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CD로 본 나무이야기
경북대 임산공학과 박상진
고려사(高麗史)는 조선왕조 태조 때부터 편찬을 시작하였으나 세종 31년(1449)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여 문종 원년(1451)에 완성하였다. 구성은 세가(世家) 46권, 지(志) 39권, 연표(年表) 2권, 열전 50권, 목록 2권 총139권의 고려시대의 역사·문화 등의 내용을 기전체(紀傳體)로 정리한 책으로 고려시대 역사연구의 기본자료이다. 고려사는 삼국사기, 조선왕조실록과 함께 우리 나라의 가장 믿을 만한 정사(正史)로서 나무에 관한 많은 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필자는 우리의 옛 선조 들이 한반도에 정착하면서 무슨 나무를 어떻게 사용하였는지를 추정하는 작업을 문헌과 실제 출토되는 유물을 대상으로 계속하여 왔다. 문헌에 의한 조사는 삼국사기에서 나무관련 내용을 소개한 바 있으며, 이어서 고려사에 실려있는 나무의 종류와 여기에 얽힌 역사적인 사건에 관련된 나무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고려사 자료는 북한 사회과학원 민족고전연구소에서 번역한 내용을 열린데이타베이스 연구원에서 개발하고 (주)누리미디어(02-761-1661)에서 제작한 고려사 CD를 사용하여 수종을 검색하였다. 정리방법은 검색어로 나무이름을 넣어 추출되는 관련자료를 필자의 주관적인 판단에 따라 부분적으로 삭제 및 첨가하였다. 소개할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태조 왕건과 소나무, 향나무 ◆ 경종왕비의 불륜과 버드나무 ◆ 태조 이성계와 소나무 ◆ 무신정권의 횡포와 관련나무 ◆ 원나라 용상에 쓰인 녹나무와 황칠나무 및 비자나무 ◆ 공민왕과 봉선사 소나무 ◆ 세정의 문란과 나무 ◆ 도토리와 흉년 ◆ 정몽주와 배나무 ◆ 시가(詩歌)에 나오는 나무 ◆ 한약제로 쓰인 나무 ◆ 제사의식에 관련된 나무 ◆ 뽕나무 재배와 누에치기 ◆ 조림과 산림보호 ◆ 소나무와 송충이 ◆ 연리목(連理木) ◆ 이상 기후와 나무 ◆ 사치품 침향(沈香)의 수입
◆ 태조 왕건과 소나무, 향나무
열전 후비 조를 보면 태조 왕건이 신혜왕후 유(柳)씨와 처음 만나게 되는 과정에서부터 태조 등극에 까지의 과정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 <왕건이 궁예의 부하이든 시절 군대를 거느리고 정주를 지나 가다가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말을 쉬고 있는데 유씨가 길옆의 시냇가에 서 있었다. 왕건이 그의 얼굴이 덕성스러움을 보고 그에게 “누구의 딸이냐?”고 물은즉 처녀는 대답하기를 “이 고을의 장자 집 딸입니다”라고 하였다. 왕건이 그 집으로 가서 유숙하였는데 그 집에서는 풍성하게 음식을 차려 대접한 다음 유씨로 하여금 왕건을 모시고 자게 하였다. 그 후는 서로 소식이 끊어져서 정절을 지키고자 머리를 깍고 여승이 되었다. 왕건이 소식을 듣고 불러다가 부인으로 삼았다. 궁예 말년이 되어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 왕건의 집으로 와서 궁예를 폐하는 것에 대하여 의논하려고 하는데 유씨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아서 그에게 말하기를“채소밭에 새로 익은 오이가 있는지요? 따오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더니 왕후는 그들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나왔다가 다시 북편 창문을 통하여 가만히 휘장 속으로 들어 가 숨었다.
이때 여러 장군들이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자는 의사를 표시하니 왕건이 낯을 붉히면서 완강히 거절하고 있었다. 유씨가 급히 휘장 속에서 나와 왕건에게 말하기를“대의를 내세우고 폭군을 갈아치우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한 일입니다. 지금 여러 장군들의 의견을 들으니 저도 의분을 참을 수 없는데 하물며 대장부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손수 갑옷을 가져다가 왕건에게 입혀 주었으며 여러 장군들은 그를 호위하고 나가 그가 드디어 왕위에 올랐다>한다. 버드나무는 가늘고 낭창낭창한 가지가 실바람에도 하느적거린다. 따라서 나무 이름은 '부들부들하다'는 나무 가지의 특성에서 부들이 버들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부드럽고 연약한 것을 대표하며 옛 말에도 가느다란 것의 표현으로 세류(細柳)라 하였으며 여인의 날씬한 허리를 유요(柳腰)라고 하였다. 신혜왕후는 성도 버들유자 유씨이고 버드나무 옆에서 태조와 인연을 맺었지만 날씬한 허리를 가진 연약한 여인이 아니라 나라의 임금을 갈아치운 대단한 여장부이었든 모양이다.
또 왕건이 태조로 등극하기 바로 전 궁예의 부하일 때 왕창근(王昌瑾)이라는 중국상인이 바친 거울속에 새겨진 비밀의 글귀를 해석하는 내용 중에 소나무와 왕건의 고향인 송악군과의 관련성을 연계하여 임금이 될 기상을 점치고 있는 내용이 있다. ● <태조 원년(918) 3월 아직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기 전 중국 상인 왕창근이 저자 가운데서 갑자기 웬 사람을 만났다. 그는 얼굴이 이상하고 수염과 머리가 희며 옛날 관을 쓰고 거사가 입는 옷을 입었으며 왼손에는 도마 세 개를 들고 오른손에는 옛날 거울 한 개를 들었는데 거울은 사방이 1척 가량이었다. 창근은 쌀 두 말을 주고 그것을 샀다. 거울을 저자 담벽에 걸어 놓으니 일광이 옆으로 비쳐 그 속에 있는 가늘게 쓴 글이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은은히 보였다. 이를 궁예에게 바치니 궁예는 글을 잘 아는 송사홍 등에게 그 글을 해석하게 하였다.
사홍 등이 글귀의 내용을 훑어보고 서로 말하기를“두 용이 나타나서 그 하나는 청목 속에 몸을 감추고 다른 하나는 흑금 동쪽에 형적을 드러내리’라는 대목이 있는데 청목은 소나무니 송악군 사람으로서‘용’으로 이름을 삼은 사람의 자손이 임금이 되리라는 말이다. 왕건은 왕으로 될 기상이 있는데 아마 그를 두고 이른 말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만일 이 글을 사실대로 고한다면 왕건이 반드시 해를 입을 것이요 우리도 역시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하고 거짓말을 꾸며서 궁예에게 보고하였다>
태조 18년(935) 11월 30여 년 넘게 이어져 오든 후삼국의 역학관계가 무너지고 신라는 드디어 고려와 합병할 것을 결정하여 경순왕이 태조에게 항복하러 가게된다. ● <갑오일에 신라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왕도를 출발하였는데 인민들이 다 그를 따라 나섰다. 이 때에 향나무로 꾸민 수레와 구슬로 장식한 말이 30 리에 뻗쳐 길을 메웠고 구경꾼들이 담벼락처럼 늘어섰으며 연도 주, 현에서는 주연을 성대하게 베풀었다> 비슷한 기록이 삼국사기에도 있다.
한편 태조가 죽고 정종이 즉위한 원년(946)에는 ● <봄 정월에 왕이 장차 태조의 능을 참배하기 위하여 정성을 들이던 날 저녁에 궁전 동쪽 산 소나무 속에서 왕의 이름을 부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소리가 들리었다. “너 요야! 극빈한 백성들을 잘 돌보아 주는 것이 임금의 가장 요긴한 정무이니라.”이 해에 뇌성을 듣고 대사령을 내렸다>고 한다. 이는 사람이 비교적 많이 사는 궁궐의 근처에는 소나무 숲이 이때 벌써 형성되어 있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 경종왕비의 불륜과 버드나무
고려 초기사회의 상류계급이 어떤 성도덕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 경종 6년(981)의 기록에는 <경종이 승하하자 헌정왕후 황보(皇甫)씨도 대궐에서 나와서 왕륜사 남쪽에 있는 자기 집에서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꿈에 그가 혹령에 올라서 소변을 누었더니 소변이 흘러서 온 나라에 넘쳤으며 그것이 모두 변하여 은(銀)바다로 되었다. 이 꿈을 깨고 점을 치니 “아들을 낳으면 왕이 되어 한 나라를 가지게 되리라”고 말하니 왕후가 “나는 이미 과부로 되었으니 어찌 아들을 낳겠는가?”라고 말하였다.
