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를 2번이나 한 고국천왕의 왕비 우씨
왕비를 2번이나 할 수 있을까? 우리 상식으로는 도저히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고구려 9대 임금인 고국천왕과 10대인 산상왕의 왕비는 다 같이 우씨라는 동일인이다. 고국천왕이 죽고 후사가 없자 왕비 우씨는 시동생인 연우와 내통하여 다른 시동생을 따돌리고 연우를 10대 산상왕으로 추대한 후 자신은 또 왕비가 되었다. 말하자면 우리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우씨는 왕비를 두 번 한 셈이다. 삼국사기에서 11대 임금인 동천왕 8년(234)조를 보면 {가을 9월, 태후 우씨가 죽었다. 태후가 죽을 때 다음과 같이 유언하였다. "내가 행실이 좋지 않았으니,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고국천왕을 보겠는가? 만약 여러 신하들이 계곡이나 구덩이에 나의 시신을 차마 버리지 못하겠거든, 나를 산상왕릉 옆에 묻어 달라." 하여 태후의 유언대로 장사지냈다.
얼마간의 세월이 지난 후 무당이 동천왕에게 말했다. "고국천왕의 혼백이 저에게 내려와서 '어제 우씨의 혼백이 산상왕에게 가는 것을 보고는, 분함을 참을 수 없어서 마침내 우씨와 다투었다. 내가 돌아와 생각하니 낯이 아무리 두껍다 하여도 차마 백성들을 대할 수 없구나. 네가 동천왕에게 이를 알려서, 나의 무덤을 가리는 시설을 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고국천왕의 능 앞에 일곱 겹으로 소나무를 심었다.}한다.
죽어서도 다른 사람도 아닌 친동생을 찾아다니는 우씨가 얼마나 괘씸하였겠는가? 그래도 불륜의 현장을 아예 볼 수 없도록 부탁한 고국천왕의 선택은 현명하였다. 바람난 아내, 살아서도 힘들 것인데 죽어서 까지 막는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부인에게 더 좋은 나무를 쓰게 하다
삼국사기 지(志)의 거기(車騎) 조(條)에는 진골에 대하여{수레 재목으로 자단과 침향을 쓰지 못하고 대모를 붙이지 못한다. 또한 감히 금, 은, 옥으로 장식하지도 못한다. 안장에 자단과 침향의 사용을 금한다.} 고 하여 진골은 수레와 말안장에 자단과 침향 등 수입목만 규제를 하고 국산수종인 회양목, 느티나무, 산뽕나무 등의 사용을 권장한 것 같다.
한편 6두품과 5두품은 {안장에 자단, 침향, 회양목, 느티나무, 산뽕나무 등을 사용하거나, 금, 은을 사용하거나 구슬 다는 것을 금한다. 여인은, 안장에 자단과 침향을 사용하는 것과 도금을 하거나 구슬 다는 것을 금한다.}하였다.
즉 6두품, 5두품의 벼슬을 한 본인은 자단과 침향 등의 비싼 수입목재는 물론 국산재라도 귀중한 나무는 쓸 수 없도록 규제하였다. 그러나 그의 처는 수입목재 만 못쓰게 하고 국산재의 사용제약은 하지 않았다. 부인이 남편보다 더 좋은 나무로 수레도 만들고 장식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는 여왕까지 배출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 역사상 가장 여권이 신장되어 있던 신라시대 사회상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적어도 이때는 남녀차별이란 없었고 있었다면 여남(女男)차별이 있었지 않았을까?
아름다운 수로부인 때문에 속썩이는 순정공
삼국유사 제2권 기이(紀異)전을 보면 철쭉과 관련된 재미있는 수로부인(水路婦人) 이야기가 실려 있다. {신라 성덕왕(702-737) 때 순정공(純貞公)이 강릉 태수로 부임하는 길에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곁에 있는 돌 봉우리가 병풍처럼 바다를 두르고 있어 그 높이가 천 길이나 되고, 그 위에는 철쭉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공의 부인 수로가 이것을 보자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저 꽂을 꺾어다가 나에게 줄 사람은 없는가?" 했으나, "거기는 사람이 갈 수 없는 곳입니다" 하고 아무도 가지 않았다.
