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비로 유명한 전남 서해안 영광에는 불갑사란 절이 있다. 백제 침류왕 원년(384) 인도의 중 마라난타가 법성포로 들어와 불교를 처음 전하고 지은 절이라고 한다. 그래서 절 이름도 부처님의 첫 번째 절이란 이름으로 불갑사(佛甲寺)다. 알려진 관광지임에도 주차료와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공짜는 언제나 즐거운 법, 부처님의 자비가 더욱 돋보이는 절이다.
불갑산과 모악산의 능선으로 둘러싸인 산자락에 절이 들어서 있고 앞은 넓은 평지가 이어진다. 불갑사 뒤 전일암으로 올라가는 길의 골짝에는 27,769㎡(8,400평)에 걸쳐 온대남부 산림에서 만날 수 없는 특별한 ‘참식나무 숲’이 있다. 참식나무는 우리나라 남해안에서부터 일본, 타이완, 중국 남부 등 난대와 아열대에 걸쳐 자란다. 긴 타원형의 늘 푸른 잎을 달고 있으며 이곳에는 직경 10~20cm, 키 10여m짜리 수백그루가 모여 자란다. 제 식구끼리 만이 아니고 비자나무, 굴피나무, 머귀나무, 동백나무, 개서어나무 등과 섞여있다. 참식나무는 비옥하고 수분이 많은 곳을 좋아하여 계곡이나 산록 부분에 터를 잡는다. 암수 딴 나무로 가을에 꽃자루가 없는 우산 모양의 꽃차례에 연한 노랑 빛 꽃이 핀다. 푸른 잎에 묻혀 꽃을 찾아내기가 어려워도 자기들끼리는 수정이 되어 작은 구슬 굵기의 동그란 열매가 열린다. 겨울을 넘기고 다음해 가을에 빨갛게 익는다. 푸른 잎사귀를 배경으로 꽃과 열매가 같이 달리는 보기 드문 나무다. 추위를 싫어하여 남해안을 벗어나면 잘 만나기 어렵다. 따라서 나무를 따로 공부하지 않은 내륙에 사는 분들은 참식나무를 잘 알지 못한다. 참식나무가 육지에서 자랄 수 있는 가장 북쪽 한계가 이곳이다. 식물학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으므로 천연기념물 112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참식나무가 불갑사에 숲을 이루어 자라게 된 가슴 아픈 사연이 전해지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어느 날 법명이 경운이라는 젊은 스님은 부처님의 본 고장 인도로 유학 갈 꿈을 키워간다. 그의 소원이 이루어져 뱃길과 육로로 이어지는 험난한 길을 헤치고 마침내 인도의 유명한 절에 도착한다. 유학승으로서 수행에 온 정성을 쏟았지만 가끔씩 고향생각으로 마음이 심란해 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럴 즈음 마침 스님이 머물던 절은 왕실과 관련이 깊었던 터라 아리따운 공주가 자주 찾아왔다. 먼 이국땅에서 온 경운스님의 남달리 헌칠한 외모와 그의 진솔한 수행태도에 반해 둘은 차츰 사랑에 빠진다. 몰래한 사랑은 들키기 마련이다. 둘의 사랑은 바람에 실려 궁궐의 임금님 귀에까지 들어가 버린다.