당시 안종의 집과 왕후의 집이 서로 거리가 가까운 까닭에 자주 왕래하다가 간통하여 임신하게 되었다. 성종 11년(992) 7월에 왕후가 안종의 집에서 자고 있을 때 그 집 종들이 땔나무를 뜰에 쌓고 불을 지르니 불꽃이 올라서 마치 화재가 난 듯하여 백관들이 달려가서 불을 껐다. 그때 성종도 급히 위문하러 갔는데 그 집 종들이 안종과의 간통사실을 고발하였다. 이에 안종을 귀양보내니 왕후는 부끄러워서 울고 있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 문어구에 이르렀을 때 뱃속의 태아가 움직였다. 그래서 문 앞의 버드나무 가지를 붙잡고 아이를 낳았으나 산모는 바로 죽었다. 성종은 유모를 택하여 그 아이를 양육하라고 명령하였는데 장성한 후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현종이다>라고 한다. 많은 나무 중에 튼튼한 끈을 대신할 수 있게 탄력성이 좋은 버드나무 가지를 붙잡고 아기를 낳았다는 대목이 흥미롭다.
◆ 태조 이성계와 소나무
알려진 바와 같이 태조 이성계는 활쏘기의 명수이었다. 나는 새를 화살하나로 떨어트렸다는 이야기에서 솔방울을 맞추었다는 내용까지 어느 정도 믿어야 할지는 상상에 맞길 수밖에 없다. 소나무가지와 솔방울을 맞추어 부하들을 감복하게 한 고려사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 우왕 14년(1388) <그때 태조는 안장을 내리어 말을 풀어놓고 있었는데 유만수가 도망하여 돌아왔다. 좌우의 부하들이 그것을 보고하였으나 태조는 들은 체도 않고 여전히 장막 안에 누워 있었다. 그래서 부하들이 재삼 보고한 연후에야 서서히 일어나서 식사를 한 후 안장을 갖추고 말을 준비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군사를 정돈하여 장차 출발하려 할 때 태조가 승리의 징조를 보여서 장졸들의 마음을 단합시키기 위하여 백 보 거리에 있는 작은 소나무 그루를 쐈더니 단번에 명중하여 끊어졌다. 이에 태조가 “또 어느 것을...?”하고 말하니 모든 장졸이 치하하였고 진무 이언은 앞으로 나와서 꿇어앉으며 “우리 영공(令公)을 모시고 가지 못할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또 ● 열전29 심덕부(1328-1401) 조를 보면 <이때 심덕부의 군대 역시 대패하고 적의 기세는 더욱 치열하였다. 이것을 안 우리 태조(李成桂)는 나가서 공격할 것을 왕에게 요청하고 함주에 도착하여 여러 장수들을 배치하였다. 그런데 병영 안 70보쯤 되는 거리에 소나무가 있었다. 우리 태조는 군사들을 불러 말하기를 “내가 몇 번째 가지에 있는 몇 번째 솔방울을 쏠 터이니 너희들은 구경하라”고 하고 즉시 유엽전(柳葉箭-무과과거에 사용하든 버들잎 모양의 화살)으로 그것을 쏘아서 일곱 번에 전부 말한 대로 맞히니 전 부대가 모두 날뛰며 환호를 울렸다>
또 이성계가 집권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고려사에는 우왕(1375-1388)을 중 신돈의 아들로 매도하고 '신우'라고 하여 고려 왕조 왕씨의 세계(世系)가 단절된 것으로 고려사에 쓰고 있다. 이에 하늘이 노하여 소나무가 뿌리 채 뽑히는 천벌이 내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공양왕 원년(1389)의 기록을 보면 <신우가 왕으로 즉위하니 큰바람이 시조의 묘에서 일어나서 북으로 불어 가니 대실(大室)의 추두(鷲頭)가 꺾이고 묘문이 넘어지고 시조 묘의 침원의 소나무가 태반이나 뿌리째 뽑혔으며 또 쥐가 대실의 침구를 갉아 먹었습니다>라고 하였고 공양왕 2년(1390)에는 <여름 4월 초하루 갑오일에 이인임은 요망한 중 신돈이 낳은 아이인 신우를 현릉의 궁녀가 낳은 것이라고 사칭하고 왕으로 세웠다. 그가 왕위를 계승하니 바람이 시조 묘의 침원의 소나무를 뽑았고 태묘의 추두를 꺾었으며 묘문이 넘어지고 궁내 창고에 불이 일어났다. 이러한 것은 선조의 신령이 그 위엄을 보임으로써 신우와의 관계를 끊는 것이다>라 하였다.
◆ 무신정권의 횡포와 관련나무
무신정권이란 고려시대에 무신들에 의하여 문·무 제반의 정치 권력이 행사되던 시기의 특수한 형태의 정권으로서 의종 24년(1170)부터 원종 11년(1270)까지의 100여 년에 걸치는 정치형태를 말한다. 칼과 창으로 권력을 잡은 무신들은 민중의 의사와는 동떨어지게 사치의 극을 달렸으며 정원을 꾸미고 집을 새로 짓는 용도 등 나무에 얽힌 이야기들이 많다.
김돈중 : 김부식의 아들인 김돈중(?-1170)은 의종 5년(1151) 아우 김돈시와 더불어 김부식이 창건한 관란사를 중수하고 왕을 위하여 복을 빌었으므로 소문이 났다. ● 왕이 김돈중, 김돈시, 한정에게 말하기를 <“들은즉 그대들이 나를 위하여 복을 축원한다 하니 대단히 고마운 일이다. 내가 한번 가서 보겠노라.”고 하였다. 김돈중 등이 절의 북쪽에 초목도 없는 붉은 산에다가 근처 주민들을 동원시켜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 향나무를 비롯하여 기이한 화초를 이식하고 또 단(壇)을 축조하여 왕이 휴식할 집을 신축하였는데 단청으로 장식하였으며 섬돌은 모두 기괴한 돌로 만들었다> 그러나 임금에게 온갖 아부를 하든 그도 의종 24년(1170) 정중부 등에 의한 무신의 난 때 잡혀죽고 만다.
이의민 : 정중부의 난에 협조하여 권력을 잡은 이의민은 자기의 사가를 꾸미기 위하여 큰 공사를 벌렸다. ● <낙타교에서 저교까지 뚝을 수척의 높이로 쌓고 뚝 좌우 편에 버들을 심었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신도 재상(新道宰相)>이라 하여 비꼬았다.
최충헌 : 고리버들 및 키버들 등은 각종 기구를 만들든 나무로 옛부터 널리 사용되어왔다. 고리버들과 관련된 내용은 최충헌의 첩 자운선의 횡포에 얽힌 이야기와 함께 열전 최충헌 조에 실려있다.
