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동구릉東九陵은 이름 그대로 서울의 동쪽에 있는 아홉 기基의 조선시대 왕릉이다. 조선 왕릉은 42기나 되는 데, 주로 서울과 근교의 경기도에 있으면서 주위를 에워싼 숲이 잘 보존되어 경관이 빼어나고 찾아가기가 편리하여 휴식 공간으로서 사랑을 받는다. 동구릉은 전체 조선 왕릉 중에 맏형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을 비롯하여 5대 문종, 14대 선조, 18대 현종, 24대 헌종, 추존왕인 익종(문조) 등 9기가 모여 있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집단 왕릉이다. 각 왕릉들은 적당한 간격을 두고 야산 자락을 따라 말발굽 모양으로 배열되어 있다. 동구릉은 1408년 처음 건원릉을 만든 이후 50~100년 간격으로 조선 말기까지 계속 왕릉이 들어선 셈이다. 이 일대는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좌청룡 우백호’의 지형을 갖춘 최고의 명당이라고 알려져 있어서다.
동구릉은 면적이 1,969,675㎡로서 축구장 275개 넓이에 이른다. 일반 참배객들이 둘러 볼 수 있는 길은 능 앞으로 연결된 널찍한 답사로 이다. 소나무가 가장 흔히 눈에 띄나 실제 조사를 해보면 갈참나무를 비롯한 참나무 종류가 가장 많고 잣나무, 전나무, 오리나무, 물푸레나무, 팥배나무, 서어나무, 산벚나무, 버드나무, 쪽동백나무 등 100여종 이상의 나무를 만날 수 있다.
왕릉의 둘레는 온통 소나무로 채워진다. 예부터 이런 무덤 주위에 심은 소나무를 도래솔이라 한다. ‘둘레소나무’ 가 변하여 된 말이다. 역사책 《삼국사기》에 도래솔에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나 있다. 고구려 9대 고국천왕은 대를 이을 아들 없이 죽자, 왕비 우씨는 시동생을 도와 10대 산상왕으로 만든다. 그녀는 바로 산상왕에게 개가하여 또 왕비가 되었다. 우리 역사상 유일하게 우씨는 왕비를 두 번 한 셈이다. 세월이 흘러 우씨가 죽으면서 먼저 간 산상왕 옆에 묻어 달라고 유언한다. 그런데 엉뚱하게 전 남편 고국천왕의 혼백이 하늘에서 내려와 우씨의 혼백에게 자기 곁으로 오라고 ‘딴지’를 걸어 다툼이 생긴다. 개가해버린 아내가 첫 번째 남편의 연고권 주장을 들어 줄 리가 없다. 살아서도 아니고 혼백이니 더 더욱 그러하다. 할 수 없이 고국천왕은 자기 무덤 주위에다 7겹으로 소나무를 심어 달라고 부탁한다. 아예 험한 꼴을 안보겠다는 선택이다. 이후 우리의 무덤 주위에는 도래솔을 심게 되었다고 한다. 도래솔은 한번 눈감아버린 풍진 세상의 좋은 일이던 나쁜 일이던 모두 잊어버리고 편히 쉬시라는 후손들의 뜻이 서려있다. 개인 무덤의 도래솔은 대체로 홑겹이나 동구릉 왕릉마다 도래솔은 수십 겹으로 숲이 되어 있다. 이는 혹시라도 죽은 왕의 혼백이 살아있는 왕의 권력에 ‘감나라 배나라’ 할까 봐 아예 꽁꽁 묶어두는 조치라고도 생각된다.
도래솔로 소나무를 주로 심은 데는 이유가 있다. 먼저 왕릉이나 일반 무덤은 야산의 약간 경사진 곳에 만들므로 건조한 땅에도 잘 자라며 뿌리도 깊이 들어가 바람에 잘 넘어지지 않는다. 또 소나무는 늘 푸른 나무로 변치 않은 절개를 상징하고 십장생의 하나로 여길 만큼 오래 산다. 그 외 소나무는 햇빛을 좋아하는 양陽의 나무이므로 능 주위의 음陰과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란 생각도 했다는 것이다.
동구릉 숲길은 탐방에서 첫 번째 만나는 능이 수릉이다. 그 앞 저습지에 특히 오리나무가 많다. 《승정원일기》에는 ‘고종 29년(1892) 소나무, 전나무, 버드나무와 함께 오리나무 59주를 심었다’는 기록도 나온다. 특별히 오리나무를 심은 뜻은 무엇인가?. 습한 땅에 잘 자라기도 하겠으나 남녀의 사랑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오리나무는 한 나무에 암꽃과 수꽃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 달리며 채 봄이 오기 전부터 꽃을 피우는 부지런함이 있으니, 부부가 오랫동안 행복하게 같이 살라는 상징성을 부여할 수 있다. 전통혼례식 때 전안례奠雁禮를 위하여 신랑이 가지고 가는 나무 기러기도 흔히 오리나무로 만든다. 작년 가을 KBS 2TV로 방영된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박보검은 효명세자로, 채수빈은 훗날 신정왕후가 된 세자빈으로 연기했다. 효명세자는 23살의 꽃다운 나이에 죽어버리고 홀로 남은 신정왕후는 수많은 격동의 세월을 잘 넘겨, 고종을 임금으로 만들면서 조선말기 최고의 실세 여인이 된다. 그녀가 죽자 고종은 효명세자에게 익종이란 추존追尊 임금을 만들고, 당당히 왕릉의 반열에 올려 묻힌 곳이 바로 수릉이다. 두 분이 저승에 가서나마 오리나무 꽃처럼 가까이서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내기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능 앞에다 특별히 오리나무를 많이 심지 않았나 싶다.
수릉을 지나 더 올라가면 가장 깊은 곳에는 조선의 첫 임금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이 있다. 입구의 한 아름반이나 되는 곧게 자란 소나무와 주위의 소나무 대여섯 그루는 마치 이성계가 부하 장수들을 데리고 곧 출전할 것만 같다. 건원릉이라고 다른 왕릉보다 특별히 크게 만든 것도 아니지만 눈에 띄는 것은 무덤의 잔디이다. 자세히 보면 잔디가 아니라 억새이다. 태조 이성계는 고향을 항상 그리워하여 함경도 함흥에 묻히기를 원했다. 그러나 왕릉을 멀리 둘 수는 없었으므로 아들인 태종은 함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가 아버지의 묘를 만들었다. 이후 지금까지 조선 왕릉에서 유일하게 건원릉만 잔디를 심지 않고 억새를 심고 있다.
찾아가려면…
대중교통 : 중앙선 구리역 3출구, 마을버스 02, 06등
자가용 :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