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인간의 역사를 말하다.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박상진
그는 지구상의 수많은 생물체 중 가장 오래살고 부피가 많은 것은 나무다. 사용하기에 적당한 강도와 굵기를 가지며 수십 메타의 높이까지 이용할 수 있는 재료는 나무밖에 없었다. 아울러서 베어서 사용하고 새로 심으면 다시 사용할 수 있는 재생(再生)이 가능한 재료이기도 하다. 아득한 옛날부터 우리 선조들은 나무의 이런 특성들을 살려 친근한 생활용품으로 널리 이용하여 왔다.
집짓기, 각종 기구, 배 만들기, 시신을 감싸는 관재 등, 나무는 바로 역사의 현장을 지키고 있던 재료이다. 살아있는 고목나무들은 수백 수천 년의 주변 환경기록을 나이테에 저장하고 있고, 죽어서는 다양한 쓰임의 흔적들을 남겨놓는다. 이런 것들이 모두 지나온 우리의 역사를 말해주는 증거물들이다.
이 강의에서는 매년 새로운 기록을 남겨가는 나이테 이야기와 나무의 재질로 추정해 볼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대자연의 하드디스크, 나이테
1901년 미국 천문학자 더글라스(A. E. Douglas) 박사는 태양의 흑점을 연구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는 흑점주기의 효과적인 계산방법을 찾지 못하여 속을 썩이고 있던 터였다. 우연히 재제소의 마당에 층층이 쌓여 있는 나무의 자른 단면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동심원의 나이테 세계를 보는 순간, 머릿속에 하나의 영감이 스쳐간다. 해마다 나이테의 너비가 좁아졌다 넓어졌다 하는 것은 바로 그해 기상조건의 결과이며 태양 흑점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즉시 나이테 연구를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태양의 활동은 지구의 기후에 영향을 미치고 해마다 나이테의 너비가 일정하지 않은 것은 그해 온도와 비오는 양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특히 매우 메마른 지역에서 간신히 살아가는 나무의 경우에는 나이테 너비의 변화가 기상조건에 더욱 민감하다는 사실도 눈치 챌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는 1914년 공동연구자들과 함께 1천년 자란 폰데로사소나무(Ponderosa pine)를 이용하여 ‘나이테 너비 변동 그라프’를 처음으로 만들어 낸다. 그런데 이 그라프는 엉뚱하게 기상학자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게 된다. 지난 세월의 기상자료는 단순히 흥미차원이 아라 과거를 토대로 인류에게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자연재앙을 예측할 수 있는 필수자료이기 때문이다.
나무의 나이테를 연구하는 새로운 학문은 기상학자뿐만 아니라 곧바로 고고학자들에게도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유물이나 오래된 건축물을 비롯한 대부분의 나무문화재는 만든 시대가 불확실한 경우가 많다. 나이테의 넓고 좁음으로 정확한 연대를 알아 낼 수 있는 신비의 기술은 고고학연구의 새로운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 기상학자들이 시작한 나이테 연구는 연대추정의 수단으로 고고학자들과 임학자들에 의하여 연륜연대학(dendrochronology)이라는 새로운 학문으로 발달하게 된다.
나무 삶의 애환을 기록한 일기장
나무는 3월에 햇볕이 따사로워지면 나무껍질 바로 아래에 있는 부름켜에서 겨울동안 쉬고 있던 세포가 분열을 시작하여 밖으로 부피를 늘여간다. 봄의 끝자락인 5월까지 왕성하게 분열하며, 이 시기에 만들어진 세포는 크고 세포의 벽이 얇으므로 부드럽고 색깔도 연하다. 흔히 춘재(春材)라고 부르는 부분으로 3월에서 5월말 사이에 만들어진다.
6월에 들어서서 잎이 완전히 피고 광합성이 활발할 때면 세포분열 회수가 느려진다. 그러나 이때 만들어진 세포는 크기가 작고 세포의 벽이 두꺼우며 단단하고 진한 색을 나타낸다. 나무 종류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대부분의 나무들은 7월을 고비로 분열활동이 급격히 둔화된다. 8월말에서 늦어도 9월 중하순에 이르면 대부분의 나무들은 분열활동을 멈추고 이듬해 봄까지 긴 잠 속에 빠져버린다. 이렇게 6월 이후 9월 사이에 만들어진 세포가 하재(夏材)이다. 흔히 추재(秋材)라고 부른다. 결국 나무의 나이테를 구성하는 세포들은 약 6개월 동안에 만들어지고 가을에서 겨울에 걸치는 1년의 나머지 6개월을 노는 게으름뱅이 들이다.
1년 동안 자란 춘재와 추재를 합친 것이 나이테이며 나무가 살아 있는 동안은 매년 하나씩 만들어 간다. 적당히 비가 오고 햇빛을 충분히 받아 좋은 날이 계속된 해에는 나이테가 넓고 반대의 경우는 좁아진다. 또 나무가 한창 자랄 시기에 극심한 가뭄이나 병충해, 늦서리 등 갑작스럽게 환경이 나빠졌을 때는 나이테처럼 보이는 ‘가짜 나이테‘가 생기거나, 심한 경우 한 해 동안 나이테 만들기를 아예 쉬어버리기도 한다.
이처럼 나무는 자기가 부닥친 자연계의 복잡한 환경조건을 있는 그대로 나이테에다 기록하면서 살아간다. 나이테는 1년 동안의 계절변화가 뚜렷한 온대나 한대지방에서 자라는 나무에만 생긴다. 나이테의 숫자는 바로 그 나무가 살아온 세월을 나타낸다. 나무는 험난한 자연환경에 맨몸 하나로 보통 수백 년, 길게는 몇 천 년을 살아간다.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 사는 생물체다.
물론 동물처럼 신체의 전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부름켜 안쪽으로 아주 일부만이 살아있어서 동물의 삶과 직접 비교는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예를 들어 지름 1m짜리 나무라면 살아있는 곳은 껍질에서 안쪽으로 10여cm 남짓한 부분의 일부 세포에 불과하다. 그나마 모든 세포가 살아 있는 것은 껍질 바로 안쪽의 부름켜 기준 나비1cm 남짓의 가락지모양 부 분이다. 우리는 흔히 속이 모두 썩어버린 고목들이 죽지 않고 거뜬히 살아가는 것을 보고 신기해한다. 껍질 주위의 1cm 남짓만 있어도 나무는 최소한의 생명을 부지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하다.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의 화이트마운틴에는 브리슬콘소나무(Bristlecone pine)라 부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살아온 나무가 있다. 5천년을 살아오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나무는 강원도 정선 두위봉에서 발견된 1천4백년짜리 주목이다. 김유신장군과 동갑내기 나무다.
옛 기후를 밝혀내는 단서
나이테가 갖고 있는 정보를 알아내는 방법은 이렇다. 우선 살아 있는 나무를 베어 매해의 나이테 너비의 변화를 재어 그라프로 만든다. 물론 많은 수의 나이테가 들어 있는 큰 나무일수록 좋다. 이때 ‘크로스데이팅(cross-dating)’이라 하여 가능한 여러 나무를 서로 비교하고 가짜 나이테나 아예 만들지 않은 해를 찾아내어 그라프의 정확도를 높인다. 다음에 옛 건물의 기둥이나 출토된 나무유물의 나이테도 같은 방법으로 그라프를 만든다. 살아 있는 나무의 그라프와 유물의 그라프를 견주어 보아, 나이테 너비의 변화 모양새가 일치하는 부분을 찾아내어 ‘표준 나이테 그라프’를 완성한다. 다음, 연대를 모르는 유물은 나이테를 조사하여 이 그라프와 일치하는 부분을 찾아내면, 정확한 연대를 밝혀낼 수 있다.
미국의 예를 보면 브리슬콘소나무를 조사하여 8천2백 년 전까지의 나이테 그라프를 만들었고, 이 그라프로 기원전부터 여러 번에 걸쳐 온난기와 한랭기가 반복되었음 알 수 있었다 한다. 또 미국은 신대륙 발견 이전의 역사 기록이 없기 때문에, 수많은 미국 서부의 중요 인디안 유적은 거의 모두가 나이테 그라프를 이용하여 '미지의 세계, 미국 서부의 비밀'을 캐는데 크게 이바지 하였다. 유럽에서는 북부독일과 아일랜드 및 스위스 등에서 나오는 출토 유물과 유럽참나무를 이용하여 약 1만 년 전까지의 표준그라프가 만들어져 있어서, 오래된 건축물을 비롯한 나무유물의 연대를 알아내고 있다.
우리나라는 아직 초보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충북대 박원규 교수는 연륜연대학을 연구하는 유일한 우리 학자다. 그는 소나무와 주목 및 잣나무를 사용하여 6백 년 전까지의 나이테 그라프를 만들었다. 최근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을 해체 수리할 때 나온 소나무 나이테를 분석하여, 사용된 나무의 대부분이 1871년에 베어온 것임을 알아내어 그 정확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이테만이 알아 낼 수 있는 ‘초정밀 연대추정법’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셈이다.