● <거란의 군사가 침공해 오니 서울에는 아무런 방비가 없어서 인심이 흉흉해졌으며 모두 최충헌을 원망했다. 최충헌이 자운선을 첩으로 삼은 후 인구를 조사해서 공납을 더욱 심하게 징수했다. 그러므로 양수척(楊水尺, 압록강 국경지대에 살고있는 귀화천민)들의 원망이 대단했는데 거란병이 침입하자 그들이 마중 나가 항복하고 길 안내를 한 까닭에 적병이 산천, 요해지며 도로의 원근을 모조리 알았다. 본래 양수척은 태조가 백제를 공격할 때에도 제어하기 어렵던 사람들의 후손인데 본시 관적(貫籍)도 부역도 모르며 즐겨 수초를 따라서 유랑 생활을 하면서 사냥이나 하고 버들 그릇을 엮어서 팔아먹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다. 대체로 기생 종자는 근본이 유기쟁이(柳器匠, 고리쟁이) 집에서 나왔다>
또 최충헌의 권력을 믿고 군사들이 함부로 군 기록이 있다. ● <최충헌은 태창(太倉)을 열고 가병과 서울에 있는 5령 군사들에게 5일간의 식량을 주고 주야로 계엄하였는데 기후가 심히 추워서 군사들이 길가의 버드나무를 찍고 또 공가의 재목을 훔쳐다가 우등 불을 놓고 방한하였다>. 기타 최충헌에 아부하는 관리들의 행태를 기록한 내용 중에 ● <최충헌이 남산리 자기 집 옆에 정자를 짓고 소나무 두 그루를 심었는데 급제 최이가 쌍송시(雙松詩)를 짓고 문사들이 모두 시를 지어 화답했는바 최충헌은 노숙한 선비 백광신 등을 초청하여 그것을 평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최이 : 무신정권의 중심 인물인 최충헌의 아들 최이(최우)는 고종을 협박하다 시피 하여 고종 19년(1232) 강화천도를 단행한다. 절대권력을 장악한 최이는 자택을 신축하고 얼음 창고를 짓는 등 피난지 강화도에서도 사치가 극에 달하였다. 이에 관한 기록은 ● 고종 21년(1234) <최이는 진양후(晉陽侯)가 되었다. 그리고 자택을 신축하면서 도방과 4령의 군사를 사역하여 옛 서울에서 재목을 수송했고 또 소나무와 잣나무를 많이 가져다 후원에 이식하였다. 이런 물자를 모두 배로 수송해 들여오느라고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많았다 그 원림은 너비가 수십 리나 되었다>. 같은 해 최이는 <서산에다 백성을 동원하여 사사로 얼음을 저장하였으므로 백성들은 심히 괴로워하였으며 또 싫어했다. 또 안양산은 강화로부터 2∼3 일 길이나 떨어져 있는데 최이는 자기 문객인 장군 박승분 등을 시켜서 그 산에서 잣나무를 캐다가 후원에 심었다. 때는 엄동 설한이라서 역군중 동사한 사람이 생겼으며 연로 고을들에서 집을 버리고 산으로 도피했다. 어떤 사람이 승평문에 방을 써 붙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사람과 잣나무가 어느 것이 더 중한가!”라고 하였다>
유경(1211∼1289) : 유경은 처음 무신정권 최항의 신임을 받았다가 뒤에 무신정권 타도를 주도하였다. 거사를 모의하는 과정에 김준 등의 속마음을 떠보기 위하여 살구를 이용하였다. ● <최항의 아들 최의는 수대를 내려오면서 정권을 잡고 위세와 화복을 자기 멋대로 좌우하였다. 또 당시에 해마다 흉년이 계속 들어서 굶고 파리하게 된 백성들이 서로 베개 삼아 드러눕게 되었다. 그런데도 최의는 구휼을 소홀히 하여 크게 인심을 잃었다. 드디어 유경이 김준 등과 더불어 최의를 죽일 것을 의논하였다. 하루는 김준 등이 유경의 집에 와서 의논을 하게 되었는데 유경은 말을 까놓고 하지는 않고 집안 사람을 시켜 살구(杏子) 한 사발을 가져 오라 하여 대접하였더니 김준 등이 절을 하면서 말하기를“잘 알았습니다”라고 하였다. 그것은 행(幸)과 행(杏)은 음이 비슷하기 때문이었다. 이날에 최의를 죽이고 정권을 왕실에 돌려주니 왕이 유경을 보고 “그대들은 나를 위하여 비상한 대공을 세웠다”라고 말하면서 눈물을 흘리었다>
◆ 원나라 용상에 쓰인 녹나무와 황칠나무 및 비자나무
고종 18년(1231)에 시작되어 거의 30여년간 7차에 걸쳐 계속된 몽골군의 침략을 버티어 오든 고려도 결국 포악한 몽골군에 손을 들게 되고 그후 몽골의 요구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많은 물자를 조공으로 바치게 된다. 보낸 임산물의 종류는 녹나무, 황칠, 비자열매와 판자, 녹나무, 잣을 비롯하여 약제 등 북쪽지방에 나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 중에서 우리 나라 녹나무와 황칠(黃漆)은 권력의 상징인 원나라 임금의 용상을 만든 재료로 쓰여서 품질의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
향장목(香樟木)으로 불리든 녹나무는 장뇌(camphor)라는 일종의 방충성을 가진 방향물질을 함유하고 있어서 옛부터 귀중한 목재로 사용되었다. ● 원종 14년(1273) 3월 임오일에 <원나라 사신이 와서 황제의 어상(御床)을 만들 향장목을 요구하였다>하고 이어서 10여년 뒤인 ● 충렬왕 9년(1283)에는 1월 계해일에 <원나라에서 백라개를 파견하여 탐라도에서 나는 향장목을 요구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유럽까지 정벌하여 한때 세계에서 가장 큰 왕국을 만들었든 원나라 임금의 용상을 만든 재료가 우리 나라 제주도 녹나무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황칠나무에서 나오는 황칠(黃漆)은 고려 때는 금칠(金漆)이라 하여 매우 귀중하게 여겼다. 제주도 산 녹나무 용상에다 역시 제주도 황칠로 칠하여 권위의 상징인 황금빛을 내었다.
기록을 보면 ● 원종 12년(1271)에는 을묘일에 <몽골에서 궁실을 지을 재목을 내라고 요구하였다. 또 중서성의 지시로 금칠, 비자나무, 노태목(奴台木), 오매(烏梅) 등의 물품들을 요구하였다. 왕이 중서성에 회보하기를 우리 나라가 저축하였던 금칠은 육지에 나올 때 모두 잃어버렸으며 그 산지는 남해 바다의 섬들이다. 그런데 요사이 역적들이 왕래하는 곳으로 되었으니 앞으로 틈을 보아서 가져다가 보내겠다. 지금은 가지고 있는 열 항아리를 먼저 보낸다. 그 역즙(瀝汁)을 만드는 장인은 금칠이 산출되는 지방에서 징발하여 보내겠다. 또 흑구가 말로 전하는 비자나무란 것은 지방 사람들이 백목(白木)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추에게 그 산지가 어디냐고 물으니 그는 승천부의 금요도라고 답하였고 비자 열매, 오동 열매, 잣나무 열매도 역시 이곳에서 산출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 지방들은 왕경(개성)에서 1천여 리나 떨어져 있기 때문에 당장 가져올 수 없다고 하였더니 이추는 자신이 가서 보지도 않고 되돌아왔다. 그래서 달로화적에게 사람을 붙여 보내서 그 유무를 보라고 했은 즉 그들이 돌아올 때를 기다려서 다시 보고하겠다. 우선 비목(榧木) 약간 쪽(片)을 바친다>고 하였다. 이추라는 고려인이 조국을 배신하고 몽골 조정에 붙어서 황칠과 비자나무의 산지를 알려주어 어려움에 처한 고려가 그 전말을 밝히는 내용이다. 비자나무 산지에 관하여는 ● 문종 7년(1053) 2월에 <탐라국 왕자 수운라가 자기 아들 배웅교위 고물 등을 보내 비자 등 물품을 바쳤다>는 내용이 있다.
또 이추는 김유와 함께 원종(1259-74)때 사람인데 원나라로 사신을 수행하여 간 다음에는 변절하여 고려를 괴롭힌 기록이 또 있다. ● 반역 이추 조를 보면 <원나라 승상 안동에게 말하기를“조선의 삼신산에는 선약이 있는데 나를 보내 주면 구할 수 있다”라고 하니 안동은 그 말을 곧이 듣고 드디어 김유와 신백천을 파견하여 다음과 같은 안동의 서한을 전달하였다.
“귀 왕국 소산 약품으로서 궁중 의국(醫局)에 비치하여 두고 쓸 만한 것이 있다는 말을 듣고 이제 김유 등을 보내서 채취케 하니 필요한 인원을 붙여 주어서 수집하여 돌아오게 할 것이다. 그 약명으로 말하면 향백자(香栢子) 60근, 남해도 심모송(失母松) 50근, 남쪽 비자 50근, 송고병(松膏餠) 30근이며 또 복약 후 목욕방으로는 관음송(觀音松)에 고인 물과 풍면송(風眠松) 솔잎 2백 근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김유 등이 돌아갈 때 통역 낭장 강희를 보내면서 회답하기를“당신의 글을 받고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는 약재를 채취하여 공급하라는 요구에 따라 김유 등에게 문의해서 약재를 일일이 그 수량대로 채집하여 보낸다. 그러나 관음송에 고인 물이 어느 곳에 있는지 미심해서 김유 등에게 문의한즉 낙산에 있다 해서 즉시 김유 등에게 사람을 붙여 주어 찾으러 가라 했더니 김유 등의 말이 풍면송 솔잎을 많이 얻으면 관음송에 고인 물은 없어도 무방하며 이것은 당초에 도당(都堂)께 말씀드리고 왔다고 하면서 찾으러 가지 않았다. 그런데 관음송에 고인 물이란 본래 없는 물건인 것 같다. 또 송고병이란 즉 소나무 속껍질을 벗겨서 잿물에 이겨 가지고 절구에 잘 찧어서 꿀물에 반죽한 후 만든 떡인데 김유는 소나무 위에서 저절로 생긴 것이라 하니 다 허황한 말이다”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실모송, 관음송, 풍면송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모두 약제로 쓰였든 모양이다.
