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학자와 문화재의 만남
나무문화재 하면 생소하게 느낄 많은 사람들처럼 나와 이 나무문화재와의 만남도 평범한 것만은 아니었다. 우연인 듯 필연인 듯 다가온 이 만남은 30여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다. 산림청 임업연구원에 근무하고 있던 1975년 4월 10일, 필자는 ‘일본문부성 초빙장학생’으로 일본행 비행기를 탔다. 일본 교토대학 농학부 임산공학과 석사과정 입학 예정…, 전공은 목재해부학(wood anatomy), 나무을 이루고 있는 세포모양을 공부하는 학문이다. 가장 크기가 큰 세포라야 기껏 머리카락 3개 굵기, 당연히 연구라는 것이 하루 종일 현미경과의 씨름이다. 눈에 뵈는 것만도 온 천진데 하필이면 ‘보이지도 않은 연구를 왜 하느냐’고 같이 간 유학생들의 핀잔을 들으면서도 나는 늘 현미경 들여다보기에 파묻혀 있었다. 교토는 우리 경주와 비슷한 도시다. 시내 어디를 가나 문화재가 흩어져 있다. 또 바로 이어진 도시 나라(奈良)에도 수많은 문화재가 있다. 교토・나라 일대는 일본문화의 정수가 있는 곳이다. 그러나 때늦게 시작한 공부에 지쳐 기숙사와 실험실을 다람쥐 채 바퀴 돌 듯 할 뿐, 고도(古都)의 옛 문화 정취에 가까이 다가갈 여유는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유학생활 1년쯤 지난 어느 따사로운 봄날 일요일 오후, 기숙사 식당에서 유난히 흰 얼굴의 한 동양인이 나에게 한국 사람이냐며 다가왔다. 필자와 나이가 비슷한 이 사람은 나중에 경주박물관장을 거쳐 지금 이화여대 석좌교수로 있는 미술사학자 강우방 교수였다. 그 후 그는 같은 기숙사에서 지내면서, 그의 첫인상처럼 예리하고 통찰력 있으며, 명쾌하고 알기 쉽게 한일 문화재를 비교해설 해 주곤 했는데, 이것은 나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점차 나는 문화재를 보는 눈높이를 키워 나갈 수 있었고, 일본의 나무문화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나무는 옛 사람들이 가장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생활도구의 재료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따라서 문화재도 상당 부분이 나무로 만들어졌고, 지금도 나무로 만들어진 문화재가 계속 발굴되고 있다. 그런데 나무는 종류에 따라 어느 정해진 지역에만 분포하는 자람 특성이 있다. 따라서 이 재질을 분석해 보면 나라와 나라사이 혹은 특정 지역 간의 교역범위를 추정할 수 있다. 나무는 수 백 년에서 때로는 천년이 넘도록 한곳에서 자란다. 자라면서 1년을 단위로 자신이 처한 자연환경을 종합적으로 나이테 속에 기록해 둔다. 무한 용량의 ‘자연식 하드 디스크’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매년 만들어지는 나이테의 좁고 넓음은 당시의 비 내림 양이나 햇빛 세기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는다. 그래서 나이테를 만들고 있는 세포 구조를 조사해 보면 유물이 만들어진 연대, 자람 당시의 기후 등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
일본 유학생활 동안 필자는 현미경 관찰로 눈이 아파오는 순수 목재해부학 공부보다, 나무로 만들어진 문화재 속에 숨겨진 비밀들을 찾아내는 일에 나도 모르게 조금씩 빠져들어 갔다. 그리고 옛 나무의 재질과 보존방법을 공부하는 고고목재학(Archeological woods)이라는 학문이 바로 내가 전공하는 나무 세포 연구가 바탕이 된다는 사실도 이때 알게 되었다.