물론 나이테로 연대를 찾아내는 방식이 모든 나무 유물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무마다 생장양식이 다르므로 우선 그라프를 만들 수 있을 만큼 여러 해 동안, 가능하면 수백 년을 사는 나무라야 한다. 또 흔히 자라는 나무라서 통계처리를 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자료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또 땅이 깊고 수분이 충분한 곳에 자란 나무는 기상조건의 영향을 덜 받으므로 나이테 너비의 변화가 적어 연대를 알아내기 어렵다. 나무 문화재는 이런 좋은 환경에 자란 나무로 만든 경우가 많아서 연구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상식으로는 나이테로 연대를 알아내는 방법이 정확도가 가장 앞선다. 예를 들어 정확히 ‘서기 321년에 벤 나무로 지어진 건물’과 같은 해석이 가능해서다.
방사성 탄소연대측정법
유물의 연대를 알아내는 방법으로는 나이테로 들여다보는 방법 이외에 ‘방사성 탄소연대측정법’이 있다. 원리를 간단히 보자. 우주에 존재하는 높은 에너지의 방사선은 주로 양성자로 구성된다. 이들이 대기 속으로 들어오게 되면 중성자를 생성하고 다시 질소와 핵반응을 일으켜 방사성동위원소인 14C를 만든다. 14C는 산소와 결합하여 14CO2를 만들면서 공기 중에 있는 이산화탄소(CO2)와도 단단하게 결합한다.
한편 식물은 광합성작용을 하면서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비롯하여 14C도 항상 흡수하고 있다. 동물들도 직접 혹은 간접으로 식물이 만들어 놓은 광합성생산물을 먹이로 하기 때문에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14C를 반드시 포함하게 된다. 이런 14C는 대기 중에 있는 14C와 서로 주고받아 항상 거의 같은 농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생물체가 죽으면 대기와 교류가 끊겨 버린다. 즉 14C는 더 이상 보충되지 않으므로 차츰 감소한다. 그런데 14C는 5,370년마다 그 양이 반으로 줄어드는 성질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예를 들어 14C를 1천 개를 가진 생물체는 5370년 뒤에는 500개가 되고 11,460년 뒤에는 250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죽은 생물체에서 14C의 양을 측정하면, 그 생명체가 언제 죽었는지를 알 수 있다. 1949년 사이언스 3월호에 미국의 화학자 리비(Libby)가 이 방법을 발표하면서 정확한 연대 측정의 신기원을 이룬 것이다. 처음에는 분석을 위하여 상당한 양의 시료, 적어도 최소 몇 그램 정도는 필요하였다. 대상 문화재가 아주 작거나 귀중한 경우는 비록 작은 양이라도 채취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긴다. 그러나 최근에는 ‘가속기 질량분석기’가 개발되어 불과 0.001g만 있어도 연대측정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야 말로 먼지 크기의 시료만 가지고도 그의 나이를 알아볼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방사성탄소연대 측정법은 연대를 알아볼 수 있는 ‘만능선수’는 아니다. 우선은 정확한 연대를 측정할 수 없다는 게 사실이다. 오차의 범위가 50~100년에 이르며 때로는 수 백 년이 왔다 갔다 하기도 한다. 연대가 오래될수록 오차의 범위가 더 커지다. 측정하려는 대상물이 다른 생물체에 조금만 오염되어도 정확성이 떨어진다. 따라서 나무는 나이테로 연대를 측정하는 방법과 방사성탄소연대 측정법을 서로 보완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면 보다 더 정확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나무 재질로 추정하는 역사 현장
1. 문화의 여명과 목간
인류가 문명생활로 접어든 계기는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써 문자라는 간접방법을 찾아내면서 시작되었다. 차츰 문자를 쓸 수 있는 재료가 필요하였다.
처음 사람들은 나무 자체보다 먼저 나무껍질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하얗고 표면이 매끄러운 자작나무 종류를 더욱 눈여겨보았고, 그림과 글자를 기록하는 재료로 널리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작나무는 추운 지방에서만 구할 수 있고 생산량도 적어서 사람들은 다른 재료를 찾았다. 곧 값싸면서도 구하기가 쉽고 글자를 새기기에 적당한 야자나무 잎사귀가 눈에 띄었다. 불교의 최초 경전 패엽경은 이런 나무 잎사귀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역시 열대지방의 한정된 지역에서만 구할 수 있는 것이다.
문자를 기록할 수 있는 적당한 재료를 찾아 고심하던 사람들은 나무껍질이나 잎과는 비교할 수 없이 편리한 죽간(竹簡)을 발명하기에 이른다. 오늘날 우리가 책을 읽다가 책갈피에 끼워 넣는 서표(書標)를 두세 개 이어 둔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사용목적에 따라 크기가 다양했지만 대체로 세로 20∼25㎝, 너비 1∼3㎝에 두께는 부러지지 않을 만큼 얇게 만들었다. 여기에 직접 붓으로 글자를 쓰거나 칼로 새긴 후 먹물을 넣으면 완성된다. 죽간 하나에 30~40자는 충분히 써 넣을 수 있다고 한다.
대나무는 열대에서 온대지방까지 비교적 널리 자라며 가공하기에 편하다. 또한 표면이 단단하고 매끄러워 다른 어떤 나무보다 쉽고 효과적으로 얇은 판을 얻을 수 있다. 굵은 대나무라면 세로로 두세 줄 가량 써 넣을 수 있을 정도로 제법 넓은 판이 된다. 《논어》에는 공자가 책을 하도 많이 읽어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는 구절이 있다. 종이가 발명되기 전이니 그 책은 아마 죽간을 엮어 만든 책일 테고, 죽간을 엮은 가죽 끈이 하도 닳아서 끊어졌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쓰는 책(冊)이라는 한자는 여러 개의 죽간에 구멍을 뚫어 끈으로 이은 모양의 상형문자에서 유래했다.
나무로 만든 기록매체로는 죽간 이외에도 목간(木簡)이 있다. 죽간은 만들기 쉽고 편리하지만 대나무가 자라지 않는 곳에서는 재료 자체를 구하기 어렵다. 이리저리 궁리를 해본 사람들은 주위에 흔한 보통 나무를 얇게 켜거나 쪼개 죽간처럼 만들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이것이 바로 목간이다. 나무로 만들어진 목간은 죽간보다 더 넓은 판을 얻을 수 있어 편리했으나 두께를 얇게 하기가 어려워 무겁다는 단점이 있었다.
옛 중국인들은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 사용한 죽간과 목간을 합쳐 간독(簡牘)이라 불렀다. 간은 죽간에서 따온 말이고, 독은 나무 조각으로 만든 목독(木牘)에서 따온 것이다. 이런 죽간과 목간은 20세기 들어서야 발굴되기 시작했다. 중국의 경우 20세기 초 유럽탐사단에 의해 처음 발견됐고,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1975년 경주 안압지에서 처음 발굴됐다.
옛 사람이 쓴 죽간과 목간의 실물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20세기 초 유럽의 고고유물탐사단이 중국에 들어와 여러 유적지를 발굴하면서 목간은 비로소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중국에서는 수십만 점의 죽간과 목간이 출토돼 찬란한 옛 문화의 영광을 보여주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일본에도 1961년 고대왕국의 수도였던 나라(奈良) 부근의 궁궐터에서 41점의 목간이 발견된 것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거의 20만 점 가깝게 출토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중국이나 일본보다 훨씬 늦은 1975년에 경주 안압지를 준설하는 과정에서 51점의 목간이 찾아진 것이 최초이다. 그 후 경남 함안 성산산성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발굴된 90여 점을 비롯해 부여 능산리 유적 터에서 23점, 경기 하남 이성산성 등 지금까지 3백여 점 정도가 발견됐다. 목간이 대부분이고 죽간은 매우 드물다. 우리가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목간의 양이 이렇게 적은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나무유물이 썩지 않고 남을 수 있는 저습지가 많지 않은 것도 하나의 원인일 것이다.
2. 대량인쇄를 위한 목판과 나무 활자
종이의 발명으로 지식의 전달 방법은 획기적인 전환기를 맞는다. 간편하게 기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 번 작성된 문서는 오랫동안 보관이 가능하고 먼 곳에 전해줄 수도 있었다. 처음에는 필사로 출발하여 인쇄라는 새로운 개념을 생각해 냈다. 똑같은 책을 한꺼번에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방식은 인류 문명 발달에 커다란 사건이라고 봐도 좋다. 지식의 전달과 보급이 대중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쇄술은 목판에서 출발하여 나무활자를 디딤돌로 금속활자로 이어져 오늘의 문명세계로 업그레이드되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 경판(고려대장경판)
팔만대장경(공식명칭 고려대장경)의 경판은 세계기록유산에 등록될 만큼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이지만, 아직도 밝히지 못한 수많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엄청난 규모에 비하여 새김장소를 비롯한 관련 기록이 너무 부족한 탓이다. 다행히 팔만대장경판은 경판이라는 나무로 만들어진 현품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경판 자체를 대상으로 목재과학이란 학문의 잣대로 접근하면 미비한 기록을 보완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
어떤 일의 판단을 명확히 하려면 육하원칙에 따라 따진다. 팔만대장경판을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로 따져본다면 다섯은 알아낼 수 있는데, 단 하나 어디서 새겼는지가 명확하지 않다.
