잣나무와 목조문화재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박상진
잣나무는 멀리 신라민정문서에 최초의 조림수종으로 기록될 만큼 우리에게 친숙한 수종이다. 당연히 우리의 선조들의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을 것으로 생각되나 잣을 식용으로 이용하였다는 여러 기록이외는 목조문화재의 재료로서 쓰임은 그렇게 많지 않다. 우리의 옛 문헌에서 잣나무의 위상을 찾아보고 실제 목질유물에서 검출된 잣나무를 알아본다.
문헌으로 만나는 잣나무
잣나무의 한자 이름은 백(栢,柏)이다. <논어>의 자한편에는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 즉‘추운 겨울(歲寒)이 되어야 송백(松柏)의 굳은 절개를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이때의 송백을 흔히 소나무와 잣나무로 번역한다. 그러나 중국의 옛 문헌에 나오는 송백은 소나무와 잣나무로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잣나무는 공자님의 활동무대가 된 사천성은 물론 중국문화의 발상지 황하나 양자강 유역 등 중국본토에는 자라지 않는 나무로 알고 있어서다. 따라서<시경(詩經)> ‘용풍(鄘風)’에 나오는 “백주(栢舟)”를 흔히 잣나무 배라고 번역하나 실제는 측백나무로 만든 배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이렇게 잣나무의 한자 표기는 이유는 확실하지 않으나 처음부터 측백나무와 뒤섞여 사용되었다. 우리 문헌에서 잣나무의 찾아내는 일은 우선 앞 뒤 문맥으로 측백나무가 아닌지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가 흔히 쓰는 잣나무의 별칭 홍송(紅松)이란 이름은 <선만식물자휘>에 중국에서 부르는 이름이라 했다. 하지만 우리의 4대 사서(史書)를 비롯한 <산림경제>, <훈몽자회>, <물명고>등에는 홍송이란 이름은 찾을 수 없다.
잣나무가 첫 등장하는 문헌은<삼국유사>이다. “신라 효성왕(737~742)이 아직 왕이 되기 전에 어진 선비 신충(信忠)과 함께 대궐 잣나무 밑에서 바둑을 두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는 대궐 안에 상당히 큰 잣나무가 자라고 있었다는 증거이며 쉼터나무로 활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효성왕의 다음 임금인 경덕왕 14년(755)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신라민정문서〉에 잣나무를 인공적으로 심은 것으로 짐작되는 내용이 실려 있다. 민정문서는 1933년 6월 일본 동대사(東大寺)의 유물저장창고인 정창원(正倉院)의 문서 정리과정 중에 발견되었다. 오늘날의 충청도 청주지방으로 추정되는 마을의 실태를 상세히 기록한 내용으로서 세금부과를 위한 목적이라고 한다. 잣나무는 이전부터 자라고 있었던 주수(株數)와 새로 심은 주수를 따로 기록하여 두었다. 바로 최초의 인공조림 기록인 것이다. 이후 <고려사>에는 고종 21년(1234) 진양후(晉陽侯) 최이는 자택을 신축하면서 엄동설한에 산에서 잣나무를 캐다가 후원에 심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수많은 잣나무의 기록을 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지는 일부 내용을 보면 태종 11년(1411), 성석린이 남산에다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자고 건의하였다. 잣나무는 공공건물에도 많이 심었다. 중종 21년(1527)에는 성균관 명륜당 뜰에 있는 잣나무가 벼락을 맞는 변이 있었으나 예조에만 보고하고 임금께 보고하지 않았다고 해당 관리가 벌을 받았는데, 삼정승에게 의견을 물어 벼락 맞은 나무에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세종 31년(1449) 효행이 널리 알려진 함경도의 김득인(金得仁)은 그 아비가 죽게 되어서 잣나무를 얻어다 관을 만들어 장사지냈다 하였으며, 선조 26년(1593)에는 임진왜란에 참전한 명나라 장수 셋이 총을 맞아 병세가 위중할 때 모두 잣나무로 짠 관에 시신을 넣어달라고 부탁한 기록이 있다.
잣을 따기 위하여 출입을 통제한 내용도 있다. 명종 14년(1559) 안동 봉정사 근처의 잣은 다른 곳에 비하여 품질이 좋아 해마다의 진상품으로 쓰이므로 특별히 보호하여야 한다는 건의가 있었다.
