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 문화재 재료의 재질분석
-조선중후기 목활자 및 목판과 고려와 조선의 책지를 중심으로-
1. 서론
인류의 발전은 문자의 발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문자를 통한 의사전달은 좀 더 자세한 생각을 표현 할 수 있었으며, 더욱 뛰어난 점은 기록문화를 발전시킨데 있다. 기록문화는 시대를 반영하는 매체로서 오늘날에도 그 시대의 상황을 알 수 있게 하는 척도를 제시해 주었다. 이러한 문자발명에 이어 기록문화의 발전은 인쇄술의 발명에 이르게 되어 더욱 문명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인쇄술이 발명되기 이전에 기록하고 의사를 전달하는 방식으로는 압인법(원통이나 인형 같은 재료에 문자나 그림을 새기고 이를 점토판 위에 굴리거나 눌러서 그 새긴 자국을 만들어 내는 방식) 과 날염법(나무나 금속 등의 판에 그림이나 무늬를 새겨 천에 날염하는 방식), 탁인법(비석 등에 조각된 문자나 그림을 복사하는 방법)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방법은 인쇄술을 싹트게 하는 근원이 되었을 뿐 진정한 의미의 인쇄술은 7세기경에 발생한 목판 인쇄술에서 부터 시작 되었다.(대한인쇄문화 협회)
나무는 수많은 세포로 구성된 유기물로서 세포의 모양, 크기 배열상태 등이 수종에 따라 다르며 이러한 것들이 모여 나무마다 다른 성질을 나타낸다. 1).2),3)
이러한 특징에 의해 글자 새기기에 적합한 나무는 세포의 크기가 적당하고 균일해야하며 또한, 정교하게 글자를 세기거나, 새긴 후에 인쇄 할때 오래사용 할 수 있도록 어느 정도의 강도를 가진 나무 또는 주위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나무가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특징을 보았을 때 목판에 사용된 나무는 10여종에 불과하였다.1),2)
목판의 발견에 가치를 가지는 것은 가볍고 새기기 간편한 나무를 사용함으로서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되었고 교육이 일부 계층에 국한된 것을 일반서민들에게 까지 전파 될 수 있게 하는 방법을 제시한 점으로 다시 말해 인쇄술의 발전을 의미하게 되는데 있다. 이러한 목판은 가깝게는 세계 문화 유산인 고려 대장경에서4) 그 이전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및 많은 서책을 제작하는데 널리 쓰였으며, 우리나라 인쇄에서는 단연 중요한 역할을 해 왔었다.
목판의 발전은 고려시대에 와서 불교를 기본국가 이념으로 삼으면서 사찰에서 크게 발전하였고, 외침에 대항하고자하는 염원을 새기고자 많이 쓰였다. 이러한 목판기술은 조선시대에 와서도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대장경판의 인쇄나 각 사찰의 간경사업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또한, 태조에서 태종 대에 이르는 조선조 초기에는 불경판 외에도 다른 서책들의 관판본과 사판본 들의 간행이 상당히 성행하였으며, 삼국사지(三國史記)나 조준(趙浚) 등의 <경제육전(經濟六典)>, 권근(權近)의 <입학도설(入學圖設))>이 간행되었고, 정종 대에는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이 간행됐다. 이외에도 이숭인(李崇仁)의 유고집인<도은문집(陶隱文集)>, 고려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記)> 등 많은 서책들이 관판으로서 중앙 및 지방 관서에서 간행되었다. (대한인쇄문화 협회)
목판인쇄술 외에도 동양에서는 부수적인 것으로 활자 인쇄가 성행하였는데, 초기에는 금속활자가 대부분 사용되었으나, 목판과 마찬가지로 나무라는 특징에 의해 목활자가 많이 쓰이게 되었다. 목활자는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전해지는 것은 없으나 금속활자본인 <직지>에서 부족한 글자를 목활자로 충당하였는 것을 보았을 때 그 이전부터 쓰였다고 여겨진다. 현재 우리나라에 전해지고 있는 최초의 목활자 인쇄물로는 조선 태조 4년(1395) 및 동왕 6년(1397)에 인출한 <개국원종공신녹권(開國原從功臣錄券)>이라는 문서가 있다. 또한 목활자의 제작방법을 소상히 소개하고 있는 책으로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서유구의 <임원십육지(林圓十六志)> 등이 있다. (대한인쇄문화 협회)
이러한 것을 보았을 때 조선시대에는 목활자가 상당히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목판 및 목활자의 발달과 더불어 지식 보급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종이를 들 수가 있다.