◆ 공민왕과 봉선사 소나무
공민왕은 원나라의 세력이 약해지는 틈을 이용하여 내정간섭에서 헤어나고 제도개혁과 함께 선정을 배풀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노국공주가 죽자 정사는 신돈에게 맡겨버리고 불사에만 전념하였다. 고려사에는 공민왕이 5번의 봉선사 행차가 있었으며 소나무와 관련된 기록이 3번이나 있다. 당시에 봉선사에는 잘 가꾸어진 소나무림이 있었든 모양이다. ● 공민왕 14년(1365) <신돈이 기현의 집에 기숙하면서 봉선사(奉先寺) 솔밭 길로 왕궁에 출입했는데 그 솔밭 언덕 서남에 약간의 평지가 있었다>, ● 공민왕 16년(1367) <왕이 봉선사 소나무 동산에 걸어가서 격구(擊毬)를 구경하였다>, ● 공민왕 23년(1374) <왕이 사랑 받는 측근자들을 데리고 도보로 봉선사의 소나무 동산에 가서 놀이를 하였다>
◆ 세정의 문란과 나무
세금에 관한 내용은 녹과전의 문란과 밤, 잣, 옻칠, 소나무종자 등을 잡세로 징수한 기록이 남아있다.
녹과전(祿科田)이란 고려 후기에 녹봉을 보충할 목적으로 관리에게 나누어주었던 토지인데 세정이 문란해지면서 그 폐해가 심하였다. 고려사 지32 녹과전 조를 보면 ● <토지가 자기의 조업전이라는 핑계로 서로 훔치고 빼앗으니 1묘의 주인이 5, 6명을 넘으며 1년의 도조를 8, 9번씩 받아 내고 있습니다. 이 자들은 위로는 어분전으로부터 아래로는 종실, 공신, 조정의 문무백관의 토지에 이르기까지 더 나아가서는 외역전, 진, 역, 원, 관의 토지와 다른 사람들이 여러 세대를 내려오면서 심어 둔 뽕나무와 건축해 둔 집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빼앗아 자기 것으로 하고 있으니 이는 사전(私田)이야말로 나라를 어지럽게 만드는 장본이 되는 것입니다>라 하였고 같은 녹과전의 다른 기록에는 ● <이 자들이 땅 붙인 자의 집에 들어가면 사람은 술과 음식을 싫증이 나도록 먹고 마시며 말들은 알곡을 싫도록 먹으며 햅쌀을 먼저 바치게 하고 다음에는 무명 삼베 각전(脚錢-여비)과 개암(榛), 밤, 대추, 말린 고기 등을 내게 하며 심지어 억지로 싸게 사는 방법으로 수탈하는 액수가 그 도조(田租)의 10배에 이르게 됩니다>라는 내용이 있다.
또 ● 열전 제31 조준 조에는 고려말 도감(都監)의 폐해를 상소하면서 <도감이란 곳이 관리를 파견하여 역졸을 괴롭히며 백성의 재산과 힘을 탕진하고 있습니다. 나무 1대를 끌어오는 데 소 10마리를 죽게 하고 있으며 한 노(爐)의 쇠를 제련해내는 데 10집의 농가가 폐농하고 있으며 1단의 삼과 1단의 칡을 구하는 데 10필의 베를 쓰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백성에게서 징수할 때에는 마치 가죽을 발라내고 골수를 두드려내듯이 가혹히 착취하며 이것을 사사로 쓰기에는 진흙이나 모래처럼 쓰고 있습니다>고 하여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 열전 제18 정가신 조에도 <임금에게 바친다는 구실 밑에 백성들의 명주, 저피폐(楮皮幣-닥 껍질로 만든 지폐), 포(脯), 과실, 명표지(名表紙) 등의 물품들을 거두어 들여 권세 있고 지위가 높은 자들에게 뇌물로 보내고 있으니 이러한 자들을 모두 처벌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의 철없는 행동으로 부역에 동원된 백성이 고통을 받는 경우는 ● 충숙왕 16년(1329) 봄 정월 <사냥을 좋아하는 왕은 지난해 8월부터 평주의 천신산 밑에 임시 거처할 집을 짓고 그곳에 머물기로 하면서 우인(虞人-산림을 관리하는 관원)에게 “지붕은 무엇으로 덮으면 좋은가!”고 물은즉 “굴참나무(樸木) 껍질이 제일 좋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왕이 곧 명령을 내려 굴참나무 껍질을 채집하게 하였던 바 백성들이 매우 고통을 받았다>는 내용이 있다.
고려말의 이인임, 임견미 등은 이성계의 반대편에 있었든 권신인데 ● 열전39 간신2에서 보면 <우왕이 화원에서 승마하다가 좌우 시종들을 돌아보며“수정목공문(水精木公文)을 가져 오라! 내가 이 말을 길들여 놓겠다”라고 하고 또 임치를 보고 희롱하여 말하기를 “네 부친이 수정목 공문을 잘 쓴다지?”라고 하였다. 그런데 당시 임견미, 이인임, 염흥방이 그 흉악한 종들을 내놓아 좋은 토지를 가진 사람들에게 덮어놓고 수정목(물푸레나무)으로 곤장질을 하여 강탈하였는데 그 임자가 공가문권(公家文券)을 가지고 있어도 감히 시비를 가리지 못하였다. 그때 사람들이 이것을“수정목 공문”이라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임산물을 세금으로 바치는 것은 잡세라하여 별도로 징수하였는데 그 양은 정한 것은 ● 선종 5년(1087) 7월에 <잡세를 제정하였는바 밤과 잣은 큰 나무에 3되, 중간쯤 되는 나무에 2되, 작은 나무에 1되씩을 바치게 하고 옻칠 1되를 바치게 하기로 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 충혜왕 후 4년(1342) 11월에 <강릉도에서 산림세로 솔씨(松子) 3천 성을 바쳤다>한다.
또 땔나무와 숯은 세금이 아니라 별도로 바치게 하였고 그에 관한 내용은 ● 충열왕 17년(1290) 9월 <서해의 3도에는 전쟁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자기 상업을 잃었다 하여 그 도에서 바칠 땔나무와 숯을 면제하여 주었다>하였다. 마찬가지로 ● 충선왕 원년(1308)에는 <여러 도에서 바치던 땔나무, 숯과 여러 원과 절(院寺)들 및 여러 관청들에 소속된 공해전의 조세를 면제할 것이다....원나라를 방문하는 행차가 지나가는 서해도에는 그 삼세 대공(三稅大貢) 이외의 정상적 부역과 잡공세 및 각 역들에서 바치던 땔나무, 숯을 금년에 한하여 전부 면제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편 ● 문종 8년(1053)에 <장작감(將作監) 상인이 관가의 숯 창고에 고의로 불을 질렀다 하여 장형 20대를 치고 얼굴에 낙인을 찍어 섬으로 귀양을 보냈다>는 내용이 있어서 고려 초부터 관가에 필요한 숯을 받아 창고에 보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 숙종 신사 6년(1101) 4월 경신일에 <평로진(平虜鎭-평남 영유) 관내의 추자전(楸子田)을 떼내어 백성들이 경작하도록 나누어주었다> 라하여 가래나무를 집단으로 재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열전 제18 정가신 조에는 ● <지금 모두 임금에게 바친다는 구실 밑에 백성들의 명주, 저피폐(楮皮幣-닥 껍질로 만든 지폐) 등의 물품들을 거두어 들여 권세 있고 지위가 높은 자들에게 뇌물로 보내고 있으니 자기 자신이 벌써 올바른 행동을 못하는 이상 어찌 남을 옳은 데로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자들을 모두 처벌하기를 바랍니다>라 하였다.
◆ 도토리와 흉년
가물거나 수해를 입어 한해의 농사를 망치면 수많은 백성들이 굶어죽는다. 이에 대한 참상은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의 곳곳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를 대비하여 대용식으로 쓸 수 있는 식물을 추천한다. 고려 때도 흉년에는 구황식물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고려사에는 도토리에 관한 내용이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때의 대표적인 구황식물이었든 소나무 껍질에 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 충선왕 원년(1308)에는 <금년 농사가 흉작이어서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는 까닭에 왕이 자기 식찬을 줄이고 주방에 명령하여 도토리를 가져다가 맛보았다>하였고, ● 우왕 5년(1379)에는 간관 들이 진언하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 근본이 견고해야 나라가 편안합니다. 근자에 왜적의 침략과 수해 및 한재로 인하여 백성들이 굶고 있으니 응당 구휼해 주고 농업을 장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후소(後蘇)와 좌소(左蘇)의 토건 사업이 한창이므로 백성들은 부역에 지쳐서 장차 죽음의 구렁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농사만을 못 지을 뿐만 아니라 도토리를 주어 살아갈 수도 없을 것이니 이 역사를 즉시 중지했다가 가을에나 다시 시작하기를 바랍니다> 라고 건의하였다.