어느덧 정해진 유학생활은 끝나고 귀국하여 근무지로 되돌아 왔다. 돌아오자마자 여러 정책연구에 매달리느라 나무 문화재 연구는 잠시 뒤로 미뤄두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여전히 머리와 가슴 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던 나무문화재에 대한 호기심은 나를 나무문화재 앞으로 데려다 놓았다. 그렇게 틈틈이 없는 시간을 조금씩 내어 나온 첫 작품이 바로 제주도 ‘조선조 향교 건물 기둥나무’ 분석. 나는 그 기쁨을 바탕으로 논문발표도 하고 남들이 별로 관심도 갖지 않은 분야이나 보람된 일이라는 생각에 더 열심히 할 다짐을 하고 있었다. 또 그 사이 임업연구원에서 전남대로 직장을 옮기게 되어 더욱 관심분야에 전념할 수 있었다.
신안보물선과 거대한 힘의 장벽
그러나 1981년 2월, 순조롭게 잘 나가던 나무 문화재와의 인연에 내려진 호된 시련. 문제의 발단은 논문 한 편이었다. 당시 전라남도 신안 앞바다에서 중국과 일본을 왕래하던 침몰 무역선이 발굴되었는데, 중국 송나라・원나라 때 만들어진 도자기가 2만 점이나 실려 있었다. 일명 ‘신안보물선’이라 부르는 이 배의 발굴에 많은 수많은 이들의 눈이 쏠렸고, 그 작업이 한창이었다.
필자는 이 배를 만든 선체(船體)나무의 재질을 분석하여 1981년 한국임학회 봄 총회 때 그 결과를 발표했다. 일본에만 자라는 삼나무가 일부 섞여 있다는 내용이 포함된 논문이었다. 발표장을 막 빠져나오는데 경향신문 기자가 붙잡았다. 평생 처음 당하는 기자 인터뷰에 약간 어리둥절하였으나 나쁠 것도 없다는 생각에 기꺼이 응했다. 일본 삼나무가 섞여 있으니 일본배일 것이라는 기자의 추정은 경향신문의 특종기사가 되어 1면에 실리는 영광(?)을 안게 된다. 그리고 다음날, 이 보도는 일본 아사히신문, 하와이 교포신문, 조선일보로 재인용 확대되었다. 갑작스런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부터 문화재관리국(지금의 문화재청)으로부터의 확인 전화까지, 나는 2-3일간 정신이 없었고 이로 인해 부담도 상당히 느껴야 했다.
기사가 나가고 일주일쯤 지난 어느 날 안기부(지금의 국가정보원) 광주 분실에서 수사관이 학교로 찾아왔다. 당시의 표현을 그대로 전하자면 “기사 내용을 ‘고위층’이 아는 척하였다”고 한다. 광주민주화 운동의 직후, 권력탈취에 혈안이 되어 있을 당시에 설마 어마어마한 고위층께서 가라앉은 배 한 척의 국적에 관심을 가질 만한 여유가 있을 리는 없을 터인데, 어찌하다 신문에 눈길이라도 한번 갔던 것인지…. 죄인 심문하듯 연구동기부터 따지더니 꼬치꼬치 신상명세서를 작성하고 사용한 표본은 압수해 가 버렸다.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광주를 떠나면 안된다는 명령도 잊지 않고 곁들이면서.
새가 아니라 점보 비행기라도 떨어뜨릴 공포의 대상, 안기부한테 조사를 당하였으니 나이 마흔에 겨우 얻는 대학 전임강사 자리는 풍전등화인 셈이었다. 이런 상황과 위압적인 분위기에서의 조사는 나를 매일 밤 불안에 떨게 만들었고, 낮에는 학생들이 연구실 노크만 해도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그러고 10여 일쯤 지난 어느 날 감금 아닌 감금이 해제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겨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하루가 천년이라더니 그때의 긴 하루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왜, 무엇 때문에 학자의 하나의 연구결과까지도 조사의 대상이 되어야 했는지 아무런 설명도 없었고 지금도 그 이유를 모른다. 어렵게 구한 표본을 돌려달라는 말조차 감히 입에 올릴 수도 없었다. 오히려 잡혀가서 혼나지 않은 것만으로 감사해야 했을 뿐….
