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륙에 사는 사람들에게 바다는 언제나 낭만적이다. 크고 작은 섬들이 점점이 떠 있는 남해바다, 그 남서쪽에 보길도란 섬이 있다. 가는 길은 만만치 않다. 해남 땅끝마을이나 완도 화흥포에서 들어갈 수 있는데, 두 곳 다 서울서 430km나 된다. 카페리에 자동차를 싣고 뱃길로 30분 남짓이면 노화도 산양항이나 동천항에 닿는다. 다시 자동차로 보길대교를 건너 30분쯤 더 가면 섬의 동남쪽 바닷가 마을이 예송리다. 숲은 마을 앞 바닷가를 따라 초승달 모양을 이루고 있다. 숲의 앞쪽으로는 몽돌 해수욕장이다. 흔하디흔한 모래사장이 펼쳐진 평범한 해수욕장이 아니다. 몽돌이란 귀퉁이가 다 닳아서 동글동글 해 진 돌을 일컫는다. 콩알.밤알 크기에서 아이 주먹만 한 것 까지 섞여있지만 자잘한 몽돌이 더 많다. 그래서 발바닥을 간질이는 촉감은, 크고 작은 머릿속의 번민을 모두 훑어 내려가 버린다. 마른 몽돌은 잿빛이었다가 파도가 한번 씻어주면 까매진다. 마치 반짝이는 흑진주를 보고 있는 듯하다.
숲은 길이 700여m, 폭 30m의 긴 띠를 이루면서 여러 종류의 늘 푸른 넓은잎나무(상록수)를 품안에 고이 담고 있다. 황해의 억센 바닷바람으로부터 마을과 농경지를 보호하기 위하여 가꾸어 온 숲이다. 바닷물은 바람이 휘몰아 쳐 뽀얀 물보라가 되어도 여전히 소금기를 머금고 있다. 농사를 짓기 위하여 물보라를 꼭 막아줘야 한다. 막대한 인력과 비용이 드는 제방보다 숲이 가장 효과적이다. 그것도 사시사철 울창한 푸른 잎을 달고 있는 상록수 숲이 더 좋다. 뿐만 아니다. 숲으로 드리워지는 그늘과 풍부한 유기물은 물고기가 모여들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기능도 함께 갖는다. 처음 섬에 들어온 사람들이 개간하여 농경지를 만들 때도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숲으로 남겨 놓은 것이다.
숲의 나이는 350여년이다. 조선 18대 임금 현종(1660∼1674) 때에 장흥 마씨가 처음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이어서 해남 윤씨, 김해 김씨, 밀양 박씨 등이 이사와 마을을 이루었다. 그렇다면 그전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는가?. 우리나라의 남서해안 섬들은 일본의 도적떼(왜구)들의 침략으로 조선초기에는 섬을 아예 비워버리는 공도空島 정책을 흔히 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라가 피폐해저 먹고 살기가 어려워지자 차츰 사람들이 들어가 살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 날 이 숲을 바라보는 마음은 편치 않다. 이름과 달리 늘 푸른 넓은 잎을 가진 난대 숲의 상록수보다 침엽수 곰솔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다. 안쪽으로 들어가야 이름도 생소한 난대 숲의 대표인 늘 푸른 넓은잎나무들을 만날 수 있다. 생달나무가 가장 흔하며, 구실잣밤나무, 가시나무, 참식나무, 후박나무 등이 상층부를 이룬다. 조금 작은 나무로는 까마귀쪽나무, 동백나무, 돈나무가 자라며 덩굴나무로는 보리밥나무, 송악이 있다. 곰솔이 더 많아지는 이유는 오랜 세월 동안 태풍 등 자연재해로 막대한 피해를 입기도 했지만 몰지각한 사람들의 탓이 더 크다. 90년대 이후 레저 붐이 불면서 보길도라고 조용할 리가 없다. 여름이면 하루에 수백 대의 자가용들이 섬에 몰려든다. 대부분 이곳 상록수 숲 앞 몽돌 해수욕장에 몰려든다. 몰지각한 사람들은 담장을 넘어 숲 속에 들락거린다. 난대 숲 원래의 나무들은 자꾸자꾸 줄어들고 생명력 강한 곰솔만 불어나는 것이다. 특별한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이 상록수림은 오래지 않아 사라질 것 같아 이 순간에도 안타까움이 앞선다. 이 숲은 일제강점기인 1936년 벌써 ‘예송리 상록수림’이란 이름으로 천연기념물 40호란 영예를 앉았다. 당시에는 한 아름이 넘는 나무를 비롯하여 지름 한 뼘 정도에 높이 10m전후의 상록수 약 500그루 정도 들어차 있었다고 한다.
보길도는 예송리 뿐만 아니라 섬 전체가 온갖 상록수가 자라는 난대 숲의 보물섬이다. 제주도를 가야 만날 수 있는 나무들을 거의 대부분 여기서도 자란다. 조선 중기의 문신 고산 윤선도는 51세가 되던 인조 15년(1637) 제주도로 귀양 가는 길에 처음 이 섬을 만난다. 고향은 해남이지만 주로 서울에서 생활한 그는 상록수로 우거진 보길도의 풍광에 반하여 아예 정착해 버린다. 귀양지를 이렇게 마음대로 바꿔도 되는지? 일부계층에 한정될 뿐이지만 이렇게 멋과 풍류가 용서되던 시절이 세삼 그립기도 하다. 그는 세연정이란 연못이 딸린 정자를 세우고 만년을 보낸다. 여기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어부의 생활을 노래한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지었다고 한다. 세연정 일대는 오늘날 조선시대 대표적인 정원으로서 보길도의 대표 명소다.
숲과 나무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보길도에서 또 꼭 찾아가볼 곳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황칠나무 고목 한 그루다. 일주도로를 타고 세연정에서 서쪽으로 4km쯤에 정자리란 마을이 있다. 마을 뒷산 늘 푸른 나무로 이루어진 숲속에 아래부터 V자로 갈라져 자라는 황칠나무 한 그루가 찾아간 나그네를 덤덤히 맞는다. 나무는 높이 15m, 밑동둘레 180cm로서 한 아름 남짓이다. 나이 100~150년 정도에 불과하여 네댓 아름에 수백 년 나이의 다른 고목나무와 비교하여 실망할지 모른다. 원래 황칠나무는 이 보다 더 크게 자랄 수 있으며 더 큰 나무도 있었을 터이나 대부분 잘려 나가 버렸다. 남아있는 나무 중에는 규모가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다. 황칠나무는 남쪽의 난대 숲에만 자란다. 나무진을 뽑아 황금색의 귀한 전통 칠을 할 수 있다. 조선시대 관리들의 수탈이 심하여 백성들이 황칠나무를 몰래 없애버리는 바람에 한 때 전통 황칠의 맥이 끊겼다가 최근에야 복원되고 있다.
찾아가려면…
예송리 상록수 숲 : 전남 완도군 보길면 예송리 220
황칠나무 천연기념물 : 전남 완도군 보길면 정자리 산115-7
가는 길 : 카페리 완도 화흥포항-노화도 동천항, 자동차 보길대교-예송리
카페리 해남 땅끝 항-노화도 동천항, 자동차 보길대교-예송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