팔만대장경판은 어디에서 만들어 오늘날 해인사에 보관하게 된 것인가? 지금까지 정설로 알려진 대로 강화도에서 새겨서 보관하고 있다가 조선 초 해인사로 옮겼을까? 아니면 진주와 남해 등 남부 지방에서 새겨서 해인사로 가져왔을까? 해인사나 그 부근에서 새겨서 본래부터 해인사에 있었던 것일까? 이렇게 여러 가지 의문부호를 찍을 수밖에 없는 것은 옛 문헌 어디에도 새김 장소에 관한 명확한 기록이 없어서이다.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믿을 만한 자료는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한 줄 남짓한 내용이 전부이고, 그 외의 자료는 거의 없을뿐더러 고증도 부족하다. 그나마 표현이 애매하여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팔만대장경 경판의 개요
팔만대장경판은 약 5천2백만 자의 부처님 말씀이 새겨진 81,258장의 나무판이다. 경판 한 장에는 앞뒤로 약 640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글자를 새긴 부분과 양옆에는 인쇄할 때나 보관의 편의를 위하여 만든 마구리(손잡이)로 구성된다. 길이는 대체로 다섯 종류로서 75cm, 73cm, 70cm짜리도 있지만 68cm 혹은 78cm가 대부분이며 너비는 24cm, 두께는 약2.8cm정도이다. 대체로 컴퓨터 자판의 1.5배 정도이다. 무게는 3.4㎏전후다. 경판을 전부를 한꺼번에 쌓아놓는다면 백두산 높이가 넘고, 길이로 이으면 약150리에 이른다. 또 전체 무게는 약 280톤, 4톤 트럭에 싣는 다면 70대 분량이다. 부피로 계산하여서는 약 450m3에 달한다.
경판 새김에 쓰인 나무들
팔만대장경판을 만든 나무는 지금까지 자작나무(樺木)라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최근 필자가 2백여 장의 경판에서 극소량의 표본을 수집하여 현미경으로 조사한 바로는 자작나무는 검출되지 않았다. 산벚나무 64%, 돌배나무 15%, 거제수나무 9%로 산벚나무가 가장 많으며, 그 외 층층나무, 고로쇠나무, 후박나무 등이 사용되었다. 물론 이런 비율은 경판의 숫자에 비하여 표본의 수가 너무 적어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우나, 전체적인 경향을 알 수는 지표가 된다고 생각한다.
산벚나무와 돌배나무는 우리 주위에 흔하면서 경판새김 나무로서는 재질이 좋아 가장 많이 이용되었다. 그러나 주목할 나무는 거제수나무와 후박나무이다. 왜냐하면 두 나무 모두 자람 터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거제수나무는 해인사의 뒷산 가야산을 비롯하여 남부지방의 고산지대에 자라고, 후박나무는 난대림을 구성하는 주요한 수종이다.
산벚나무
팔만대장경판 만들기에 쓰인 나무의 약 2/3는 산벚나무다. 산벚나무는 흔하고 쉽게 찾을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나무껍질의 독특함 때문이다. 대부분의 나무는 나무껍질이 세로로 갈라지지만, 산벚나무는 가로로 갈라진다. 나무줄기의 숨구멍인 피목皮目이 약간 진한 적갈색을 띠고 가로로 짧게 혹은 길게 분포한다. 이런 모습은 멀리서도 다른 나무와 쉽게 구별하여 찾아낼 수 있다. 나라의 땅덩어리가 온통 몽고군에게 유린당한 당시로서 내놓고 나무를 베어 올 수도 없는 형편, 몰래몰래 한 나무씩 베어 나오기에도 안성맞춤이다.
돌배나무
두 번째로 많이 쓰인 나무는 약 14%의 돌배나무다. 산벚나무보다 구하기가 어렵고 나무의 굵기도 약간 가늘어 대장경판의 재료로 산벚나무 만큼 많이 쓰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옛날부터 돌배나무는 과일나무로서의 값어치가 더 컸다. 제사상의 맨 앞줄의 과일 중 하나가 될 만큼 사랑을 받아왔다. 이처럼 돌배나무는 사람들 곁에 가까이 있으면서 과일 이외에도 죽어서는 좋은 몸체를 대장경판의 재료로 보시해주는 고마운 나무였다.
거제수나무
거제수나무는 자작나무, 사스레나무, 박달나무 및 물박달나무 등과 함께 식물학적으로는 자작나무과科 자작나무 속屬에 들어가는 나무다. 자작나무와 거제수나무는 잎의 모양은 다르지만 껍질만 보아서는 서로 비슷하다. 거제수나무의 90% 이상이 표고 600m보다 더 높은 곳에 자라며 1,000m 전후가 가장 좋아하는 자람 터라고 한다.
거제수나무는 크게 자라면 높이 30m, 굵기 두 아름을 넘는다. 4월 말이나 5월 초쯤의 곡우 때가 되면 사람들은 거제수나무의 줄기에 구멍을 뚫고 파이프를 꽂아 물을 받아 마신다. 거제수나무를 거재수去災水로 표기하기도 했다고도 한다. 또 하나의 한자 이름 혼란이 있다. 거제수나무를 巨濟樹라고 쓰고 거제도와 관련지우는 것이다. 그러나 우연히 이름이 같을 뿐 아무런 관련이 없다.
자작나무(樺木)
자작나무가 자라는 지역은 백두산 원시림을 비롯한 북한 내륙의 고산 지방, 중국의 북동부, 사할린에서 시베리아에 걸쳐 있다. 추운 곳을 좋아하는 한대 수종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자작나무를 베어다 경판을 만들었다고 가정한다면, 생각해볼 수 있는 지역은 북한 내륙의 고산 지방이다. 벌채한 나무는 압록강이나 대동강에 뗏목을 띄워 황해로 내려와 강화도로 가져와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 역사의 상식으로는 대장경판을 새길 당시 몽고군에게 수도 개성을 비롯한 육지가 모두 점령당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런 가정은 성립되지 않는다. 또한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꼭 자작나무를 가져다 새겨야 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비슷한 품질을 가진 산벚나무나 돌배나무 등 다른 나무들로도 새김에 아무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작나무는 결코 경판에 사용될 수 없는 나무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팔만대장경판 새김에 쓰인 나무가 식물학적으로 말하는 진짜 자작나무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팔만대장경판은 자작나무로 만들었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각 급 학교의 교과서는 물론 대장경 관련 대부분의 문헌에는 자작나무 제작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여러 문서에서 옛 사람들은 자작나무와 벚나무를 같은 글자인 화樺로 표기하여 뒤섞어 사용했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후박나무
양이 많지는 않지만 대장경판 새김 나무에는 자라는 곳이 남해안 지방인 나무가 일부 들어 있다. 대장경판을 어디서 새긴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는 현실에서 이런 나무들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후박나무는 남해안이나 다도해의 섬 지방, 제주도에 걸쳐 자란다. 겨울날 남부 지방을 여행하다 보면 잎이 두껍고 짙푸르며 윤기가 흘러 마치 흔히 보는 감나무의 작은 잎처럼 생긴 상록수를 만날 수 있다. 이 나무가 후박나무로서 추위에 약하여 내륙으로 들어오면 거의 자라지 못한다.
새김장소, 과연 강화도인가?
새김장소가 강화도라고 하는 근거는 다음 문헌 셋이 거의 전부다. 관련 기록도 적을뿐더러 ‘강화도에서 새겨서 해인사로 옮겨왔다’ 고 명확히 기록한 문헌이 아니라 표현이 애매하여 추정하여 주장할 따름이다.
첫째는 “고종 38년(1251) 9월 25일임금은 여러 신하들과 함께 서문 밖 대장경 판당(板堂)에 행차하여 임진년(1232) 몽고 침입 때 불타버린 초조대장경을 16년에 걸쳐 다시 새긴 것을 자축하는 기념행사를 했다.는 ≪고려사≫ 기록이다. 둘째는 조선 태조 7년(1398) 5월 10일임금이 한강에 가서 강화도 선원사로부터 대장경판을 가져오는 것을 참관했고 다음날 2천 명의 병사를 동원하여 대장경판을 지천사로 옮겼다.”는 ≪조선왕조실록≫ 기록이다. 셋째는 같은 실록 정종 원년(1399) 1월 9일태상왕(이성계)은 사재私財로 해인사 대장경을 인쇄하고 싶어 하니 조치를 취하도록 하라”는 내용이다.
이 세 기록을 바탕으로 대장경판은 ‘1236~1251년의 16년에 걸쳐 강화도에서 새겨서 보관하고 있다가 1398년 해인사로 옮겼다이다. 과연 사실인가? 재질 분석을 바탕으로 새김 장소와 이운(移運)문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해 본다.