◆ 정몽주와 배나무
고려 충신 정몽주는 태어날 때부터 특이하게 생겼으며 어깨 위에 검은 사마귀 일곱 개가 마치도 북두칠성 같이 배열되어 있었다하며 ● 열전30 정몽주 조를 보면 이름이 세 번씩이나 바뀐 연유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정몽주의 어머니 이씨가 임신 중의 어떤 날 꿈에 난초 화분을 안았다가 갑자기 떨어뜨리고는 놀라서 잠이 깨고 그를 낳았으므로 몽란(夢蘭)이라고 명명하였다. 나이가 아홉 살 되던 해 어떤 날 그의 어머니가 낮잠 자다가 꿈에 검은 용이 동산 가운데 있는 배나무에 올라 간 것을 보고 놀라서 잠이 깨어 나가 본즉 그것은 몽란이었다. 그래서 이름을 몽룡(夢龍)이라고 고쳤다가 성년된 후에 몽주(夢周) 로 고쳤다>
◆ 시가(詩歌)에 나오는 나무
시가에 등장하는 나무는 모란, 복사, 매화, 진달래, 해당화를 비롯한 꽃나무를 비롯하여 버들, 소나무 등이 있다. 모란은 언제 들어왔는지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중국에서 수입된 꽃인데 그 화려함 때문인지 옛 시조의 단골메뉴이다. 모란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고종 때 한림학사들이 합작한 것이며 1215∼16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경기체가의 효시로 알려져 있는 한림별곡(翰林別曲)의 내용 중에는 ● <홍모란, 백모란, 정홍모란(丁紅牡丹)>이 등장한다. 또 다른 모란에 관한 내용은 ● 예종 17년(1122) 정축일에 <왕이 사루에 나가서 문신 56명을 불러서 초에 금을 그어 시간를 정하고 모란에 관한 시 여섯 구를 짓게 하였는데 안보린이 1등으로 뽑혔다. 왕이 이에 참가한 문신들에게 비단을 차등 있게 주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강일용이 시 잘 짓기로 명성을 날렸으므로 왕이 그의 시짓는 솜씨를 보고 있었다. 촛불이 다 타려 할 때 일용이 겨우 구절 하나를 생각하여 “머리 흰, 취한 노인은 대궐 뒤를 보고 있는 데 눈 밝은 늙은 선비는 난간 가에 비켜섰네”라고 쓴 다음 그 초고를 소매에 넣고 나가서 대궐 뜰 개천에 쳐 넣었다. 왕이 환관을 시켜 가져다가 보고 칭찬하기를 말지 않으면서 “이는 옛 사람의 이른바‘늙은이에게는 온 낯에 꽃 장식을 하더라도 서시(西施)의 절반 단장만 못하다.’는 것과 같다.”하고 그를 위로하여 돌려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임금과 신하간의 돈독한 정의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 있다. ● 예종 7년(1112) 여름 4월 병신일에 <왕이 대궐 안 사루(紗樓)에서 모란 시를 짓고 유신들에게 명령하여 화답 시를 짓게 한 다음 피륙을 차등 있게 주었다. 이에 앞서 현종이 일찍이 이 누 앞에 모란을 손수 심었는데 덕종으로부터 숙종에 이르기까지 모두 모란꽃을 읊은 시가 있었고 또 시종 신하들의 화답시가 있었던 것이다>.
진달래에 관한 내용은 ● 충렬왕 6년(1280) 3월 병진일에 <왕이 궁전 뒤에 진달래꽃이 만발한 것을 보고 사운시(四韻詩) 1편을 짓고 사신(詞臣) 백문절, 반부, 곽여, 민지 등 18명으로 하여금 화답하는 시를 지어 올리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고 동백나무에 관한 가사에는 ● 충숙왕 때에 <채홍철이 죄를 범하고 먼 섬으로 귀양 갔는데 그가 덕릉(德陵-충선왕을 가리킴)을 사모하고 동백나무 노래를 지었더니 왕이 듣고 곧 그날로 소환하였다. 그런데 혹자의 말은 예로부터 이런 가사가 있었는데 채홍철이 가사를 수정 첨가하여 자기 뜻을 붙인 것이라고도 한다>라는 내용이 있다.
한편 소나무를 두고 시를 지은 것은 최해에 관한 기록이 있다. ● 열전 제22 최해 조를 보면 <어느 때 그가 동래현을 지나다가 해운대에 올라 합포만호 장선이 자기의 시를 소나무에 새긴 것을 보고 이르기를 “슬프다! 이 나무여 무슨 액운을 만나, 이런 나쁜 시를 새기게 되었는고? ”라고 하고 드디어 그것을 깎아 버리고 흙을 바른 후 안동으로 갔다. 장선이 그 말을 듣고 노하여 용감한 장수 3∼4인을 뒤쫓아 보내 시중군 한 사람을 잡아다가 칼을 씌워 문 밖에 세워 두었다. 최해는 가만히 죽령을 넘어 서울로 돌아갔으므로 이것이 유림들 사이에서 큰 웃음거리로 되었다> 하였다. 최해는 충숙왕 8년(1321)에 원나라에 가서 과거에 합격할 만큼 문장이 뛰어난 사람인데 행동에 절제가 없고 말을 서슴없이 맞대 놓고 하기 때문에 큰 벼슬에 등용되지 못하였다.
노래가사에 포함된 나무는 살구, 버들, 복사나무, 매화, 해당화 등이다.
● <수려한 우리 나라에 봄소식 먼저 왔나?
자세히 보니 이른 봄빛 완연하구나!
깊은 동산에 봄바람 지나가니
살구 꽃가지에서 꾀꼴새 소리 좋을시구
푸른 연기 아득히 먼길에
눈앞엔 푸른 버들과 우거진 풀뿐이로다.
취해서 거듭 노는 걸 아까워 말라>
● <선경 화원의 작은 복숭아 가지에 춘색이 무르녹아
벌써 꺾을 만큼 자랐도다.
비오다 개이고 따스하다 추워지니
점차 꽃구경할 시절이 가까웠도다.
버들 잎 너울거리고
고요한 창 밖에 산새들의 구슬픈 노래는 애를 끓누나>
● <과연 5봉(鳳) 쌍난(鸞)이
마주 서서 춤추는 듯
요대(腰帶)를 따라 느리기도 하고 빠르기도 하네.
저 꾀꼴새 만발한 꽃 속에
푸른 버들로 계단 만들고
한바탕 고운 곡조 연주하는 차에
그 누군가 앙상한 나뭇가지로 풀매 던지는고?>
● <서울에 봄이 짙어가니
온갖 꽃이 만발하여 이상한 향기 풍기네
왕궁에선 잔치가 열리어 좋은 경치 구경하며
풍악소리는 사면에서 들려 오네
봄날 긴긴 해, 바람결도 온화한데
버들 빛은 푸른 연기 어리인 듯하구나.
