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할아버지와 풋감
나의 큰할아버지(어릴 때 증조부를 이렇게 불렀다)는 오직 근검절약으로 당대에 재산을 모아 내가 태어났을 때는 시골에서 밥술이나 먹는 집안을 일구어 내셨다. 덕분에 광복 후의 혼란과 한국전쟁의 와중에도 큰 어려움 없이 유년을 보낼 수 있었다. 큰할아버지는 우리가 알고 있는 자린고비 일화와 거의 판박이 생활을 하셨다. 외출을 하시면 절대로 외부에서 용변을 보지 않고 꼭 집에 와서 일을 치렀다. 인분은 농사용 거름으로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사실이 그랬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멀리 외출을 하시면 당시 고급신발이었던 흰 고무신은 사람이 보일 때만 신고 혼자 걸을 때는 따로 준비한 집신으로 대신하셨다고 한다. 밥상에서 생선 가시를 발라 놓은 것을 보면 눈곱만한 살점하나 남아있지 않다. 고양이도 울고 갈 정도였다. 한 가지 내가 영영 잊지 못하는 인상적인 장면은 사과를 드실 때다. 할아버지가 따로 경산에서 사과 농사를 짓고 계실 때이니, 좀 좋은 사과를 드셔도 될 터인데 탄저병으로 동그랗게 썩어 들어가거나 까치가 파먹은 등외품 사과를 보내라고 요구하셨다. 칼로 원뿔 모양으로 쓱쓱 오려내는 것이 아니다. 병든 부분만을 조금 도려내고 칼끝으로 혹시라도 썩지 않은 사과 살이 조금이라도 묻어나올 까봐 정성스럽게 긁어낸다. 다행히 이런 자신의 생활태도를 가족모두에게 그대로 따라 하도록 강요는 하지 않으셨다. 식구들이 모여 앉으면 자기가 본 큰할아버지의 자린고비 행태를 이야기하면서 뒷담화를 즐기곤 했다. 큰할아버지를 그대로 따라잡을 수는 없었지만 집안의 기본 흐름은 절약정신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큰할아버지가 거처하던 사랑채 옆에는 제법 큰 감나무 한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감꽃이 지고 콩알만 한 풋감이 달리기 시작하면 나를 포함한 마을 어린이들은 감나무에 자꾸 눈길이 간다. 거의 간식거리가 없을 때이니 구슬크기 만큼이라도 풋감이 굵어지면 우선 먹으려고 덤빈다. 그러나 이런 풋감은 배탈이 나기 마련이라 큰할아버지는 감나무 근처에 어린이가 아예 얼씬도 못하게 감시를 하셨다. 낙과한 풋감을 주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는 기준일이 초복이다. 초복 날 우리들은 오랫동안 눈독들여오던 감나무 밑으로 몰려가서 홍시가 된 풋감은 그 자리서 먹고 떫은 풋감은 주어다 삭혀 먹었다. 이후는 가을까지 감나무 출입은 자유로웠다. 마루에 앉아 긴 담뱃대를 물고 계시는 큰 할아버지에게 인사만 하면 됐다. 가을이 깊어 빨갛게 감이 익어 하나둘 홍시가 생기면 언제 바닥에 떨어질지를 점쳐본다. 예상 날짜의 아침에 일찍 달려가야 자기 차지가 된다. 그래도 감나무에 올라가 직접 홍시를 따는 일은 절대 못하게 하셨다. 감나무 목재의 세포는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짧고 길이가 비슷한 세포들이 계단상에 가까운 좀 독특한 형태로 배열한다. 대부분의 다른 나무 세포들은 서로 어긋나기로 배열하는 것과 달리 감나무의 이런 배열은 가지를 쉽게 잘 분질러지게 한다. 우리 선조들은 현미경으로 세포보기를 하지 않아도 감나무의 특성을 잘 알아 함부로 나무에 올라가지 못하게 했다. 감을 수확하면 홍시와 생감은 모두 할아버지 차지다. 홍시는 손님접대용으로 따로 보관하고 생감은 손수 껍질을 깎아 곶감을 만들어 마루에 있는 궤짝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감 딸 때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10여개는 꼭 따지 않고 그냥 남겨두는 모습이었다. 이게 겨울을 나는 새들의 먹이가 되도록 배려한 ‘까치밥’이란 것은 내가 어른이 되어 나무 공부를 시작하고 비로소 알았다. 큰할아버지의 홍시와 곶감은 이듬해까지 자기는 거의 드시지 않고 아꼈다가 증손자들의 간식거리로 내주셨다. 한 달에 두세 번 정도 예뻐하는 증손자만 불러서 내주신 그 기막힌 홍시와 곶감 맛을 지금도 생각만하면 입안에 침이 고인다.
큰할아버지는 농사를 직접 짓지는 않았다. 일제강점기 지방의 사대부로 사시면서 농지는 전부 소작을 주고 있었다. 광복이 되고 1949년 8월 정부는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기본 원칙이 지주제를 인정하지 않고 소작인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형식이며 지주에게는 채권으로 보상했다. 산골의 작은 지주였던 큰할아버지에게도 토지개혁에 대한 소문이 들리지 않았을 리 없다. 신식공부를 조금 하신 나의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토지개혁이 곧 이루어진다는 정보를 알려드리면 ‘어라!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다더냐.’로 믿으려 하시지 않았다. 막상 토지 개혁이 시행되자 유달리 농토를 집중적으로 갖고 계시던 큰할아버지는 거의 전 재산이 하루아침에 날아가 버렸다. 현재 나는 7남매지만 큰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당시는 5형제였다. 자손이 귀한 집안이라 증손자들을 끔찍이 아끼셨다. 토지개혁이 시행되자 지팡이에 의지한 채 소작인들을 찾아다녔다. ‘여보게! 다섯이나 되는 증손자들이 뭘 먹고 살겠는가? 조금만 돌려주게’라고 사정했다한다. 그래도 당시는 인정도 있고 인심도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구걸하다 싶이 하여 얻어온 땅이 논 20여 마지기나 됐으니 말이다. 이 땅은 훗날 우리 형제들이 먹고사는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 한편 지주가 받은 채권은 물가가 연간 1천 퍼센트가 넘게 오르던 시절이라 오래지 않아 휴지조각으로 변해버렸다. 근검절약으로 당대에 부자란 소리를 들을 만큼 재산을 모았던 큰할아버지가 토지개혁으로 받았을 엄청난 정신적인 쇼크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영영 쇼크에서 빠져나오시지 못하고 토지개혁이 시행된 후 불과 2년을 더 사시다 한국동란 중에 영겁의 세계로 떠나버리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