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 50년, 박용구 교수님과 함께한 추억의 시간들
경북대 명예교수 박상진
세월의 길이를 말할 때 우리는 흔히 1세기를 기준으로 한다. 사반세기면 25년, 반세기면 50년이다. 박교수님은 1962년 나무와의 인연을 시작하였으니 사반세기도 아니고 50년이란 반세기가 흘러 왔다. 이렇게 기나긴 세월을 박교수님은 한 번도 임학이라는 ‘삶의 현장’ 을 떠나 보신 적이 없다. 사람이 한 전공에 이렇게 한 길만 걸어오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박교수님의 이력은 화려하다. 수원에 있던 임목육종연구소에서 새내기 연구원으로 출발하여, 1969년 일본 유학을 가게 된다. 당시는 해외 나가기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렵던 시절, 벌써 교수님의 능력을 인정받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잠시 귀국하였다가 일본 문부성장학생으로 다시 일본 구주대학으로 간 박교수님은 1976년 ‘소나무 천연림의 집단유전학적인 연구’라는 제목으로 농학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지금이야 30대 박사가 흔히 있지만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젊은 나이로서 나무를 공부하던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았다.
우리나라는 소나무만 나무인 것처럼 오직 소나무사랑 일변도이지만, 일본임업에서는 삼나무와 편백이 주가 되고 소나무가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높지 않다. 그래서 일본 학자들도 그렇게 심도 있는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일본소나무와 관련된 귀중한 연구는 일본학자들의 높은 관심을 끈 것은 물론 우리나라 소나무 연구에도 중요한 전기를 제공하였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일본에 소나무가 없어서 소나무 만든 일본 문화재는 모두 한국에서 가져갔다는 잘못된 논리를 반박할 때는 박교수님의 논문을 자주 인용해 왔다.
박교수님은 일본에서 학위를 따고 일본에만 치우친 연구만 한 것이 아니다. 미국, 호주, 유럽을 비롯하여 선진외국의 연구교수로서는 물론 국제학술회의가 있을 때면 흔히 말하는 오대양 육대주 어디거나 박교수님 발길이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만큼 폭 넓은 학문적인 교류를 했고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학자임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학교 홈피에서 업적 검색을 해보면 295건이란 엄청난 연구 결과물이 나온다. 웬만한 정열과 능력으로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1970년부터 벌써 일본과 우리나라 학회에 연구발표로 이름을 올린 교수님은 처음에는 유전학의 기본연구를 해 오셨다. 이어서 유전공학, 알렐로파시(allelopathy) 등의 기초연구에도 탁월한 업적을 남기셨다.
1980년 수원의 임목육종연구소에서 경북대학으로 옮겨 오시면서 더욱 연구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학생들과 함께 정열적으로 수행한 수많은 연구결과가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교수님은 일찍부터 연구결과의 대부분을 국제학술지에 발표하셨다. 그래서 유능한 교수의 판단기준이 되는 SCI급 논문이 유달리 많은 분이기도 하다.
박교수님은 학문의 발전에 기여할 순수연구만 해 오신 것은 아니다. 연구결과를 현장에 접목하고 일반인들에게 보급하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1990년대 들면서는 우리나라 전통 차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차학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차(茶)를 알리는 데도 많은 노력을 하셨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기억나는 것은 경남 하동의 어느 차 농가에 자라는 큰 차나무의 나이 조사를 도와드린 일이다. 당시 약 100여년으로 감정한 차나무의 나이가 훗날 1천년으로 뻥튀기가 되자 여러 경로를 통하여 바로 잡은 노력을 기울인 것도 인상에 남는다.
아울러서 박교수님은 아까시나무에 관련된 연구도 꾸준히 해 오셨다. 아까시나무는 일본인들이 한국의 산을 망치기 위하여 일부러 심었다는 인식이 강했다. 아까시나무는 햇빛을 좋아하여 조상숭배사상이 유난히 강한 우리나라에서 묘지 근처에 잘 자라는 것도 아까시나무를 싫어하는 한 가지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아까시나무는 재질이 좋기로 널리 알려진 나무이고 콩과 식물이라 메마른 땅에 잘 자라는 유익한 나무다. 몹쓸 나무라는 잘못된 인식을 불식시키는데 남다른 노력을 하셨으며 아까시나무의 본 고장 헝가리까지 달려가서 수많은 자료를 수집하는 열정을 보이시기도 했다. 칠곡의 아까시나무 축제에도 깊이 관여하면서 지역사회에도 크게 기여를 하셨다.
이상 필자가 대체로 알고 있는 내용만을 주마간산으로 소개해 보았지만 박교수님의 업적은 너무나 엄청나서 이렇게 요약 소개가 불가능하다. 또 다른 지면에서 상세하게 지면이 할애될 것이므로 이 정도로 마무리코자 한다.
박교수님과의 첫 인연은 1987년 필자가 전남대학에서 경북대학으로 옮겨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같은 임학과 동료로서, 옆 연구실의 이웃사촌으로 처음 만났다. 물론 선생님의 명성이야 훨씬 전부터 듣고 있었다. 같은 학과 최관 교수님과 함께 점심시간에 학교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교내를 한 바퀴 도는 산책은 교수님과 오랫동안 해오던 필수과목이었다. 산책이 끝나고 5교시가 없으면 박교수님 연구실에서 전문가의 안목으로 선정한 귀한 녹차 한잔을 놓고 담소를 나누는 것도 중요한 일과였다. 전문적인 이야기에서 세상사까지 우리는 폭넓은 대화를 나누었다. 특히 박교수님은 해박한 지식과 일상사까지 알고 계시는 것이 많아 나는 개인적으로 상의할 일이 있으면 박교수님의 연구실로 먼저 달려가기도 했다. 학기가 끝나고 방학이면 박교수님과 최관 교수님, 농경제학과 최규섭 교수님과 필자, 이렇게 넷이 남해일주 여행을 한 기억도 좋은 추억으로 남는다.
박교수님과는 경북대 산우회 멤버로서 한 달에 한 번씩은 산행을 같이하기도 했다. 이름은 경북대 산우회지만 10여명 남짓한 미니 모임이다. 다른 교수님들과 함께 산행을 시작하면 언제나 앞장을 서는 튼튼한 체력도 필자의 부러움을 샀다. 우리는 둘 다 나무를 붙잡고 평생을 살아온 터라 산행 길의 나무 하나 하나도 언제나 관심의 대상이었다. 수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때로는 논쟁을 벌이던 기억도 새롭다.
박용구 교수님! 천하장사도 가는 세월을 잡지 못한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만년 청년이었던 교수님의 정년을 실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숨 가쁘게 달려온 인생역정에서 큰 전환기를 맞는 시점에 와 있습니다. 삶의 길이로 68년, 나무와 맺은 인연의 길이로 50년, 생각해 보면 순간이지만 실제로는 길고 아득한 시간의 끈이었습니다. 어찌 회한이 없고 아쉬움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지나온 세월일랑 가슴 속에 고이 묻어 두어야 할 시점인 것 같습니다. 아름다운 추억의 지난 세월보다 더 짧아진 앞날을 조용히 셈해 보아야할 나이에 와 있다는 현실을 아쉽지만 받아들여할 시간입니다. 열정보다는 안정을, 달리기보다는 천천히 걷기가 더 필요한 오늘입니다. 법정스님이 남긴 위대한 메시지처럼, 혹시라도 남은 회한과 아쉬움이 있다면 모두 버리시고, 오직 건강을 챙겨야 할 오늘을 흔쾌히 받아드리시기 바랍니다.
만수무강하시고 영광스런 퇴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