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만난 46년 세월을 되돌아보면서
경북대 교수 박상진
1959년 2월, 수원역 건물은 아직 전쟁의 상처를 다 털어내지 못했다. 을씨년스런 풍경은 우리를 움츠려들게 하였고, 수원들판을 가로 지르는 겨울바람은 구정을 지나고도 여전히 칼바람이었다. 그와 나는 59학번,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입시생으로 수원과의 첫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입학 후 얼마지 않아 마련된 ‘대구학우회’에서였다. 예나 지금이나 신입생환영회라는 것이 술통에 빠지기 마련이다. 엉겁결에 막걸리 몇 잔 먹고 쉽게 필름이 끊겨 버린 탓에, 그에 대한 첫 기억은 별로 남아있지 않다.
수원에 봄이 찾아오면서 유난히 목장을 잘 들락거리는 학생이 눈에 띄기 시작하였다. 60년대의 최첨단 패션, 물들인 검정색 군복에 군화로 무장한, 당시로서는 제법 멋을 부린 그가 동호라는 사실을 아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가끔 그는 목장 앞의 연습림을 가로질러 말을 타고 다녔다. 서부활극 영화가 대유행을 하던 시절, 말 타고 다니는 그는 여학생들에게도 꽤나 매력적이었을 터, 흔히 말하는 ‘썸싱’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대생 수가 5%남짓한, 철저한 남초(男超)의 시절, 행복하게도 축산과에는 여학생이 몇 있었다. 가끔은 목장에서 여학생들과 실습을 같이하는 장면을 목격하면, ‘아! 나도 축산과를 갈 것을’ 하고 부러워하였다. 특히 여학생들이 돼지 교배를 기막히게 잘 붙인다는 확인 안 된 소문들은 우리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1학년 내내 그는 아예 목장에서 살림을 차린 것 처럼 목장 일에 매달려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대학 1학년이란 것이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온통 노는 일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고 처음부터 대학생활을 시작한 것 같다. 얼마지 않아 그의 앞가슴에는 네잎 클로버 문양의 4H마크가 달려 있었다. 지덕노체(知德勞體, Head, Heart, Hand, Health)를 이상으로 하는 4H운동은 농촌을 잘 살게 하자는 운동이다. 그는 열심히 활동하였고, 농촌진흥청에서 주최하는 관련 행사에도 빠지지 않았다. 정말 농촌을 사랑하여 농대에 들어온 진짜 농대생으로 우리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잊을 수 없는 어느 겨울 방학
지금도 고향을 사랑하고 땅을 좋아하는 그는 선조들이 물려준 청천의 불이(不二)농장을 지킨다. 45년 전에도 역시 그는 그 자리에 있었다. 1960년 2학년 겨울 방학으로 기억한다. 동기 몇이 동호 집에 능금 먹으러 가기로 의견을 모았다. 전화가 제대로 있던 시절이 아니니 번거로운 만날 약속 같은 것은 아예 없었다. 사과밭 입구를 들어서자 개 짖는 소리부터 났다. 지금도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는 사랑채 쪽문이 열리면서 우리를 처음 맞는 것은 동호가 아니라 동호 할아버지였다.
“너들 누고?”
“예, 동호 친굽니더”
“으라! 야들봐라. 아-들이 무운 친구고, 동무지!”
이렇게 심상치 않는 첫 만남이 이루어지고 우리들은 동호 할아버지께 먼저 큰절부터 올렸다. 해박한 지식을 가지신 할아버지는 꿇어 앉아 있는 우리들을 상대로 주자학의 이기론(理氣論)부터 공자님의 말씀, 우주의 섭리에 이르는 폭 넓은 주제 강의를 시작하셨다. 지금 기억에 남는 대목은 대학생의 ‘大’ 자는 하늘(一)위로 사람의 머리가 올라간 학생이란 뜻의 말씀이 한참 있었다. 결코 열심이라고 할 수 없는 대학생활을 보내던 우리들 모두 가슴이 뜨끔했다. 오후 2시쯤 시작된 강의는 3시를 훨씬 넘겨서도 계속되었다. 문 쪽을 힐끔힐끔 곁눈질하면서 어서 동호가 나타나 위기에 처한 우리를 어서 구해주기만 바랐다. 발은 저려오고 온돌의 윗목이라 춥기도 하여 영 죽을 맛이다. 거의 2시간에 걸친 할아버지의 강의가 끝날 때 까지 동호는 나타나지 않았다. 밖으로 나오니 어머님이 우리를 따뜻하게 맞으신다.
