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의 자연은 온통 초록천지다. 너무 단조로워 꽃 피는 봄날과 단풍 드는 가을날 만나는 자연색의 변화무상함이 그리워지는 계절이도 하다. 이를 즈음 화려한 꽃으로 초록세상에 악센트를 주는 배롱나무가 등장한다. 배롱나무는 화무십일홍이란 말처럼 열흘 남짓 피었다가 저버리는 보통 꽃나무가 아니다. 7월 중순에 시작하면 9월까지 이어진다. 거의 백일에 걸쳐 핀다하여 ‘백일홍百日紅나무’라고 하다가 ‘배기롱나무’를 거쳐 배롱나무란 이름이 생겼다. 전국에 명소도 많다. 경주 서출지, 안동 병산서원, 강릉 오죽헌, 고창 선운사, 강진 백련사 등 특히 옛 양반들의 문화유적지나 사찰에서 흔히 만날 수 있다. 오늘은 이들 중 우리나라 제일의 배롱나무 숲으로 알려진 담양 후산리 명옥헌鳴玉軒을 찾아가 본다. 문화재청이 명승 제58호로 지정한 국가 문화재다.
이곳은 조선 중기의 문신 오희도(1583∼1624)선생이 살던 곳이다. 그는 마흔 살에 늦깎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원의 기주관記注官이 되었으나 1년 만에 병사해 버린다. 안타깝게 생각하던 넷째 아들 오명중은 1652년 무렵 이 터에다 명옥헌(鳴玉軒)을 짓고 아버지의 뜻을 기린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에 팔작지붕으로 자그마한 선비의 쉼터이며 수양처다. 계곡사이로 물이 흐를 때에 옥구슬이 부딪치는 소리가 난다고 하여 명옥헌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건물의 앞뒤로 연못을 팠으며, 아래 연못은 동서 20m, 남북 40m의 사각 형상이고 안에는 동그란 섬을 하나 만들었다. 연못 주변에는 배롱나무 수십 그루를 심어 굵은 것은 거의 한 아름에 이른다. 세월이 지나면서 죽은 나무는 새로 심기도 했을 터이나 한 두 그루는 350여 년 전의 그때 그 나무로 보인다. 정자에 앉아 활짝 핀 이곳 배롱나무 꽃의 고아한 정취를 조용히 감상하다 보면 후덥지근한 여름날의 답답함은 금방 날려준다. 뭉실뭉실 모여 피는 배롱나무 꽃이 연못에 비춰지고 하늘에 뭉게구름이라도 떠 있다면 더 환상적이다. 꽃잎이 떨어져 연못을 살짝 덮을 때는 하늘과 땅이 온통 꽃 천지가 된다. 옛 선비들도 이런 모습에 취하여 배롱나무를 심고 가꾸었을 터이다. 배롱나무는 중국에서 들어온 꽃나무이며 그들 이름은 자미화紫微花다. 연한 보라색에서 붉은 색이 많이 들어간 적자색까지 꽃 색깔의 범위가 넓다. 이곳 배롱나무 꽃은 진한 적자색이라 더 붉고 깔끔해 보인다. 줄기의 표면은 연한 붉은 기가 들어간 갈색이고 얇은 조각으로 떨어지면서 얼룩무늬가 생겨 반질반질해 보인다. 또 다른 이름은 간지럼나무다. 간질이면 나뭇가지가 움직인다는 속설도 있으나 착각일 뿐이다. 기록으로 배롱나무가 등장하는 것은 고려중기의 문신 최자가 지은 ‘보한집’이다. 대체로 이 시대 때쯤부터 우리나라는 배롱나무 심기를 즐겨한 듯하다. 그러나 배롱나무는 자랄 수 있는 북쪽 한계가 있다. 강희안의 양화소록에 ‘서울의 벼슬아치 집안에 이 꽃이 여럿 보이더니 근래 대부분 얼어 죽었다’고 하였다. 원래 고향이 중국 남부라 추위를 싫어한 탓이다. 물론 지금은 기후 온난화의 영향으로 서울에서도 잘 자란다.
배롱나무는 명옥헌 뿐만 아니라 부근에도 많이 심고 가꾸었다. 명옥헌 서쪽을 흐르는 개울이 증암천인데, 광주천이라고도 하며 옛 이름은 자미탄紫薇灘이다. 배롱나무 개울이란 뜻이다. 개울을 따라 좌우로 배롱나무가 줄줄이 자라 물속에 꽃 그림자가 비춰지는가하면 떨어진 꽃잎 들이 개울을 물들였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 가사 문학의 대가인 송강 정철을 비롯한 수많은 선비들이 소쇄원, 식영정, 환벽당, 취가정, 독수정 등의 정자를 짓고 배롱나무를 심어 가꾸면서 아름다움을 노래했기 때문이다. 송강 정철도 배롱나무 꽃을 얼마나 좋아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시 한 수가 있다. 1582년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때 사랑했던 남원 기생의 이름이 자미였다. 그는 ‘영자미화(詠紫薇花)’란 시를 지어 주었다. ‘동산에 자미화가 활짝 피니 봄날 같구나/예쁜 얼굴이 옥비녀보다 더 곱네/망루에 올라 장안을 둘러보지 마라/거리에 가득한 사람들 모두 네 고움을 사랑하리니’. 증암천 주변에는 한때 선비들의 정자가 72채가 됐다고 한다. 1976년 증암천에 광주호를 막으면서 옛 정취는 많이 가셨지만, 정자마다 배롱나무 고목 한 두 그루씩은 아직도 살아남아 아쉬움을 달래준다.
명옥헌을 찾았다면 바로 옆 5분 거리에 있는 후산리 은행나무 고목도 잊지 말아야 한다. 조선 16대 임금 인조(1623~49)는 광해군을 쫓아내고 임금이 된다. 그가 왕위에 오르기 전의 능양군 시절에 호남지방을 두로 돌면서 민심을 살피고 지지 세력을 모을 때, 이 일대의 지방유지인 오희도선생을 만나러 왔다고 한다. 그때 인조가 타고 온 말을 이 은행나무에 매어 두었다고 하여 다른 이름은 ‘인조대왕의 계마행(繫馬杏)’이다. 원래는 은행나무와 함께 명옥헌 뒤에는 오동나무 고목도 한 그루 더 있었는데 죽어 버렸고 지금은 은행나무만이 남아 있다. 은행나무는 높이 약 30m, 둘레 네 아름이 조금 넘는다. 나이는 약 500년에 이르고 아직도 은행이 주렁주렁 달리는 암나무다.
찾아가려면…
명옥헌 배롱나무 숲 : 전남 담양군 고서면 산덕리 513
후산리 은행나무 : 전남 담양군 고서면 산덕리 485-1
가는 길 : 호남고속도로 창평 IC에서 2km쯤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