첫째, 경판 나무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경판을 만든 나무의 대부분인 산벚나무와 돌배나무는 식물학적으로 전국 어디에나 자랄 수 있는 나무이다. 하지만 실제로 나무가 벌채된 곳은 남해안 섬과 경남과 전남 일대의 남부 지방이라고 본다. 후박나무 등 따뜻한 남쪽에 주로 자라는 나무가 포함되어 있고 수운을 주로 이용하는 당시의 운반 수단을 생각해 본다면 전쟁 상황에서 비교적 몽고군의 영향을 덜 받은 남해안이라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거제도․남해도 등을 생각할 수 있다. 그곳에서 나무를 베어 초벌 경판을 만든 후 해인사 및 그 인근으로 추정되는 새김 장소로 옮기면 된다.
둘째, 경판 나무에 거제수나무가 들어 있는 점은 새김 장소를 찾는 중요한 실마리이다. 거제수나무는 주로 해발 600~1,000m 사이의 고산에서 자란다. 지리산과 조계산 등 남부 고산 지방에는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나무이다. 그래서 거제수나무는 먼 곳에서 일부러 가져다 경판 나무로 이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산벚나무나 돌배나무를 비교적 손쉽게 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높은 산에 자라는 거제수나무를 고생스럽게 베어다 쓸 특별한 이유가 없어서이다. 그런데 해인사 인근의 가야산에는 질 좋은 거제수나무가 흔히 자란다. 따라서 팔만대장경판에 거제수나무가 일부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해인사 주위에서 벤 거제수나무를 사용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해인사를 비롯한 가야산 일대에는 예부터 거제수나무가 많았다. 오늘날에도 성주를 비롯한 해인사 부근의 마을에서는 거제수나무가 거자나무란 이름으로 곡우 때 수액을 받아 마시는 나무로 널리 알려져 있다.
셋째, 현재 해인사에 보관된 경판의 표면 상태가 먼 거리를 옮길 때 생길 수 있는 마모 흔적을 비롯한 아무런 흠도 찾을 수 없는 점이다. 이는 가까운 거리에서 경판을 새겨서 바로 보관했을 때만 가능하다. 옮긴 거리가 멀수록, 또 글자까지 새긴 완성 경판일 때 옮겼다면 표면에 여러 가지 흠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해인사에는 지금의 위치 말고도 주위에 10여 곳 이상의 절터가 남아 있다. 사실 대장경 새김을 하는데 구태여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모여서 작업해야 할 필요는 없다. 초벌 경판은 다른 곳에서 만들어 오고 새김 기술자 몇 사람만 있으면 해인사에 가까운 여러 절에서도 얼마든지 새김을 할 수 있다.
넷째, 조선왕조실록 기록대로라면 태조7년 강화도에서 나온 경판은 정종 원년에 해인사에서 인쇄가 있었으니, 그해의 윤5월을 포함하더라도 정확히 9달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8만 천여 장이라는 엄청난 양의 경판을 아무런 흔적도 없이 감쪽같이 서울 지천사에서 산간오지인 해인사로 옮겨다 놓은 셈이다. 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이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으며, 연대가 명확한 유일무이한 기록이다. 그러나 당시의 지천사가 어디 있었는지 알 수 없으며, 강화도 선원사의 대장경이 곧 팔만대장경이라고 볼 수 있는 절대적인 증거가 부족하다.
다섯째, 강화도란 지정학적인 위치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강화해협에서 육지와 가장 가까운 거리는 500m 남짓하다. 한강 나비도 안 되는 좁은 해협을 사이에 두고 몽고군과 대치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고도의 정신집중이 필요한 경판새김이 가능하였을까? 새김장소라고 알려진 선원사는 강화해협 해안 쪽이니 대포소리와 군사들의 함성이 그대로 들리는 곳이다. 이런 환경에서 한가하게 장장 16년에 걸쳐 대장경을 만들고 있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여섯째, 좁디좁은 강화도 자체에서는 새김나무를 조달할 수 없다. 강화도에서 경판을 새겼다면 그 엄청난 양의 나무를 배에 실어 가져왔다는 이야기이다. 고려군과 몽고군이 서로 대치하는 전쟁 상태에서, 더욱이 간만의 차가 커서 썰물 때면 십 리도 넘게 노출되는 강화도의 갯벌에 배를 대고 무거운 통나무를 운반했을까?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일곱째, 지금의 경판 무게 280톤에다 옮기려면 포장을 해야 하니 전체 무게는 아무리 줄여 잡아도 400톤이 넘을 것이다. 한 사람이 50kg씩 운반하더라도 연인원 8천 명이 필요하다. 그것도 힘센 장정을 가정한 것이다. 장정을 매일 100명씩 동원한다면 80일이 소요된다. 그러나 이렇게 엄청난 대역사가 600여 년 전 실제로 있었다면 어디엔가 증거가 남을 수밖에 없다. 단기간에 수많은 사람이 동원되었을 이런 일이 기록은 고사하고 전설 하나 남아 있지 않다.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의문투성이다.
경판을 만든 수종으로 검토해본 결과 새김 장소가 강화도라는 지금까지의 학설은 받아드리기 어렵다. 새김 장소는 해인사 자체 및 인근 지역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거제수나무라는 고산수종이 일부 포함된 것이 직접적인 이유이고 경판의 표면에 옮겨올 때 생길 수 있는 마모 흔적이 전혀 없는 것이 간접이유다.
조금 더 범위를 넓혀서 새김장소의 가능지역을 생각해 보면, 거제도 및 남해도를 포함한 남부 섬지방도 포함시킬 수 있다. 후박나무라는 난대림의 대표수종이 들어 있고 대장경을 새기는데 직접 관여한 최이의 식읍이 진주를 포함한 남해안이라 서다.
앞으로 대장경판에서 더 많은 표본이 수집되고 목재과학의 기술이 더 발달된다면, 문헌사료의 부족으로 아직도 상당한 부분이 미스터리로 둘러싸인 팔만대장경의 비밀도 모두 풀려질 것으로 기대해 본다.
3. 회화속의 나무
천마도와 자작나무
천마는 예부터 옥황상제가 타고 다닌다는 신성한 동물로써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비슷한 그림들이 있다. 천마도의 크기는 가로 75cm, 세로 56cm, 두께 0.6cm로 대체로 중형TV의 화면 정도이고 쓰임새는 말다래였다. 다른 이름으로 장니(障泥)라고도 불리는 이것은 말안장에 늘어뜨려 진흙이 튀는 것을 막는 장식품이다. 말안장의 좌우에 매달던 것이었으므로 처음 발굴될 때는 2장이 겹쳐 있었다. 한 장은 심하게 훼손되어 있으나 같은 그림으로 된 나머지 한 장은 무사했다. 나무껍질 위에 거의 45도 각도로 14줄의 선을 서로 교차되게 누볐는데, 마름모꼴의 격자가 오늘날의 누비이불을 연상케 했다. 사용 중에 껍질이 찢기고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함인 듯하다. 위쪽 가운데 부분은 반달 모양으로 얕게 패었고 바깥 둘레는 넓이 1.2cm의 얇은 가죽 단으로 안팎을 덧대었다. 말안장에 매달 수 있도록 좌우에 각각 2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화려한 편은 아니지만 붉은색, 흰색, 검정색이 어우러져 소박한 느낌을 주는 컬러 작품이다. 색깔을 내는 칠감의 원료는 호분(胡粉)이라는 돌가루가 흰색에, 먹이 검은색에 쓰였다. 그리고 붉은색은 일종의 납 화합물인 주사(朱砂)와 광명단으로써 모두 옛 그림에 흔히 사용되는 천연무기물 물감이다. 표면 안쪽에 폭 10cm로, 둘레에는 인동덩굴모양의 둥근 무늬가 가로 6개, 세로 4개 씩 모두 20개의 띠를 둘렀다. 그리고 중앙에 하늘로 오르는 흰말을 그렸는데, 앞 뒤 발을 넓게 뻗었으며 벌린 입으로는 긴 혀를 내밀고 있다. 목덜미의 갈기와 힘차게 뻗쳐오른 꼬리털은 바람에 휘날린다. 날개가 있고 몸통 군데군데에는 반달 모양의 문양이 보인다. 힘차게 하늘을 달리는 천마가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그려낸 원숙한 솜씨가 돋보인다.
이 천마도는 신라뿐만 아니라 삼국시대 그림으로서 벽화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 된 그림이다. 천마총에는 이외에도 상서로운 새를 그린 서조도(瑞鳥圖)와 말 달리는 모습을 그린 기마인물도가 함께 출토되었는데, 천마도와 마찬가지로 나무껍질에 그려졌다. 그래서 천마총은 우리나라 옛 사람들의 솜씨를 확인할 수 있는 그림이 여럿 나온 무덤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우리는 천마도를 ‘자작나무 껍질 위에 그린 그림’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결론부터 말하면 백두산에서 시베리아 벌판에 걸쳐 자라는 새하얀 껍질의 바로 그 자작나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조금 전문적인 이야기로 들어가 우리나라에 자라는 이 나무의 족보부터 알아보자. 자작나무 무리는 원래 자손을 많이 퍼뜨린 종가집이다. 식물학적으로는 자작나무과(科)라 하여 우리나라만 해도 36종의 나무가 있지만 백화수피와 직접 관련된 종류는 몇 안 된다. 거제수나무, 사스레나무를 비롯하여 박달나무, 물박달나무 등이 자작나무속(屬)에 들어가는 형제들이다. 이들 중 박달나무와 물박달나무는 껍질의 모양이 너무 다르니 더 따져볼 것도 없다. 반면에 나머지 셋은 하얀 껍질이 그들의 트레이드마크라서 세쌍둥이처럼 거의 비슷하다.
