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나지막한 야산의 가장자리에 터를 잡았다. 마을 입구의 길가 언덕에서 길을 향하여 기울어 진채 자라고 있다. 옆으로 묘가 몇 있고 뒤편으로는 상수리나무와 소나무가 섞여 작은 숲을 이루는 전형적인 동네 뒷산의 모습을 가진다. 그러나 나무가 있는 주위 얼마를 제외하고는 모두 개발의 바람으로 공장이 되고 주택이 들어서 버렸다. 생명을 위협 받을 순간이 머지않은 것 같아 백송을 바라보기가 벌써부터 애처롭다. 두 아름정도의 굵기에 키가 그리 크지 않으며 옆에서 보면 여러 개의 굵은 가지를 뻗어 부채 살처럼 퍼져있어서 역삼각형모양을 하고 있다. 백송의 특징인 껍질의 얼룩무늬 중 흰빛이 그렇게 강하지 않아 오히려 푸른빛이 더 눈에 띈다. 백송은 대체로 흰 빛이 강할수록 길조로 받아들이며 더 고귀한 나무로 인식한다. 이 나무의 유래는 두 가지로 알려져 있다. 하나는 조선 선조 때 유하겸이라는 사람이 중국사절로부터 백송 두 그루를 받아서 그 가운데 한 그루를 이 마을에 살고 있던 최씨의 조상에게 주어 묘지 주변에 심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 보면 숙종 때의 문신 유하겸(兪夏謙)이 사신으로 중국에 다녀온 적이 있어서 선조 때의 유하겸이 아니라 숙종 때의 중국 사신 유하겸이 가져다 심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조선 세종 때 김종서가 6진을 개척할 당시 그곳에서 근무하던 최수원 장군이 고향에 오는 길에 가져다 심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따라서 앞의 전설에 따르면 나무의 나이는 약 4백년, 뒤의 전설로는 6백년이 되는 셈이다. 나무의 나이는 이렇게 전설에 따르는 방법밖에 없는가? 물론 과학적인 방법이 있다. 나무의 속이 썩지 않았다면 생장추(生長錐)라는 기구로 나무줄기에다 작은 구멍을 뚫어 나무속 고갱이를 뽑아낸다. 나이테는 한해에 하나씩 생기니 고갱이에서 나이테 수를 세면 정확한 나이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오래된 나무는 가운데의 전부 혹은 일부가 썩어버리므로 이 방법을 적용할 수 있는 나무가 드물고, 문화재에다 구멍을 뚫는다는 것 자체가 거부당하기 일쑤다. 이래저래 고목의 나이는 나무 자신이외에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꼭 나이를 알아내야 할 이유도 없으므로 그냥 전설대로 믿고 있다. 이 백송은 짧게는 4백년, 길게는 6백년을 살아온 역사의 산 증인이라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보호하고 가꾸어야 할 충분한 값어치를 가지고 있다. 나무 높이는 약11.5m , 가슴높이 둘레가 약 2.4m , 가지 뻗음은 동서 16.1m, 남북 16.2m 정도이다. 사람들은 중국에서 온 나무라고 하여 당송(唐松)이란 이름으로 오랫동안 불렀다. 조상의 묘지를 지켜주는 나무로서, 또 흰 껍질을 가진 귀한 소나무라는 희귀성 때문에 수 백 년을 잘려나가지 않고 보존 될 수 있었다. 백송으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나이가 거의 비슷한 커다란 또 한 그루의 느티나무가 서 있다. 이곳은 옛 사람들의 나무사랑을 한층 더 느낄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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