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재에서 만나는 나무
-부여일원 출토 목질유물을 중심으로-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박상진
5천년 역사를 이어오면서 우리 곁에는 항상 나무가 있었다. 삶이 힘들 때 쉼터로서만이 아니다. 집짓고 음식 해 먹고 살림살이를 만드는 인간생활의 직접적인 재료로서 나무와 풍광을 아름답게 하고 귀족들의 취미생활에 필요한 조경수로서 나무는 없어서는 안 되는 선조들의 필수품이었다. 그래서 선조들과 삶을 같이 하였던 옛 나무의 사연들은, 바로 우리 역사의 편린을 알아내는 단서가 된다. 우선 나무 쓰임의 역사적 변천을 단군신화에서부터 조선왕조에 걸쳐 선조들이 좋아한 나무를 알아보고자 한다.
1. 단군신화 속의 나무
일연스님의 삼국유사 내용대로 민족의 시작은 환웅이 하늘나라에서 무리 3천 명을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에 내려오면서부터다. 그러나 이런 높은 산꼭대기에는 무리 3천은 고사하고 혼자도 버티기 어렵다. 신단을 쌓아 제사 의식을 치루고 곧바로 하산하셨을 터이다.
평지로 내려오신 환웅과 그의 일행들은 우선 숲을 없애는 일부터 시작하셨을 것이다. 무리를 먹여 살리는 일이 간단치 않으니 농사지을 땅 확보가 급선무다. 토템사상으로 무장된 옛 사람들에게 큰 나무는 숭배와 두려움의 대상이다. 큰 나무는 개간의 도끼자국은 피해갈 수 있었다. 남겨진 곳이 바로 ‘단나무(壇樹)’와 그 일대 일 것이다. 단나무란 제단을 구성하고 있는 나무란 뜻이다. 그래서 환웅이 땅에 첫발을 내디딘 신단수와 평지로 이동하신 다음의 단나무는 분명히 구별할 필요가 있다.
결국, 단군할아버지가 나라를 열어 통치이념을 전파한 곳이 높은 산꼭대기 신단수아래 라고 보기는 어렵다. 넓은 들판이 가까이 있는 구릉지나 평지의 단나무가 있는 곳을 근거지로 했을 것이다. 또 호랑이와 곰에게 인내심 테스트를 시킨 마늘과 쑥도 산꼭대기 신단수가 아니라 평지의 단나무와 관련이 있다. 두 식물은 높은 산을 자람 터로 하지 않는다. 사람 사는 곳 가까이 심거나 자연적으로 자란다.
단나무와 단군할아버지를 나타낸 ‘단’에는 당시의 숲을 짐작할 수 있는 실마리가 들어있다. 글자를 보면 이승휴의 제왕운기에는 박달나무 ‘단(檀)’을 쓰고, 삼국유사에서는 제단을 의미하는 ‘단(壇)’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단군의 태교 장소가 된 단나무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숲의 실체는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제왕운기에 기록된 한자뜻 그대로 박달나무 아래서 우리의 역사가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선 박달나무는 몇 백 년에서 천년을 넘길 만큼 오래 살지 못한다. 자라는 모양도 대부분 곧바르게 하늘로 솟은 키다리 꼴이다. 가지를 넓게 펴서 주위를 넉넉하게 감싸주고 악귀를 쫓아내는 위엄을 갖추어야하는 제단의 나무로서는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 많다. 따라서 단나무가 단군왕검이 나라를 열던 시절의 박달나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단을 이루는 나무의 주체는 무엇이었는지 다른 방법으로 찾아들어가 보자.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단수, 즉 단나무는 당나무(당산나무)와 맥이 통한다. 오래된 마을 입구나 고갯마루에서 볼 수 있는 서낭당의 원형이 단나무에서 유래되었다고 짐작해 볼 수 있다. 전형적인 서낭당은 돌로 쌓아 올린 단(壇)과 큰 나무가 있기 마련이다. 아울러서 때로는 당집이 있는 작은 신의 공간이기도 하다. 당나무가 자라는 곳이다. 따라서 오늘날 드물게 남아 있는 서낭당의 나무를 보면, 비슷한 성격의 당나무가 바로 단군할아버지께서 나라를 열던 그 당시의 나무를 짐작해 볼 수 있는 지표가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 전체 당산나무의 2/3이상이 느티나무이며 참나무, 서어나무, 전나무, 소나무 등과 어우러져 작은 숲을 이룬다. 한마디로 예부터 서낭당을 이루는 당나무는 느티나무에서 느티나무로 계속 이어졌음을 나타내고 있다. 느티나무라면 세월을 압도하는 긴긴 삶과 우람한 덩치로 하늘과 땅을 잇는 민족의 나무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다. 느티나무와 함께하는 숲을 배경으로 5천년 우리의 역사는 이어지지 않았나 싶다.
2. 선사시대의 나무들
사람이 처음 집단생활을 시작할 때는 자연 동굴을 주거공간으로 이용하다가, 차츰 그 형태가 인위적인 움막으로 발전했다. 선사시대에 만들어진 구조물이 그대로 남아 있지는 않다. 하지만 겨울의 추위가 심한 한반도의 특성상 반지하의 구조가 필요했을 터이다. 바로 수혈식(竪穴式)주거지다. 가장 원시적인 형태는 둥글게 움을 파고 둘레에 서까래를 세워 가운데로 모이도록 만든 원추형 움집이다. 서울 암사동의 4호 집터처럼 바닥의 네 귀퉁이에 한 개씩의 큰 기둥구멍이 있다. 움집들로 벽을 보강하고 서까래를 견고하게 떠받치기 위해 벽체기둥을 세우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움집을 만드는 재료는 어차피 나무가 주축이 된다. 어떤 나무를 사용하였을 것인가? 땅에 맞닿은 곳에 바로 쓸 재목이니 우선 잘 썩지 않아야하고 단단해야함이 기본이다. 한반도에서 이런 나무로 적합한 나무는 참나무와 느티나무다.