다만 서산에 해 떨어질까 두려우니
즐겁게 놀고 유쾌히 마시며 취해 보세!>
● <이른 봄 서울의 대학 늪 얼었더니 따스한 봄바람에
매화는 향기 풍기고
버드나무엔 푸른빛 띠었는데
상서로운 연기 아지랑이와 얕게 엉키었도다>
● <석화 춘조기 만
봄을 찾아 동산에 가니
고운 꽃 수놓은 듯이 피었네
해당화 가지에 꾀꼴새 노래하고
못가 누각엔 제비 날아 들구요
가느다란 수양버들 실실이 늘어졌구나!>
◆ 한약제로 쓰인 나무
병약하였든 문종은 송나라에 중국산 약제를 보내달라고 요구하였다. 송에서는 약제와 함께 의원도 보냈는데 ● 문종 32년(1078) 6월 정묘일에 태자를 순천관에 보내 송나라 사신을 인도하여 오게 하였다. <송나라 사절이 보낸 물품 중에는 행인(杏仁-살구씨)으로 빚은 특별주가 10병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다. 다음해인 ● 문종 33년(1079) 가을 7월 신미일에 송나라에서 1백 가지의 약품을 보내왔는데 나무에서 생산되는 약제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침향(沈香), 정향(丁香), 안식향(安息香), 구기(枸杞, 구기자), 지각(枳殼, 탱자껍질), 욱리인(郁李仁, 이스라지), 괴교(槐膠, 회화나무진), 해동피(海桐皮, 엄나무껍질), 산수유(山茱萸), 오수유(吳茱萸), 척촉(철쭉), 두중(杜仲, 두충), 진피(秦皮, 물푸레나무껍질), 산조인(酸棗仁, 대추), 만형자(蔓荊子, 순비기나무열매), 건칠(乾漆), 갈근(葛根, 칡뿌리), 오가피(五茄皮, 오갈피나무껍질), 후박(厚朴), 위령선(威靈仙, 으아리), 목단피(牧丹皮, 모란껍질)>
한편 ● 한림별곡(翰林別曲)의 내용 중에 <백자주(柏子酒), 송주(松酒), 죽엽주(竹葉酒), 이화주(梨花酒), 오가피주(五加皮酒), 홍모란, 백모란, 정홍모란(丁紅牡丹), 황색장미, 자색장미, 동백, 당추자(唐楸子, 호두), 조협(?莢, 주엽나무 열매)>이 포함되어 있다. 기타 ● 의종20년(1166) 11월 계묘일 밤에 <청녕재에서 연회를 배설하였는데 왕이 총애하는 환관 이영이 금수(錦繡), 금은화(金銀花), 진향(眞香), 서각(犀角), 말, 노새, 염소, 양, 물오리, 기러기 등 기이한 물건들을 수집하여 좌우에 진열해 놓고 왕을 영접하였다>, ● 의종24년(1170) 여름 4월 을사일에 <왕이 친히 노인성에 기도를 하기 위하여 판 예빈성사 김우번 낭중 진역승들을 시켜서 진관사 남쪽 산기슭에 노인당을 세우게 하고 또 별기은소를 세우고 금은화와 금옥 기명(器皿)을 제조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금은화가 인동덩굴의 옛이름이므로 약제로 사용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 제사의식에 관련된 나무
제사의식에 사용된 제물로 사용된 나무열매를 기록한 내용을 보면 지금 쓰지 않은 앵도, 개암이 포함되어 있다. 고려사 지(志)의 길례대사에서 제사의식을 기록한 것을 보면 ● <보름 제사 때에 제수의 가짓수는 같으나 다만 고기를 쓰지 않고 주고(奏告-임시 종묘에 고하는 일)에는 일률로 술을 사용한다. 2월 보름에는 이름을 드리는바 만일 춘분 날짜가 보름이 지나서 있을 때에는 따로 날을 받아서 드린다. 4월 보름에는 보리와 앵두를 드리고 7월 보름에는 피와 기장쌀을, 8월 보름에는 깨를, 9월 보름에는 벼와 쌀을, 12월 보름에는 생선을 드린다>, ● <1열에는 대추, 소금, 마른 고기, 흰떡을 놓고 제2열에는 사슴 포, 개암(榛寶), 검정 떡의 순서로 놓고 제3열에는 말람씨(菱仁), 거시연밤, 밤 등을 차린다>하여 대추, 밤과 함께 개암을 제사에 쓰는 과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돌아가신 임금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당인 태묘에서 왕이 제사를 지낼 때에는 옥책(玉冊)이나 죽책(竹冊)을 사용하였다. ● <옥책 한 책의 장수는 책마다 24매씩인데 길이는 1척 1촌, 너비는 1촌이다. 옥책은 은실로 매고 죽책은 붉을 실로 매어 붉은 비단으로 꾸민다. 그리고 태조 실(太祖室)에는 옥책을 쓰고 기타 여덟 개 실에는 죽책을 쓴다. 재상에게 대행시킬 때에 축판은 길이 2척 너비 1척 두께 6푼의 소나무로 만든다>하여 소나무판자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예종 8년(1122)에 요나라에서 사신이 와서 다음과 같은 제문을 올렸다. ● <돌아간 왕태후는 온화하고 인자한 것으로써 덕성을 기르며 유순하고 선량한 것으로써 모범을 이루었다. 향초와 난초는 본래부터 향기를 풍긴 것이며 복숭아와 오얏은 꽃도 있고 아름다운 열매도 맺는 것과 같이 선대의 왕이 세상을 떠났으나 맏아들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더니 그러나 뜻밖에 중한 병이 계속 침중해져서 애석하게도 세상을 떠났다>.
◆ 뽕나무 재배와 누에치기
우리 나라에 누에치기가 시작된 것은 주나라의 기자가 조선으로 옮겨와서 기자조선을 세울 때 전래되었다고 하며 약 3000여 년 전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도 신라 문무왕 11년(672)조와 고구려 보장왕 27년(668)조에 뽕나무를 재배하고 누에치기를 한 기록이 있으나 고려사에는 고려초부터 뽕나무를 심고 누에치기를 독려한 내용들이 많이 나온다. 뽕나무와 함께 밤나무, 옻나무, 닥나무, 잣나무, 배나무, 대추나무 등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특용수재배를 장려한 기록이 있다.
● 현종19년(1026) 정월에 <왕이 각 도, 주, 현들에 명령하여 해마다 뽕나무 모종을 심게 하되 정호(丁戶)는 20뿌리, 백정(白丁)은 15뿌리를 밭머리에 심어서 누에치기에 힘쓰도록 하였다>. ● 인종 6년(1128) 3월에 왕이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농사와 누에치기를 장려하여 의식을 충족하게 하는 것은 어진 임금들이 급선무로 삼던 일이다> ● 인종 15년(1137) 5월에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조서를 전달하였는바 농사와 누에치기를 장려하며 군량을 저축하라는 것이었다> ● 인종 23년(1145) 5월에 <수양 도감(輸養都監)에서 왕에게 아뢰기를 “여러 도들과 고을들에 명령하여 땅의 품질이 나빠서 밭으로 하지 못할 데는 뽕나무, 밤나무, 옻나무, 닥나무를 그 땅의 성질에 따라 심도록 장려하게 합시다>라고 하였다.
● 명종 18년(1188) 3월에 왕이 명령을 내려 이르기를 <뽕나무 모를 철을 따라 심고 옻나무, 닥나무, 밤나무, 잣나무, 배나무, 대추나무 등 과일 나무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때를 맞추어 심어서 이익을 많이 거두도록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 충렬왕 34년(1308) 11월에 명령을 내리기를 <농사하고 누에를 치는 것은 의식의 근본이니 해당 관리들은 마땅히 이를 장려하라>고 하였다.
● 충숙왕 12년(1325) 10월에 왕이 명령을 내리기를 <농사를 짓고 누에를 치는 일은 나라를 통치하는 데 있어서 우선적으로 돌보아야 할 일이니 급하지 않은 역사(役事)들은 중지하고 때를 맞추어 장려토록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 충숙왕20년(1333) 12월에 왕이 명령을 내려 이르기를 <농사를 짓고 누에를 치는 것은 의식의 근본이 되는 것이니 여러 도의 순문사, 안렴사들은 수령들이 뽕나무를 심고 밭갈이 한 그 수량이 크고 적음을 조사하고 이름을 모두 밝혀 보고하라>라고 하였다. ● 공민왕 5년(1356) 6월에 왕이 명령을 내려 이르기를 <중앙과 지방의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집집마다 뽕나무를 심고 삼을 가꾸게 하되 각각 인구수에 따라서 심는 비율을 정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상의 기록에서 보듯이 뽕나무를 심는 일과 누에치기는 임금이 직접 교지를 내릴 만큼 중요한 산업이었다.
◆ 조림과 산림보호
치산치수는 예나 지금이나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기본이고 고려사에도 나무를 심고 가꾸며 벌체를 통제하는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 현종 4년(1010) 3월에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 <사기에는 ‘소나무잣나무는 모든 나무의 으뜸’이라고 하였는데 근자에 듣건대 백성들이 흔히 시기를 가리지 않고 소나무, 잣나무를 찍는다고 하니 앞으로는 국가 수요 이외에 무시로 소나무를 베는 것을 일체 금지하라!>. ● 정종 7년(1041) 2월 경진일에 <공부상서가 송악산동서 기슭에 소나무를 심어 궁궐을 장엄하게 하기를 청하니 왕이 이 제의를 좇았다>. ● 고종 4년(1217) 봄 정월 경진일에 <초군들이 대묘 경내에 있는 소나무를 거의 다 베어 갔다. 이에 군사를 시켜 그것을 금하였으나 역시 막지 못하였다>. ● 공민왕 6년(1357) 무신일에 사천 소감 우필흥이 왕에게 글을 올리기를 <“모든 산들에는 소나무를 빽빽하게 심어서 무성하게 키울 것이며 기물은 모두 동과 유기와 질그릇을 써서 토풍(土豊)에 순응하게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 제의를 좇았다>.