그런데 이 사건은 예기치 않은 수확을 안겨주었다. 필자의 전공인 목재해부학이 무얼 하는 학문인지를 알려주는 계기가 된 것이다. 문화재 관련 학자들과 공무원들에게 이런 분야도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셈이다. 당장 '신안해저유물 발굴위원'이란 감투가 씌워졌다. 나를 제외하면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름 석 자만으로도 일반인들이 쉽게 아는 유명학자들이었다. 어쨌든 감투 덕에 약 4년에 걸쳐 보물선 발굴현장에 직접 참가하여 표본도 수집하고 배의 재질도 분석하는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또 그러다보니 관련 분야 사람들도 나를 만나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아! 그 신안 보물선 재질을 분석한 박 아무개냐" 하며 먼저 알아주기도 하였다.
그 이후 신안보물선과 아울러 곧 이어 발굴된 약산도 어두리 앞 고려초기 화물선, 완도 장좌리 청해진 유적지의 목책, 강진 무위사와 전북 화암사 건축재의 재질 분석을 비롯하여 몇 군데 출토 나무유물이 나의 손을 거쳐 갔다. 그 동안 개인적인 사정으로 경북대학으로 옮겨오면서 잠시 주춤거리기도 하였으나 나무문화재 재질연구는 그대로 이어오고 있었다.
무령왕릉과 금송의 비밀
그러던 1990년 여름, 나는 당시 정재훈 문화재관리국장을 찾아갔다가 평생 잊지 못할 귀중한 표본을 구하게 된다. 중앙박물관 이건무 유물부장의 호의로 백제 무령왕릉에서 나온 나무관재를 비롯하여 낙랑고분과 창녕 다호리 가야고분의 나무관재 조각을 만나게 된 것이다. 사실 나무 문화재연구에서는 표본을 구하는 일이 가장 어렵다. 재질분석을 하겠다고 어렵사리 청을 넣으면 톱으로 문화재를 잘라내는 정도로 생각하고 대개 문전박대를 당한다. 그러나 작은 부스러기나 사방 1mm크기, 경우에 따라서는 이보다 더 작은 표본이라도 전자현미경을 들이대면 나무의 종류 정도는 찾아낸다. 그러나 책임자에게 이런 내용을 설명하고 재질분석을 하자고 설득하는 일은 언제나 간단치 않다.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허락이 있을 때까지 발표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단서까지 붙는다. 그러나 학자라는 사람들의 속성이 새로운 것을 하나 찾으면 어디다 대놓고 자랑하지 않고는 입이 간지러워 못 배기게 마련인데, 아차, 잊어버리고 그 내용이 새어 나가 발표되거나 말 한마디 잘못으로 오해라도 생기면 그 기관으로부터 표본 구하는 일은 그것으로 끝이다.
너무 귀한 표본을 손에 넣은 터라 벅찬 설렘을 안고 현미경 앞에 앉았다. ‘잃어버린 왕국’ 백제 25대 무령왕(462-523)의 왕릉 발굴은 20년 전에 이루어졌지만, 너무나 유명하여 필자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광복 후 가장 가치 있는 발굴이라는 명성과 달리 지나치게 서두른 탓에 수많은 귀중한 자료가 없어져 버렸고 충분한 연구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채 수 십 년의 세월이 흘러가고 있는 상태였다. 발굴보고서를 보았더니 ‘목관의 재질은 밤나무다’라고 적혀 있는 한 줄이 전부였다. 시꺼먼 옻칠에 으스스한 느낌마저 주는 관재(棺材)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우선 관재의 나무 종류부터 궁금하였다. 뜻밖에도 무령왕과 왕비의 시신을 감싸고 있던 관 나무는 일본 남부지방에서 가져온 금송(金松)임을 밝힐 수 있었다. 이는 무령왕이 어릴 때 일본에서 자랐다는 역사적 기록을 증명하고 백제와 일본의 관계를 규명하는 귀중한 근거를 제시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몇몇 매스컴에 연구 내용이 크게 소개되자 나는 다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안기부 조사를 또 당하는 것은 아니겠지? 지난날의 쓴 기억이 떠올라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려야 했다.