실증적으로 조사한 자료를 보면 구석기 문화유적지로 유명한 석장리의 경우 참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 소나무 등이었다. 수양개 유적의 경우에는 참나무, 오리나무, 소나무가 출토되었다. 울산 옥현동의 청동기 시대 유적에서도 대부분 참나무였으며 굴피나무가 상당량 출토되었다. 그 외 오리나무, 느릅나무, 소나무 등이 있었다. 그 외 여러 유적에서 출토되는 나무를 포함하여 종합해 보면 거의 대부분이 참나무다. 식물학적으로 정확히 말하여서는 상수리나무 종류다. 참나무 이외의 나무들은 대체로 서까래 등의 보조재로 쓰였으리라 짐작된다.
참나무의 종류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면 대부분이 상수리나무 종류다. 참나무 중에서 특히 상수리나무는 높은 산보다 인가 근처의 야산에 널리 자란다. 쉽게 재료를 취득할 수 있으면서 좋은 재질을 가졌기 때문에 다른 참나무보다 널리 이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3. 삼국시대의 나무들
삼국시대가 시작되면서 주거의 위치는 차츰 지상으로 올라오기 시작했고 건축재는 통나무를 그대로 사용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가공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절대 권력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왕궁의 건축에는 나무껍질을 벗기고 멋스럽게 다듬는 기술이 필요하다. 이때부터 보급되기 시작한 철기문화와 함께 목재의 가공기술은 급격히 발전했다. 도끼와 톱을 이용한 판자 만들기도 훨씬 손쉽게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의 나무건축물은 현존하는 것은 없고, 관재 등 출토 목재에서 쓰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한편 삼국사기, 삼국유사, 동국통감 등의 문헌에 등장하는 조경수 나무는 삼국을 구분하여 알아보기는 어렵고 통일신라시대의 나무를 중심으로 알아본다.
3.1. 고구려 및 낙랑의 나무
우선 문헌에서 보면 《삼국사기》에 이런 기록이 있다. 고구려 시조 주몽은 부여를 떠나면서 일곱 모가 난 돌 위의 소나무 기둥 아래(七稜石上松下)에 부러진 칼 한 쪽을 묻어둔다. 훗날 태어난 아들 유리는 자기 집 소나무 기둥 밑에서 부러진 칼 한 쪽을 찾아내어, 아버지가 있는 졸본으로 달려가 주몽을 이어 임금이 된다. 소나무가 건축물의 기둥으로 쓰였다는 최초의 기록이며 그만큼 소나무가 널리 자랐다는 증거이다. 삼국이 정립되던 2천여 년 전, 만주벌판의 고구려 땅에는 나라가 성립되기 이전부터 소나무가 비교적 널리 퍼졌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렇게 만주 벌판에 소나무가 먼저 자리 잡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소나무는 햇볕을 좋아하는 나무다. 자라는 데 햇빛이 들어올 넉넉한 공간이 필요하므로 우거진 숲에서는 크게 번성하지 못한다. 오랜 세월동안 다른 나무들의 등살에 억눌려 살아오던 소나무는 기원전 10세기 전후 북방민족이 남하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숲에 불을 질러 농경지를 넓히고 집짓기와 난방에 필요한 나무를 베어내니, 소나무가 좋아하는 삶의 터전이 확보된 것이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의 땅, 한반도 깊숙한 곳엔 산악지대가 많고 사람의 수가 적어서 숲이 울창한 편이다. 즉 소나무가 잘 자랄 수 있는 넓고 양지바른 곳을 찾기 힘들다. 따라서 고구려 이외의 백제와 신라의 영역에는 활엽수가 주로 산을 점령했으며 이런 증거는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한편 고구려 지역에서 실제로 출토된 목재는 일제강점기에 발굴된 낙랑고분의 목곽이나 목관이 대표적이다. 낙랑고분 정박리(貞拍里) 4호 관재는 넓은잎삼나무, 석암리(石巖里) 257호 관재는 주목, 목곽(木槨)재는 둘 다 졸참나무 종류이다. 넓은잎삼나무는 우리나라에 없고 중국 양자강 남부에서 대만에 걸쳐 자라는 나무다. 상록침엽수로서 키는 30~40m 가량, 지름은 두세 아름이 넘는다. 바깥 모양과 재질이 삼나무와 비슷하나 잎이 더 넓어서 광엽삼(廣葉杉)이란 이름이 붙었다. 이 나무는 잘 썩지 않고 비교적 재질이 단단하여 관재를 비롯해서 돛배의 돛대나무로 쓰이기도 했다.
주목은 재질이 붉은색을 띄어 벽사의 의미가 있고, 잘 썩지 않는 특징 때문에 관재로도 널리 쓰이는 나무다. 이곳 이외에도 만주 길림성 집안현 환문총(環紋塚)및 경주 금관총의 관재가 주목이다. 한편 관을 둘러싸는 목곽재는 평양 주변에도 흔히 자라는 참나무 종류를 이용했다. 어쨌든 낙랑고분은 사용된 관재의 일부를 멀리 중국남부에서 직접 가져와 만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역시 고대 동아시아 국가들의 세력과 교역범위를 알려주는 확실한 물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나무는 건축재로서는 주로 소나무가 쓰인 것으로 짐작되며 관재나 특수 쓰임으로는 주목, 수입목재로서 넓은잎삼나무등으로 추정된다.
3.2. 신라의 나무
《삼국사기》 옥사(屋舍)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주택 한 변의 길이는 진골 24척, 6두품 21척, 5두품 18척, 4두품 이하는 15척을 넘지 못한다’며 집 크기를 못 박았다. 덧붙여서 집짓는 나무로 5두품 4두품 이하는 ‘느릅나무(山楡木)을 써서는 안 된다’고 아예 나무 종류까지 규제하고 있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귀족들이 집을 지을 때 느릅나무를 널리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운명적 만남이 나온다. 남천에 걸려 있는 느릅나무다리(楡橋)에 원효대사가 일부러 떨어짐으로써 인연이 시작되었다. 시대를 앞서간 신여성 평강공주가 청혼하러 온달 집을 찾아갔을 때, 그는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려 앞산에 올라가 있었다. 이 같은 기록으로 짐작해보건대 한반도에는 느릅나무가 흔했고 고급 기둥나무 등 건축재로 널리 사용되었다. 영명이 elm인 느릅나무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건축재이다. 그 외 참나무와 천마총 관재인 느티나무 등도 널리 쓰인 것으로 보인다.