한편 임금이 직접 소나무의 사용을 줄이고 절약을 솔선수범한 내용은 ● 충렬왕 3년(1277) 신해일에 <관청에서나 사민 집에서 소나무로 차양을 만드는 것을 금지하였다. 매년 더운 여름철에는 궁궐 도감이 왕의 침전에 소나무로 차양을 만들고 그들에게 은병 두 개를 주는 것이 예로 되었다. 그런데 이 때 왕이“관사의 솔차양을 금지하는데 나 혼자 그것을 만들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면서 새(茅)를 엮어서 차양을 만들도록 개정하니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도감원이 은병 두 개를 잃었구먼”하며 야유하였다>.
◆ 소나무와 송충이
소나무에 가장 큰 피해를 주는 솔나방(통칭 송충이)은 어느 때부터 창궐하기 시작하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의 3대 사서(史書)에서 본다면 삼국사기에는 송충이에 대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단편적인 탓도 있겠으나 당시의 임상이 활엽수가 주축을 이루고 소나무림이 적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송충이 피해를 심하게 받기 시작한 것은 숙종 때부터이다. 특히 숙종 5년에서 7년의 3년간에는 송충이 피해가 너무나 극심하여 이를 줄여 보려고 군사를 동원하여 잡아보기도 하고 불경을 외우고 기도까지 드렸으나 효험이 없자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내각총사퇴까지 거론되었다. 고려사의 내용을 보면 ● 숙종 5년(1100) 5월에 <평주 관내 백주와 토산에 있는 소나무가 충해를 입었다>. ● 숙종 6년(1101) 4월에 <수압산 소나무가 충해를 입었다. 신축일에 태사가 보고하기를 “벌레가 소나무를 먹는 것은 전란이 있을 징조이니 도량을 차리고 기도하여 재앙을 물리치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병술일에는 동북 지방의 각 주, 진(鎭)들에 명령하여 신중 도량을 열고 송충이에 대한 액막이를 하게 하였다. 을사일에 여러 신하들이 건의하기를“송충이 번식하여 온갖 제거 대책에도 성과가 없습니다. 저희들이 변변치 못하여 왕께 걱정만 끼치오니 원컨대 어진 사람을 등용하고 불초한 자를 물러가게 함으로써 하늘의 견책에 대처하소서!”라고 하였으나 왕이 회답하지 않았다. 6월 병술일에 재상(宰相)들에게 나라의 명산들과 바다의 신들을 세 곳에 나누어서 제사 지내고 또 중 2천 명을 모아서 네 길로 나누어 서울과 지방의 여러 산들을 돌아 다니면서 반야경을 외우면서 송충이 구제에 대한 액막이를 하게 하고 드디어 군인 500명을 동원시켜 송악산에서 송충이를 잡았다>. ● 숙종 7년(1102) 4월에 <벌레가 소나무를 먹으므로 신해일에 중을 시켜서 5일간 화엄경을 외우면서 액막이를 하였다. 6월 정해일에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태안(泰安-遼道宗年號) 2년에 송충이 서산에서 처음 발생하여 백주, 토산 등지에 만연되었었는데 근래에는 이것이 더욱 번성하여지고 있다...”>
이후 10-20여년 간격으로 송충이 피해에 관한 기사는 명종때 까지 이어진다. ● 예종 17년(1122) 7월에 <소나무가 충해를 입었는데 병술일에 회경전에서 불정도량을 차리고 7일간 기도하였다>. ● 인종 11년(1133) 5월 을축일에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오늘 간관의 말에 의하면 경기 지방의 산야에 황충(蝗蟲)이 솔잎을 먹는다고 하니 이는 아마도 국내에 간사한 사람이 많고 정부에 충성스러운 신하가 없기 때문인 듯하다. 그리고 양나라의 무제 초기에 황충이 송백 잎사귀를 먹은 적이 있었다>. ● 명종 16년(1146) 16년 5월에 <서해도 풍주 지방에서 황충이 솔잎을 먹으므로 재를 차리고 액막이를 하였다>. ● 의종 5년(1151) 8월에 <해주에서 소나무가 충해를 입었고 지난해부터 지금까지는 황충의 피해가 있었다. 이 피해에 대하여 태사가 보고하기를 “해동고현참기에 이르기를 ‘곡령에 소나무가 있으니 성과 소나무는 임금과 신하로 되며 차충과 괴충은 소인들이다. 염충이 소나무를 먹을 때 문호(文虎)가 정사를 문란케 하고 소나무가 변하여 흰 나무로 될 때에는 세상이 어지러워진다’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 명종 2년(1172) 가을 7월 을해일에 <왕이 생각하기를 궁궐에 화재가 발생하였고 송충이 솔잎을 먹으며 천재가 자주 나타난다 하여 자신을 책망하고 서울과 지방의 참형, 교형 이하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명종조 이후 인종 때까지 50여년 간격으로 송충이의 피해는 단순기록일 따름이고 기도를 하거나 잡았다는 내용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든 것 같다. ● 고종 10년(1223) 7월에 <황충이 솔잎을 먹었다. ● 11년(1124) 5월에 벌레가 안화사의 솔잎을 먹었다>. ● 충렬왕 원년(1275) 10월에 <벌레가 솔잎을 먹었다>. ● 인종 11년(1333) 4월에 <소나무가 충해를 입었다>.
그러나 송충이 피해는 공민왕에 들면서 다시 극심해지기 시작하여 이후 조선왕조 세종 8년(1425)에 이르는 70여년간 수많은 송충이 기록이 남아있다. 특히 공민왕과 조선왕조 태조의 재위기간 때 더 심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송충이 퇴치를 위하여 불경을 외우거나 기도하는 일은 포기하고 아예 잡아버리기로 한 점이다. ● 공민왕 2년(1353) 9월에 <벌레가 솔잎을 먹었다>. ● 3년(1254) 6월에 <송충이가 소나무를 먹으므로 명령을 내려 송충이를 잡았다>. ● 5년(1356) 4월 <송충이가 솔잎을 먹으므로 명령을 내려 송충이를 잡았다>. ● 13년(1364) 5월에 <송충이가 솔잎을 먹었다>. ● 14년(1365) 4월에 <송충이가 솔잎을 먹었다>. ● 공양왕 4년(1393) 5월 병신일에 <벌레가 송악산 솔잎을 먹었고 병오일에는 벌레가 태묘의 소나무를 먹었는데 소나무가 충해를 입어온 지가 5∼6년이나 되었으나 아직까지 태묘의 소나무는 재해를 입지 않았더니 지금에 와서 처음으로 재해를 입었다>.
송충이 이외에 수목의 병충해에 관한 기록은 열전14 권경중 조에 보면 ● <나무에 나타난 변괴로는 나무가 얼음 옷을 입은 일이 두 번, 벌레가 밤나무 잎을 갉아먹은 일이 두 번, 궁전의 기둥에 벼락 맞은 일이 한 번 있었는바 상서에 의하면 ‘함부로 백성들에게 부역을 시켜서 백성들이 제때에 농사를 짓지 못하면 나무가 제 본성을 잃어서 변고로 된다’라고 하였다>.
◆ 연리목(連理木)
연리란 나무와 나무가 맞닿아 서로 형성층이 통하게되어 한 나무가 되는 현상을 말한다. 대체로 같은 종의 나무를 가까이 심고 맞닿을 부분의 딱딱한 껍질을 벗겨내고 안껍질이 서로 닿게 하여 묶어주면 몇 년 뒤에는 연리목이 된다. 자연상태에서 연리목은 대단히 드물며 부부간의 화목과 사랑을 상징하므로 연리목은 아주 진귀하게 생각하였다.
광종 24년(973) 조를 보면 ● <2월 임인일에 서울 덕서리에서 연리목이 났다> 하였고 성종 6년(987)조에도 ● <충주에서 연리목이 났다>는 기록이 있다.