개인적으로 무령왕릉관재를 분석함으로써 귀중한 고고학적인 근거를 찾았다는 것은 일생의 크나큰 영광이다. 하지만 이렇게 중요한 기초조사를 20년 동안 해볼 생각도 않았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지금도 여전히 대부분의 발굴현장마다 수많은 나무 자료들이 재질조사조차 거치지 않고 없어져 버리는 현실은 안타까울 뿐이다.
고려대장경, 그 전설과 진실 사이
이런 저런 인연으로 이외에도 일산 신도시, 익산 미륵사지, 울산 옥현 청동기 유적, 부여 궁남지 등 여러 매장문화재까지 우리나라 나무문화재의 상당 부분이 필자의 손을 거쳐 재질 분석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언제나 나의 관심의 중심부에 있던, 단일 나무문화재로서는 최대라고 할 수 있는 해인사 팔만대장경판만은 여전히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먼 당신'이었다.
그런데 드디어 기회가 왔다. 1993년 경 부산 MBC 창사 30주년 다큐멘터리 제작에 관여하면서 팔만대장경판과 만나게 된 것이다. 이어서 문화공보부 주관 ‘팔만대장경판의 과학적인 보존을 위한 기초조사’ 팀에 참가하면서 본격적이 대장경판 연구에 들어갔다.
팔만대장경판은 알려진 바와 같이 고려 고종 23년(1236)에 시작하여 38년까지 16년간에 걸쳐 제작된 81,258여 장의 나무판(경판)으로 전체 무게는 280톤에 이른다. 한 장의 크기는 길이 68 혹은 78㎝, 나비 24㎝, 두께 3㎝, 무게 3㎏정도이다. 한 장에는 앞뒤 322자, 양면을 합치면 644자가 새겨져 있고 팔만대장경판 전체로 볼 때는 약 5천2백만 자나 된다.
이렇게 엄청난 일을 해두고도 어인 일인지 선조들은 기록에 너무 인색하였다. 믿을 만한 기록이라고는 《고려사》에 한 줄, 《조선왕조실록》에 두 줄이 전부다.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 오늘날 해인사에 보관하고 있는지, 수많은 사연들이 모두 신비의 베일에 가려진 문화재다. 기록이 없고 현물은 남아 있는 문화재의 비밀 문…, 나는 이 문을 열기 위해 자연과학이라는 열쇠를 사용하였다.
그 시작은 우선 무슨 나무로 만들었는지를 밝히는 일이었다. 나는 먼저 자작나무로 제작하였다는 전설부터 확인했다. 결과는 전설과 달리 우리나라 산에서 흔히 보는 산벚나무와 돌배나무가 대부분이었다. 다음은 강화도에서 새겨서 조선 태조 때 해인사로 옮겨왔다는 학설에 정면 도전을 해보았다. 경판 자체 무게만도 4톤 트럭으로 70대 분량, 천리 길을 지게로 지고 머리에 이고 달구지에 실어 날랐다면 지금의 경판 표면에서 부딪힌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어야 했다. 표면에 생긴 여러 가지 흔적들을 조사하고 경판이동에 필요한 인원을 계산해 본 결과, 해인사 근처에서 만들었을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또 팔만대장경판을 해인사로 옮기는 일이 있었다면 임금님의 방귀소리까지 적어 둘 정도로, 세세한 기록으로 유명한 《조선왕조실록》에 이런 내용이 비치지도 않았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추정했다. 이런 내용들을 정리하여 ‘다시보는 팔만대장경판 이야기’라는 책을 한 권 내는 것으로 팔만대장경판 연구는 일차 마무리를 하였다.
필자는 이렇게 거의 30년에 걸쳐 나무 문화재와의 만남을 이어 왔다. 지금도 연구실 구석구석에는 수백 년에서 수천 년의 시공을 뛰어넘은 옛 나무 조각들이 필자를 기다리고 있다. 때로는 썩어서 형체조차 보존하기 힘든 작은 나무토막이지만 선조들의 역사를 읽고 문화를 바라 볼 수 있게 해주는 매개자인 그들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늘 설레고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