이 때 늙은이 하나가 암소를 끌고 지나다가 부인의 말을 듣고 그 꽃을 꺾어 헌화가(獻花歌)까지 지어서 부인에게 바쳤다. 다시 이틀을 편안히 가다가 임해정(臨海亭)에서 점심을 먹는데, 바다에서 용이 나와 갑자기 부인을 끌고 바다로 들어가 버렸다. 공이 땅에 넘어지면서 발을 굴렀지만 어찌할 수가 없었는데, 또 한 노인이 나타나더니 "옛말에 여러 사람의 말은 쇠도 녹인다 했으니, 이제 바다의 용인들 어찌 여러 사람의 입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경내의 백성들을 모아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지팡이로 강 언덕을 친다면 부인을 만나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했다. 공이 그 말대로 했더니 과연 용이 부인을 모시고 나와 도로 바쳤다.
공이 바다에 들어갔던 일을 묻자, 부인은 대답하기를 "칠보 궁전에 음식은 맛있고 향기로우며 깨끗한 것이 인간들이 먹던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하는데, 부인의 옷에서 나는 이상한 향기도 세상에서는 맡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수로 부인은 아름다운 용모가 세상에 뛰어나 매양 깊은 산이나 큰못을 지날 때면 여러 번 신물(神物, 귀신)에게 붙들려 갔다. 이 때 여러 사람이 부르던 해가(海歌)의 가사는 이러했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를 내놓아라
남의 부인 앗아간 죄 얼마나 크랴
네 만일 거역하고 내놓지 않으면
그물로 잡아서 구워 먹으리
수로부인은 용모가 너무 뛰어나 지나가던 노인도 암소를 팽개치고 절벽에 기어올라 철쭉꽃을 따다 노래까지 지어 받칠 정도이다. 그러나 천길 절벽에 매달린 철쭉꽃을 따 달라고 할만큼 주책이 없고 걸핏하면 용왕과 물귀신에게 붙잡혀 다니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예쁜 부인을 둔 탓에 순정공은 아마 평생 속이 새까맣게 썩었을 것이다.
장미와 "나 어때요?"
아름다운 꽃이라면 우선 떠올리는 것이 장미꽃이다. 사랑을 고백할 때도 점수 따려고 생일 선물할 때도 장미꽃이라면 항상 여심(女心)은 쉽게 녹아난다. 장미(薔薇)는 중국과 우리 나라에도 비슷한 수종이 있지만 개량하여 아름다운 꽃을 만든 사람들은 유럽 사람들이다. 우리 역사에 장미가 등장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오래 전이다. 삼국사기에 벌써 장미라는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모란처럼 중국을 통하여 수입되어 즐겨 심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다양한 장미품종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광복 후부터이다.
삼국사기 제 46권 열전6 설총 조를 보면 {신이 들으니 예전에 화왕(花王, 모란)이 처음 들어 왔을 때 향기로운 꽃동산에 심고 푸른 장막으로 보호하였는데, 봄이 되어 곱게 피어나 온갖 꽃들을 능가하여 홀로 뛰어났습니다. 이에 가까운 곳으로부터 먼 곳에 이르기까지 곱고 어여쁜 꽃들이 빠짐없이 달려와서 혹시 시간이 늦지나 않을까 그것만 걱정하며 배알하려고 하였습니다.
홀연히 한 가인(佳人)이 붉은 얼굴, 옥 같은 이에 곱게 화장하고, 멋진 옷을 차려 입고 간들간들 걸어 와서 얌전하게 앞으로 나와서 말했습니다. '첩은 눈 같이 흰 모래밭을 밟고, 거울 같이 맑은 바다를 마주 보며, 봄비로 목욕하여 때를 씻고, 맑은 바람을 상쾌하게 쐬면서 유유자적하는데, 이름은 장미라고 합니다. 왕의 훌륭하신 덕망을 듣고 향기로운 휘장 속에서 잠자리를 모시고자 하는데 왕께서는 저를 받아주시겠습니까?}하였다.