유적지에서 출토된 신라시대의 나무를 보면 경주박물관 본관 신축부지에서는 소나무, 참나무, 오리나무 등 25종의 나무가 나왔다. 대구 칠곡 아파트 단지에서 발굴된 수중보(洑)는 5~6세기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조사해본 결과 32종류의 나무가 발견되었다. 이 중 참나무가 30%, 오리나무가 18%. 버드나무가 12%의 순이었으며 느릅나무와 소나무도 3%씩 차지했다. 신라시대 대구 근교의 산에는 대부분 넓은잎나무가 번성해서 바늘잎나무인 소나무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낮았음을 알 수 있다.
1921년 9월, 우리나라 최초의 금관이 나온 금관총이 발굴된다. 이곳에서는 길이 8자3치, 너비 3자3치 크기의 옻칠된 목관이 있었으며 목곽이 그 주위를 둘러쌌다. 목관은 주목으로 밝혀졌고 목곽은 녹나무이었다.
그런데 필자가 98호 고분(1975년 발굴)의 관재를 조사해본 결과 녹나무가 검출되었다. 여기서 목곽과 목관을 만든 녹나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부터 향장(香樟), 예장(豫樟)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이 나무는 주로 배를 만드는 데 쓰였으나 일부에서는 관재로도 이용되었다. 우리나라에 경우 녹나무를 사용한 것은 98호분과 금관총이 처음이다.
녹나무가 주로 자라는 지역은 제주도, 일본남부, 중국의 양자강 남부를 비롯한 아열대지방이다. 자라는 곳을 최대한 북쪽으로 잡더라도 남해안의 다도해 섬지방을 벗어나지 못한다. 더욱이 기후 한계선에 분포하는 나무들은 자람이 좋지 못해서 관재와 같은 고급 재료로 쓰일 수 없다. 녹나무는 난대나 아열대에 주로 자라는 나무이다. 경주의 왕릉에 쓰인 녹나무는 중국 남부, 제주도, 일본 남부의 세 지역 중 어느 곳에서 가져온 수입 나무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신라 중심으로 쓰인 삼국사기에 나오는 나무를 정리해 보면 나무의 종류는 침엽수로서 소나무, 잣나무, 향나무의 3종, 활엽수는 버드나무, 참나무, 밤나무, 느릅나무, 느티나무, 산뽕나무, 복사나무, 자두나무, 매화나무, 배나무, 모란, 옻나무, 회양목, 싸리나무, 차나무의 15종 및 대나무와 인도에서 수입한 자단과 침향을 합치면 모두 20여종을 검색할 수 있었다. 집을 짓는 등 일반 용재로는 소나무, 잣나무, 참나무가 쓰인 것 같고 가구와 치장을 위한 특수용재는 자단, 침향, 느티나무, 회양목, 산뽕나무가 쓰였다. 또 구황식물로는 소나무, 느릅나무, 참나무, 밤나무를, 관상수로는 소나무, 대나무를 비롯하여 과일을 생산하는 복사나무, 자두나무, 매화나무, 배나무를 심고 가꾼 것 같다.
자단과 침향은 삼국시대에도 벌써 인도와의 교역이 활발하였음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수입품의 규제를 위하여 신라사회의 지배계층이었든 진골까지도 이의 사용을 금하고, 단지 성골과 임금만이 사용할 수 있도록 엄격히 통제하였다.
신라시대에 쓰인 나무를 종합해 보면 참나무와 느릅나무, 느티나무, 소나무 등이 건축재를 비롯한 일반용재로 주로 쓰였으며, 관재 등의 특수 용재로는 느티나무와 녹나무 등을 선호한 것으로 짐작된다.
3.3. 백제의 나무
역사는 언제나 싸움에 이긴 사람들의 눈으로 쓰여다. 우리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백제라는 고대국가는 나당 연합군에 의해 정복당하면서 수많은 기록과 유물이 철저히 파괴되어버렸다. 진실을 밝혀낼 수 있는 자료가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이런 실정에 비추어보면 1971년 7월 5일, 충남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 발굴된 백제 무령왕릉의 발굴은 1천 5백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잃어버린 왕국’의 얼굴을 찾는 일과 마찬가지였다. 도굴꾼의 피해를 전혀 받지 않은 ‘처녀분’이어서 모두 108종 2,906점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수많은 유물 중에는 왕과 왕비의 시신을 감쌌던 11조각의 널빤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발굴 당시부터 시꺼먼 옻칠이 되어 있었고 어쩐지 으스스한 기운을 자아내어 이 나무판자에 관심을 갖는 이가 적었다. 그러나 여기에 백제와 일본의 교류를 밝혀줄 귀중한 증거가 숨어 있었음이 발굴된 지 20여 년 후에야 비로소 밝혀지게 된다.
이후 궁남지, 미륵사지, 능산리 고분군, 관북리 등에서 출토된 목질유물은 백제의 옛 이야기를 일구어 내는데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곳은 궁남지이다. 총 172점을 수종 분석한 결과 비자나무, 전나무, 삼나무, 측백나무, 버드나무류, 굴피나무, 오리나무, 팽나무, 벚나무류, 옻나무, 개옻나무, 헛개나무, 음나무, 말채나무, 때죽나무, 물푸레나무 등이 검출되었다. 참나무 종류가 33%와 소나무가 27%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였으며 다음으로 밤나무 9%, 느티나무 6%이었고 나머지는 1~2점이었다. 관북리는 총 42점을 대상으로 한 결과 소나무 21점, 삼나무 8점, 편백 4점. 측백나무 1점, 전나무 2점, 밤나무 2점, 참나무류 1점, 팽나무 1점, 벚나무류 1점, 비자나무 1점이 검출되었다.
