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잠자리와 능금 밭
한국전쟁의 비참함이 온 강토를 덮고 있을 때 나는 경북 경산시의 변두리에서 초등학교 고학년을 보냈다. 주위는 온통 ‘능금밭’이었다. 능금이란 오늘날 사과의 옛말인데 지금은 능금이란 말이 생소하지만 1970년대 이전만 해도 오히려 사과란 말을 거의 쓰지 않았다. 조선 말기에 서울의 자하문 밖에 널리 심었으며 옛날 기록에도 임금(林檎)으로 등장하고 있으니 능금이 맞는 말이다. 골프공 크기의 작고 새큼한 우리의 토종 능금과 달리 개화기에 들어온 서양능금은 훨씬 알이 굵고 당도도 높다. 우리 능금이 거의 멸종되면서 이름도 차츰 사라져 갔다. 서양능금은 사과(沙果)란 새로운 이름을 얻어 오늘에 이른다. 낙동강 지류인 금호강을 따라 처음 일본인들이 만들었던 사과 밭은 주변의 웬만한 야산까지 잠식하여 이 일대는 온통 능금밭 단지가 됐다. 할아버지가 경영하던 사과 밭은 당시에도 귀했던 골덴이란 사과품종이 대부분이었다. 우리들은 그냥 일본식 발음 그대로 ‘고리뗑’이라 했는데, 익으면 노란 색에 부드럽고 달콤한 맛을 기억한다. 문지르면 더 빨갛게 되는 홍옥, 청록색의 독특한 색깔에 달콤한 맛이 일품인 인도, 지금의 부사사과를 닮은 국광등 거의 없어져 버린 옛 사과품종이 추억 속에 남아 있다.
학교는 언제나 뒤숭숭하여 수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날이 많았고 아예 오지 말래기 일쑤였다. 집안의 어른들은 들러 앉으면 전쟁이야기를 할 뿐 내가 공부를 제대로 하는지 안하는 지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목숨이 하루아침에 왔다 갔다 하는 전쟁 중이니 어린이들이야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따라서 하루 종일 내 멋대로의 자유세상이다. 지금의 불쌍한 어린이들에 비하면 천국에서 산 셈이다.
한 겨울의 얼음지치기와 팽이치기에 실증이 날 즈음, 멀리 들판에는 아지랑이 가물거리고 사과나무에 꽃이 피는 계절로 들어서 버린다. 봄이 짙어가면서 사과밭 일이 조금씩 바빠지면 여러 가지 잔심부름으로 짧은 다리가 조금 잰 걸음을 하다보면 금세 신나는 여름으로 접어든다. 이때쯤 적막속의 사과밭은 매미들이 펼치는 교향곡이 울려 퍼진다. 아이들에게는 매미잡기의 신나는 놀이가 기다린다. 말이 끄는 마차가 흔할 때다. 마부의 눈치를 봐 가면서 말 꽁지 털을 뽑아 올가미를 만든다. 버들가지 끝에 올가미를 매달아 한가하게 노래 부르기에 여념이 없는 매미 앞에다 살그머니 놓는다. 이 녀석의 버릇이 올가미가 보이면 앞발로 끌어당긴다, 그대로 낚아채면 양쪽으로 튀어나온 눈 밑에 정확하게 걸린다.
매미잡기에 조금 신물이 나면 왕잠자리 잡기가 기다린다. 사과밭 주위에는 크고 작은 저수지가 유난히 많았다. 수초 사이를 서식지로 하는 곤충을 비롯하여 붕어와 미꾸라지까지 여러 생물들이 삶을 꾸려가고 있다. 이들 중 사투리로 ‘철갱이‘이라는 왕잠자리가 특히 주의를 끌었다. 이름 그대로 길이가 어린아이 뼘으로 한 뼘 정도나 되는 커다란 잠자리다. 마리숫자가 많기도 하였으나 수컷은 하루 종일 저수지 가장자리를 돌아다니기 때문에 눈에 잘 띄었다. 먹이를 구하고 생식활동을 하기 위함이겠으나 그의 생태특성이 어린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우선 암컷부터 잡기 시작한다. 버들가지를 바가지만한 크기의 O자형으로 휘고 안에다 실로 촘촘한 그물망을 뜬다. 길 다란 대나무 장대에다 이를 갖다 붙이고 수초위에 얌전히 앉아있는 암컷 왕잠자리를 위에서 그냥 내리 덮어서 잡는다. 암컷 한 마리는 너무나 소중한 재산이다. 적어도 수컷 십여 마리를 꼬여 낼 수 있는 미끼이기 때문이다. 암컷의 앞발 2개를 실로 묶어 한발쯤 늘어트리고 오른 손을 높이 쳐들어 빙글빙글 돌린다. 그냥 돌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철~갱이 붙어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가면서. 간절한 소망이 전달된 탓인지 아니면 암컷의 미모(?)에 반하였는지 정염에 불타는 수컷들이 금세 달려온다. 사랑의 밀어를 나눌 틈도 갖지 않고 성질 급하게 불문곡직 덤벼든다. 잠깐 이 녀석의 정신이 몽롱할 때 왼손으로 눌러 암컷에서 떼어내면 행복은 찰나이고 바로 죽음의 구렁텅이로 떨어져 버린다.
대체로 체구가 수컷보다 작고 연약하게 생긴 암컷은 강제로 휘둘러대는 회전목마 놀음에 한두 시간을 버티기도 어렵다. 대역을 찾아야 한다. 바로 수컷으로 수컷을 잡는 방법이다. 오랑캐는 오랑캐로 다스리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지혜가 필요하다. 문제는 어떻게 암컷처럼 위장할 것인가?. 순수 자연산 재료를 쓴다. 잠자리의 꽁지와 날개사이에 달린 약간 굵은 생식기 부분에는 호박꽃의 노란 꽃술을 따다 정성껏 발라주고 꽁지에는 고운 황토 흙을 물에 개어 얇게 입힌다. 눈치 빠르고 분별 있는 녀석은 이 가짜 암컷에 눈길도 주지 않고 날라 가버린다. 잠자리 사회에도 욕심이 멱에 찬 녀석이 있는 법, 사랑에 눈이 먼 멍청한 녀석들은 얼씨구나! 하고 우선 덤비고 본다. 그러나 가짜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으니 날쌔게 잡아채야 함은 물론이다. 한마디로 암수 구별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정신없이 ‘여자’ 밝히다가 신세를 망치는 것이다. 이렇게 잡혀온 왕잠자리의 수컷은 처참한 최후를 맞는다. 통속에 보관 중이던 매미와 함께 날개를 떼어내고 닭장에 넣어주어 오랜만에 고기 맛을 보게 하는 것이다.
매미와 왕잠자리로 비롯된 어린 시절은 능금밭의 능금나무, 학교 가는 오솔길의 소나무, 뒷산의 참나무, 앞동산의 아까시나무, 능금밭 울타리를 둘러치는 탱자나무, 저수지 옆의 버드나무들과 함께 항상 추억의 한 자락을 붙잡고 있다. 눈 감으면 바로 아름다운 자연을 떠올릴 수 있는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오늘까지 내가 평생 나무와 함께 살아 갈 수 있는 커다란 힘이 되고 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손자들에게 어린 시절을 이야기해 주지 못한다. 경험하지 않은 추억이 공유될 될 수 없을 것 같고 아이들이 금방 싫증을 낼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