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의 화원 곰배령’이란 드라마는 채널A의 개국기념 특집으로 2011년 12월에서 이듬해 3월까지 30부작으로 방영되었다. 소박하고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사람냄새 나는 삶을 조명하려 했다는 작가의 말처럼 늦가을에서 겨울에 걸치는 깊은 산골풍경이 그대로 화면에 흐른다. 거기다 접두어 ‘천상의 화원’은, 하늘 위에 아름다운 꽃밭이 펼쳐지는 곰배령이란 뜻이니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후 전문 여행사가 생길만큼 널리 알려진 유명한 산행지가 됐다. 곰배령은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 설악산과 점봉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등뼈에 자리 잡은 산마루다. 도로명 주소는 꿩밭길 174다. 꿩이 얼마나 자주 보였으면 꿩밭길일까?. 이름이 재미있다. 고도 1,164m에 넓은 평원이 펼쳐지고 계절 따라 수많은 야생화가 피고 진다. 1987년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으며 산림청의 허가를 받아 1일 600명씩만 입산이 가능하다.
서울양양고속도로 서양양IC를 빠져나와 잠시면 산림청 ‘점봉산생태관리센터’ 앞 널찍한 주차장, 설피마을에 도착한다. 눈이 많이 내리고 한번 내린 눈은 겨우내 녹지 않아 신발에 덧대어 신은 설피(雪皮)가 없으면 움직이기 어렵다는 마을이다. 설피는 다래나무나 물푸레나무로 만든다. 여기서 강선계곡을 따라 곰배령까지는 편도 약 5km 거리다. 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 내려와야 하므로 왕복 10km에 이른다. 경사가 급하지 않고 길 정비가 잘 되어 있어서 4시간 정도면 갔다 올 수 있다. 이 길을 따라 곰배령을 넘으면 반대편 아래 마을이 인제읍 귀둔리다. 계속해서 내려가면 소양강 상류를 거쳐 인제에 닿는다. 개화이전의 조선시대 사람들이 이용하던 옛길이다. 동해안에서 가져온 어물과 산골의 곡식을 교환하던 중요한 교역로였다.
강선계곡에서 첫 만나는 길은 경사가 거의 없고 비포장도로일 뿐 자동차가 다닐 수 있을 만큼 넓다. 사철 내내 졸졸 흐르는 개울물 소리가 끊기지 않고 주위는 거의 원시림에 가까운 숲이 펼쳐진다. 점봉산을 포함한 이곳은 우리나라 식물서식종의 약 20%(약 850여종)가 분포하는 생태계의 보물창고다. 곰배령에서 만날 수 있는 야생화만도 수백 종에 이르며 대체로 5~7월 사이에 가야 많은 꽃을 볼 수 있다.
지금은 꽃보다 찬찬히 나무를 볼 수 있는 시기다. 그리 크지 않은 당단풍나무, 피나무, 물푸레나무, 서어나무 등이 입구부터 길 쪽으로 가지를 뻗어 터널을 만들고 있다. 올라가면서 진한 갈색의 칙칙한 느낌의 다른 나무줄기와 구별되는 하얀 껍질의 거제수나무가 금방 눈에 띈다. 자작나무와 잘 혼동하는 나무다. 무리지어 자라는 개울가의 속새에 잠시 눈길이 간다. 입구에서 2km쯤에 잣나무 수십 그루가 숲을 이루고 옆에 작은 마을이 나타난다. 곰배령 길에서 마지막인 강선마을이다. 강선(降仙)마을은 아름다운 경치에 반한 신선이 내려와 머물던 곳이라고 한다. 신선은 멀리 가버리고 지금은 10여 채의 민박집과 먹거리를 파는 가게들이 들어서 있다. 내려올 때 꼭 들러달라는 가게 여주인의 간절한 부탁을 뒤로하고 개울가의 징검다리로 내려서니 아름드리 큰 나무 밑에 보호수 팻말이 붙어있다. 높이 20m, 둘레가 거의 세 아름에 이르고 나이도 200년이 넘었다는 쪽버들이다. 우리나라 1만4천여그루의 보호수 중 쪽버들로서는 유일하다. 필자도 이렇게 큰 쪽버들은 처음 만났다. 멀리 찾아온 보람을 이럴 때 느낀다.
