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동강과 서강이 만나 남한강을 이루는 합수(合水)지점을 바라보는 전망 좋은 곳에 자란다. 이 나무는 영월 엄(嚴)씨의 시조 엄임의(嚴林義)가 심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당나라 현종(712∼756) 때 파락사(波樂使, 악장을 만들어 여러 나라에 널리 알리는 일종의 대사)로 신라에 왔다가, 안녹산의 난으로 고향 땅이 어수선해지자 돌아가지 않고 정착하였다고 한다. 이 일대가 마치 배의 모양이므로 돛대 역할을 할 나무로 은행나무를 심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선후기의 문인으로 봉서 신범(辛汎, 1823∼1879)이 있다. 규장각에 보관된 그의 시문집 봉서유고(蓬西遺稿)에 실린 월행(越行)이란 기행문의 내용에는, 그가 본관인 영월을 찾아 남긴 시한수가 있다. ‘鉢山平地落/江上臥龍如/中有千年杏/古來嚴氏居(발산 은 평지로 떨어졌고/강 위에는 마치 용이 누워있는 것 같구나/마을의 가운데는 천년이나 된 은행나무가 있고/예부터 엄씨들이 모여살고 있네)’ 150여년 전에도 엄청나게 큰 은행나무가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엄씨의 집성촌으로 내려왔음이 확인된다. 따라서 선조가 심은 은행나무를 엄씨들은 대대손손 보호하여 오늘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또 세조 3년(1457) 청령포에 유배와 있던 단종이 읍내의 관풍헌으로 옮겨질 때, 임금은 이 나무에서 은행 몇 알을 따서 다가올 자신의 운명을 점쳤다고 알려있다. 분명 나쁜 점괘를 보았을 그는 얼마지 않아 최후를 맞았고 시신마저 팽개쳐 질 때, 은행나무를 심은 엄임의의 12대손 엄흥도가 이를 수습하는 용기를 낸다. 1910년 한일 합방, 1945년 해방, 1950년 한국동란 때는 굵은 가지를 하나씩 부르트려 다가올 큰 일을 예고하고 사람들과 기쁨을 나누고 아픔을 같이 하기도 한 나무이다. 이 은행나무는 절개와 의리의 상징으로서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자기 몸의 일부를 잘라낸 나무로도 유명하다. 전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나이는 1,300년 가까이 된다. 가슴높이 둘레가 14.8m나 되는 거대한 나무다. 2003년도 문화재청 일제조사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굵은 나무이다. 나이도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나무이나 사람들에게 이런 사실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일제 때의 조사자료에는 나무 높이가 38m, 가슴높이 둘레가 14m라고 하였으며 ‘조선최대의 은행나무‘로 평가하였다. 나무의 모양새는 약 2m높이에서 굵은 가지가 여럿 나와 자란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원둥치가 죽고 옆에서 나온 맹아가 자랐다고 도 한다. 어쨌든 엄씨들의 상징목으로 천년 넘게 그 자리를 지켜온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지금의 나무높이는 29m, 바람에 가지가 분질러지고 관리를 위하여 잘라내 버린 탓에 옛날 보다 오히려 키가 작아졌다. 가지의 길이는 동서가 약 16.5m, 남북이 약 21.3m정도다. 옛날에는 근처에 대정사(對井寺)라는 절이 있었고 나무는 절 앞에 자랐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나무속에 신통한 뱀이 살고 있기 때문에 동물이나 곤충이 접근하지 못한다고 믿었고 어린 아이들이 나무에서 떨어져도 상처를 입지 않으며, 정성을 들여 빌면 자식을 낳는다는 전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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