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유학에서 만난 나의 녹나무
내가 일본 유학생이 되어 일본의 오사카 공항에 내린 때는 4월 초순이었다. 처음 타보는 비행기가 너무 빨리 가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내려다 본 일본은 온통 벚꽃천지였다. 벚꽃의 화려함이 연속되어 좀 지겹다는 생각이 들 즈음 일본의 옛 수도 교토에 도착했다. 예약된 기숙사에 잠을 자고 아침 일찍 유학생활을 할 교토대학 농학부로 찾아갔다. 자그마한 키에 인상 좋은 지도교수를 만나니 긴장이 조금 풀리고 마음이 놓인다. 연구실 학생들과 인사를 나누고 바로 학내를 둘러봤다. 벚꽃이 여기저기 피어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난대의 따뜻한 곳에 자라는 늘푸른잎나무로 채워져 있다. 녹나무가 가장 많이 눈에 띈다. 그때까지 난 녹나무를 제대로 본적이 없었다. 원래 큰 나무로 자란다고는 알았지만 캠퍼스 곳곳에 두세 아름에 이르는 고목 녹나무가 수두룩하다. 본관 옆의 큰 녹나무 하나를 ‘나의 녹나무’로 점을 찍었다. 오래전부터 내가 머무는 부근에 자라는 큰 나무 하나를 나 마음속의 멘토 나무로 정해둔다. 기분이 울적하거나 억울하고 분통터지고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찾아가서 하소연하기 위함이다.
실험실은 박사과정과 석사과정 및 4학년 학생, 연수생을 포함한 20여명이 각자의 연구테마에 열중하고 있다. 나의 전공은 목재조직학(wood anatomy), 나무의 세포 형태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큰 세포라야 지름 0.3밀리미터 전후이니 종일 현미경과의 씨름이다. 눈에 보이는 것도 수없이 많은데 하필이면 보이지도 않은 세포연구냐고 친구들의 핀잔도 들었다. 지금도 전공자가 극히 적지만 당시에는 일본을 통틀어 목재조직학을 공부하는 한국인은 나 혼자였다. 첨단 연구도 아니고 돈이 생기는 연구도 아니며 기초중의 기초분야이니 누가 하려고 들지 않는다. 1년쯤 지나 좀 나태해 질 즈음, 경주 박물관장을 지내고 이화여대에서 퇴직한 강우방 교수님이 옆방에 들어오면서 새로운 활력이 생겼다. 당시 박물관 연구사였던 그는 우리나라 경주와 비슷한 교토의 유적답사를 거의 매일하고 다녔다. 저녁이면 한국 유학생들에게 일본문화재의 특성을 열성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교토는 유난히 목조문화재가 많은 탓에 누구보다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어렴풋이 알고 있던 고고목재학(archeological woods)도 차츰 흥미로워졌다. 이때 공부한 목재조직학을 바탕으로 목질문화재 연구라는 새로운 분야가 나의 평생 직업이 됐다.
연구실 생활은 녹녹하지 않았다. 처음 다뤄보는 실험기구의 사용방법부터 초자기구의 취급요령까지 배우고 익히는 일에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복잡한 기계를 다루는 일보다 단순한 일에 애를 먹었든 기억은 사용한 물건을 제자리에 갖다 놓은 훈련이었다. 당연히 그래야 될 일이지만 간단한 이런 일 하나에도 습관화 되는 데는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아마 나의 생활방식이나 의식이 평소에 철저하지 못한 탓이었을 터다. 표면적인 친절은 몸에 밴 사람들이라 연구실학생들과도 오래지 않아 조금씩 어울릴 수 있게 됐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의사소통도 나아져 그네들의 표정을 읽고 표면의 친절함 뒤에 숨겨진 내면의 진심을 엿볼 수 있었다. 다른 나라 사람을 가리키는 말에 외국인(外國人)과 외인(外人)이란 말이 있다. 일본 국어사전에 두 가지 말을 구분하는 것은 아니나 현실적으로는 외국인이란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의 자기들 보다 못사는 나라 사람들을 말하고 외인은 구미선진국에서 온 사람들을 가리킨다. 외인에 대하여는 필요이상으로 친절한 반면 외국인에 대하여는 호의적이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일본인 심정의 밑바닥에는 선조들이 악랄한 수탈자였다는 사실에 대하여는 거의 반성하지 않고, 오늘날 한국이 이 만큼이라도 발전한 것은 모두 자기들의 강제개화 덕분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못된 학생들은 서울을 일제강점기의 지명인 경성(京城)으로 부른다거나 남북이 분단된 것은 민족성과 관련지어 비판하기도 한다. 일부 교수들은 일본말이 서툰 유학생에게는 한국 사람이 왜 일본말이 서투냐고 따지기도 한다. 대체로 일본인들이 숭앙해 마지않은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애국자는 우리에게는 만고역적에 해당한다. 서로를 이해하기는 어차피 어려울 것이나 가해자로서 피해자들에 대한 아량이 부족한 것 같았다.
2년에 걸친 유학생활 중에 나의 녹나무를 가능한 찾아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생각보다 더 자주 찾게 됐다. 우리나라 버드나무와 비슷한 껍질이라 더 친숙하고, 거창한 덩치는 어린 시절 본 당산나무가 연상되어 나의 소원은 꼭 들어 줄 것만 같아서다. 녹나무는 중국 양자강 남부-제주도-일본중남부를 잇는 선의 남쪽, 난대에서 아열대에 걸쳐 자란다. 키는 3~40미터이며, 지름 4~5미터에 이를 수 이르며 세계에서 가장 굵고 키가 큰 나무 중 하나이다. 녹나무는 크게 자라고 목재는 비교적 단단하며 잘 썩지 않아 널리 쓰이던 유명한 나무다. 유럽까지 정벌하여 한때 세계에서 가장 큰 왕국을 만들었던 원나라 임금의 용상을 만든 재료가 녹나무였을 만큼 좋은 나무였다. 우리나라 <삼국사기>에 해당하는 그들의 역사책 <일본서기>에 보면 나라를 연 신은 신체 각 부위의 털을 뽑아 여러 가지 나무를 만들었다. 수염은 삼나무, 눈썹의 털은 녹나무, 가슴 털은 편백, 엉덩이 털은 금송을 만들었다한다. 쓰임도 정해 주었는데 삼나무와 녹나무로는 배를 만들고 편백은 궁궐을 짓고 금송은 관재로 쓰라고 했다. 특히 녹나무는 선박은 물론 여러 용도로 쓴다. 그들이 자랑하는 백제관음을 비롯하여 많은 불상도 녹나무로 만들었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일본의 혜택을 가장 많이 입은 한국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석.박사학위를 일본문부성 장학금으로 취득하였고 이 학위를 바탕으로 대학교수라는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또 장학금의 일부를 쪼개어 송금한 덕분에 단칸 셋방에서 13평짜리 주공아파트의 주인이 되는 감격도 맛볼 수 있었다. 그러나 유학생활을 돌이켜 보면 실험하고 공부하는 과정에서 힘들고 어렵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겠으나 고마움이나 인간적인 정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근본적으로는 두 나라의 역사적 관계가 심리의 밑바닥을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