종이는 예부터 사람들이 말과 생각을 기록하고 보전, 전달하는 매체로서 인류와 함께한 종교, 정치, 경제, 교육, 역사 등 거의 사회 모든 분야에 두루 사용되었다. 이러한 종이는 기록매체의 발전을 이루었으며, 나아가 종이제작의 발전을 초래하였다.
종이는 중국에서 105년에 처음으로 제작되어 사용되었으며, 그 이전에는 서사재료로 처음에는 거북의 껍질이나 동물의 뼈를 이용하다가 돌이나 옥(玉), 도기등도 널리 사용되었으며, 간혹 양피지를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대나무(죽간,竹簡)나 나무(목독,木牘)도 많이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후에 발명된 종이는 죽간이나 목독은 물론 점토판이나 금석(金石)보다도 훨씬 가볍다. 또한 비단이나 양피지보다도 값이 싸고 날로 늘어나는 수요에 충당하기도 쉬웠다. 그러므로 종이는 널리 사용되었으며, 종이 제조기술이 날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중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종이로는 한지가 있다. 한지는 문방사우라 불리울 만큼 우리 민족과 가깝게 지내온 구한 존재 이며 우리 생활사에 중요하게 자리 잡아 왔다. 한지가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기원전 2세기 중국 문· 경제년간 (179-141 B.C.) 무렵에 제작된 방마탄에서 출토된 종이가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종이이며 그 무렵에 우리나라에도 종이생산 기술이 전해졌으리라 여겨진다.6) 또한 한지는 시대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달랐으며, 색깔이나 크기, 생산지에 따라 다르게 불리어 졌으며, 대표적인 구분은 재료 · 만드는 방법 · 쓰임새 그리고 크기에 따라 나누어져 대략 200여종에 이르렀다. 이처럼 다양하게 생산된 한지는 주로 그림과 글씨를 쓰기 위한 용도로 가장 많이 사용되었으며, 일반 민중 속에서는 다양한 공예 기법을 창조적으로 발전시켜 다양한 용도의 생활용품과 장식적 아름다움을 표현하는데 활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한지는 목판과 목활자의 발달과 함께 중국과 다른 우리나라만의 고유한 기록문화를 발전시켜왔다.
이러한 인쇄문화는 오늘날 우리에게 귀중한 문화유산으로써 뿐만 아니라 옛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그리고 앞으로의 기록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한 기초 자료를 제공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한지에 대한 뛰어난 제조기술은 일부 문헌에 기록되어 있으나 한지원료에 대한 뚜렷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이러한 상황은 시대별로 사용한 한지의 원료를 알 수 없으며, 지금껏 가지고 있는 기록문화재의 원료가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이에 한지로 만들어진 책지(冊紙)의 원료를 분석한다면 새로운 기록문화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더불어 목활자와 목판의 조직학적인 구별법을 통한 수종식별이 이루어진다면 한지와 더불어 우리나라 인쇄문화의 이해에 관한 중요한 점을 제시 할 수 있으리라 본다.
5.결과
1. 조선후기 목활자에 사용된 수종을 분석한 결과 돌배나무 40.2%, 감나무16.5%, 모과나무 14.4%, 회양목 10.1%, 산벚나무 6.5%, 박달나무 5.8%, 단풍나무 5.3%, 사철나무 0.4%, 피나무 0.4%, 노린재나무0.4%의 순 이였으며 돌배나무가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돌배나무의 비율이 가장 높으며 주위에 흔히 자라는 다양한 수종이 사용되었다.
2. 조선조 중후기 영남지방에서 만들어진 목판은 단풍나무 42.5%, 박달나무39.9%, 돌배나무 8.5%, 감나무4.6%, 오리나무 0.7%, 서어나무 0.5%, 산벚나무 0.5% 이였다. 단풍나무가 차지하는 비율이 가장 높고, 단풍나무와 박달나무가 전체의 82.4%를 차지하고 있다. 단풍나무는 구하기 쉬운 장점이 있고 박달나무는 새기기는 어려우나 재질이 단단하여 여러 번 인쇄하여도 목판의 표면 마모가 적은 특성이 있다.
3. 책지의 원료는 15C이전에는 닥나무와 마섬유를 사용했으며, 차츰 고정지, 안피지, 면섬유의 비율이 높아졌으며, 16C이후에 다시 닥나무 와 마섬유가 많아지는 경향이었다. 이것으로 보아 우리의 책지에 사용된 원료는 닥나무가 주축을 이루고 마섬유를 같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닥나무나 마섬유를 사용한 책지는 고급품이었으며, 이들 원료의 공급이 원활하지 못할 때 고정, 안피, 면섬유를 보완제 혹은 증량제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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