곰배령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좁은 산길로 3km를 더 가야한다. 크고 작은 바위로 덮인 지표면에는 마치 삿갓을 뒤집어 놓은 것 같은 커다란 식물이 군락을 이룬다. 양치식물인 관중이다. 무성한 잎들을 넉넉하게 펼치고 무리지어 자라고 있어서 깊은 산속임을 말해준다.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자란 들메나무, 둥치가 보디빌더 근육처럼 생긴 서어나무, 덩굴을 뻗어 높은 나무까지 타고 올라간 다래나무와 노박덩굴이 특별히 눈에 띈다. 그 외 음나무, 층층나무, 까치박달, 다릅나무, 산벚나무, 느릅나무, 야광나무, 산돌배나무, 복장나무, 난티나무, 전나무 등 이름표를 붙인 나무만도 한참을 헤아려야 한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곧게 자란 아름드리 침엽수들을 만날 수 있다. 아마 분비나무일 것이나 잎을 볼 수 없어서 전나무인지 확인이 안된다. 드물게 만나는 주목도 눈여겨 볼만하다. 원래 점봉산과 곰배령으로 이어지는 능선에는 주목이 많았다. 그러나 사람들의 욕심에 대부분 잘려나갔다. 지금은 점봉산 일대만 군락으로 조금 남아있고 곰배령 등산길에는 어쩌다 만날 수 있을 뿐이다. 정상을 10여분 남겨놓고 ‘깔딱고개’라는 경사가 조금 급한 고갯마루를 올라서면 바로 ‘천상의 화원 곰배령’이다. 사방이 확 터진 펑퍼짐한 능선은 얼핏 봐도 축구장보다도 훨씬 넓다. 주위를 신갈나무가 벽처럼 둘러싸고 가운데는 초원이다. 나무 데크 길로만 사람이 다닐 수 있게 해둬서 초원은 아쉬운 대로 위에서 내려다 볼 수밖에 없다. 자주방아풀, 구절초, 금강초롱꽃이 눈에 들어올 뿐 다른 야생화들은 감감하다. 집에 와서 보고서를 찾아보니 이름도 생소한 고려엉겅퀴, 곰취를 비롯한 취 종류, 꽃향유, 눈빛승마, 둥근이질풀, 배초향, 뻐꾹채, 산비장이, 솔체꽃, 촛대승마 등이 지금 꽃이 핀단다. 그러나 대부분 눈에 잘 띄는 꽃이 아니라 찾기가 어렵다. 아무래도 천상의 화원에 어울리는 야생화를 감상하려면 봄날에 찾아 와야 할 것 같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면 북쪽으로 아련히 보이는 봉우리가 설악산 대청봉이며, 작은 점봉산 너머 진짜 점봉산이 있다. 곰배령 표석에 가서 사진 한 장 찍고 나면 하산길이다. 왜 곰배령일까? 곰이 벌렁 드러누워 있는 모습을 닮았다는 데서 왔다고 한다. 밭 흙을 고르는 농기구 고무래의 강원도 사투리인 ‘곰배’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어느 쪽이던 우리에게 정감 있는 이름임에는 틀림없다. 곰배령은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으로도 선정되었다니 한번쯤은 다녀올만하다.
찾아 가려면...
인터넷 예약 : 산림청 홈페이지(www.forest.go.kr) 의 휴양ㆍ문화ㆍ복지>산림산촌생태>산림생태탐방
입장 : 11시 이전에 생태관리센터 통제소를 통과해야 한다. 신분증 지참 필수.
가는 길 : 서울양양고속도로 서양양IC~418번도로(조침령로)~점봉산생태관리센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