그러면 천마도를 그리는데 쓰인 나무껍질은 세 나무 중 어느 것일까? 우리가 알고 있는 나무 세포 모양으로는 세 나무를 정확하게 구분해 내는 방법이 없다. 나무껍질을 이루는 세포 형태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아도 세 나무의 차이가 없을뿐더러 성분 차이가 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눈으로 보았을 때, 자작나무 껍질이 더 흰빛이고 잘 벗겨져서 품질이 조금 더 낫다는 정도이다. 그러나 덧칠 그림이 그려져 있고 땅속에 오랫동안 묻혀 있어서 색이 변해버린 천마도의 경우, 눈에 보이는 이런 차이는 나무의 종류를 찾아내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세 나무의 껍질은 어느 것이나 ‘백화수피‘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이처럼 식물학적인 구분에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고고학적인 의미는 크다. 천마총이 만들어진 연대를 5~6세기로 추정하고 있으니, 삼국통일 이전이고 자작나무가 자라던 곳은 고구려의 땅인 북쪽의 추운 지방이다. 반면에 거제수나무나 사스레나무는 남쪽의 태백산 줄기로 이어진 산에서 지금도 흔히 만날 수 있다.
만약에 천마도를 그린 나무껍질이 자작나무라면 고구려 땅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아야 하며, 두 나라 사이에 밀접한 교류가 있었다는 실증적 자료가 된다. 그러나 앞뒤 사정을 따져서 생각해볼 때 천마도의 재료는 거제수나무나 사스레나무 껍질일 가능성이 더 높다. 왜냐하면 세 나무의 껍질이 엇비슷한 품질에 쓰임새도 같으니 굳이 수입품을 쓰지 않더라도 당시 신라 영토 안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천마총에서 함께 출토된 서조도, 기마인물도를 비롯해서 금관총 및 황남대총에서도 여러 ‘백화수피’ 제품이 나오고 있다. 이를 통해 당시 신라에서 ‘흰 나무껍질’의 수요가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모두 고구려로부터 들여왔다고 보기가 어렵다.
이처럼 나무로 만들어진 문화재의 나무 종류를 알아보는 것은 단순한 흥미차원이 아니라, 국가와 국가 혹은 지역과 지역 사이의 교류를 짐작해 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된다. 그래서 유적지에서 나오는 나무는 썩은 토막 하나라도 반드시 과학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완당 김정희의 세한도
완당(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는 그가 귀양 온지 5년째인 1844년 그린 최고의 명작으로 꼽는다. 허름한 집 한 채를 두고 앞뒤로 그려진 한 쌍씩 네그루의 나무가 그림의 요체다. 그림설명에 논어 자한편의 ‘세한송백(歲寒松柏)’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였고, 그림의 제목마저 세한도이니 우리는 흔히 집 앞의 두 그루를 소나무, 집 뒤의 두 그루를 잣나무라고 해설한다. 과연 그런가?
먼저 짚고 가야한 부분은 세한도가 실제의 경치를 그린 실경 산수화냐는 것이다. 창문이 동그란 원창(圓窓)으로서 흔히 접하는 전형적인 우리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실경이 아니고 추사의 마음을 표현한 상상화라고도 한다. 또 옛날 독을 깨어 창문으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니 원창을 우리 것이라는 견해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런 논의에 자연과학자인 필자가 끼어들 틈새가 없다. 다만 세한도가 실경 산수화라면 무슨 나무일까?라는 전제로 생각해 본다.추사가 귀양 가서 살았던 제주도 대정일대는 바다에 가까운 평지로서 자라는 나무 종류가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그것도 세한도의 그림이 모두 바늘잎나무이니 더욱 간단하다. 당시에 주위에서 추사가 만날 수 있는 바늘잎나무는 소나무나 곰솔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잣나무는 제주도에 자라지 않았으며 당시에는 전나무로 알고 있던 구상나무는 한라산 꼭대기 근처에나 있는 나무이다. 지금 제주도에 흔한 삼나무는 일제 강점기 전후에 들어온 나무일 따름이다. 세한도에서 보면 집 앞의 오른쪽 늙은 노목은 껍질이 거북등처럼 갈라지고 비스듬히 자라고 있으며 늘어진 가지 끝의 잎 모양은 짧고 부드러운 맛을 풍긴다. 왼쪽 나무는 나이가 많지 않는 젊은 나무이며 껍질이 세로로 갈라 진 것으로 보이고 줄기도 곧다. 소나무 종류는 노목이 되기 전에는 껍질이 거북등처럼 갈라지지 않는다. 이런 특징들은 모두 소나무와 곰솔이 갖는 형태 특징이다. 즉 소나무는 잎이 부드럽고 짧은 반면 곰솔은 잎이 억세고 길다. 따라서 오른 쪽 노목은 소나무, 왼편의 나무는 잎이 촘촘하고 길며 솔잎을 휘어지게 그렸으나 억센 느낌이 그대로 와 닿으니 곰솔로 짐작해 볼 수 있다. 다음 집 뒤의 두 나무를 생각해 본다. 원근법이 강조된 그림이 아니므로 실경이라면 나무의 실제 크기를 그대로 나타냈다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집 앞 나무 보다는 더 지름이 가늘고 어린 나무로 볼 수 있다. 작게 그려져 나무의 특징을 찾아내기는 어려우나 줄기가 곧으며, 잎 모양은 상하로 직선 처리하여 집 앞의 젊은 소나무보다도 더 억세게 그려져 있다. 가지 뻗음이 수평인 것은 더 어린 나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집 뒤의 두 나무는 모두 곰솔로 볼 수 있다. 세한도가 실경 산수화라고 본다면 그림의 주 구성요소인 4그루의 나무들은 늙은 소나무 한 그루와 3그루의 곰솔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4. 일본 광륭사의 반가사유상
반가사유상은 불상(佛像)의 한 종류로서 돌, 청동, 나무 등의 재료로 만들어진다. 우리나라는 수많은 전란을 겪은 탓에 나무로 만들어진 불상이 거의 사라져버렸다. 고려 나무불상 몇 점과 조선조 때 만들어진 불상이 조금 남아 있는 정도이다. 하지만 사정이 다른 일본에는 나무로 만든 목조(木造) 불상이 많이 남아 있다. 이 중에서 특히 우리나라와 교류가 활발했던 일본 고대국가의 수도, 나라(奈良)와 가까운 교토시의 광륭사(廣隆寺)에는 뛰어난 예술적 가치로 널리 알려진목조반가사유상‘이 있다.
6세기 경에 만들어진 일본의 국보 중의 국보인 이 반가사유상에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나라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추정되기 때문이다. 반가사유상의 얼굴과 전체적인 모습이 우리의 금동미륵반가사유상(국보83호)과 쌍둥이처럼 닮아 있고 수많은 일본의 나무 문화재 중에 재질이 소나무인 유물은 이것 밖에 없다. 그 외 만든 방법이라든가 관련 역사 기록 등이 모두 한반도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일본의 광륭사는 6~7C 경 가와가즈(泰河勝)라는 신라계의 호족이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는 성덕태자와 가까운 관계였다고 한다. 광륭사는 창건 당시부터 두개의 미륵보살상이 모셔져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목조반가사유상(일본 이름은 宝冠弥勒)이고, 또 하나는 보발미륵(宝髻弥勒)이다. 우선 반가사유상의 성격을 구명하는 데 재질의 종류가 중요한 변수이므로 이것부터 알아본다.
재질을 가장 먼저 조사한 학자는 당시 일본 교토대학 조교수였던 소원이랑(小原二郞)이다. 그는 반가사유상은 소나무로 만들었고 보발미륵은 녹나무로 만들었음을 알아냈다.
소나무라는 결과에 너무 놀란 그는 현미경을 붙잡고 여러 번 실험을 반복하고 자료를 찾았다. 그래도 반가사유상이 소나무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다만 현미경 세포검사만으로는 소나무와 바닷가에 자라는 곰솔의 구분이 어렵다. 그가 소나무란 결론을 내린 것은 소나무가 곰솔보다는 재질이 더 좋으며 소나무가 더 많이 쓰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곰솔일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고만 했다. 이 발표는 일본 고대미술사학을 연구하는 모든 학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후 그는 수많은 발굴에 관여하여 출토 유물 중 자연목 소나무를 발견한 적은 있지만 도구로 만들어진 소나무 제품은 찾아내지 못했다. 다만 건축재로써 우리의 동해안 쪽으로 향해 있는 마쯔에시(市)의 신혼신사(神魂神社)가 조선의 건축방식을 본떠서 소나무로 만든 예로 유일했다.
