에 올라가 사방을 바라보니, 서울에 민가가 즐비하고, 노래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왕이 시중 민공을 돌아보면서 "내가 듣건대 지금 민간에서는 짚이 아닌 기와로 지붕을 덮고, 나무가 아닌 숯으로 밥을 짓는다 하니 과연 그러한가? 라고 물었다. 민공이 "저도 일찍이 그렇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라고 대답하고, 이어서 "왕께서 즉위하신 이후로 음양이 조화를 이루고, 바람과 비가 순조로워서 해마다 풍년이 들고, 백성들은 먹을 것이 넉넉하며, 변경이 안정되고 시정이 즐거워하니, 이는 왕의 어진 덕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왕이 즐거워하며 "이는 그대들의 도움 때문이지, 나에게 무슨 덕이 있겠는가? 라고 말했다.>라는 구절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아부하는 관료의 행태는 마찬가지였든 것 같다. 숯이 일반 취사연료로 쓸 만큼 일반화되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데 재료는 대부분 참나무이었을 것이다. 숯은 건축물을 그을리지 않고 취급이 간편한 이점은 있으나 열효율이 낮은 연료이다. 고급관료가 아니면 취사까지 숯으로 할 수 없었다고 생각된다. 어쨌든 당시로서 숯이란 일종의 사치품 연료이었고 이는 경주 일원의 산림파괴와 이어져 50여년 뒤인 935년에 신라가 멸망하는 원인(遠因)을 제공한 지도 모른다.
차나무(茶)
신라 흥덕왕 3년(828)조에는 <당 나라에 갔다가 귀국한 사신 대렴이 차나무 종자를 가지고 왔다. 왕은 그것을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왕 때부터 있었으나, 크게 유행한 것은 이 시기부터였다.> 하여 본격적으로 차를 마시게된 연대를 명확히 하고 있다.
배나무(梨樹)
고구려 양원왕 2년(546)조에는 <봄 2월, 서울에 가지가 서로 맞붙은 배나무가 있었다(王都梨樹連理).>는 기록이 1건 검색되었다. 연리란 나무와 나무를 맞붙여 두면 나무껍질이 파괴되고 서로의 형성층이 연결되어 한 나무가 되는 현상으로서 부부의 금실을 상징하여 가정에서는 일부러 만들기도 한다. 또 식용의 목적으로 배나무는 흔히 심기도 하였으리라 생각된다. 연리에 관한 다른 기록은 신라 나물니사금 7년(362)조에 <여름 4월, 시조묘 뜰에 있는 나뭇가지가 맞붙어 하나가 되었다.>가 있다.
옻나무
옻나무에 관한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그러나 신라의 직관(職官)인 사전(寺典), 칠전(漆典), 모전(毛典), 피전(皮典)의 하나로서 칠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양의 옻을 채취하여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정리해본 것처럼 정사 중심으로 기록한 삼국사기에도 상당히 구체적인 나무에 대한 기술이 있었다. 우선 나무의 종류는 침엽수로서 소나무, 잣나무, 향나무의 3종, 활엽수는 버드나무, 참나무, 밤나무, 느릅나무, 느티나무, 산뽕나무, 복사나무, 자두나무, 매화나무, 배나무, 모란, 옻나무, 회양목, 싸리나무, 차나무의 15종 및 대나무와 인도에서 수입한 자단과 침향을 합치면 모두 20여종을 검색할 수 있었다. 집을 짓는 등 일반 용재로는 소나무, 잣나무, 참나무가 쓰인 것 같고 가구와 치장을 위한 특수용재는 자단, 침향, 느티나무, 회양목, 산뽕나무가 쓰였다. 또 구황식물로는 소나무, 느릅나무, 참나무, 밤나무를, 관상수로는 소나무, 대나무를 비롯하여 과일을 생산하는 복사나무, 자두나무, 매화나무, 배나무를 심고 가꾼 것 같다.
자단과 침향은 삼국시대에도 벌써 인도와의 교역이 활발하였음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수입품의 규제를 위하여 신라사회의 지배계층이었든 진골까지도 이의 사용을 금하고, 단지 성골과 임금만이 사용할 수 있도록 엄격히 통제한 것은 무분별한 사치품수입에 들떠있는 오늘의 우리 현실과 대비하여 한번쯤 곱씹어 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