◆ 이상 기후와 나무
고려사에는 기후현상을 추정할 수 있는 많은 내용이 나무와 관련하여 기록 되어있다. 대부분은 현재의 한반도 기후로서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개화시기, 열매모양, 우박피해, 벼락 등에 관한 것이다. 당시로서도 정상이 아닌 이상기후이기 때문에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나 생각된다.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시기 및 형태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 모란 : 현종 2년(1009) 11월에 <전주 흑석사에서 모란꽃이 피었는데 눈이 내렸어도 꽃이 떨어지지 않았다. 10년 8월에 광명사에서 모란꽃이 다시 피었다>
● 배나무 : 원종 원년(1125) 8월에 <배나무 꽃이 피었다>. 인종 11년(1133) 8월에 <배나무 꽃이 다시 피었다>. 의종 5년(1151) 8월에 <궁궐 남쪽에서 배나무 꽃이 피었다. 21년(1166) 8월에 배나무 꽃이 피었다>. 우왕 5년(1379) 10월에 <배나무 꽃이 피었다. 8년(1382) 7월에 궁중에 배나무 꽃이 피었다>
● 복숭아와 오얏 : 충혜왕 원년(1331) 10월에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에 꽃이 피었다>. 공민왕 16년(1366) 4월에 <강동에서 복숭아가 열렸는데 매개가 다 한쪽 면에는 털이 돋지 않았다>
● 앵두나무 : 예종 6년(1110) 6월에 <중서성(中書省)에 있는 앵두나무에 열매가 열렸는데 크기는 살구만하고 씨가 없었고 속이 비었다>.
● 장미꽃 : 고종 44년(1257) 9월에 <갑인일에 사관에 장미꽃이 피었다. 45년 10월에 사관에 장미꽃이 피었다>. 충정왕 3년(1351) 10월에 <접시꽃과 장미꽃이 피었다>
● 진달래 : 경종 5년(980) 12월에 <두견화(진달래)가 피었다>
● 오동나무 꽃 : 고려사 지(志) 제5 보발렴 <3월 청명은 3월의 절기이며 곡우는 3월의 중기이다. 오동나무 꽃이 피기 시작하고 두더지가 종달새로 변한다. 무지개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개구리밥풀이 나기 시작한다. 위는 비둘기 나래를 치기 시작하고 대승(戴勝, 오디새)이 뽕나무에 내려 와 앉는다>
우박피해에 관한 내용은 오얏과 매화, 밤 크기와 비교하여 기록하고 있다.
● 충렬왕 20년(1294) 9월 갑인일에 <우박이 내렸는데 그 크기가 오얏 만하였다. 29년(1303) 4월 정해일에 우박이 내렸는데 그 크기가 오얏과 매화 열매만하였다>. ● 충숙왕 9년(1325) 8월 기축일에 <큰 우박이 내렸다. 9월 을미일에 벼락치고 번개치면서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오얏과 매화 열매만하였으며 그 모양이 네모져서 마치 질려풀과 같았으며 정유일에도 큰 우박이 내렸다>. 17년(1333) 8월 병자일에 <우박이 내렸는데 그 크기가 오얏과 매화 열매만하였다>. ● 충혜왕 4년(1342) 4월 병자일에 <큰 우박이 내렸는데 그 크기가 오얏과 매화 열매만하였으며 무자일에도 큰 우박이 내렸다>. ● 충정왕 2년(1350) 4월 무술일에 <우박이 내렸는데 그 크기가 오얏과 매화 열매만하였고 곡식들이 상하였다>. ● 고종 23년(1236) <여름 4월 기해일에 우박이 내렸는데 굵기가 밤 만하였다>.
또 벼락맞는 나무에 관하여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예종 원년(1106) 6월 기축일에 <서화문 밖 소나무에 벼락쳤다. 2년(1107) 7월 무술일에 송악산 소나무에 벼락쳤다>. ● 현종 3년(1012) 5년 4월 정해일에 <덕릉 오동나무를 벼락쳤다>. ● <문종 18년(1065) 11월 갑자일에 우레 소리나면서 민가 밤나무를 벼락쳤다>. ● 선종 2년(1185) 11월 계묘일 밤에 <안정 마을 인가 밤나무에 벼락쳤다. 7년(1190) 8월 신해일에 우박이 내리고 시장 서쪽 골목에서 사람과 말에게 벼락치고 또 건릉 소나무와 서울 동북산 소나무에 벼락쳤다. 9월 무오일에 우박이 내리고 우레 소리 울리기가 밤낮 멎지 않더니 덕풍 오정 두 마을 밤나무에 벼락쳤다>. ● 인종 원년(1123) 3월 무신일에 <궁궐 문밖 회화나무에 벼락쳤다. 8년(1131) 6월 갑오일에 모진 비가 내리고 귀법사 산꼭대기 소나무에 벼락쳤다. 10년(1133) 6월 을미일에 송림사 소나무에 벼락쳤다. 11년(1134) 5월 경오일에 독한 바람이 불고 우레 소리나면서 우박이 내리고 사람과 말에게 벼락쳤으며 무인일에 진관사 잣나무에 벼락쳤다>. ● 인종 8년(1230) 7월 신해일에 <폭풍이 불어 나무를 뽑히고 우레와 번개가 치면서 오정리 인가의 소나무에 벼락을 쳤다>. ● 충혜왕 후 2년(1340) 12월 정묘일에 <큰바람이 불어 소나무 수천 그루가 뽑혔다>. ● 충정왕 원년(1348) 윤 7월 갑자일에 <큰비가 내리며 큰바람이 불어 성안의 지붕 기와가 모두 날리고 의봉루가 무너지고 송악산과 용수산의 소나무가 모두 뽑혔다>.
기타 말라죽은 나무가 다시 살아나고 넘어졌든 나무가 저절로 일어났다는 등의 내용은 해석하기가 어렵다. 이와 같은 기록들을 모아보면 다음과 같다.
● 태조 21년(938) 8월에 <궁궐 안 유원(柳院)에 넘어져 있던 회화나무가 저절로 일어섰다>. ● <현종 7년(1016) 여름 4월 사헌대 뜰에 있는 잣나무가 말라죽은 지 여러 해 되었는데 이때에 와서 다시 살아났다>. ● 명종 8년(1177) 2월 임신일에 <거창현 우거향의 민가에 넘어져 있던 배나무가 저절로 일어서서 가지와 잎이 다시 돋아났다. 4월 무인일에 황간현에서 넘어져 있던 도토리나무가 저절로 일어섰다>. ● 명종 25년(1194) 정월 계사일에 <서경 감군사(監軍使) 청사의 북쪽에 있는 느릅나무가 무릇 10여 일이나 저절로 울었다>. ● 신종 6년(1203) 6월 경자일에 <큰비가 내려서 송악산 소나무가 물에 떠내려 간 것이 많았다>. ● 충숙왕 후 8년(1339) 6월 신묘일에 <대관전 은행나무가 저절로 넘어졌다>. ● 공민왕 16년(1368) <진주 단속사에 넘어져 있던 소나무가 저절로 일어섰다>
◆ 사치품 침향(沈香)의 수입
침향(沈香)이란 중국 남부 등 아열대 지방에 자라는 침향나무 줄기에 인공적으로 상처를 내고 흙속에 묻어 침향을 만든 것인데 태우면 독특한 향을 내므로 불교 의식 등에 사용되고 약용으로도 이용되는 고급 향료이다. 우리 나라에는 질 좋은 침향이 생산되지 않으므로 목재와 향료 모두 수입에 의존하였다. 목재로 수입된 것은 ● 의종 5년(1151) 기유일에 <왕이 목공에게 명령을 내려 침향목(沈香木)으로 관음 보살 불상을 조각하여 내전에 두게 하고 중들에게 음식을 먹였다>는 기록이 있다.
향료로 수입한 것은 ● 문종 33년(1079) <중국의 해남도에서 생산되는 침향을 수입한 기록>이 있고, ● 의종 17년(1163) 을사일에 <송나라 도강 서덕영 등이 와서 송황제의 비밀 지시라 하여 금은합(金銀合) 두 벌에 침향을 담아 바쳤다> 는 기록이 있으나 대부분은 고려 후기인 충선왕에서 공민왕사이에 주로 수입하였다. 특히 공민왕 때는 3회나 수입기록이 있어서 사치품인 침향의 수입과 고려왕실의 흥망성쇄와 관련을 생각해 볼 수 있다. ● 충선왕 원년(1308) <마팔국 왕자 패합리가 사신을 보내 침향 5근 13냥 등을 왕에게 바쳤다>, ● 공민왕 9년(1360) 가을 7월 <병자일에 강절의 이우승이 장국진을 보내 침향 등을 헌납하였다>, ● 10년(1361) 3월 정사일에 <장사성이 사람을 파견하여 침향 등을 바쳤다>, ● 13년(1364) <을묘일에 명주 사도 방국진이 조마 호약해를 파견하여 전녹생과 함께 와서 침향 등을 바쳤다>는 등의 기록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