삼국시대에도 장미는 역시 가장 아름다운 꽃의 하나이었던 모양이다. 이 정도로 아름다우면 임금의 사랑을 차지하는데 다른 꽃들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 요즈음 식으로 "나 어때요?" 한마디로 승부는 끝난 셈이다.
사랑을 위하여 왕궁을 무단 가출한 평강공주
삼국사기 열전(列傳) 온달 조에 보면 평강공주가 바보 온달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처녀의 몸으로 용감하게 온달의 집을 찾아갔다. 앞을 볼 수 없는 그의 어머니와 만나는 과정을 기록한 내용이 있다.
{공주는 보물 팔찌 수십 개를 팔꿈치에 걸고 궁궐을 나와 혼자 길을 떠났다. 길에서 한 사람을 만나 온달의 집을 물어 그의 집까지 찾아갔다. 그리고 눈먼 노모를 보고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서 절을 하며 아들이 있는 곳을 물었다. 늙은 어머니가 대답하였다. "내 아들은 가난하고 보잘것이 없어서 귀인이 가까이 할 만한 사람이 못 됩니다. 지금 그대의 냄새를 맡으니 향기가 보통이 아니고 그대의 손을 만지니 부드럽기가 솜과 같으니 필시 천하의 귀인인 듯합니다. 누구의 속임수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소?
내 자식은 굶주림을 참다 못하여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려고 산 속으로 간 지 오래인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소." 공주가 그 집을 나와 산밑에 이르렀을 때, 온달이 느릅나무 껍질을 지고 오는 것을 보았다. 공주가 그에게 자기의 생각을 이야기하니 온달이 불끈 화를 내며 말했다. "이는 어린 여자가 취할 행동이 아니니 필시 사람이 아니라 여우나 귀신일 것이다. 나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 온달은 그만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다.
공주는 혼자 돌아와 사립문 밖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에 다시 들어가서 모자에게, 시집오겠다는 결심을 이야기하였다. 온달이 우물쭈물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그의 어머니가 말했다. "내 자식은 비루하여 귀인의 짝이 될 수 없고, 내 집은 몹시 가난하여 정말로 귀인이 거처할 수 없습니다." 하니 공주가 대답하였다. "옛 사람의 말에 '한 말의 곡식도 방아를 찧을 수 있고, 한 자의 베도 꿰맬 수 있다.'고 하였으니 만일 마음만 맞는다면 어찌 꼭 부귀해야만 같이 살겠습니까?" 말을 마치고 공주가 금팔찌를 팔아서 전답, 주택, 노비, 우마, 기물 등을 사들이니 살림 용품이 모두 구비되었다.}하였다.
글쎄? 온달을 부러워할 일은 아닌 것 같다. 공주라는 신분에다 돈까지 잔득 가지고 시집을 왔고, 글 모르는 신랑을 교육시켜 장군으로 출세까지 시켰으니 온달입장에서는 평생 평강공주에게 소리한번 크게 낼 수 있었겠는가?.
태조 왕건의 왕비 유(柳)씨와 버드나무
버드나무, 수양버들, 용버들 등의 버드나무 종류는 가늘고 낭창낭창 한 가지가 실바람에도 하느적거린다. 이는 부드럽고 연약한 것을 대표하며 옛 말에도 가느다란 것의 표현으로 세류(細柳)라 하였으며 여인의 날씬한 허리를 유요(柳腰)라고 하였다.
고려사 열전 후비 조에 보면 {태조 왕건이 궁예의 부하로서 장군이 되어 군대를 거느리고 정주를 지나 가다가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말을 쉬게하고 있는데 나중에 신혜황후가 된 유(柳)씨가 길옆의 시냇가에 서서 생긋이 웃고 있었다. 왕건이 아름다운 그녀에 반하여“누구의 딸이냐?”고 물은즉 처녀의 대답이 고을 유천궁이란 부호의 딸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왕건이 그 집으로 가서 머물었는데 처녀로 하여금 왕건을 모시고 자게 하였다. 그 후는 서로 소식이 끊어져서 정절을 지키고자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었는데. 어느 날 왕건에게 알려져서 불러다가 부인으로 삼았다.