반가사유상이 만들어지던 일본의 아스카시대에는 녹나무가 널리 쓰였다. 그러나 정관시대(貞観時代)를 거쳐 등원중기(藤原中期) 이후가 되면 모두 편백나무로 변한다. 불상에 쓰인 재료의 변화 속에서 반가사유상은 유일한 예외이자 이질적인 존재라고 진단했다. 그가 조사한 750건의 일본 나무 불상 중에 소나무는 오직 반가사유상뿐이었다. 가장 흔히 쓴 나무는 편백나무로서 전체의 약 35%를 차지했고, 비자나무 20%, 계수나무 10%, 느티나무5%, 벚나무4%, 녹나무4% 순이었다. 4%의 녹나무는 대부분 아스카시대에 만들어진 불상이었다.
왜 하필 이 반가사유상만 소나무를 사용하였는가? 이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내놓지 못했다. 나무 재질을 연구하는 학자가 답을 내놓지 못하니 논쟁은 미술사학자한테 넘어갔다.
광륭사 목조반가사유상의 유래에는 보면 두 가지 설이 존재한다. 하나는 일본에서 만들었다는 설이고 하나는 조선에서 가져왔다는 것이다.
우선 일본에서 만들었다는 설은 보발미륵에서 출발한다. 보발미륵은 그 표정이 굳어 있어서 ‘우는 미륵’이라고 하는데, 세련되지 못하고 유치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이것이 조선에서 가져온 원형이고 목조반가사유상은 보발미륵을 원형으로 하여 일본인들이 지금처럼 부드럽고 아름답게 조각했다는 주장이다. 결국 조선에서 가져왔다고 생각되는 보발미륵은 엉성하고 유치했지만 이후 조각기술을 발전시킨 일본에서 부드러운 표현의 목조반가사유상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보발미륵의 재질이 녹나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이론적인 근거에 치명타를 입었다. 왜냐하면 녹나무는 우리나라 본토에 아예 없을 뿐더러 제주도에 있기는 하나 일본이 훨씬 많으니 보발미륵은 일본에서 만든 것으로 밖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가사유상의 일본 제작설이 그대로 잦아든 것은 아니었다. 일본에도 반가사유상 하나를 만들 정도의 소나무는 당시에도 충분히 있었으므로, 재질이 소나무라는 이유만으로 한반도 제작설을 받아들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다른 학설은 반가사유상이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져 일본에 전해졌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황수영 전 동국대 교수는 다음 몇 가지 이유를 밝혔다. 첫째, 일본의 초기 반가사유상을 포함한 불상들은 모두 편백나무를 사용했지만 이 상은 소나무를 쓰고 있다. 일본에도 소나무가 자라지만 우리나라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둘째, 제작기법으로 보아 일본의 초기 반가사유상은 바깥부터 안으로 들어가면서 조각을 하는데, 이 상은 나무의 목심(木心)에서 바깥쪽으로 조각되었다. 셋째, 당시 일본에서는 여러 나무를 합쳐서 하나의 불상을 만들었으나 이 반가사유상은 나무 하나로 제작되었다. 넷째, 《일본서기》나 광륭사 관련 기록에 623년 신라에서 다른 불구(佛具)들과 함께 일본에 불상을 보냈다는 자료가 있다.
한편 한반도 제작설을 수용하는 일본 학자들도 상당수 있는데, 그 이유로서는 목조반가사유상은 아름다운 불상임에는 틀림없지만 표정으로 보아서는 일본인답지 않다고 한다. 또《일본서기》에 백제로부터 추고(推古) 11년(603), 신라로부터는 같은 임금 31년, 각각 일본에 불상이 전해진 기록이 있다.
오늘날 앞에서 설명한 이런 저런 이유로 반가사유상의 제작지 논쟁은 한반도 제작설 쪽에 무게가 실려 있다. 일부 일본학자를 포함하여 많은 학자들은 우리나라에서 만들어 일본에 가져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제작설의 가장 중요한 근거로 흔히 재질이 소나무임을 금과옥조처럼 들고 있는 경우를 흔히 본다.
그러나 재질이 소나무라는 것은 반가사유상의 제작지를 추정하는 참고인자이지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소나무는 우리나라와 일본 모두에서 자라며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지식으로는 우리 소나무인지 일본 소나무인지를 밝혀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5. 왕릉의 관재나무
고분에는 당시의 문화가 모두 집결되어 있다. 가장 아름다운 그림, 가장 세련된 무늬, 가장 고급스러운 옷, 가장 유행한 장신구 등으로 꾸며졌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날에 발견된 대형 무덤들이 왕족이나 귀족들 것인 만큼 예술적인 역량이 총 발휘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화는 늘 유동적이다. 고립된 지역이 아니라면 이웃한 세력과의 끊임없는 교류로 변화 ․ 발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화적 변동은 고분에 들어 있는 유물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즉 고분은 해당 시대의 총체적 문화를 읽을 수 있는 압축 파일이나 마찬가지이다.
고분에 들어 있는 관도 그 파일 중 하나이다. 앞서 무령왕릉의 관을 통해 고대 한일관계를 엿보았는데, 다른 무덤에서 나온 관들도 이에 못지않은 정보를 담고 있다. 여기서는 주로 관재를 통한 고대국가의 교류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 뱃길을 건너왔던 금송에 대한 이야기부터 꺼내본다.
백제 무령왕릉의 금송
1971년 7월 5일, 충남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 도굴꾼의 피해를 전혀 받지 않은 백제 25대 임금 무령왕릉이 ‘처녀분’상태로 발굴된다. 모두 108종 2,906점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수많은 유물 중에는 왕과 왕비의 시신을 감쌌던 11조각의 널빤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발굴 당시부터 시꺼먼 옻칠이 되어 있었고 어쩐지 으스스한 기운을 자아내어 이 나무판자에 관심을 갖는 이가 적었다. 그러나 여기에 백제와 일본의 교류를 밝혀줄 귀중한 증거가 숨어 있었음이 발굴된 지 20여 년 후에야 비로소 밝혀지게 된다.
나무는 저마다 좋아하는 환경이 서로 달라 어느 한정된 지역에만 자라는 특성을 갖는다. 때문에 무슨 나무로 만든 것인지를 알아내는 일은 당시 사람들의 지역간 혹은 국가간의 교역범위를 짐작케 하는 바로미터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가까운 곳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나아가서는 톱, 대패, 자귀 등의 사용 자국을 분석해보면 당시 사용한 쇠의 강도와 함께 쇠를 다룬 기술력도 짐작해볼 수 있다.
무령왕릉에서 나온 관재는 오래되어 옻칠이 된 밑나무가 조금 썩기도 했지만 나무 세포의 기본 모양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발굴이 이루어지고 꼭 20년째인 1991년, 무령왕의 관재 조각을 입수하는 행운을 얻은 필자는 현미경 검사로 일본인들이 자기네들 나라에만 있다고 자랑해 마지않는 금송(金松)임을 알 수 있었다. 이후 1994년, 필자는 공주박물관 지하 수장고에 보관된 무령왕릉의 11개 나무관재 하나하나를 다시 조사하여 금송임을 확인했고 무령왕의 나무 관은 일본 특산 금송으로 만들어졌음을 밝혀냈다. 이 조사 때 유물의 종류는 알 수 없었으나 함께 보관된 작은 나무 조각에서 삼나무가 검출되었다. 삼나무도 금송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만 자라는 나무이다. 건축재, 나무배 등으로 널리 쓰였으며 편백나무와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나무의 하나이다. 일제강점기부터 우리나라에 심기 시작한 나무이니 무령왕릉이 축조될 당시 한반도에 삼나무가 분포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즉 무령왕의 관재는 일본에서 가져온 것임을 다시 확인시켜준 자료였다.
금송은 이름만 보고 금빛 나는 소나무쯤으로 생각하겠지만, 소나무와는 촌수 세기도 어려운 먼 친척일 따름이다. 식물학적으로는 낙우송과(科)의 금송속(屬)으로서 자손이 귀한 집안의 외동아들이다. 세계의 다른 어떤 곳에도 없고 오직 일본열도의 남부지방에만 자란다. 키가 수십 미터에 지름이 두세 아름을 훌쩍 넘치게 자라는 큰 나무이다. 판자를 만들어 놓으면 연한 황갈색을 띠어 고급스럽고 나이테가 살짝 드러나는 은은함이 돋보인다. 잘 썩지도 않으며 특히 습기가 많은 장소에 쓰더라도 오래 견딜 수 있으므로 고급 나무관의 재료로는 최상품이다. 나무통이나 배 만드는 데도 알맞다. 당연히 최고급 목재로써 예부터 일본의 왕궁 기둥을 비롯하여 고급관리나 임금의 관재로 쓰였다.
이 사실은 무령왕과 일본의 관계가 특별하다는 것은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에서 만들었든, 단지 재료만 제공했든지 간에 다른 나라 왕의 시신이 안장될 관재 제작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양국의 관계가 매우 밀접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우리나라와 일본 옛 문헌 어디에도 금송의 수출입에 관한 내용이 없다. 하지만 금송이란 나무의 특성을 과학적으로 들춰보면 짐작은 가능하다.