어떻게 할 것인가? 임금님은 고심을 거듭하였다. 결국 공주의 첫 사랑이 결실을 맺게 할 수는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안타깝게도 경운스님을 본국에 ‘강제송환’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신라로 되돌아가기 전날 둘은 마지막으로 만난다. 이승에서 다시 만나 사랑을 나눌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은 내세에 못 다한 사랑을 이어가기로 약속한다. 이별의 증표가 필요하였다. 둘이 자주 만나던 곳의 참식나무 한 그루가 생각났다. 우선 사시사철 잎이 지지 않아 푸름이 변치 않은 사랑나무로 제격이다. 가지에 새싹이 돋으면서 아래로 처지는 새잎은 짧은 황금빛 털이 빈틈없이 덮여 있다. 살짝 만져보면 새털보다 더 보드라움에 감탄한다. 공주의 섬섬옥수를 그대로 연상한다. 차츰 잎의 뒷면은 하얗게 변하는데,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어가는 사람들의 삶을 되돌아보게도 한다. 작고 귀여운 노란 꽃을 잠시 내 보이고 나면 굵은 콩알 크기의 빨간 열매가 송골송골 매달린다. 이 역시 공주와의 정열적인 사랑을 연상케 한다. 이래저래 참식나무만큼 사랑의 증표로 제격인 나무가 없다. 떠나는 경운스님의 바랑 속에는 공주는 참식나무 열매 몇 알을 넣어준다. 딱딱한 핵과(核果)인 탓에 돌아오는 몇 달 동안 씨앗은 썩지 않고 잘 버틴다. 귀국하자 곧장 인도와 인연이 깊은 곳, 마라난타 스님이 처음 불교를 이 땅에 전해준 불갑사로 찾아간다. 따뜻한 봄날 스님은 절 뒷산 양지바른 곳에다 가져온 열매를 묻고 싹을 틔워 자라도록 돌봐준다. 이것으로서 인도 공주와 이승에서의 사랑의 연(緣)은 참식나무로 승화시키고, 처음처럼 경운 스님은 다시 부처님의 제자로 조용히 되돌아갔다고 한다. 원래 남해안이나 제주도의 따뜻한 기후를 좋아하는 참식나무는 불갑사 일대에서 자라기가 어렵다. 그러나 경운 스님의 이루지 못한 사랑을 가엽게 여긴 부처님이 특별히 북쪽으로는, 이곳까지만 참식나무가 자랄 수 있게 배려해줬다고 사람들은 이야기 한다. 인도 동남부에는 우리가 만나는 참식나무(학명Neolitsea sericea)와 비슷한 인도참식나무(학명Neolitsea fischeri)가 자란다. DNA분석 등의 기법으로 둘의 유연관계(類緣關係)가 어느 정도인지 조사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불갑사는 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의 거리가 거의 1km에 이른다. 널찍한 평지에는 비록 최근에 조성된 시설들이 많지만 몇 군데 볼거리가 있다. 지금은 한반도에서는 서식하지 않은 우리 호랑이가 1908년 마지막으로 잡힌 곳이 이곳 불갑산이라 하며, 그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제법 규모를 갖춘 산림박물관도 한번쯤 둘러 볼만하다. 또 인도의 간다라 지역 사원 유구 가운데 비교적 잘 남아있는 ‘탁트히바히 사원’을 본떠서 만든 탑원도 불교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한번쯤 둘러볼만하다.
불갑사 본당에 가까워지면서 여기저기 심어 둔 식물, 지금은 초록색 기다란 잎만 무성하게 자라는 꽃무릇 밭을 만날 수 있다. 좁고 긴 붉은 꽃잎이 뒤집어져 피는 꽃무릇은 무리를 이루어 자라는 특성이 있어서 초가을에 꽃이 필 때는 불갑사 주위를 완전히 뒤덮는다. 붉은 꽃 천지로 불갑사 주변을 물들이는 아름다움을 보기위하여 9월말이면 서울에서 꽃구경 특별 관광버스가 운행될 정도로 인기가 높다. 꽃무릇은 석산(石蒜, 돌마늘의 뜻)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뿌리가 마늘을 닮아서라고 한다. 곳곳의 입간판에는 ‘상사화(꽃무릇)’로 소개하고 있지만 상사화와 꽃무릇은 분명 다른 식물이다.
불갑사 찾아가려면...
자가용 : 서해안 고속도로 영광IC에서 약 20km
고속버스 : 서울센트럴시티-영광(약 1시간 간격), 영광-불갑사 시내버스(1일9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