백제시대의 나무는 한반도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소나무와 참나무가 주축이 되나 특히 주목할 수종들이 있다. 즉 금송을 비롯하여 삼나무, 편백 등 일본을 원산지로 하는 나무가 출토되는 점이다. 일본과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근거 수종으로서 크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앞에서 예를 든 유물을 제외하고는 아직 대부분의 백제 목질유물들은 재질분석의 과정을 밟지 않았다. 전체적인 재질 분석이 이루어진다면 더 많은 자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백제 땅의 일본 수입나무
금송
무령왕릉-11편의 목관재는 모두 금송으로 제작되었으며 수령은 350년 내지 600여년, 직경은 130cm 이상에 달하는 거대목을 수 십 본 벌채하여 사용한 것으로 추정 된다.
익산 미륵사지-수로 경사면에서 출토된 목편이 금송이었다. 건축재의 가능성이 크다.
익산 쌍릉-관재가 금송임이 일제강점기에 밝혀졌다.
1971년 7월 9일, 해방 이후 최대의 고고학적 발굴이라는 백제 25대 무령왕릉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출토된 유물은 108종 3천여 점에 이른다. 동시에 왕과 왕비의 시신을 감싸고 있던 다량의 목관(木棺)도 출토되었다. 발굴 보고서에는 그냥 ‘밤나무’라고 기록한 다음 공주박물관의 지하창고에 들어가 버렸다.
20년이 지난 1991년, 우연한 기회에 관재 조각을 입수하게 된 나는 현미경으로 세포검사를 하여 일본 특산인 ‘금송(金松)’임을 밝혀냈다. 물론 금송은 화석으로 보면 마이오세(1~2천만 년 전) 동안 한반도 남부에도 자생한 적이 있지만, 이후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무령왕은 《일본서기》에도 기록이 남아 있으며, 어릴 때는 일본에서 자랐다고 알려져 있고 유난히 일본과 관계가 깊은 임금으로서 관재가 일본에서 가져온 금송이라는 사실은 자료가 부족한 백제사 연구에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금송은 이곳 이외에 익산 미륵사지에서도 출토되어 당시 일본과의 활발한 교역을 짐작할 수 있는 실증적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금송은 세계의 다른 곳에는 없고 오직 일본 남부에만 자라는 희귀 수종이다. 늘 푸른 바늘잎나무로 원산지에서는 키 20~30미터, 지름이 두세 아름에 이르는 큰 나무다. 바깥 모양이 긴 원뿔처럼 생겼고, 가지 뻗음과 잎이 독특하여 아름다운 나무로 유명하다. 나무는 특히 잘 썩지 않아 관재, 건축재 등에 쓰이며 일본의 여러 목조문화재의 기둥으로 쓰인 예가 있다. 공교롭게도 옛 국립공주박물관의 앞뜰에는 일제강점기인 1920년경에 심은 세 그루의 금송이 자란다. 그들의 선조 나무가 역사의 영겁으로 사라져 버린 무령왕의 시신을 영광스럽게 감싸고 있었다는 가문의 영예를 아는지 모르는지 단아한 모습으로, 2004년 박물관이 옮겨가지 전까지 무엄하게 파헤쳐 전시되고 있는 대왕의 유물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삼나무
무령왕릉-관제 편(片)의 사이에서 나온 작은 목편 1점이 삼나무였다. 용도는 알 수 없다.
부여 관북리 유적-42점의 표본 중 삼나무가 5점이었으며, 유물의 용도는 목간형 목제품 및 소형목제품이 주류를 이루었다.
궁남지-목간의 하나와 3점의 유물이 삼나무로 제작되었다.
우리나라의《삼국사기》에 해당하는 역사책《일본서기》의 신대(神代)를 보면 ‘스사노오노미코토(素戔鳴尊)’라는 신은, ‘내 아들이 다스리는 나라에 배가 없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하고, 수염을 뽑아 흩어지게 하니 삼나무가 되었으며 가슴의 털을 뽑아 흩으니 편백이 되었다. 삼나무는 배를 만드는 데 쓰고 편백은 서궁(瑞宮)을 짓는 재료로 하라’는 기록이 나온다. 아득한 옛날부터 그들의 개국신화에 나올 만큼 삼나무는 일본인들이 자랑해 마지않는 일본의 나무다. 이처럼 그들의 시조 신(神) 이야기는 물론 노래(俳句)나 시를 비롯한 문학작품에까지 삼나무는 빠지지 않는다. 그만큼 일본에서는 흔한 나무이면서 동시에 나무로서의 좋은 점은 다 가지고 있다.
바로 바다 건너의 이런 좋은 나무에 대하여 우리의 선조들은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다. 정약용의《아언각비》에 이름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개화 이전의 조선왕조 때는 일본의 삼나무를 남부지방에 따로 심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문헌으로는《고려도경》제29권 공장(供張)의 삼선(杉扇)에 보면, 일본백삼목(日本白杉木)을 종이처럼 얇게 쪼개서 부채를 만들었다는 내용이 있다.
삼나무를 우리나라에 대량으로 심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00년대 초부터다. 곧게
빨리 자라는 나무이니 재목을 생산할 목적이었다. 다만 추위를 싫어하므로 경남과 전남의 해안지방에서부터 섬 지방에 주로 심었다. 한편 제주도에서는 목재생산보다는 귤 밭의 방풍림으로 심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른다. 남해안지방에서는 우리의 고유 수종인 곰솔이나 비자나무를 제치고 가장 널리 퍼져 있는 나무가 되었다.
늘 푸른 바늘잎 큰 나무로 키 40미터, 지름이 두세 아름은 보통인 거목이다. 잎은 약간 모가 나고 길이는 손가락 한 마디 정도로 송곳처럼 차츰 가늘어져 끝이 예리하다. 암수 한 나무이고 꽃은 초봄에 피고 열매는 가을에 익는다.
편백
부여 관북리 유적-42점의 표본 중 편백이 4점이었으며, 유물의 용도는 목간형 목제품 및 소형목제품이 주류를 이루었다.