무령왕릉에서 나온 널빤지 11개를 일일이 조사한 결과, 베어낼 당시 나무 지름은 1백50cm, 나이는 3백년 이상으로 추정되었다. 이 정도의 큰 나무가 자라는 곳은 ‘고우야마끼’라는 금송의 일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일본의 고야산 주변일 것이다. 여기서 베어진 나무는 판자로 켜진 다음 우리나라와 일본을 잇는 옛 뱃길을 따라 백제로 옮겨졌을 것이다. 즉 오사카-시고쿠-후쿠오카를 잇는 좁은 해협을 거쳐 우리나라의 남해안으로 들어온 후 해안선을 타고 금강 하구로 진입해 곰나루(지금의 공주)에 닿는다.
무령왕과 왕비의 나무관은 아름다운 관 덮개가 달린 고급 목관이다. 현재 남아 있는 무령왕과 왕비 관에 쓰인 널빤지는 길이가 2.5m, 너비가 20~60cm, 두께가 6cm다. 이 정도 규모라면 관 하나를 만드는 데 필요한 널빤지는 적어도 10장이 넘는다. 다듬다가 버리는 것과 말리는 과정에서 갈라져 못쓰는 것도 있을 테니 실제로 쓰인 널빤지는 훨씬 더 많다. 왕과 왕비의 관에 필요한 재목은 판자로 따져도 족히 30~40장이 넘는다. 작은 배라면 두 척은 돼야 하고 큰 배라도 한 배 가득 실어야 겨우 실어 나를 수 있는 엄청난 양이다. 현재 옛 국립공주박물관 앞뜰에는 일제강점기에 심은 세 그루의 금송이 단아한 모습으로 자라고 있다. 그들 선조 나무가 백제 중흥의 기수 무령왕의 시신을 감싸고 있었다는 영예로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금은 무엄하게 파헤쳐 전시되고 있는 대왕의 유물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낙랑고분
일제강점기에 발굴된 유적지 중에 낙랑고분이 유명하다. 평양시 낙랑구역은 1,300여 개의 무덤이 넓은 지역에 걸쳐 흩어져 있으며 아직도 북한당국에 의해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최근 그들의 발표에 따르면 무덤 숫자가 2,600여 개에 이른다고 한다. 무덤은 덧널무덤, 벽돌무덤 및 혼합형이 있으며 일부 무덤에서는 목곽이나 목관이 출토되고 있다. 사용된 나무의 종류에 대해서는 1936년과 1993년에 각각 일본인 미중문언(尾中文彦)씨와 필자가 조사한 내용이 있다.
미중 씨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낙랑고분 정박리(貞拍里) 4호 관재는 넓은잎삼나무, 석암리(石巖里) 257호 관재는 주목, 목곽(木槨)재는 둘 다 졸참나무 종류라고 되어 있다. 넓은잎삼나무는 우리나라에 없고 중국 양자강 남부에서 대만에 걸쳐 자라는 나무다. 바늘잎늘푸른나무로서 키는 30~40m 가량, 지름은 두세 아름이 넘는다. 바깥 모양과 재질이 삼나무와 비슷하나 잎이 더 넓어서 광엽삼(廣葉杉)이란 이름이 붙었다. 이 나무는 잘 썩지 않고 비교적 재질이 단단하여 관재를 비롯해서 돛배의 돛대나무로 쓰이기도 했다. 관재로써 사용한 예는 미이라가 출토되어 유명해진 호남성 장사(長沙)의 마왕퇴(馬王堆) 무덤이다. 목관은 가래나무이고 목곽은 이 나무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보아 정박리 4호분의 관재는 넓은잎삼나무가 자라는 양자강 남부에서 수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낙랑고분은 사용된 관재의 일부를 멀리 중국남부에서 직접 가져와 만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역시 고대 동아시아 국가들의 세력과 교역범위를 알려주는 확실한 물증이기 때문이다.
창녕 송현동 고분군 6.7호분의 녹나무 목관
2005년 경남 창녕군 송현동에서 발굴된 6세기 초의 가야고분은 녹나무로 만든 목관을 비롯하여 금제이식 등의 장신구류, 행엽 등의 마구류, 장경호 등의 토기류, 철부 등의 철기류, 기타 칠기류, 목기류 등이 있으며, 토기를 담은 소쿠리 등 약 31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창녕 송현동 고분에서 확인된 목관의 재질은 녹나무로 확인되었는데, 녹나무(Camphor Tree, 樟腦木, クスノキ)는 상록활엽수 교목으로 우리나라의 남해안 지역, 일본에도 분포하나, 그 분포 중심지역은 중국 남부지방이며 높이 30m, 지름 2~5m에 이르는 거목으로 유명하다. 녹나무는 비교적 단단하며, 물속에서 잘 썩지 않으므로 선박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되었다. 목재에는 장뇌향(樟腦香, Camphor)이라는 일종의 방충제를 함유하고 있어 옷장 등 고급가구재 및 의약용으로도 활용되어, 조선시대에는 소나무와 함께 녹나무를 보호하였다. 신안 앞바다에서 인양된 송원대 무역선의 격벽이 녹나무인 것을 확인하였고, 1988년에 발굴된 진도 벽파리 통나무배(직경 2.3m)의 격벽 등은 중국산 녹나무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1921년 9월 경주에서는 금관총이 발견되고 이듬해 발굴에서 옻칠된 목관이 출토되었으며 목곽이 그 주위를 둘러쌌다. 목관은 주목으로 밝혀졌고 목곽은 녹나무였다고 한다. 최근 필자가 98호 고분(1975년 발굴)의 관재를 조사해본 결과 녹나무가 검출되었다. 여기서 목곽과 목관을 만든 녹나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부터 향장(香樟), 예장(豫樟)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이 나무는 주로 배를 만드는 데 쓰였으나 일부에서는 관재로도 이용되었다. 중국 후한시대 유학자 왕부의 《잠부론(潛夫論)》에는 장례를 성대하게 치루는 것을 경계하여 ‘귀족이 강남(양자강 남부)에서 나오는 녹나무를 좋아하기 때문에 아랫사람들도 이것을 배워서 그 풍습이 동으로는 낙랑에서 서쪽은 돈황에 미친다.’는 내용이 있다. 최근 사천성 성도(成都)시에서는 춘추전국시대 때 녹나무로 만든 거대한 배 모양 목관이 대량으로 발견되기도 하였다. 일본에서도 정강(静岡)현에 있는 적문상고분(赤門上古墳)을 위시하여 몇 군데의 관재가 녹나무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경우 녹나무를 사용한 것은 98호분과 금관총이 처음이다.
창녕 고분과 경주의 왕릉에 쓰인 녹나무는 중국 남부, 제주도, 일본 남부의 세 지역 중 어느 곳에서 가져온 수입 나무로 보아야 할 것이다. 지리적으로 가장 가깝고 녹나무 자원도 풍부한 규슈지방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또 당시에는 목불과 배를 비롯하여 일본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가 녹나무였다. 이처럼 가야 및 신라 고분에서 나온 녹나무는 백제 고분에서 나온 금송과 마찬가지로 일본과 관련이 깊다.
6. 건축재 나무
주거의 발달과 나무
사람이 처음 집단생활을 시작할 때는 자연 동굴을 주거공간으로 이용했으나 차츰 그 형태가 인위적인 움막으로 발전했다. 선사시대에 만들어진 구조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움막의 재료가 무엇인지 잘 알 수 없으나, 겨울의 추위가 심한 한반도의 특성상 반지하의 구조가 필요했을 것이다. 바로 수혈식(竪穴式)주거지다. 가장 원시적인 형태는 둥글게 움을 파고 둘레에 서까래를 세워 가운데로 모이도록 만든 원추형 움집이다. 서울 암사동의 4호 집터처럼 바닥의 네 귀퉁이에 한 개씩의 큰 기둥구멍이 있다. 움집들로 벽을 보강하고 서까래를 견고하게 떠받치기 위해 벽체기둥을 세우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쓰인 나무들은 구석기 문화유적지로 유명한 석장리의 경우 참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 소나무 등이었다. 수양개 유적의 경우에는 참나무, 오리나무, 소나무가 출토되었다. 울산 옥현의 청동기 시대 유적에서는 수집 표본의 54%가 참나무였으며 25%가 굴피나무, 느릅나무가 5%, 소나무가 4%의 순이었다. 이런 나무들이 모두 건축재로 쓰였다고 볼 수는 없으나 나무의 성질로 보아서 참나무는 기둥처럼 힘을 많이 받는 구조재로 사용했을 것이다. 그 외의 나무들은 서까래 등의 보조재로 쓰였으리라 짐작된다.
