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길이에 함축된 향기
잊고 살아온 고향마을을 잠시 떠올려 봅니다. 나지막한 동산을 뒤에 두르고 널찍한 들판을 내려다보는 마을 어귀에는 어김없이 아름드리 고목나무 한 그루가 찾는 이를 반겨줍니다. 서정적인 우리 농촌의 대표적인 풍경이죠. 이런 고목나무는 대부분 옛날에 당산제를 지내던 당산목으로서 수백 년 때로는 천년을 넘겨 살고 있습니다. 우리 땅의 고목나무들은 천연기념물, 시도기념물, 보호수란 이름을 달고 대부분 나라의 보호를 받습니다. 이런 벼슬자리 하나도 얻지 못하고 ‘마을나무’라 하여 마을 사람들이 그냥 아껴 주기만 하는 나무까지 이 땅에는 수많은 고목나무가 오늘도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나라의 보호를 받은 고목나무가 약 1만4천 그루쯤 되며, 마을나무까지 합치면 우리나라의 고목나무는 2만 그루가 넘습니다.
여기, 이런 고목나무를 찾아내어 사진 예술로 승화시킨 분들이 계십니다. 56년의 전통을 가진 대구 사광회 회원 여러분들이 40여점의 우리나라 대표적인 고목나무 사진을 들고 이 자리에 오셨습니다. 다양한 현업에 종사하면서 주말을 이용하여 나무가 있는 곳이라면 천리 길 마다 않고 내달리는 정열을 가졌기에 가능했습니다. 여러 사진 예술의 장르 중에 고목나무를 테마로 잡은 일은 그 자체가 고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교통망이 발달하고 자동차로 움직이는 세상이지만 이름 없는 시골마을 어귀의 고목나무를 찾아다니는 일은 대단한 열성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습니다. 울릉도와 제주도를 비롯하여 한반도 구석구석을 오직 고목나무를 만나기 위하여 거의 누비고 다니면서 현장답사를 하셨습니다.
나무를 찾아내고 첫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은 시작일 따름이라는 군요. 앵글을 들이대고 나무의 특성에 맞추어 어떻게 예술적인 표현을 할 것인지는 다시 고민이랍니다. 수백 년 세월의 길이에 함축된 향기를 찾아내어 작가와 진정한 대화가 이루어 질 때 고목나무 사진은 높은 예술성을 나타낼 터입니다. 그래서 이에 맞은 빛의 각도와 세기, 구름과 바람까지 모두 예술이란 안목으로 맞추어 주어야 한다는 군요. 당연히 현대인들의 바쁜 시간일정은 잠시 뒤로 돌려 두어야 하겠지요. 나무 하나를 붙잡고 하루 종일을 씨름하는 일은 흔합니다. 그뿐이 아니죠. 꽃피고 잎 필 때, 단풍시기에서 겨울 나목까지 나무 하나를 두고 서너너덧 번은 면회를 다녀야 마음에 드는 사진 한 장을 얻을 수 있는 것이 고목나무 사진예술의 세계입니다.
고목나무는 5천년 우리역사를 지켜본 현장 목격자입니다. 나이테 속에 삶의 애환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우리의 살아있는 문화유산이죠. 저는 반세기를 나무와 함께 살아오면서 수많은 고목나무와 만났습니다만 한 번도 여기에 전시된 사진처럼 감격스럽게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나무를 공부해온 한 사람으로서 작품을 출품하신 사광회 회원 여러분에게 깊이 감사말씀을 드립니다. 전시회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기를 기원합니다.
2011년 9월
경북대 명예교수
박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