일본인들의 신화대로 궁궐을 비롯한 일본의 전통 건축물은 대부분 편백으로 지어졌다. 그들이 섬기는 신사의 대표적 건물인 이세신궁(伊勢神宮)이나 나무 불상의 상당 부분도 역시 편백이다. 삼나무와 함께 편백(扁柏)은 일본을 대표하는 나무 중 하나이다. 키 30~40미터, 둘레 두세 아름이 넘을 정도로 자라는 큰 나무로서, 잎 모양은 사뭇 달라도 흔히 보는 소나무와 같이 바늘잎나무로 분류한다. 20세기 초 일제의 손길이 한반도에 미치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조금씩 가져다 심었다. 추위를 싫어하여 주로 남해안을 선택했다. 광복이 되고 산림자원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좋은 나무로 알려진 편백은 차츰 널리 심게 되었다. 남해의 편백 자연휴양림, 독림가 임종국 씨가 심은 전남 장성의 편백 숲이 아름다운 숲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편백은 수천수만 그루가 떼를 이루어 모여 자라기를 좋아한다. 자기네들끼리 높이 경쟁을 하여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오른다. 또 편백은 소나무나 향나무와 같은 다른 바늘잎나무보다 세 배나 많은 피톤치드를 발산한다. 실제로 편백 숲속에서 심호흡을 해보면 다른 나무의 숲보다 향이 강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편백 숲은 산림욕장으로 인기가 높다.
나무질은 약간 단단한 편이며, 봄 세포와 여름 세포의 모양변화가 적어서 매끈하고 균일한 맛이 난다. 독특한 향기가 있고 잘 썩지 않는다. 어디에 쓰든 나무가 갖추어야 할 장점은 대부분 갖추고 있다. 살아서는 피톤치드로, 죽어서는 나무 몸체를 통째로 사람에게 보시하는 고마운 나무다.
백제 땅의 우리나무 들
비자나무
능산리 고분 관재-필자의 조사와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의 조사에서도 비자나무임이 밝혀졌다.
부여 관북리 유적-42점의 표본 중 1점이 비자나무였으며 용도는 미상이다.
궁남지-2점의 유물이 비자나무 이었으나 용도는 미상이다.
지금은 만나기 어려운 나무이나 옛날에는 남해안에서 흔히 자라던 나무였다. 이는 문헌이나 출토유물에서도 확인된다.《고려사》에 보면 원종 12년(1271)에는 원나라의 궁궐을 짓는데 필요한 비자나무 판자를 보냈다고 한다.《동국여지승람》,《세종실록지리지》,《조선왕조실록》등에는 비자나무의 분포지역과 조정에 바치는 세공(歲貢)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또 1983년 완도 어두리에서 인양된 고려 초기의 화물운반선 선체의 밑바닥 일부와 완도 장좌리 청해진 유적지의 나무 울타리, 4~6세기 무덤으로 알려진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서 나온 관재의 대부분은 비자나무를 사용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나무가 부드럽고 연하면서도 습기에 잘 견디므로 예부터 바둑판 이외에도 관재나 배의 재료로 널리 이용된 좋은 나무다.
이처럼 고려 이전만 해도 비자나무는 널리 자라고 있었음을 짐작 할 수 있으나 조선조에 들어오면서 사정이 달라진다. 벌써 세종, 예종, 성종 때 여러 번에 걸쳐 비자나무 판자의 수탈에 관한 지적이 있었으며, 영조 39년(1762)에는 제주도에서 바치는 비자나무 판자 때문에 백성들이 폐해가 심하므로 일시 중지시킨 기록도 있다. 그래서 우리와 가까이서 삶을 함께 해온 비자나무 숲은 안타깝게도 모두 없어지고, 지금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몇 곳만이 겨우 목숨을 이어가는 현실이다.
남해안 섬 지방 및 제주도에서 시작하여 육지는 전라남북도의 경계에 있는 백양산과 내장산이 비자나무가 살 수 있는 북쪽 한계선이다. 그러나 심은 나무는 충남 서산시 운산면 여미리에는 둘레 세 아름에 나이 300년에 이르는 비자나무 고목이 자라기도 한다. 늘 푸른 바늘잎을 가진 큰 나무로서 어릴 때 생장은 매우 느리나 크게 자라면 두세 아름에 이른다.
암수가 다른 나무이고 봄에 꽃이 피어 열매는 다음해 가을에 익는다. 크기는 손가락 마디만 하며 새알 모양으로 생겼다. 껍질을 벗겨내면 연한 갈색에 딱딱하고 얕은 주름이 있는 씨가 들어 있다. 아몬드와 닮았는데 맛은 떫으면서 고소하다. 그러나 함부로 먹을 수는 없고 예부터 회충, 촌충 등 기생충을 없애는 약으로 쓰였다.
참나무
궁남지-분석한 172점 중 약 1/3에 해당하는 57점이 참나무였다. 궁남지의 여러 시설물에 참나무가 가장 많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관북리와 왕궁리-1~3점의 참나무가 포함되어 있다.
참나무는 어느 한 종(種)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도토리가 달리는‘참나무 무리’의 여러 종류를 따로 구분하지 않고 집합적으로 부르는 이름이다. 참나무 무리에는 상수리나무와 굴참나무 두 종, 졸참나무로 대표되는 넓은 타원형의 비교적 큰 잎을 가진 졸참나무, 갈참나무, 신갈나무 및 떡갈나무 네 종을 합쳐서 모두 여섯 종을‘참나무’라고 간단히 말한다.
우리나라 숲은 바늘잎나무는 소나무, 넓은잎나무는 참나무가 대표 수종이다. 두 나무가 가장 흔하다는 뜻이다. 참나무는 전국 어디에서나 자라며 키 20~30미터, 지름이 두세 아름에 이를 수 있는 큰 나무다. 목질이 단단하면서 질기고 쉽게 썩지 않으므로 역사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선조들이 널리 쓰던 나무 중 하나였다. 한반도에 처음 들어온 우리의 선조들은 참나무로 만든 움막집에서 살았다. 실제로 점말동굴을 비롯한 신․구석기시대 유적에서 많은 참나무가 출토되고 있다. 건축재로서 해인사 대장경판전의 기둥, 선박재로서는 완도 어두리 화물 운반선의 외판(外板), 관재로서는 의창 다호리 가야고분 및 낙랑고분 관재의 일부가 모두 참나무다. 그래서 참나무는‘진목(眞木)’이라 하며 나무들 중에는 가장 재질이 좋고 진짜 나무란 뜻의‘참’나무다.
