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식나무의 애달픈 사연
지은 지가 좀 오래된 우리 집 아파트에는 널찍한 베란다가 있다. 단독주택에 살다가 처음으로 아파트에 입주했을 때, 베란다 공간이 너무 휑했다. 무엇으로 채울 것인지 고심하다가 내가 잘 아는 난대의 나무들을 떠올렸다. 대부분 늘푸른잎나무들이니 일 년 내내 푸름을 선사해 줄 터이고 아파트는 온실처럼 따뜻한 곳이니 잘 자라 줄 것 같았다. 베란다에는 참식나무, 황칠나무, 보리장나무, 후박나무, 다정큼나무, 돈나무 등 온대 지방에 사는 우리에게는 이름도 생소한 난대의 나무들로 채워졌다. 처음에 수종 별로 한두 그루씩 묘목 상태의 작은 나무로 가져왔지만 시간이 지나니 베란다가 점점 좁아진다. 강아지를 키우다 정이 들면 아무리 귀찮아도 쉽게 누굴 주어버리지 못하듯이 나무도 마찬가지다. 비록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들어주지는 않아도 가만히 나무를 들여다보면서 그들의 소곤거림을 나도 들을 수 있어서 정이 든다. 같이 살아가게 된 여러 사연을 가만가만 말해주기도 하고 꽃대를 언제쯤 내밀 것인지도 알려준다.
베란다의 여러 나무 중 나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나무는 흔하지 않은 참식나무다. 예전에 보길도 숲 속에서 어린 참식나무를 처음 만나면서 금방 정이 들어버렸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수많은 늘푸른잎나무 중에 유독 잎이 피는 모습이 독특해서다. 베란다에 나무를 들이면서 가장 먼저 보길도의 전남대학교 학술림에 특별히 부탁하여 참식나무부터 가져왔다. 원래 아름드리를 훌쩍 넘겨 자랄 수 있는 큰 나무다. 남쪽 나라 고향의 갯바람을 맞으면서 자랐더라면 아마 한 뼘 굵기가 되었으련만 화분 속에서 겨우겨우 살아가느라 새끼손가락 굵기가 고작이다. 매끈한 회백색의 껍질과 콩알 굵기의 새빨간 열매가 그의 트레이드마크인데, 베란다에서는 고유의 모습도 찾기 어렵다. 봄에 갓 돋아난 갸름하고 자그마한 잎은 사냥개 포인터(pointer)의 귀처럼 멋스럽게 밑으로 늘어진다. 손으로 살짝 만져보면 새 잎의 보드라움에 감탄하곤 했다. 촉감만이 아니라 표면은 짧은 털이 빈틈없이 덮여 있어서 아침 햇살이라도 퍼지면 그 모습이 신비롭기까지 하다. 계절이 여름으로 들어가면서 잎의 뒷면은 하얗게 변하는데,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어가는 인간사의 과정을 볼 수 있는 것도 이 나무의 또 다른 매력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보길도의 짙푸른 고향 바다를 뒤로하고 머나먼 경상도 땅, 그것도 공중에 매달린 아파트에 강제로 붙잡혀온 참식나무의 애달픈 삶을 보고 있는 내 마음은 편치 않았다.
‘아파트 생활이 나도 갑갑한데, 너야 정말 마지못해 살겠지?’
더 늦기 전에 고향 바다는 아니더라도 넓은 공간이나마 마련해 주기로 마음을 바꾸어 먹었다. 4월의 따뜻한 햇살이 아지랑이를 만드는 어느 날을 택하여 화분에서 꺼내 양지바른 학교의 연구실 건물의 앞마당으로 옮겨 심었다. 출퇴근 때마다 차츰 싱싱해지는 잎사귀 위에 눈길을 얹어주는 것으로 나와 나무는 기쁨을 함께 했다. 그러나 이런 기쁨은 금세 끝나버렸다. 대학 문화를 창달하고 젊음을 마음껏 발산한다는 6월의 축제가 있던 다음 날, 통째로 부러져버린 가냘픈 참식나무 한 그루가 나의 발아래 누워 있었다. 참식나무는 지옥 같은 ‘화분 살이’에서 빠져나와 이제 겨우 두 달 남짓도 안 돼 영문도 모른 체 세상을 떠났다. 무엇이 그렇게 못마땅하였는지 나로서는 그 비뚤어진 심통을 헤아리기 어렵다. 이후 참식나무를 만나면 애써 외면하는 버릇이 생겼다. 비명에 가버린 ‘베란다 참식나무‘가 자꾸 생각나서다. 어느 가을 날 제주도 천지연을 가기 위해 걷다가 땅바닥에 뒹구는 참식나무 열매가 눈에 들어왔다. 몇 알을 주워 손수건을 펴고 정성껏 싸서 호주머니에 넣었다. 사과 궤짝을 가져다가 안에다 모래를 채운 다음 씨앗을 정성껏 심었다. 새싹이 모래흙을 밀치고 힘차게 올라와 주기를 손꼽아 기다리면서 둥지를 내려다보는 것은 즐거웠다. 몇 개가 싹이 터서 올라오긴 했으나 정성이 부족한 탓인지 대를 잇는 데는 실패했다. 참식나무는 나와 인연이 아니었나 보다.
참식나무 사건 이후 베란다에 키우던 후박나무, 굴거리나무, 돈나무등 보길도 늘푸른잎나무들에게 적어도 화분에서의 삶만은 해방해 주기로 마음을 바꿔 먹었다. 아파트 베란다는 보길도 출신 늘푸른잎 나무들이 자라기에는 너무 열악한 환경이란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개인 주택이나 농장을 가진 친지들에게 시집보내면서 하나 둘씩 나의 곁을 떠났다. 텅 빈 베란다를 볼 때는 서운하기도 하지만 마음은 편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중심의 이기적인 삶을 살아간다. 내 편의를 위하여 참식나무 같은 괴로움을 타인에게 안기게 한 일은 없었는지 잠시 되돌아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