“고생했제, 능금 좀 묵어라. 동호는 일 있다고 시내 갔데이”
그러나 우리들의 입에서는 꼭 같은 말이 동시에 나왔다.
“아임니더. 시간이 늦어 지금 가야 합니더”
한사코 붙잡으시는 어머님의 손을 박절하게(?) 뿌리쳤다. 억지로 넣어주시는 사과 몇 알로 불룩해진 주머니를 만져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도망을 치다 싶이 동호 집을 빠져 나왔다. 버스정류장까지 그대로 달음질 쳤다. 혹시라도 우리를 다시 붙잡아 할아버지가 강의를 한 번 더 시작하시면 ‘우리는 정말 죽는다’는 위기의식이 발동한 것이다.
그 이후 우리는 오랫동안 ‘동호 사과 맛’은 잊어야 했다. 아마 할아버지가 살아계시는 동안은 내내 사과 맛은 못 본 것 같다.
Almighty Club
미국원조를 받아 지어진 기숙사에 우리가 첫 입주생이었다. 2층 침대 두 개가 놓인 4인1실의 기숙사는 당시로서는 일류 호텔 못지않았다. 침대에 수세식 화장실이라니! 이런 문화 시설을 구경해본 적도 없는 나 같은 촌뜨기에게는 평생 처음 보는 고급궁전이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한 방의 넷은 공부보다 놀이를 하기에 딱 알맞다. gostop이 아직 보급되기 이전, 트럼프 놀이가 기숙사를 휩쓸었다. 각 지방출신마다 놀이문화가 달랐는데, 대구학우회는 야당과 여당으로 나누어 게임을 하는 Almighty로 지샜다. 덕분에 우리들 대부분은 시들시들(CDCD)한 성적표로 만족해야 했다.
추억은 아름다워라! 맞는 말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니 Almighty게임이 그리웠다. 이 이름으로 모임 하나 만들자! 이런 일에 언제나 적극적인 농학과의 박호를 중심으로 축산과 배동호, 농공학과 정하우, 이병철, 임학과 이병진, 윤수길, 박상진, 이렇게 모두 일곱이 모였다. 1965년 시작한 모임은 예의 술타령에, 그렇고 그런 곳에 단체 입장도 하면서 70년대로 들어왔다. 이때부터는 새로 맞이한 반쪽들이 함께 자리를 하여 1년에 1~2회 만남이 이어졌고, 곧 이어 딸 아들도 참가하는 가족모임이 되었다. 만날 때 마다 옛 추억을 살려 Almighty게임 판을 벌렸다. 편이 나누어지는 게임이니 모두가 잘해야 한다. 그러나 맨 날 실수투성이, 가장 어벙한 것이 나이고 다음이 그였다. 나 보다야 몇 배 명석하였지만, 그에게는 어울리기 위한 게임이지 결코 즐기는 게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의 축산과 농촌 문제가 나오면 그는 언제나 진지했다. 나름대로 확고한 의견을 갖고 있는 탓이다. 우리 모두 農을 붙잡고 평생의 업으로 살아왔으니 어느 누구라고 일가견이 없을 리 없다. 하지만 논쟁이 벌어지면 아무도 그의 논리에 반박을 하고 나설 수가 없다. 오늘의 이 순간까지도 농사일에 매달리는 농사꾼이며 농과대학의 교수로서 실무와 이론을 겸비하였기 때문일 테다.
세월이 흐르면서 룰이 복잡한 Almighty게임은 어느덧 gostop에 밀려나고 모임의 이름만으로 남았다. 이후, 10여년 전에 일찌감치 저 세상으로 가버린 이병진 형을 제외하고 Almighty club이란 이름으로 아직도 만남은 이어지고 있다.