목조문화재에서 실제로 만나는 잣나무
송백이란 이름으로 선조들의 옛 문헌에서 비교적 쉽게 만날 수 있는 잣나무지만 남아 있는 우리 목조문화재에서 재질이 잣나무인 경우는 소나무에 비하여 그렇게 많지 않다. 잣나무로 만들어진 유물로서 가장 오래된 것은 삼국초기(원삼국)에 조성된 유구(遺構)로 알려진 경북 경산시의 임당동유적이다. 고분군(古墳群)과 생활유적이 함께 있었으며, 잣나무는 피장자의 신분이 알려지지 않은 고분의 목관재로 사용되었다. 이곳의 관재는 잣나무 외에도 느티나무, 산뽕나무, 밤나무 등의 여러 수종이 알려지고 있다. 한편 같은 시대의 관재로서는 느티나무(천마총), 상수리나무(의창 다호리), 굴피나무(화순 대곡리)등 주로 활엽수가 이용된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러나 후대의 기록에 잣나무를 관재를 선호한 예가 여럿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잣나무를 특별히 관재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건물의 기둥에서 잣나무를 만날 수 있다. 수다라장의 기둥 48개 중 느티나무 21개(43%), 잣나무 13개(28%), 젓나무 5개(10%), 소나무 7개(14%), 상수리나무 2개(5%)로서 느티나무 다음으로 많은 잣나무가 기둥으로 사용되었다. 또 사간판(寺刊板)을 보관하고 있는 서사간장의 기둥 6개중 1개가 잣나무이다. 그러나 수다라장과 마찬가지로 팔만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또 다른 건물인 법보전의 기둥 48개는 모두 느티나무이다. 수다라장과 법보전의 건조 년대에 대한 여러 논란이 있으나, 두 건물 모두 필자의 추정은 팔만대장경을 새길 당시인 고려 중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며 처음에는 기둥이 모두 느티나무이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법보전은 당시의 기둥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으로 짐작되나, 수다라장은 조선 성종 18년(1486) 및 광해군 14년(1622)의 왕조실록 기록을 비롯하여 여러 번의 수리가 있었다. 이를 미루어 볼 때 잣나무는 조선 중후기의 수리 당시에 보수용으로 일부 들어간 것으로 추정한다.
한편 팔만대장경판의 양쪽 끝에는 인쇄의 편의와 보관 중에 판이 서로 맞닿지 않도록 경판보다 두꺼운 각재로 마구리를 만들어 두었다. 마구리를 만든 나무는 대체로 경판을 만든 나무인 산벚나무나 돌배나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일부 경판의 마구리는 잣나무로 만들었다.
조선왕조로 들어와서는 완주 화암사 극락전에서 2점, 영천 향교 대성전에서 4점, 법주사 대웅전에서 1점, 서울 종묘정전에서 1점, 김제 귀신사에서 1점, 밀양 영남루 능파당에서 4점의 잣나무가 검출되었다. 이상의 결과는 기둥을 포함한 서까래와 기타 건축부재에서 조사한 결과이며 모두 조선중기의 건물이다. 잣나무가 이렇게 극소량 이용된 것은 소나무나 다른 나무가 구하기 어려워 보충재로서 일부 이용된 것으로 짐작한다. 근세의 건물로서는 조계사 대웅전에서 36점의 잣나무가 검출되어 소나무 24점 보다 훨씬 많은 잣나무를 이용하였다. 이 조선후기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급격한 소나무 자원의 감소로 소나무를 쓸 수 없어서 잣나무를 대용재로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잣나무의 재질
잣나무는 소나무와 달리 춘재에서 추재로의 이행이 점진적이며, 변재가 황백색이고 심재는 붉은 기가 강한 홍갈색으로서 심변재가 비교적 명확하다. 대패질한 판자의 표면은 약간의 윤택이 있고 육안으로도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실제로 잣나무 등 주요 수종의 물리적 성질을 측정한 자료를 보면 표1과 같다.
수종 |
기건비중 |
강도(kg/cm2) |
비고 |
휨강도 |
압축강도 |
전단강도 |
잣나무 |
0.48 |
770 |
430 |
95 |
|
소나무 |
0.50 |
890 |
480 |
101 |
|
젓나무 |
0.39 |
580 |
410 |
76 |
|
상수리나무 |
0.84 |
1,480 |
530 |
142 |
|
느티나무 |
0.74 |
880 |
500 |
130 |
|
표1에서처럼 잣나무는 젓나무에 비하여는 물리적 성질이 더 좋으나 소나무보다는 다소 떨어지고 상수리나무나 느티나무등 활엽수에 비하여는 훨씬 못하다. 이런 나무의 특성은 기둥 등 건축재로서의 이용에 제한이 되었으리라 생각되며, 다른 생활용구의 재료로서도 소나무에 미치지 못한다.
결론
옛사람들의 잣나무 쓰임은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조경수로서 궁궐이나 집안에 심어두고 아름다운 수형과 사철 푸름을 즐기는 쓰임이다. 최이의 자택 신축에 잣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에서 조경수로 쓰임을 확인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잣을 식용으로 하기 위함이다. 멀리 신라 때부터 잣은 고급식품으로서 당나라에 가는 유학생들이 가져갈 정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잣나무는 조경수인 동시에 식용 종자채취를 위하여 정원이나 가까운 산에 심은 것으로 보인다.
세 번째는 관재나 건축재로 쓰임이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나 실제로 조사된 목조문화재에서도 잣나무 부재가 확인된다. 건축재의 쓰임으로 본다면 소나무를 비롯한 다른 수종처럼 널리 쓰이지는 않았다. 이는 나무의 재질이 소나무보다는 떨어지고 쓸 수 있는 자원이 충분하지 않았던 탓으로 짐작된다. 결국 잣나무는 관재나 건축재의 주수종이 아니라 부족할 때 보충재 혹은 대용재로서 주로 이용된 것으로 생각한다.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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