《삼국사기》,《고려사》,《조선왕조실록》 등 우리의 정사(正史) 기록을 보면 참나무의 열매인 도토리는 배고픔을 달래주는 구황식물(救荒植物)로서 임금이 직접 시식을 할 정도로 귀중하게 여겼다. 흉년이 들수록 도토리가 더 많이 달리는 나무의 특성이 바로 생명줄이기 때문이다.
소나무
궁남지-172점의 표본 중 47점이 소나무로서 참나무 다음으로 많다.
왕궁리-42점의 표본 중 22점이 소나무이다.
옛사람들은 소나무로 지어진 집의 안방에서 아이가 태어났고, 소나무 장작으로 데워진 온돌에서 산모는 몸조리를 했다. 새 생명의 탄생을 알리는 금줄에는 솔가지가 끼워진다. 아이가 자라면서 뒷동산의 솔숲은 놀이터가 되고 땔감을 해오는 일터가 되기도 한다. 명절이면 송홧가루로 만든 다식(茶食)을 먹고 양반가라면 십장생도가 그려진 병풍을 치고 꿈나라로 들어간다. 가구를 비롯한 여러 생활필수품에도 소나무는 빠지지 않았다. 선비로 행세를 하려면 송연묵으로 간 먹물을 붓에 묻혀 일필휘지를 할 수 있어야 한다. 한 세상살이가 끝나면 소나무로 만든 관속에 들어가 땅속에 묻힌다. 그러고도 소나무와 인연은 끝나지 않는다. 도래솔로 주위를 둘러치고는 다시 영겁의 시간을 소나무와 함께 한다.
소나무의 또 다른 귀중한 쓰임새는 구황식물이다. 한 세기 전만 해도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풀뿌리의 대표는 칡이며 나무껍질의 대표는 소나무다. 배고픔을 참을 수 없으면 소나무 속 껍질, 즉 송기(松肌)를 벗겨 먹었다. 그러나 섬유질만 많고 실제로 영양분은 얼마 들어 있지 않다. 우리는 가난을 표현할 때 흔히 ‘항문이 찢어지게’ 라는 표현을 잘 쓴다. 소나무 껍질을 먹고 소화를 잘 시키지 못하여 변비가 되는 현상을 빗댄 말이다.
밤나무
궁남지-172점의 표본 중 16점이 밤나무이다. 참나무나 소나무에 비하여는 적은 숫자지만 다른 나무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많다. 각종 기구를 만드는 목재는 물론 식량자원으로서 밤나무를 많이 심은 것으로도 짐작된다.
밤나무와 관련된 옛 기록을 살펴보면《삼국지》 위지 동이전 마한조에‘마한의 금수초목은 중국과 비슷하지만 굵은 밤이 나고 크기가 배만하다’라고 했다.《고려도경》에도‘과실 중에 크기가 복숭아만 한 밤이 있으며 맛이 달고 좋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그 외에《후한서》와《수서》 등 여러 문헌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다. 우리 문헌에도 허균의《도문대작》에‘밀양에서 나는 밤이 크고 맛이 가장 좋으며, 지리산에서도 주먹만 한 큰 밤이 난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렇게 우리나라 밤은 예부터 굵기로 널리 이름이 나 있었다.
멀리는 낙랑고분과 가야고분에서도 밤알이 출토된 바 있다. 선조들은 예부터 생산량이 많은 우리의 굵은 밤 심기를 장려하여, 흉년에 도토리와 함께 대용식으로 귀중하게 활용했다. 《삼국유사》원효의 탄생설화에는 ‘사라율(裟羅栗)’이라는 밤나무 품종 이야기가 있으며, 《고려사》에도 예종과 인종 때 밤나무 재배를 독려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는 더욱 밤나무 키우기를 장려하였으며, 여기에는 식량자원으로서의 중요성은 물론 유교이념에 따른 조상숭배 사상이 밤나무와 관련이 있는 것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밤은 제사 때 올리는 과일 중 대추 다음 차례이었을 정도로 제물(祭物)로 중히 여겼다. 이유는 밤송이 안에 보통 밤알이 세 개씩 들어 있는데, 후손들이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으로 대표되는 3정승을 한 집안에서 나란히 배출시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해석은 밤이 싹틀 때 껍질은 땅속에 남겨두고 싹만 올라오는데, 껍질은 땅속에서 오랫동안 썩지 않고 그대로 붙어 있다. 이런 밤의 특성 때문에 자기를 낳아 준 부모의 은덕을 잊지 않는 나무로 보았다.
밤나무 목재도 조상을 모시는 제사용품으로 널리 쓰였다. 단단하고 잘 썩지 않으며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으나, 역시 조상숭배의 상징성 때문이다. 나라의 제사 관련 업무를 관장하던 봉상시(奉常寺)에서는 신주를 반드시 밤나무로 만들었고, 민간에서도 위패(位牌)와 제상(祭床) 등 제사 기구의 재료는 대부분 밤나무였다. 밤나무의 수요가 많아지자 밤나무 벌채를 금지하는 율목봉산(栗木封山)까지 두기도 했다.
느티나무
궁남지-172점의 표본 중 11점이 느티나무이다. 상대적으로 많은 것은 아니나 널리 사용되던 수종으로 보인다. '의자왕 19년(659) '대궐 뜰에 있는 느티나무(槐木, 회화나무)가 사람이 곡하는 소리처럼 울었다'는 삼국사기 기록 등이 있다.