궁예 말년에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 왕건의 집으로 와서 궁예를 쫓아낼 궁리를 하려고 하는데, 왕건은 유씨에게는 이 일을 알리고 싶지 않아 밖으로 내보냈다. 그러나 중요한 회의라는 것을 눈치챈 유씨는 나왔다가 다시 북편 창문으로 해서 가만히 휘장 속으로 들어가 숨어있었다.
여러 장군들이 드디어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자는 의사를 표시하니 낯을 붉히면서 한마디로 거절하고 있었다. 이 때 유씨가 급히 휘장 속에서 나와 왕건에게 말하기를“대의를 내세우고 폭군을 몰아 내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한 일입니다. 지금 여러 장군들의 의견을 들으니 저도 의분을 참을 수 없는데 하물며 대장부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손수 갑옷을 가져다가 왕건에게 입혀 주었으며 여러 장군들은 그를 옹위하고 나가 그가 드디어 왕위에 올랐다.}고 하였다.
신혜왕후는 자기의 미모를 믿고 왕건을 만나는 과정부터 의도적이었고 공격적이었다. 성도 버들유(柳)자 유씨이고 버드나무 옆에서 태조와 인연을 맺었지만 날씬한 허리를 가진 연약한 여인이 아니라 나라의 임금을 갈아치운 대단한 여장부이었다.
왕비의 불륜으로 태어난 아들이 임금이 되다
고려사 열전 후비 '헌정 왕후 황보씨'조를 보면 {헌정왕후 황보씨는 경종이 죽자(981) 대궐에서 나와서 왕륜사 남쪽에 있는 자기 집에서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꿈에 그가 혹령이라는 고개에 올라 소변을 보았더니 소변이 흘러서 온 나라에 넘쳤으며 그것이 모두 변하여 은(銀)바다로 되었다. 꿈을 깨고 점을 치니 “아들을 낳으면 왕이 되어 한 나라를 가지게 되리라”고 한다. 왕후는 “나는 이미 과부가 되었으니 어찌 아들을 낳겠는가?”라고 말하였다.
당시 안종(安宗-고려 성종 때의 귀족)의 집과 왕후의 집이 서로 거리가 가까운 까닭에 자주 왕래하다가 간통하여 임신하게 되었으며 만삭이 되어도 사람들이 감히 발설하지 못하였다.
성종 11년(992) 7월에 왕후가 안종의 집에 가서 자고 있을 때 왕후의 행실을 미워한 그 집의 종들이 땔나무를 뜰에 쌓고 불을 질렀다. 불꽃이 올라서 마치 화재가 난 듯하여 백관들이 달려 와서 불을 껐다. 그 때 성종도 급히 위문하러 갔는데 그 집 종들이 사실을 임금에게 고하였다. 그래서 성종은 안종을 귀양보냈으며 왕후는 부끄러워서 울고 있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중 문어구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뱃속의 태아가 움직였다. 급해진 왕후는 문 앞의 버드나무 가지를 붙잡고 아이를 낳았으나 산모는 죽고 말았다. 성종이 유모를 붙여 그 아이를 양육하라고 명령하였는데 자란 후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고려 8번째 임금인 현종(1007-1031)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 지배계층의 성도덕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데 과부가 바람피우는 일이 당당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 불륜의 씨앗이 임금이 된다는 것은 용인할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조선왕조 때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많은 나무 중에 튼튼한 끈을 대신할 수 있게 탄력성이 좋은 버드나무 가지를 붙잡고 아기를 낳았다는 대목이 흥미롭다.
삼국시대와 고려 때의 여인들은 상류사회가 이렇게 개방적이었으니 서민들은 훨씬 더 자유로웠을 것이다. 조선왕조의 건국이념을 유교에 바탕을 두고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을 펴면서 서서히 여성의 지위는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앞에서 본 것처럼 조선조 초기까지만 하여도 남편을 자네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남녀의 차별은 크지 않았다.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전쟁에 죽어버린 남자의 수가 줄어들면서 급격히 여성의 지위는 떨어지고 조선조 중.후기로 오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니 요즈음처럼 이라면 머지 않아 여성의 지위는 신라. 고려의 수준으로 되돌아 갈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