삼국시대가 시작되면서 주거의 위치는 차츰 지상으로 올라오기 시작했고 건축재는 통나무를 그대로 사용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가공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절대권력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왕궁의 건축에는 나무껍질을 벗기고 멋스럽게 다듬는 기술이 필요하다. 이때부터 보급되기 시작한 철기문화와 함께 목재의 가공기술은 급격히 발전했다. 도끼와 톱을 이용한 판자 만들기도 훨씬 손쉽게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의 나무건축물 중 현존하는 것은 없다. 문헌으로 찾아들어가 보면 《삼국사기》에 기록이 있다. 고구려 시조 주몽은 부여를 떠나면서 일곱 모가 난 돌 위의 소나무 기둥 아래(七稜石上松下)에 부러진 칼 한 쪽을 묻어둔다. 훗날 태어난 아들 유리는 자기 집 소나무 기둥 밑에서 부러진 칼 한 쪽을 찾아내어, 아버지가 있는 졸본으로 달려가 주몽을 이어 임금이 된다. 소나무가 건축물의 기둥으로 쓰였다는 최초의 기록이며 그만큼 소나무가 널리 자랐다는 증거이다. 삼국이 정립되던 2천여 년 전, 만주벌판의 고구려 땅에는 이전부터 소나무가 비교적 널리 퍼졌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렇게 만주 벌판에 소나무가 먼저 자리 잡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소나무는 햇볕을 좋아하는 나무다. 자라는 데 햇빛이 들어올 넉넉한 공간이 필요하므로 우거진 숲에서는 크게 번성하지 못한다. 오랜 세월동안 다른 나무들의 등살에 억눌려 살아오던 소나무는 기원전 10세기 전후 북방민족이 남하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숲에 불을 질러 농경지를 넓히고 집짓기와 난방에 필요한 나무를 베어내니, 소나무가 좋아하는 삶의 터전이 확보된 것이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의 땅, 한반도 깊숙한 곳엔 산악지대가 많고 사람의 수가 적어서 숲이 울창한 편이다. 즉 소나무가 잘 자랄 수 있는 넓고 양지바른 곳을 찾기 힘들다. 따라서 넓은잎나무가 주로 산을 점령했으며 이런 증거는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삼국사기》 옥사(屋舍)에 ‘주택 한 변의 길이는 진골 24척, 6두품 21척, 5두품 18척, 4두품 이하는 15척을 넘지 못한다’며 집 크기를 못 박았다. 덧붙여서 집짓는 나무로 5두품 4두품 이하는 ‘느릅나무(山楡木)을 써서는 안 된다’고 아예 나무 종류까지 규제하고 있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귀족들이 집을 지을 때 느릅나무를 널리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운명적 만남이 나온다. 남천에 걸려 있는 느릅나무다리(楡橋)에 원효대사가 일부러 떨어짐으로써 인연이 시작되었다. 시대를 앞서간 신여성 평강공주가 청혼하러 온달 집을 찾아갔을 때, 그는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려 앞산에 올라가 있었다. 이 같은 기록으로 짐작해보건대 한반도에는 느릅나무가 흔했고 고급 기둥나무 등 건축재로 널리 사용되었다. 영명이 elm인 느릅나무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건축재이다. 그 외 참나무와 천마총 관재인 느티나무 등도 널리 쓰인 것으로 보인다.
유적지에서 출토된 신라시대의 나무를 보면 경주박물관 본관 신축부지에서는 소나무, 참나무, 오리나무 등 25종의 나무가 나왔다. 대구 칠곡 아파트 단지에서 발굴된 수중보(洑)는 5~6세기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조사해본 결과 32종류의 나무가 발견되었다. 이 중 참나무가 30%, 오리나무가 18%. 버드나무가 12%의 순이었으며 느릅나무와 소나무도 3%씩 차지했다. 신라시대 대구 근교의 산에는 대부분 넓은잎나무가 번성해서 바늘잎나무인 소나무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낮았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건축재를 짐작할 만한 자료는 매우 부족하지만 익산 미륵사지와 궁남지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미륵사지에서는 바늘잎나무로써 소나무와 금송이 보였고 넓은잎나무로써는 밤나무, 가래나무, 버드나무, 뽕나무, 오리나무 등이 발견되었다. 궁남지에서는 느티나무, 참나무, 밤나무, 소나무 등이 출토되었다. 한편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의자왕 19년(659) ‘대궐 뜰에 있는 느티나무(槐木)가 사람이 곡하는 소리처럼 울었다’고 되어 있는데 궁궐에 느티나무가 많았음을 설명해주는 부분이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나무는 미륵사지에서 나온 금송이다. 작은 토막형태로 남아 있어서 추정이 어려우나 출토된 위치로 보아서 관재가 아님은 분명하다. 금송의 원산지인 일본의 경우, 조각재나 기구재로 쓰이는 예는 드물고 주로 건축재나 관재로 이용했다. 따라서 미륵사지 출토 금송은 건축재, 그 중에도 기둥나무일 가능성이 높다. 부여 능산리에서 나온 비자나무 역시 관재뿐만 아니라 건축재로 쓰였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수입재 금송과 남해안에서 자라는 비자나무는 아무래도 왕족이나 고급귀족들의 나무였을 테고 느티나무와 밤나무, 참나무 등은 일반 백성들이 사용했으리라 짐작된다.
고려시대로 접어들면서 삼국시대 때 쓰이던 나무와는 종류가 달라진다. 평안도에서 전라도를 잇는 한반도 서부 지역은 정치무대의 중심이 되었고 인구밀도가 높아지면서 급격히 산림이 파괴되었다. 가까운 산에 소나무가 많아지니 당연히 그 사용 빈도가 점점 높아졌다. 그러나 소나무 외에는 모두 잡목으로 취급하던 조선시대 이전이라서 소나무에만 의존하지는 않았다. 고려 초 화물선 완도배의 밑바닥에 비자나무와 참나무까지 쓰고 있는 예가 이를 증명한다.
몽고란을 거쳐 고려 후기로 오면서 주위에는 점점 소나무가 많아 졌다. 삼국시대 때 건축재로 쓰던 느릅나무, 느티나무, 참나무 등이 차츰 소나무로 바뀌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부근에는 소나무 외에 건축재로 쓸 만한 나무가 없었다. 그러나 깊은 산 속에 있는 사찰 건물만은 소나무보다 훨씬 오래 쓸 수 있고 주변에 풍부하게 자라는 느티나무나 참나무를 주로 이용했다.
조선시대로 들어오면서 강력하게 소나무 보호가 시작되었다. 새 왕조의 개창과 더불어 수도 건설과 새로운 권력자들의 건축물, 지방관서 건물 신축 등 건축재의 수요가 급증한다. 아울러서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남해안을 휩쓸고 다니는 왜구를 격퇴하기 위해 많은 배가 만들어졌는데, 이에 쓰인 나무도 만만찮았다. 몽고란 이후 지속된 산림 파괴로 인해 벌채하여 쓸 수 있는 나무는 소나무 외엔 거의 없었다. 자연히 소나무마저 차츰 줄어들게 되었다.
실록을 보면, 세조 7년(1461) 병조에서 소나무의 벌목을 금할 것을 건의하는 내용이 있다.
‘송목금벌(松木禁伐) 법은 엄하지만 관리 소홀로 배를 만드는 재목조차도 다 없어졌습니다. 청컨대 지금부터는 나라에서 쓰는 것을 제외하고는 관가나 양반 집에서는 배를 만들 수 없는 소나무만을 쓰게 하고, 백성들은 잡목을 쓰게 하소서’
조선 초기의 소나무 보호정책과 현황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기록이다. 이후 《경국대전》에도 소나무 보호정책을 강력히 추진했으나 소나무는 점점 고갈되어 갔다.
조선 초기 건물로 알려져 있는 해인사 고려대장경판 수다라장 장경전은 기둥 48개 중 느티나무가 22개, 참나무가 2개이고 나머지는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이다. 법보전은 47개가 느티나무, 1개가 잣나무이다. 강진 무위사 대웅전 기둥도 소나무와 단풍나무가 섞여있다. 조선 중후기로 내려와서도 사찰 기둥에는 소나무, 느티나무, 참나무, 전나무 등이 두루 쓰였다. 반면에 궁궐이나 관아의 건축물에 대부분 소나무가 쓰이면서 소나무는 최고의 나무로, 나머지 나무는 잡목으로 인식되었다.
왕실 건축과 배 만드는 데 들어가는 소나무를 특별히 보호하기 위해 전국 2백여 곳에 봉산(封山)이라는 소나무 특별보호구역을 만들고 벌목을 엄격히 규제했다. 그래도 수효에 비해 소나무 공급이 늘 부족했고, 조선조 말에 이르면 깊은 산골 외에 쓸 만한 소나무가 남지 않게 되었다. 그나마 한강 수계(水系)로 운반이 불가능했던 울진 ․ 봉화 지역의 소나무들은 오늘날까지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의 산을 둘러보면 온통 소나무이고 국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도 역시 소나무다. 주거문화라는 영역뿐만 아니라 삶의 전체를 대표하는 문화에 나무를 넣어본다면 우리 나무문화는 주저 없이 소나무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우리와 소나무의 길고도 질긴 인연을 고려해볼 때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삼국시대에서 고려로 이어진 우리 역사의 중반기에는 참나무와 느릅나무, 느티나무가 소나무 못지않게 선조들의 삶 깊숙이 들어와 있었음을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