나지막한 동산을 뒤에 두르고 널찍한 들판을 내려다보는 곳, 시골 마을 어귀에 서 있는 아름드리 고목나무 한 그루는 서정적인 우리 농촌의 대표적인 풍경이다. 당산나무나 정자나무로 불리는 이런 나무의 대부분은 느티나무가 차지한다. 우리나라 보호수 고목나무는 현재 약 1만3천 그루쯤 되고 그중에서 느티나무가 7천1백 그루로 다른 나무를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다. 따라서 고목나무라면 느티나무가 먼저 떠오른다.
느티나무는 당산 지킴이로서 백성들의 정신적인 지주나무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의 육신은 쓰임새가 너무 많아서다. 목재는 나뭇결이 곱고 황갈색의 색깔에 약간 윤이 나며 썩거나 벌레가 먹는 일이 적은데다 무늬도 아름답다. 건조를 할 때 갈라지거나 비틀림이 적고 마찰이나 충격에 강하며 단단하기까지 하다. 한마디로 나무가 갖추어야 할 모든 장점을 다 가지고 있다.‘나무의 황제’라는 별명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둥그스름한 당산나무만이 느티나무의 참 모습은 아니다. 숲속에서 다른 나무와 경쟁하여 자랄 때는 곧바르고 우람한 덩치로 자란다. 그것도 적당히 자라다 그만 두는 것이 아니라 키 20~30미터, 지름이 두세 아름까지 자란다. 느티나무 목재의 옛날 쓰임도 화려하다. 천마총을 비롯한 관재로서 임금의 시신을 감싸고 영생의 길을 함께한 영광의 나무였다. 건축재로는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 해인사 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법보전, 조선시대 사찰건물인 강진 무위사, 부여 무량사, 구례 화엄사의 기둥은 전부, 혹은 일부가 느티나무다. 또 흔히 스님들이‘싸리나무’로 만들었다고 말하는 구시(절의 행사 때 쓰는 큰 나무 밥통), 절의 기둥, 나무 불상도 대부분 느티나무다. 기타 사방탁자, 뒤주, 장롱, 궤짝 등의 조선시대 가구까지 느티나무의 사용범위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4. 고려시대의 나무들
고려시대로 접어들면서 삼국시대 때 쓰이던 나무와는 종류가 달라진다. 평안도에서 전라도를 잇는 한반도 서부 지역은 정치무대의 중심이 되었고 인구밀도가 높아지면서 급격히 산림이 파괴되었다. 가까운 산에 소나무가 많아지니 당연히 그 사용 빈도가 점점 높아졌다. 그러나 소나무 외에는 모두 잡목으로 취급하던 조선시대 이전이라서 소나무에만 의존하지는 않았다. 고려 초 화물선 완도배의 밑바닥에 비자나무와 참나무까지 쓰고 있는 예가 이를 증명한다.
몽고난을 거쳐 고려 후기로 오면서 주위에는 점점 소나무가 많아 졌다. 삼국시대 때 건축재로 쓰던 느릅나무, 느티나무, 참나무 등이 차츰 소나무로 바뀌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부근에는 소나무 외에 건축재로 쓸 만한 나무가 없었다. 그러나 깊은 산 속에 있는 사찰 건물만은 소나무보다 훨씬 오래 쓸 수 있고 주변에 풍부하게 자라는 느티나무나 참나무를 주로 이용했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은 고려 말인 1376년에 지은 건물로서 기둥의 나무는 모두 느티나무였다. 느티나무 목재는 나뭇결이 곱고 황갈색 빛깔에 약간 윤이 나며 썩거나 벌레가 먹는 일이 적은데다 다듬기도 좋다. 그러면서도 물관의 크고 작음이 확실히 구분되고 배열이 독특하여 아름다운 무늬를 갖는다. 나무가 클수록 비늘모양, 구슬모양, 모란꽃 모양의 무늬와 함께 기름기가 약간 밴 듯한 광택이 특징이다. 건조를 할 때 갈라지거나 비틀리는 경우가 적고 마찰이나 충격에 강하며 단단하다. 동구 밖 아름드리 당산목 느티나무의 고고함을 구태여 강조할 필요는 없으리라. 나무의 여러 가지 속성만 따져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나무들에 전혀 뒤지지 않는 좋은 나무이다. 한마디로 나무가 갖추어야 할 모든 장점을 다 가지고 있는 '나무의 황제'다.
나무 다루는 기술이 남달랐던 우리의 선조들이 느티나무를 그대로 썩혀 둘 리가 없다.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 해인사 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법보전 건물의 기둥은 모두 느티나무를 건축재로 썼다. 그 외 조선시대 사찰 건물인 강진 무위사, 부여의 무량사, 구례 화엄사의 기둥 등 전부 혹은 일부가 이 나무다. 사방탁자, 뒤주, 장롱, 궤짝 등의 조선시대 가구까지 느티나무의 사용범위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임금님의 관재와 배 만드는 데 쓰인 예는 앞에서 말한 대로이다.
느티나무를 정자나무로만 생각하여 키가 그리 크지 않고 둥그스름하게 퍼지는 나무로만 알면 큰 잘못이다. 숲 속에서 다른 나무와 경쟁하여 자라는 느티나무는 곧바르고 우람하게 자란다. 그것도 적당히 자라다가 멈추는 것이 아니라 키가 20~30m, 지름 너덧 아름이 될 때까지 자라는 게 보통이므로 사찰의 기둥으로도 손색이 없다.
무량수전을 비롯한 옛 건물의 기둥에 느티나무가 쓰인 것은 잘 썩지 않는 성질 때문이다. 밖에 나무를 내놓고 일정기간 후 얼마나 썩었는지를 조사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느티나무가 소나무보다 세 배나 더 오래 버티었다고 한다. 비바람이 들이쳐 장마철 내내 아랫부분이 젖을 수밖에 없는 기둥의 특성으로 볼 때, 느티나무가 소나무보다 훨씬 유용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보는 기둥은 대부분 소나무다. 대체로 느티나무 자원이 거의 없어진 조선조에 들어와서 어쩔 수 없이 소나무가 쓰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봉정사 극락전의 나무를 분석해보았더니 건물의 뒤쪽 좌우 기둥은 미국 나무였다. 하나는 리기다소나무, 또 하나는 알라스카 가문비나무였다. 1972년 보수를 할 때 구하기 쉽고 값싼 수입나무로 눈속임한 것이다. 다행이 2002년부터 새로 보수공사를 한 덕분에 지금은 소나무로 바뀌어져 있다.