불이농장에서 만나는 참 농사꾼
대구시 동구 숙천동 299번지, 금호강을 낀 5천평 규모의 농장, 그가 유년의 추억을 모두 간직한 곳이다. 앞에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처음 사과밭으로 시작한 농장은 그가 1982년 축산시험장에서 영남대학으로 직장을 옮겨오면서 본격적으로 관리해 오고 있다.
사과-복숭아-포도로 이어오다 지금은 600평 온실에 토마토까지 재배하는 전문 교수 농사꾼으로 변신해 있다. 그는 가축영양학을 전공하는 축산인이지만 오히려 식물에 더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
전라남도 해남반도에만 자라는 팥꽃나무란 아름다운 꽃나무가 있다. 몇 년 전 마침 그 부근을 지나다가 야산에서 이 나무와 마주쳤다. 나무가 전공인 나는 참새가 방앗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한 나무를 캐기로 하고, 적당히 주변을 조금 판 다음 잡아 당겼더니 잔뿌리 하나 없이 알몸으로 홀랑 뽑혀 나왔다. 키는 자그마하지만 뿌리가 깊이 들어가는 나무이기 때문이다. 버리기에는 아까워 자동차 뒤 트렁크에 넣어 두었다가 이틀이나 지난 뒤 그에게 넘겼다. 가을 쯤 나무를 살려냈다는 연락이 왔다. 이런 나무를 살려내는 데는 기술은 물론 정성이 앞서야 한다. 그는 기술과 정성을 모두 가진 참 농사꾼임을 다시 한 번 확인 했다.
그는 대구의 아파트에서 새벽5시에 일어나 농장에 간다. 몇 시간씩 농장일 하고 수업시간에 맞추어 다시 옷 갈아입고 학교로 달려간다. 대단한 정열과 체력이 따라주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농장을 사랑으로 경영하고 농사를 기본대로 짓는다. 즉 그에게 농사는 키우고 열매 따는 과정을 즐길 뿐, 꼭 이문을 남기려 들지 않는다. 내가 아는 바로는 1년 결산은 언제나 적자다. 그러나 다음 해면 또 꼭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도 그는 마냥 행복하다.
농장에서 만나는 그의 얼굴에는 항상 관음보살의 미소가 그대로 묻어있다. 부부가 함께 불교에 흠뻑 심취한 불자(佛子)라서 만은 아니다. 마음이 편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 종일 농장 일에 매달린 일요일 날 오후 늦게 그를 찾아보아도 결코 힘든 얼굴이 아니다.
2005년 1월 26일
밤 9시 중앙뉴스가 끝나고 각 지방 뉴스가 이어졌다. 영남대학의 총장선거 관련이야기가 나온다. 선거를 방해하는 버릇없는 학생들 앞에 허연 머리카락의 노교수가 보인다. 배동호 교수다. 화면에 잡힌 그는 학생들에게 호통을 치고 있다. 정년 한 달 전, 보통사람들이라면 골치 아픈 그런 자리에 나타나지 않는다. 설령 갔더라도 먼발치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있으면 될 일이다. 그러나 그는 다르다. 옳지 않다고 생각한 일에는 이렇게 앞장선다.
이 장면은 그가 평생을 어떻게 살아온 지를 이해하기에 충분하다. 한마디로 그는 소신을 갖고 흔들림 없이 평생을 살아왔다. 누가 뭐라던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앞장을 섰고 몸을 아끼지 않았다. 아직도 그의 가슴은 뜨겁다. 옳지 않은 일은 보고 그대로 넘기지 못하는 열정을 갖고 있다.
배 교수! 이제 우리는 숨 가쁘게 달려온 65년이란 세월일랑 묶어두고, 앞날을 셈해 보아야할 나이에 와 있네. 열정보다 안정을, 달리기보다는 천천히 걷기를, 일보다는 건강을 챙겨야 할 오늘을 흔쾌히 받아드리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