한편 고려시대의 최대 목재유물인 팔만대장경판의 재료를 보면 산벚나무와 돌배나무가 대부분이고 기타 자작나무류(거제수나무), 층층나무, 단풍나무, 후박나무 등이 소량 섞여 있다.
고려시대에 쓰인 나무를 종합해 보면 건축재로 쓰인 나무는 느티나무가 많고 자료는 없지만 참나무와 소나무도 함께 이용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조경수로 쓰인 나무들을 고려사, 동국이상국집, 보한집, 고려가요, 양화소록 등의 문헌에서 찾아보면 보면 다음과 같다.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 향나무, 비자나무, 가래나무, 개암나무, 개암나무, 굴참나무, 구기자나무, 녹나무, 능금나무, 닥나무, 단풍나무, 대추나무, 동백나무, 매화나무, 모란, 목련, 무궁화, 물푸레나무, 밤나무, 배나무, 배롱나무, 버드나무, 복사나무, 뽕나무, 살구나무, 석류, 순비기나무, 앵두나무, 오가피나무, 오동나무, 옻나무, 음나무, 인동덩굴, 자두나무, 주엽나무, 진달래, 탱자나무, 해당화, 황칠나무, 회화나무 후박나무, 침향(沈香), 연리목(連理木)등이다.
5. 조선시대의 소나무
조선시대로 들어오면서 강력하게 소나무 보호가 시작되었다. 새 왕조의 개창과 더불어 수도 건설과 새로운 권력자들의 건축물, 지방관서 건물 신축 등 건축재의 수요가 급증한다. 아울러서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남해안을 휩쓸고 다니는 왜구를 격퇴하기 위해 많은 배가 만들어졌는데, 이에 쓰인 나무도 만만찮았다. 몽고란 이후 지속된 산림 파괴로 인해 벌채하여 쓸 수 있는 나무는 소나무 외엔 거의 없었다. 자연히 소나무마저 차츰 줄어들게 되었다. 실록을 보면, 세조 7년(1461) 병조에서 소나무의 벌목을 금할 것을 건의하는 내용이 있다.
‘송목금벌(松木禁伐) 법은 엄하지만 관리 소홀로 배를 만드는 재목조차도 다 없어졌습니다. 청컨대 지금부터는 나라에서 쓰는 것을 제외하고는 관가나 양반 집에서는 배를 만들 수 없는 소나무만을 쓰게 하고, 백성들은 잡목을 쓰게 하소서’
조선 초기의 소나무 보호정책과 현황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기록이다. 이후 《경국대전》에도 소나무 보호정책을 강력히 추진했으나 소나무는 점점 고갈되어 갔다.
조선 초기 건물로 알려져 있는 해인사 고려대장경판 수다라장 장경전은 기둥 48개 중 느티나무가 22개, 참나무가 2개이고 나머지는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이다. 법보전은 47개가 느티나무, 1개가 잣나무이다. 강진 무위사 대웅전 기둥도 소나무와 단풍나무가 섞여있다. 조선 중후기로 내려와서도 사찰 기둥에는 소나무, 느티나무, 참나무, 전나무 등이 두루 쓰였다. 반면에 궁궐이나 관아의 건축물에 대부분 소나무가 쓰이면서 소나무는 최고의 나무로, 나머지 나무는 잡목으로 인식되었다.
왕실 건축과 배 만드는 데 들어가는 소나무를 특별히 보호하기 위해 전국 2백여 곳에 봉산(封山)이라는 소나무 특별보호구역을 만들고 벌목을 엄격히 규제했다. 그래도 수요에 비해 소나무 공급이 늘 부족했고, 조선조 말에 이르면 깊은 산골 외에 쓸 만한 소나무가 남지 않게 되었다. 그나마 한강 수계(水系)로 운반이 불가능했던 울진 ․ 봉화 지역의 소나무들은 오늘날까지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 소나무는 학술적으로 금강소나무(강송)이지만, 흔히 춘양목이라 불린다.
오늘날 우리의 산을 둘러보면 온통 소나무이고 국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도 역시 소나무다. 주거문화라는 영역뿐만 아니라 삶의 전체를 대표하는 문화에 나무를 넣어본다면 우리 나무문화는 주저 없이 소나무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우리와 소나무의 길고도 질긴 인연을 고려해볼 때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삼국시대에서 고려로 이어진 우리 역사의 중반기에는 참나무와 느릅나무, 느티나무가 소나무 못지않게 선조들의 삶 깊숙이 들어와 있었음을 알게 된다.
대표적으로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나무의 종류를 보면 다음과 같다.
가래나무, 가죽나무, 금강자(모감주나무), 감나무, 개나리, 개암나무, 느티나무, 회화나무, 금은화(인동덩굴), 느릅나무, 닥나무, 담쟁이덩굴, 대추나무, 등나무, 매화나무, 모과나무, 박달나무, 배나무, 버드나무, 벚나무, 보리수, 뽕나무, 살구나무, 상산(조팝나무), 싸리나무, 수청목(물푸레나무), 앵두나무, 영산홍, 오동나무, 오얏(자두나무), 은행나무, 자단(향나무), 자작나무, 참나무, 철쭉, 측백나무, 피나무, 해당화, 호두나무, 황벽나무, 황양목(회양목), 가목(價木), 가서목(가시나무), 귤, 칡, 겨우살이, 계수나무, 금등화(능소화), 노간주나무, 능금, 단목(丹木), 단향(檀香), 동백나무, 두충나무, 목통(으아리), 백양나무(사시나무), 백단(白檀), 비자나무, 복분자딸기, 산매자나무, 산유자나무, 석류, 소목(蘇木), 신나무, 오미자나무, 옻나무, 이년목(二年木), 유자나무, 위령선, 장미, 정향나무, 칡, 탱자나무, 화리, 황칠나무, 후박나무, 흑목(黑木)(77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